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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것은 결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시청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송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 곧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성으로 변질시키는 세태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직장에 적합한 '인재',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품'임을 오디션과 같은 입사 시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 받고 있다. 비단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라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도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혀지기를(picked up)"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유행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나를 뽑아줘"라는 간절한 외침이 배어 있는 듯해서 노래가 매우 서글프게 들린다. 더구나 이러한 정글과 같은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행을 '이용'해서 '과대 광고(공약)' 또는 '허위 광고(공약)'로 자신들을 포장해서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소명'(vocation)과 '사명(mission)'은 원래적으로 수동적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동성은 그 부름과 사명에 대한 응답에 있다. 곧 수동성이 우선이고 그 뒤에 능동성이 따른다. 앞서 말한 "pick me up"이라 외치는 노래도 자신이 수동적으로 선택되기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소명'과 '사명'이 갖고 있는 수동성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pick me up"이라는 문구에는 자신이 선택받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부름과 응답에는 자신이 부름을 받기에 매우 부적절한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청년 윤동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동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것은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허락"되어져야만 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했다. 최근에 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찬송가에 담긴 주님의 질문에 응답하던 때에는 분명 나같은 죄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그 결심 밑에 깔려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십자가는 내가 "져 주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당연히" 맡기셔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슬쩍 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시며 모든 제자들은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이 말씀 이전에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이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시인'으로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 들였다(〈쉽게 씨여진 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좋은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원하지만, 윤동주는 다른 이들이 피하는 괴로운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랬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세상은 상향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향성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캐스팅' 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 이틀 후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성금요일이다. 일 년 중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커지는 때이다. 그런데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 내가 결단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고마워하시며 얼른 십자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적 십자가는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부담스러워하며 억지로 받거나, 생색내며 받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한 줌의 재에 불과한 나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십자가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겸손히 두 손으로 받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귀히 여기는 이들은 사실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주기철)[각주:1]


/ 바람연필 권혁일


  1. 주기철, "오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서울: 홍성사, 2008), 15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