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는 자선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는 것 (그레고리우스 1세)

한 줄 묵상 2015.03.16 15:31

우리가 궁핍한 이들을 보살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때에, 우리가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당하게 속한 것이다.


-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540-604), 《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 III. 21.


언젠가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분이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 한 이들에게 준다는 표현이었다.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정말 "부자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일까? 


수도자 출신으로서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인물이었던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그런 생각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땅이 내는 소산물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셔서 땅에서 자라게 하신 곡식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먹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소유가 넉넉한 이들이 궁핍한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자신들의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돌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자선을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빚을 갚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므로, '주는 사람'은 자신이 '받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의 사람이 공공의 것인 부를 독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부자들이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두고 필요한 이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이웃들을 날마다 학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학살당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난으로 학대당하고 있는가?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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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일부.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을 하여 교인들의 종교적 열광을 만족시키는 뜨거운목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학생회 소년들과 텃밭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기도 하고, 읍내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는 목사 같지 않은사람이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설교는 집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마통에 교인이 반으로 줄고, 그의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죽자, 실망한 교인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도, 신유의 능력도 없는 그를 내쫒았다.


    이 시는 약 2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라는 전통적인 상식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목사들이 추구하거나 교회의 지도층들이 바라는 목회자상은 교인수와 헌금액수를 높이는 데에 유능한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궁극적인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너무나 뼈아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신제품을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의 쇼맨십을 흉내 내어 설교단에서 복음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재로 변질시켜 온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탁월한 목회 지침서로 사랑받아 온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I: 540-604)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목회자들에게 도움 될 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목회를 하는 이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며칠을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도 그의 목회 규칙을 시작하며, 리더가 지고 있는 부담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어려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목회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거룩한 직함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 죄인이 그 성직에 주어지는 존경을 받는다면, 그의 불법이 예가 되어 멀리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I.2). 오늘날 목사또는 장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각종 불법으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그저 좋은 옛날 말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가 이처럼 부담이 큰 자리이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말로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겔 3418-19절을 인용하며, 자신은 맑은 물을 마시면서 양들에게는 자신의 발로 더럽힌 흙탕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양떼는 그들이 귀로 들은 가르침이 아닌, 그들이 목격한 목자의 오염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I.2). 그러면 말과 행동또는 앎과 삶사이의 간극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 책 111장에서는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의 유형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자신이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결한 삶의 습관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종종 악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규칙은 습관과 리듬을 만들고, 습관과 리듬은 규칙을 실천하는 사람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과 허버트의 시골 목사는 목회자가 바람직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습관은 단순히 행위의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는 내면의 생각과 바람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는 습관을 형성하는 내면의 생각과 동기에 주목한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육체의 음탕함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 또는 탐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정욕과 탐욕이 생각의 영역에서 진압되지 않으면, 외적인 행동에서 주도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다른 악들과 쉽게 결합해 그 사람 전체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뿌리 뽑혀야 한다. 또한 무거운 땅의 염려는 아예 사람의 등을 굽게 만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I.11).


    그런데 이 유형들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I.11). 이것은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옳고 그름의 구별이 뚜렷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은 그 본질이 미묘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I.1). 비슷하게 조지 허버트는 시골 목사에서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24).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집을 구입한 교인의 집에 가서, 집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ho Nazianzos: 329-390)의 견해를 받아들여, 영혼을 돌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함을 필요로 하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목회자는 마음과 생각의 의사라고 높이 평가한다(I.1).


    목회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만에 빠질 위험도 매우 높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겸손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지혜나 진리에 대한 오만한 추측으로 눈먼 자또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보편적 진리로 절대시 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이런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신성한 관조(contemplation)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여, 곧 우리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빛을 비춰주는 하나님 경험이 매우 얕거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이다(I.11).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유형들 중에 자신이 속해 있고, 그러한 약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면,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악한 모델로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것보다는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형벌이 덜할 것이라고 권면한다(I.2).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좀 더 영성적인 목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살펴보자.

 


조화로운 삶, 전인적인 돌봄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수도자이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 시의 집행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도 생활의 이상을 좇아 정치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들에 의해 그는 오십 세에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수도자가 된 그에게 교황의 직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적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만해지고, 자기 성찰을 빠뜨려서 죄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목회 사역의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하는 것과 외적인 활동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지도자들은 외적 문제들에 몰두하여 내적 생활에 태만해지거나, 내적 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외적 문제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적으로 피폐해지고, 반대로 내적 자아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이웃들에게 필요한 외적 돌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II.7).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종종 일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외적인 일들이 끝나면 내적 공허와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들의 삶도 점점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 중에 영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들의 설교에는 청중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들이 결여 되어 있는 것과, 그들의 말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II.7).


