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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고전에서 배우는 영성목회

10.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



숲, 힐링, 그리고 생명

    몇 해 전부터 한국 사회는 웰빙(well being)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힐링’(heal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책, 먹거리, 여행, 방송 프로그램 등 ‘힐링’ 아닌 것들이 없을 정도다. 웰빙 시대가 유기농 식품이나 슬로프드(Slow food) 등 먹거리가 이끈 시대라면, 힐링 시대는 숲이 이끄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이름도 몰랐을 동네 뒷산에 올레길, 둘레길, 비렁길 등의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숲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7월22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는 숲 속을 걷는 것이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도시생활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그레고리 브랫맨(Gregory Bratman)은 서른여덟 명을 대상으로 사람이 걷는 환경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90분 동안, 한 그룹은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를 걷게 했고, 다른 한 그룹은 복잡한 팔로알토 시내를 걷게 했다. ‘걷기’가 끝난 직후에 정신 건강 설문지와 뇌 정밀검사를 해보니 한적한 숲길을 걸었던 그룹에서만 모든 검사에서 걷기 전보다 향상된 결과를 보여주었고, 혈압도 더 안정되었다. 숲과 힐링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하나의 예인데, 숲의 치유능력은 숲이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초에 교회의 청장년 그룹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킹스 캐니언 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을 다녀왔다. 겨우 삼 일이지만 ‘휴대폰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숲의 멋에 흠뻑 빠져갔다. 숲은 생명 아닌 것들로 상처 받은 우리의 눈과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숲에는 생명 아닌 풍경도, 생명 아닌 소리도 없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잠들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알람을 대신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옅은 구름들과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은 침침해진 눈을 씻어주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며 시원한 물소리는 막힌 귀를 뚫어준다. 숲의 멋은 곧 ‘생명의 멋’이다. 그래서 숲에서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수다와 끊임없는 질문들도 온통 생명에 대한 것뿐이다. 그 멋을 즐기며 인간은 한 생명으로서의 신비롭고 멋진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숲은 창조주를 닮은 생명의 멋으로 충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이후로 사람들은 피조 세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간은 오랫동안 여타의 피조 생명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창2:7). 여기서 생령(개역개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 네페쉬 하야’는 인간 외에 ‘생물’로 번역된 다른 동물계를 가리킬 때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창1:20, 21, 24, 2:7, 19).[각주:1] 사람이나 생물이나 모두 똑같은 네페쉬 하야(생명)다. 또한 인간의 창조 과정이 좀 더 하나님과 친밀했다고는 하나, 재료는 사람이나 생물이나 같다. 사람이 흙에서 왔듯이, 하나님은 땅에게 온갖 종류의 생물과 짐승들을 내어라고 명령하셨다(창1:24-25). 

    창조 신앙은 자연숭배라는 이교 사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얻어낸 신학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덴은 하나님-인간-자연이 화목한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곳이었고, 종국에 주님이 통치하실 나라는 인간과 자연이 숭배, 정복, 혹은 갑을의 관계를 이루는 곳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사11:6-8) 온 생명이 더불어 형제자매가 되는 가정 공동체이다.  


형제 해와 자매 달의 찬양

"Francis and the Wolf" by John August Swanson. Image from www.johnaugustswanson.com

     낮의 해와 밤의 달을 숭배 혹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와 자매로 칭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했던 분이 있었다. 가난의 성자로 많이 알려진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다. 그의 저작은 주로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수도회를 위한 짧은 교훈들로서 남겨진 글이 많지는 않다. 그 중에서 그의 문학적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다. 태양의 노래〉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지면상 주제와 관련된 첫째 부분만을 소개한다.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여

  찬양과 영광과 존경과 모든 은총이 당신의 것입니다.

2. 지존이시여,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께 속한 것이오니

   사람은 누구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친애하는 형제 해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는 낮이며, 그를 통해 당신은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4. 그는 아름다우며, 위대한 광채로 빛을 내며

   지극히 높으신 당신을 닮았습니다. 

5. 내 주여, 자매 달과 별들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저들을 맑고 귀하고 아름답게 하늘에 조성하셨나이다. 

6. 내 주여, 형제 바람의 찬양을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화창한 날씨, 그리고 모든 날씨의 찬양을 받으소서

   저들을 통하여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기르시나이다.

7. 내 주여, 자매 물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면서도 고상합니다.

8. 내 주여, 형제 불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로 인해 당신이 밤을 밝혀 주십니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며, 굳세고 강합니다. 

