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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자매 죽음을 통한 찬양

“(12) 찬양 받으소서, 나의 주님, 우리의 자매인 육체적 죽음을 통해,

아무도 그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13)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안에서 죽은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장 거룩한 뜻 안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죽음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raised by You, my Lord, through our Sister Bodily Death,

from whom no one living can escape.

Woe to those who die in mortal sin.

Blessed are those whom death will find in Your most holy will,

for the second death shall do them no harm.)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1182-1226),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the Sun) 중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임종을 앞두고 위의 구절을 그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the Creatures, 1225)에 덧붙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죽음을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프란치스코의 태도입니다. 그에게 육체의 죽음은 자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형제자매입니다.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그러나 아무나 죽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는 죽음이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죽음을 누이가 다가오는 것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던 사람은 두 번째 죽음(요한계시록 2:11, 20:6)으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은 죽음을 프란치스코처럼 맞이할 수 있겠지요. 초월된 죽음은 누구도 겁박할 수 없고 그저 온순하기만 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기로 삼는 세력이 맹렬한 파도를 일으키는 계절에, 오늘이든 먼 훗날이든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이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