    조지 허버트 역시 시골 목사에서 목회자의 외적 활동에 대한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은 특히 영적 교만과 마음의 불결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9). 여기서 마음의 불결함(impurity of hear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5세기에 세속 도시를 떠나 마음의 청결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세속화되어 가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모의 땅 사막으로 나아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허버트는, 목사는 이와 같은 초기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종종 읽어서 그들이 평안할 때에 어떻게 매일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며, 유혹을 이겨내고, 겸손을 훈련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비록 허버트의 시골 목사나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역간되었으니, 오늘날 영성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라면 반드시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청결함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나 허버트가 이렇게 내적 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악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허버트에 의하면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탐욕과 식탐][그 악들에 사로잡힌]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해야 한다.”(24).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 위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되고 익숙한 것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다. 조지 허버트의 시골 목사에서 말하는 시골 목사17세기 영국 각 지방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위에 올라야 한다. 특히 한 주간의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을 성찰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허버트는 교구민들의 내적 생활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 또는 일상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골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필요하면 법률가와 의사의 역할도 도맡아야 하며, 교구민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날 법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하고 대비해야 한다(23).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의사와 법률가가 드물었던 ‘17세기 영국 지방 교구라는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오늘날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체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사역은 시간적으로는 주일’, 공간적으로는 교회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영적인 일들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들은 평신도들이 담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양떼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설교의 효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에게 있어서 목회또는 목양은 양떼들에 대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물질적인 삶,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은 오늘날, 목회자가 모든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그 일을 감당할 전문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목회 규칙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일흔두 가지 종류의 다양한 청중들에게 각각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허버트는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들의 질병뿐만 아니라 시대의 질병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목회 활동의 영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교구(교회)의 범위를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32).

 




나의 목회 규칙


목회자의 소명은 종교적 기업가들의 전략에 의해 사업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조건들은 예수의 방식 그대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매우 유해한 문화적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회고록 목회자(The Pastor)에서 오늘날 급변하는 미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목회자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의미를 잃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목회자의 소명 자체도 물질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면에서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시리즈의 첫 번째를 목회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글로 시작한 이유는 영성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삶으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일상 속에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영성 생활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각자 자신 만의 목회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목회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결심문들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의 삶에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규칙이 완결된 것이 아니며, 독자들의 첨삭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목회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회 규칙이 필요한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나의 목회 규칙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소개 : 권혁일은 장로교 목사이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팀블로그(spirituality.or.kr) 편집자이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잡지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원고가 축약되어 인쇄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첫 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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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의 규칙서 (Rule of St. Benedict)




블로그를 시작하며 7월의 추천 고전으로《베네딕트의 규칙서 Regula Sancti Benedicti 를 선정하였다. 6세기 초 이탈리아의 수도승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에 의해서 쓰여진 이 작품은 현재까지 기독교 수도원운동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여겨져 오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사실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많은 기독 교회들이 분열과 분쟁을 거듭하고 있으며 참된 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공동체 생활을 택한 수도자들의 규칙서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과 지혜를 주고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 새롭게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을 소개하고, 그 책에 필자가 쓴 도움말로 작품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대신한다. 

 

베네딕트 저.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베네딕트의 규칙서》:

천국을 향한 공동체 여정의 이정표

 

 

왜 고대의 수도원 규칙서를 읽는가?

문학에서 고전古典은 그 작품이 쓰여진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딕트의 규칙서 Regula Sancti Benedicti》는 기독교 영성의 고전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작품은 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c.480-c.547)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리고 이 규칙서는 지난 1500여 년 동안 수도원 안팎에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왔고, 또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베네딕트의 규칙서》가 기독교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기록 목적과 규칙의 유연성이 중심적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규칙’을 뜻하는 라틴어 레귤라regula는 여행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길의 울타리,’ 또는 행동과 삶의 잣대를 의미한다. 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사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딱딱한 규범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영성생활을 통해 천국을 향한 수도사들의 영적 여정을 안내하기 위한 이정표와 지침이다.서문 제45-50

