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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밀, 야수, 그리고 빵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저는 모든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당부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청하니 저에게 적절하지 않은 호의를 베풀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야수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야수들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밀입니다. 그리고 야수의 이빨에 갈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순전한 하나님의 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 ~ ca. 108), Letter to the Romans, Ch. 4.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0년을 전후해서 시리아에 위치한 안디옥의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 황제 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사형을 선고 받고 로마로 압송을 당했다. 그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수들의 먹이가 될 예정이었다. 로마로 붙잡혀 가는 도중에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구출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그대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놓아두라고 부탁하였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순교를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편지 곳곳에서 절절하게 배어나왔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밀'이고, 운명은 '야수의 이빨에 갈리는 것'이며, 소망은 '하나님의 빵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열망과 용기는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역경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이그나티우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렇게 말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던 이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구현해내었다(요한복음 12:24).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에 대한 이런 열망은 로마시대의 박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그의 편지에 담긴 진지함과 용기는 오늘 나의 정체성과 가야할 길과 소망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 바람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