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처럼, 동주처럼 :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예수처럼, 동주처럼”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한 책이 있나요?"


      며칠 전 우연히 만난 분으로부터 들은 질문이다. 필자가 신학교 졸업논문으로 윤동주 시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기신 모양이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이름은 알아도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필자가 윤동주의 영성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윤동주를 기독교 영성, 또는 신학의 관점에서 연구할 만한 내용이 있느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질문을 하신 분께 지난 2월 16일이날은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 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다에 발간된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렸다.


[「돌아와 보는 밤」은] 윤동주의 작품 중 유일한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장 6절)는 말씀처럼 윤동주는 좁은 방에 들어가 '숨은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좁은 방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외면적인 실천의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는 종교시라면 「돌아와 보는 밤」은 내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숨은 신과 대화하며 사상이 익어가는 기다림은 은밀하고, 숨은 신과 인간의 일대일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헌신을 다짐하는 키에르케고르와 윤동주의 공통된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 김응교,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파주: 문학동네, 2016), 354쪽.


 

     보다 정확히 말해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만 쓴 책이 아니다.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관점에서만 윤동주를 이해하고 소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거나, 그를 '기독교 교리' 또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될 위험이 있다. 대신 이 책의 저자 김응교 교수는 가능한 다양한 관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소개하려 하고 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환경은 물론이고 그가 교유했던 벗들과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 윤동주라는 한 인물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위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윤동주의 삶과 작품에 나타난 기독교적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대부분의 장들은 저자가 기독교 월간지『기독교사상』에서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윤동주와 함께 걷는 새로운 길"이라는 꼭지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고쳐 쓴 것이다. (또한 저자가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들을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쉽게 풀어 쓴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 가장 잘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처럼"이라는 독특한 제목이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제목은 윤동주의 유명한 시 「십자가」에서 가져온 것으로 저자는 책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처럼'이란 조사만 한 행으로 써 있는 시를 본적이 있나요. ……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 귀찮은 길을 '행복'한 길이라고 그는 씁니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도 '행복'한 주체가 되는 그 길을, 윤동주는 택합니다. (5쪽)


그는 '처럼'의 시인이었습니다. 국익이라는 헛것으로 보편성을 강요하는 파시즘 시대에 윤동주의 문학은 만들어진 보편성에 흠집을 내고 그 한계를 깨뜨리는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친일 문학 같은 굴레에 갇힐 수 없었습니다. 문학은 한계와 제약으로 구속해서는 안 되고, 구속할 수도 없다는 자유에 그는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릴 희생을 각오했고, 그 결단의 순간을 위해 그는 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서시」)며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509쪽)


기독교 영성사에서 '제자도'(discipleship),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기독교적 삶의 본질적인 이상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각주:1]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급진적인 삶을 살았고, 어떤 이들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삶과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한 오랜 흐름에 맞닿아 있다. 『처럼』은 이러한 제자도를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시대에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윤동주의 영성은 '제자도'라는 주제가 그러한 것처럼 오늘날 전쟁과 자본의 폭력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동만이 아니라 유효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존의 윤동주에 대한 평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존에 출판된 윤동주 연구서들 중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책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일 것이다. 김응교 교수는 『처럼』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윤동주가 곁에 있다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송우혜 선생님의 저서가 역사적 실증주의에서 시인 윤동주의 삶을 구성한 평전이라면, 제 글은 시의 원전을 분석하여 시를 통해 윤동주를 재구성하는 '시로 만나는 윤동주'라는 입장입니다. (515쪽)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시인과 관련된 현존하는 문서들과 증언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역사적(historical) 윤동주'를 제시하고 있다면, 김응교의 『처럼』은 작품 속에 표현된 시인을 추적하는 독특한 형식의 평전이다. 물론 송우혜의 평전 또한 시인의 여러 작품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새로운 평전은 그동안 윤동주에 대한 연구서들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던 동시를 포함해서 시인이 남긴 대부분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다.


      저자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에 윤동주의 작품에 대한 그의 이해와 표현이 '분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적'이며, 그 깊이가 남다르다. 곧, 작품의 구조를 해체하고 의미를 분석하기보다는 시적 표현들 속에 녹아 있는 시정신 또는 시혼(詩魂)을  밝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에 대한 여러 책들과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작품(text)과 환경(context)을 균형있게 고려하고 있는 이 책에 담긴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에서 수년 간 디아스포라(diaspora)로 생활한 저자의 경험이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배경을 이루고 있어서 그의 해석은 더욱 공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해석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책도 없고, 시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근 4쇄를 낼 때에 몇 가지 잘못된 정보와 오자를 바로 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평생 이 책을 살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여름, 한 교회 청년부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만주 땅으로 역사탐방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이면 많은 교회들이 주로 단기선교를 떠나지만, 한 번씩 국내외 기독교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 의식과 통찰력을 갖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의 선배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김응교의 『처럼』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과 더불어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마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자는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예사말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높임말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더 쉽고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윤동주를 소개하려는 저자의 노력인 듯하다. 그리고 각 장도 분량이 길지 않아 한 자리에 앉아서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결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한 번에 여러 장을 읽기보다 한 번에 한 장씩 읽으며, 더불어 그 장에서 언급된 윤동주의 시를 생활 속에서 묵상한다면, '저자의 윤동주 이해'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윤동주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동주는 침묵으로 최초의 악수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슬픔 곁으로 가라고, 웃음 곁에서 웃으라고, 그게 축복이라고, 윤동주도 곁에 있다고. (519쪽) 