베네딕트는 이 규칙이 문자적으로 적용될 것이 아니라, 각 수도원이 처한 기후와 환경, 그리고 수도사 개인의 영적, 육체적 조건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규칙은 수도생활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도원장의 판단에 따라 적절하게 변경될 수 있으며, 더 나은 것으로 대치될 수도 있다. 이러한 규칙의 유연성은 오늘날 전 세계의 수도원 안에서 사는 이들은 물론 수도원 밖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베네딕트 영성의 유산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수도원주의의 발달과 《베네딕트의 규칙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서방기독교 수도원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는 4세기 초 이집트의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 치하에서는 많은 이들이 혹독한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틴 황제Constantine the Great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당대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순교’를 찾아서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으로 나아갔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에 따르면 4-5세기에는 “사막에 도시를 이룰 정도로 많은 수도사들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은둔형 혹은 공동체형 수도원을 만들어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렇다고 당시 사막의 수도사들이 세속 도시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처럼 교회에서 ‘영웅’으로 인식되며, 로마제국의 종교적 관용으로 인해 신앙이 느슨해진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와 수도원 이야기는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의 생애 Vita Anthonii》와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의 《제도집 Institutes,《담화집 Conferences》과 같은 글과 종교-문화적 접촉을 통해 서방교회의 수도원 발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갈리아Gaul와 팔레스타인, 로마가 지배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수도생활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원 전통의 유산들이 축적되어 6세기《베네딕트의 규칙서》로 꽃피어났다. 실제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사막 교부들의 생애와 금언집Apothegmata,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of Milan,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바실리우스Basilius of Cappadocia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베네딕트의 규칙서》보다 조금 앞서 쓰여진 《스승의 규칙서 Regula Magistri》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베네딕트는 자신의 규칙을 토대로 서구 수도원제도의 기초를 놓으려 하거나 자신만의 수도회를 창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규칙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융통성과 온건한 금욕적 수행, 그리고 균형 있는 생활규율 등으로 인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후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에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자신의 카롤링거 제국에 속한 수도원의 공식적인 규범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 10세기에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사용하는 수도원들이 연합하여 베네딕트 수도회Benedictine Order를 창설하였다. 이후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중세에 수도원이 타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는 물론 수많은 수도원개혁의 과정에서 신앙적 활력과 기준을 제공해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베네딕트 수도원들은 영국성공회와 스웨덴 루터교 안에도 세워졌으며, 오늘날 전 세계에 약 3만 여명의 수사와 수녀가 베네딕트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베네딕트의 생애

베네딕트의 생애에 관해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그의 사후 약 50년 경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the Great가 자신의《대화집Dialogues》제2권에 남겨둔 베네딕트의 생애Vita Benedicti가 전부이다. 물론 그레고리우스의 성인전聖人傳이 오늘날의 전기biography의 개념으로 베네딕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사람” 베네딕트의 거룩한 성품과 영적인 특징을 묘사하고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의도한 교훈을 교회와 이탈리아 사회에 전달하고자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기록에 따르면 베네딕트는 480년 이탈리아 중부의 누르시아Nursia라는 지방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당대 사회의 방탕함과 무의미한 생활을 목격한 그는 13세가 되던 493년에 로마를 떠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처음 1년은 엔피데Enfide에서 다른 금욕주의자들과 같이, 이후에는 수비아코Subiaco의 산 위에 있는 동굴에서 약 3년 간 홀로 기도와 금욕훈련에 매진했다. 그는 악마의 유혹과 육체의 정욕을 이겨내기 위해 심지어 쐐기풀과 들장미 덤불 속에 들어가 그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그의 종교적 생활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수비아코의 한 수도원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엄격한 삶의 방식은 평이한 삶을 원하는 그곳 수도사들의 기대와 상충했고, 그는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인 거룩함에 대한 평판과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수비아코에서 약 19년 동안 열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곧 지역 사제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이를 피해 베네딕트는 529년경에 로마와 나폴리Naples 사이에 있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적용하여 이방신을 섬겨오던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사들을 지도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가 기록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는 수도사들의 삶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뭄이 극심할 때는 수도원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등 수도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많은 자비를 베풀었다.

