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는 자선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는 것 (그레고리우스 1세)

한 줄 묵상 2015.03.16 15:31

우리가 궁핍한 이들을 보살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때에, 우리가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하게 속한 것이다.


-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40-604), 《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 III. 21.


언젠가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분이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 한 이들에게 준다는 표현이었다.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정말 "부자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일까? 


수도자 출신으로서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인물이었던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그런 생각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땅이 내는 소산물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셔서 땅에서 자라게 하신 곡식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먹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소유가 넉넉한 이들이 궁핍한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자신들의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돌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자선을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빚을 갚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므로, '주는 사람'은 자신이 '받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의 사람이 공공의 것인 부를 독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부자들이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두고 필요한 이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이웃들을 날마다 학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학살당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난으로 학대당하고 있는가?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가난과의 동행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18 02:50

 1544년 2월 6일. 수요일

미사 시작 전부터, 헌신과 눈물을 드릴 때, 고정된 수입 없는 공동체에 대한 (나의) 마음이 더 공고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보다 뚜렷해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과 다르게, (예수회 공동체를 위해) 고정된 수입을 추구하는 선택은, 혼선을 일으키고,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불명예일 수 있으며, 우리 주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가난을 경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the Procedure of Election" in Selection from the Spiritual Diary (New York: Paulist Press, 1991), 239.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을 고용환경과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내몰리고 있다. 신자본주의(Neo Capitalism) 혹은 세계화(Globalization)란 거창한 시대적 요구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세대는 가진자의 풍요와 그 독점을 정당화하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더욱 가난을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길 강요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고정된 수입이 가져다주는 오늘의 안정감을 박탈당하고, 언제 올지 모를 빈곤의 삶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오늘의 생존을 삶의 목표로 삼고 분투하고 있다. 내게도 그렇게 가난이 찾아왔다. 내일 당장 필요한 자식들의 먹을 거리를 걱정하고, 다음달 월세를 어떻게 내야할지, 막막한 고민을 안고, 들지도 않는 잠자리를 청한다. 전혀 원치 않는 삶의 조건이기에, 가난은 불청객이며,  피해야할 시련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적 성숙을 위한 최선의 삶의 조건으로 가난을 선택해왔다.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 규율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삶의 형태로 가난을 사모하고, 삶의 일부분으로 선택해왔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도 가난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의 필수적 조건으로 여겼고, 예수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가장 주요한 계율과 가치로 세워나가려고 노력했다. 영성 분별의 전문가 답게 이냐시오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랜 기간 분별의 기도를 드렸고, 그의 일기 한 부분엔 그 영적 과정 중에 깊은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난한 삶의 형태를, 최소한의 고정된 수입으로 공동체를 운영하고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마저도 포기하고, 매일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공동체의 삶을 꾸리는 규율을 세울 것인가?"

예수회 최초 구성원들은 그의 분별과 그로 인한 공동의 결정에 따라 고정된 수입을 포기하고, 매일 채워주시는 은혜로 살기로 선택한다. 가난은 그렇게 삶의 필수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두려움과 절망의 대상에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삶, 하나님만을 향한 갈망의 불길을 더욱 태우기 위한 영성적 삶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물질적 곤핍을 통해 나의 원초적 필요를 내려 놓고, 그 부족함이란 경험 속에서 오직 주님만으로 빈곤함의 공간을 채워겠다는 오늘의 영적 결단이 가난이다. 

내 삶의 조건이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적 문제, 혹은 형평성의 문제이든, 나는 오늘 내게 이미 주어진, 가난 가운데 주님의 풍성함을 누릴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영적 은사로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통해, 돈과 재물에 더 갈증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더 갈망하게 되었는가?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빈(貧)은 나의 애처(愛妻)

기타/산책길 엽서 2014.01.11 12:08
  • 이용도 목사님의 글은 가난(빈/貧)과 아내(빈/嬪)의 언어유희를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아내 빈은 함께 있는(賓) 여자(女)란 뜻의 형성 문자이다. 그에게 가난은 아내처럼 늘 곁에 있는 존재였나 보다.

    가난을 아내처럼 사랑해야겠다.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가난하셨던 예수의 발자국을 따르는 대가로 주어지는 가난이라면, 그녀를 인생의 아름다운 동반자로 여겨야겠다. 거친 나를 다듬는 존재로,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게 하는 선물로 여겨야겠다. 가난을 견디기보다 아내처럼 귀하게 여기며 즐거워해야겠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1.12 10:43 신고




빈(貧)은 나의 애처(愛妻)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부(富)보다 측은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용도, 《이용도》(서울:홍성사, 2009),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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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내 집을 고쳐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3.11.27 07:57

"프란치스코, 가서 내 집을 고쳐라. 내 집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가고 있단다."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1181-1226),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 (New York: Paulist Press, 1982), 3.

 

유학을 와서 제일 처음 들었던 수업이 바로 프란치스코의 삶에 대한 수업이었다영성 전공으로 왔지만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문외한 이었던 나에게 그나마 들어본 이름이 프란치스코였다그러나 그의 삶그의 회심그의 영성어느 것 하나 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19:21)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 9:3)"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16:24) 


프란치스코는 항상 이 세 가지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끈기 있고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았다그의 영성은 단순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었다. 프란치스코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곧 자원하여 가난을 택하여 겸손히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삶이었다

 

     프란치스코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가난"을 자원한다는 그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가난해야 한다는 소리를 한국에서 들은 적이 있었던가? 가난은 죄의 결과이며 게으름의 결과로 듣지 않았던가! 가난함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점차 프란치스코를 이해하게 되면서도 여전히 남는 걱정은 과연 그의 영성이, 물질적인 축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세계는 자본주의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시대였다봉건제도가 균열되고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신분제도도 변화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물질적인 추구가 점점 극렬해지는 시대에 교회는 점점 타락해가면서 프란치스코가 경험한대로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는 "내 집을 고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그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입던 옷과 가진 것들을 팔아 폐허가 된 교회를 수리하기 시작한다이것이 그의 수도자적 삶의 시작이었다그는 평생 '가난'을 외치며 교회를 '수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본받기 위해서 교회가 아닌 그에게로그가 속한 공동체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프란치스코가 외친 가난을 통해 물질과 성공과 욕심으로 폐허가 된 교회들을 수리하는 데 동참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라 하는 한 노 목사님의 헌금으로 네 믿음을 증명해보라는 식의 외침과 가난을 통해 폐허가 된 교회를 고쳐라하는 프란치스코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 묘하게 귓가에 맴돈다.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바른 목적은 바른 수단을 통해서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2.10.10 06:09
  • 효과적 수단이라도 잘못된 것이면 취하지 않는 것--이 또한 '가난의 영성'이군요.

    BlogIcon 산처럼 2012.10.14 02:40 신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당신이 볼 때에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데에 최선의 길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행하세요. 내가 순종한 것처럼 당신도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c. 1182-1226), "A Letter to Brother Leo," 3.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프란치스코는 리오 수사에게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수단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행하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그 바른 목적이란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과 '부정의(injustice)'와 '폭력' 같은 잘못된 수단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님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른다면 절대 자신의 욕망을 섬기며 다른 이들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빼앗지 못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발자국을 따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면 결코 잘못된 수단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아씨시의 가난한 성자의 단순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과 '바른 목적은 바른 수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최선의 길인지 질문해보자.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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