이 마지막 구절을 읽는데 눈앞에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그 손을 잡는다면, 또한 다른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만지고 잡게 될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Philip Sheldrake, A Brief History of Spirituality (Malden, MA: Blackwell, 2007), 14-15.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백투더클래식 2014.09.01 18:01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고통하는 이웃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스물여섯 살의 젊은 의사였던 아들을 잃고서 자신의 피 끓는 심경을 토해놓은 소설가 고 박완서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의 한 구절이다. 참척을 당한 어미의 깊고도 깊은 절망과 좌절감이 그대로 뼛속 깊이 전해져 올 때는 필자의 둘째 딸이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두 번째 골수이식을 마칠 즈음이었다. 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딸에게 고통을 주셨다는 말이었다. 위로 차원에서 던져진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짐을 경험했다.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쓰시기 위해 자식을 오 년이 넘도록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물과 가슴 졸임으로 지내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믿고 싶지도, 또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크게’ 쓰이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하는 딸이 죽음의 늪에서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참척을 당한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내게 다가와 일상의 삶이 완전히 정지될 정도였다. 그즈음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설교한 것을 들었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유사한 발언들이 공공연히 한국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것을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신정론이란 신학의 이해의 폭을 제쳐두고서라도, 박완서가 “주변 사람들의 아무리 사려 깊은 위로일지라도 그것이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라고 토로할 만큼 극한의 고통과 좌절감 속에 있는 부모의 심정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했다면 이런 설교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전 졸렬한 신학이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 민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잡아 먹어버려 공감능력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예수의 타자를 향한 사랑의 정신은 실존적으로 거부를 당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삶과 거룩함(Life and Holiness)》이란 책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공감(empathy)’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과 필요에 대하여 견지해야 할 신앙의 태도가 단지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공감과 더불어 긍휼(compassion)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안토니우스의 긍휼의 삶

   긍휼이란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심지어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긍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긍휼이 시작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됨으로써 마음이 요동하고, 마침내 그들을 도와줄 방도를 찾아 움직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긍휼은 단순히 인식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공감과는 구분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감(imitatio Christi)’이란 덕 안에서 긍휼의 삶을 살았음을 보게 된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음을 받으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ca.35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수도생활을 위해 이웃들을 등지고 사막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사회와 단절되지 않았고 긍휼이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가 기록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The Life of Antony)》가 증거 해주고 있다. 그 한 예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그들[각주:1]은 안토니우스에게 자신들을 방문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단지 그를 보기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그들에게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매달렸고 심지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산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군대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탄식과 필요를 보게 되자 안토니우스의 마음은 요동했고 마침내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안토니우스의 애씀은 무위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당도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과 혜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84장

     안토니우스의 초미의 관심은 금욕 생활을 통한 영성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웃들의 필요와 슬픔 앞에서는 자신을 위한 그 굳은 갈망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안토니우스의 수행은 영적인 엑스터시(ecstasy) 체험이나 사막의 수실(壽室)과 수도공동체에서만 인정받고 통용되는 갇혀버린 창백한 영성이 아니라, 이웃의 눈물 앞에서 마음이 요동하며 자기 신앙의 어젠다(agenda)를 내려놓게 되는 열리고 살아있는 영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수행의 삶을 위하여 사람들을 피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홍해 인근 깊은 광야로 들어갔지만, 그 후에도 안토니우스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찾아 그를 만나러 왔고 또 자신도 간혹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행의 삶이 얼마나 이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그의 초기 수행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또래 사람들에 대하여서 경쟁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도덕함양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했던 연유는 다른 사람들 아무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로 인해 기쁨을 누리게끔 하려는 데 있었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4장.

     사실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안토니우스의 이웃을 향한 긍휼의 삶에 주된 초점을 둔 책은 아니다. 당시 기독교 내부에서 가장 큰 쟁점의 대상이었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견제 및 대항적 요소가 곳곳에 배어있고, 또 안토니우스의 삶에 대한 소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전형 및 수도자들의 본을 제시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후일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인물의 영성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책 안에는 금욕적 삶을 기반으로 기도에 매진하는 일, 영을 분별하며 사탄을 대적하는 일,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필요와 고충을 해소시켜 눈물을 닦아주는 일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영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일인지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고 권정생 선생은 이렇게 얘기한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서울: 녹색평론사, 2008), 20).



공감을 넘어서

     큰 교회를 목회한다고 해서, 신학지식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고 해서, 영성 훈련을 몇 가지 알고 받았다고 해서, 영성 관련 책자들을 접하여 새로운 지식이 생겼다고 해서 이웃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긍휼이 없어도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긍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예수의 길이 바로 다름 아닌 긍휼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영적 활동들 중의 하나인 기도의 삶과 긍휼의 삶의 연관성을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 어린 그리스도와의 좀 더 깊은 연합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 고통을 만난다. 섬김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 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 《긍휼(Compassion)》(서울: IVP, 2002), 188.   

지난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이웃의 고통에 공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또 한 번 우리나라 교회가 수모를 당하였다. 이웃에게 공감할 줄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감의 언덕을 넘어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긍휼이야말로 성육신과 십자가란 예수의 길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기도하는 일, 목회하는 일과 이웃의 눈물을 공감하며 도움의 발걸음을 내딛는 긍휼의 길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긍휼의 사람은 참척을 당하여 눈물 흘리는 이웃에게 소위 하나님의 섭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손수건 한 장이라도 건네는 사람일 것이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는 안토니우스, 그는 예수의 길, 긍휼의 길을 옹골차게 살아내었다.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자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87장.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재판관들을 가리킨다. 당시 안토니우스를 찾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고, 이들 때문에 사실 그는 자신의 수행 생활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산 바깥으로 이끌려 나가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재판관들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그런 요청을 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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