베네딕트의 죽음은 그의 기도하는 삶의 아름다운 절정을 보여준다. 그는 547 3 21일 몬테카시노에서 형제들의 부축을 받아 서서 기도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베네딕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규칙서는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법과 양식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대화[가르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베네딕트의 규칙을 통해 그의 삶의 방식과 훈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거룩한 사람[베네딕트]은 그가 가르친 것을 모두 삶으로 살아 내었기 때문이다(그레고리우스 1세의 《대화집》 제2권 제36)

 

《베네딕트의 규칙서》의 내용과 주요 주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규칙을 제정한 의의를 설명하는 서문과 수도원에서의 각종 제도와 생활규율 등을 설명하는 7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서 제7장까지는 《스승의 규칙서》와 아주 많이 일치하는 부분으로, 수도사의 종류(1)와 수도원장(2-3), 그리고 영적성장을 위한 훈련방법(4-7)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며 글 전체의 도입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전 도입부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규칙을 다루고 있다. 전체를 간략히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례규칙과 자세(8-20), 직책과 역할(21, 31-32, 38, 47, 57, 62-66), 입회, 책벌, 파문(23-30, 42-46, 58-61), 노동과 각종 생활규칙(22, 33-37, 39-42, 48-56, 67-72), 끝맺는 말(73)로 이루어져 있다.

 

상호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순종

“들으라, 나의 아들아”라는 권고로 시작하는 서문은 이 글이 법률적 문서보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 전통잠언 1:8, 4:1 참조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베네딕트는 규칙서에 기록된 가르침들을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사랑의 교훈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이 가르침들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서문 1.

이러한 지혜문학으로서의 글의 성격은 베네딕트회의 3대 서약 중의 하나인 ‘순종’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와준다. 즉 베네딕트에게서 ‘순종’은 권위자의 일방적인 명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오는 맹목적인 반응이 아니라, 영적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과 신뢰에서 자라나는 미덕이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렇게 형성된 순종은 나아가 수평적인 관계로 확장된다. 베네딕트는 그의 규칙서 끝부분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사이뿐만 아니라,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상호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71.1, 72.5. 이와 같이 순종은 겸손과 더불어《베네딕트의 규칙서》의 처음과 마지막을 꿰뚫으며 모든 규칙을 하나로 묶는다. 이런 점에서 베네딕트의 순종은 효를 모든 행위의 근본으로 삼는 동양의 유학儒學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예를 들면, 유학에서도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녀의 사랑의 반응이 효라고 가르친다. 부모와 자녀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효가 형제자매와 친구와의 수평적인 관계로 확장된 것이 우정이다.

또한 순종은 발전시켜야 하는 미덕인 동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영성훈련의 효과적인 방법이다. ‘순종’을 뜻하는 라틴어 오보에디레oboedire는 어원적으로 ‘듣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곧 순종은 수도원장이나 다른 형제들의 말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사는 상급자의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실행해야 하며, 상급자에게 보여준 순종은 곧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 말한다5.4,15. 이처럼 순종의 훈련을 통해서 수도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귀를 열어놓게 되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겸손, 환대, 그리고 자비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순종과 마찬가지로 겸손은 《베네딕트의 규칙서》의 기초를 이루는 미덕이며 동시에 영성훈련 방법이다. 7장에는 겸손의 열두 단계가 기록되어 있는데, 베네딕트는 겸손을 인간이 몸과 영혼, 즉 전인적으로 성장해가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죄에 관한 욕망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는 수도사는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자신의 뜻을 버리며, 죄를 고백하고, 인내하는 가운데 순종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여덟 번째부터 마지막 단계는 겸손을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충실하게 나타내는 과정이다. 겸손의 단계를 모두 거치면 수도사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이 사랑은 또한 수도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연합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처럼 즐거이 준행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의 사다리는 수도사를 금욕적인 삶 또는 능동적 삶의 정점으로 인도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랑 깊은 연합이 곧 베네틱트가 추구한 수도생활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은 또한 베네딕트 영성의 또 다른 특징인 다른 이들에 대한 환대자비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도사들은 방문한 모든 손님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몸을 완전히 엎드려 겸손히 영접하고 진심으로 대접해야 한다. 손님대접을 위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담당자는 중요한 금욕훈련 중의 하나인 금식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 규칙서는 공동체의 병들거나 약한 이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배려를 보이고 있다. 손님과 병든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같이 돌봄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대를 통해 나그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경배를 받으시기 때문이다36, 53. 이처럼 겸손과 환대, 그리고 자비는 금욕수행보다도 더 우선되는 미덕이자 훈련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과 연합하는 삶의 길이다.

