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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어둠 속에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모세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 연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첫번 째 나타나심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빛 가운데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나 지금은 어둠 가운데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크고 더 철저한 근면을 통하여 영혼이 전진하다가 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되는데, 즉 그 영혼이 관상(contemplation)[각주:1]에 거의 다다르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온전히 인식될 수 없는(uncontemplated) 분임을 더욱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of Nyssenus, 335-395), 모세의 생애 (The Life of Moses) book 2.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분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일까? 


종종 눈을 떠 하루를 맞이하는 일이 두려우리 만큼 지금의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 Why me?를 외쳐 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속시원한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나의 영적 싸움은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함 이라기 보다는 이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지금 붙들고 있는 셈이다.


손을 살짝 잡아주는 딸 아이를 통해 피곤에 지친 나를 감싸주는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는 이메일 속에 담긴 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와 가슴이 울컥하기도 한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따뜻한 시선과 다가가서 함께 하여 주실 때, 어느 순간 내가 삭개오가 되어 감사와 감격이 복받쳐 오른다. 


시인이 이렇게 노래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34).



완전히 알아챌 수 없는 하나님을 이 고통의 와중에 왜 붙들고 있는걸까?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다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손을 덮석 잡고 길을 나서고 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그 속살을 조금씩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이 여정을 불안함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씨앗으로 자리잡고 있다.   / 오래된 오늘



  1. 여기서 쓰인 "관상"이란 말은 "영적 인식"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