9. 내 주여, 우리의 자매이자 어머니인 땅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우리를 기르고, 다스리며

   알록달록한 꽃과 식물들, 그리고 온갖 과일을 내어줍니다.[각주: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각적 경험에 의지해 자연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한다. 반면에 이 노래는 프란체스코가 죽기 1년 전, 병약하고 거의 장님이 된 상태에서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던 때에 작성됐다. 즉, 그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젖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싹튼 그의 형제사랑이 다른 피조세계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찬가’로 오해할 수 없는 것은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기준이 이 작품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문의 1-2절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님만이 찬양의 대상이며,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는 주님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됨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어지는 3-9절의 노래는 모든 피조세계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 절대적 종속의 표현으로 드리는 찬양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프란체스코의 자연관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그는 고난당하시는 예수(Crucified Christ)를 온 삶을 다해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주께서 그의 양 손에 예수님의 못 자국(聖痕, stigmata)을 주실 정도였다고 후대 사람들은 전한다. 프란체스코가 그토록 십자가의 예수를 사랑했던 것은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된 피조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친히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셨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주는 맏형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따라서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자연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 관계라고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토록 강조했던 형제 사랑, 특히 가난한 형제들의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가난한 형제’의 범주를 자연세계까지 확장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했던 프란체스코에게는 숲을 거닐며 만나는 모든 생명들도 사랑하고 친교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통해 그는 모든 생명을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기존의 세계관을 탈피할 수 있었다. 


숲과 목회

    지난 6월 18일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체스코 교종이 역대 교종으로는 처음으로 생태 문제를 다룬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회칙의 제목이 태양의 노래〉의 반복하는 구절 찬미(양)를 받으소서(Praised be You)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자연관과 영성은 전체 가톨릭교회 사역의 지침이 될 것이고, 작은 지역 교구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어떤가? 매 년 급격한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가 늘어나면서 이미 ‘자연과 환경’은 신학의 주된 토론 주제가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회사역의 끄트머리에도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는 우리에게 꽤 친숙한 작품이고, 심지어 자주 즐겨 부르기까지 한다. 어쩌면 가톨릭 신자들 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노래일지 모른다. 새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찬송은 야외예배의 애창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송을 프란체스코의 것으로 쉽게 연결 짓지 못하는 이유는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제목부터 가사까지 원작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새 찬송가에 실린 이 곡은 1927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출판한 《장로교 찬송가》(The Church Hymnary)에서 번역된 것으로, 윌리엄 드레퍼(William Draper)가 어린이 성령강림절 찬송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이 아쉬운 것은 자연에 대한 프란체스코의 태도와 관점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해서인데, 그는 형제(Brother)자매(Sister)를 모두 그대(Thou)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존중할 생명들이나,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그의 자연관이 번역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한국 교회는 100년 가까이 〈태양의 노래〉를 불러왔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자연관은 한 세기 전과 비교하여 그리 진일보(進一步)하지 못했다. 물론 교회들도 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회중이 많이 모이는 집회형 기도원보다 조용한 숲 속의 영성센터를 선호하는 이들이 꽤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로는 교회가 숲(자연과 환경)을 목회와 연결시켰다고 말 할 수 없다.  

    앞으로 자연을 통한 영성 훈련과 생태 문제에 참여하는 목회사역들이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숲에 대한 ‘목회 감각’을 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목회자의 자연관은 설교와 사역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 영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목회 감각’은 숲을 이루는 온 생명을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숲에 관심을 갖고 좋아한다는 것과, 그것을 같은 생명의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얼마든지 숲의 생명들을 쉼, 치유, 혹은 묵상의 도구로서 좋아할 수 있다. 혹은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내려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숲의 충만한 생명력을 지나치게 우러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숲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숲 속에서 온전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고, 숲의 생명들도 인간 형제의 따사로운 손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태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의지하는 모든 생명들이 한 교회의 성도가 되어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갖출 때 숲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최고의 영성 훈련 장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하고 치유하고 선교해야 하는 목회지로 서서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 김종수,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담임목사, D.Min Candidate(Pacific School of Religion, 기독교 영성)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0월 호에 실린 열 번째 글입니다.


  1. 1.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예수의 환경 친화적 가르침” 소기천(대한기독교서회, 2002) p.129. [본문으로]
  2. 2. Regis J. Armstrong and Ignatius C. Brady 가 공동 영역한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Paulist Press, 1982)에서 필자가 번역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