 

삶의 균형과 리듬

베네딕트 영성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균형과 리듬이다. 먼저 베네딕트는 하루 중 기도와 노동이, 그리고 공동체의 예배와 개인의 영성생활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친다. 물론 우선순위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성무일도officium divinum 또는 하나님의 일Opus Dei에 있지만, 육체적인 노동과 개인적인 독서lectio divina 역시 매일의 수도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베네딕트는 제8장부터 제20장에 걸쳐 매일 혹은 매주 드릴 성무일도의 시간과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도와 예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이 추구한 “마음의 순수함과 참회의 눈물”이다20.3. 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하며20.4, 찬송은 마음과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어져야 한다19.7.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에나 임재하시며, 모든 곳에서 주님의 눈이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에19.1 성무일도를 비롯한 모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그 외에도 베네딕트는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49과 취침과 식사 등 일상생활에 대한 지침22, 41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전례규칙과 일상생활의 규칙은 함께 어우러져 짧게는 매일의 생활, 길게는 연간 생활의 리듬을 형성한다. 즉 《베네딕트의 규칙서》에 심겨져 있는 수도원의 이상은 단조로운 매일의 의무들로 채워져 있는 삶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일상생활의 반복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리듬 있는 삶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은 발전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집”을 향해 오르는 영적인 여정이며, 공동체가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규칙이라는 리듬에 맞춰 내딛는 공동의 발걸음이다72.4, 73.8.

 

라틴어 원문들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듯 많은 사본들이 발견된다. 현재 삼 백여 개 이상의 다양한 라틴어 사본들이 남아 있는데, 전승 과정에서 곳곳에 가필된 부분이 많아 원문을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칙서》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문서가 시작하는 첫 단어에 따라 아우스쿨타ausculta옵스쿨타obsculta,두 그룹으로 구분되어 명명되어왔다. 중세시대에는 이 두 그룹의 사본을 적절히 조합하여 주석을 단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규칙서》각 장의 구분은 모든 사본에 나타나며, 절의 구분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947년에 안셀모 렌티니Anselmo Lentini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KIATS영성 선집도 이 기준을 따랐다. 중세 기독교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반영하듯, 규칙서에는 약 300여 개 이상의 성서본문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었다. 물론 베네딕트는 성경본문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거나 출처를 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사들이 보다 쉽게 낭독할 수 있도록 운율을 살리기도 했다.  KIATS영성 선집에서는 독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성경인용의 출처를 담았다. 우리는 이 《규칙서》의 한글 번역과 연구를 위해 지금까지 나온 많은 라틴어와 영어 번역을 참조했다. 동시에 믿을만한 비평본인 아달베르트(Adalbert de Vogüé)가 편집한 La Règle de Saint Benoît: Introduction, Traduction, et Notes par Adalbert de Vogüé: Texte Établi et Preésenté par Jean Neufville (Paris, Éditions du Cerf, 1972)과 프라이(Timothy Fry)가 편집한 RB1980: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with Notes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81)의 도움을 받았다.

 

주요 참고문헌

1차 문헌

Fry, Timothy . RB1980: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with Notes.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81.

Gregory the Great. The Life of Saint Benedict. Hilary Costello, Eoin de Bhaldraithe. Petersham, Massachusetts: Bedes Publications, 1993.

Lentini, Anselmo. S. Benedetto, La regola: testo, versione e comment. 2. Montecassino: Pisani, 1980.

McCann, Justin. The Rule of Sain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London: Burns and Oates, 1952.

Penco, Gregorio. S. Benedicti Regula: introduzione, testo, apparati, traduzione e commento. Florence: La Nuova Italia, 1958.

de Vogüé, Adalbert . La Règle de Saint Benoît: Introduction, Traduction, et Notes par Adalbert de Vogüé: Texte Établi et Preésenté par Jean Neufville. Paris, Éditions du Cerf, 1972.

 

 

2차 문헌

강치원. 『베네딕트 규칙서』에 나타난 렉시오 디비나. 《선교와 신학》제19 (2007): 187-220.

김봉수. 『베네딕트 규칙서』에 나타난 수도원이념에 관한 연구. 《總神大論叢》제16 (1997): 249-290.

Casey, Michael. Strangers to the City: Reflections on the Beliefs and Values of the Rule of St. Benedict. Brewster, Massachusetts: Paraclete Press, 2005.

Ladrigan-Whelpley, Theresa. “Benedict of Nursia (c.480–c.547), Rule.”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Arthur Holder . New York: Routledge, 2009: 62–73.

Merton, Thomas. The Rule of Saint Benedict: Initiation into the Monastic Tradition 4.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2009.

Stewart, Columba. Prayer and Community: The Benedictine Tradition.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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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Waal, Esther. A Life Giving Way: A Commentary on the Rule of St. Benedict.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95.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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