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윤동주의〈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과 관련된 시 두 편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입니다.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오던 그가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입니다.[각주:1] 그리고 그 중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시인은 '슬픈 사람 = 불행한 사람'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있는데, 이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봅시다. 먼저 영어 원문으로, 그 다음에는 서투르지만 저의 한국어 번역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 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모든 오랜 상흔과 한 조각의 비탄을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유를 위해 놓아 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화석이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 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으십니까? 저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 앞에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지요.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납니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합니다. 



    그는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빛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됩니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가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상처가 양분이 되어 우리가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지워져 있습니다. 이 시는 윤동주의 〈팔복〉입니다.


팔복 (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매우 충격적입니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곧,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을 새로 써넣었습니다. "오래"와 "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 자필 원고.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 12월 경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입니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입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는 한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벗어나려고 파닥거리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쉽니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나[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위로〉 3연.


재미 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의 행동이 없습니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구절을 뒤집은 〈팔복〉은 시인이 거미줄을 뒤헝큰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슬픈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과 같은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와 〈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입니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에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참고로 2부 "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 "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애기의 새벽 (윤동주)

한 줄 묵상 2012.09.28 17:42
  • 좋네요. 특히 "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이 맘에 크게 와닿습니다.

    새결새김 2012.09.29 00:41 신고
  •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비난하고 나 자신을 보면서는 체념하기는 했지만, 윤동주님처럼 아기처럼 나릉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울지조차 못하는 나의 마음의 단단함을 봅니다. "울게하소서 내 가혹한 운명을 두고....순교자들이여 나가 자비를 입도록 기도해 주소서..." 헨델의 어느 오페라 아리아의 한 대목이 맘 속에 울립니다...

    새결새김 2012.09.29 00:59 신고
  • 한 가정 안에서의 아기의 울음과 고난받던 민족의 삶을 하나로 바라볼 수 있던 마음의 눈을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울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BlogIcon 작은소리찾기 2012.09.30 02:35 신고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938년 경

윤동주 (1917-1945), 《정본 윤동주 전집》(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96.



  

이 시에 나오는 우리집은 닭 한 마리도 키울 능력이 없는 매우 가난한 집이다시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이처럼 가난하고문명도 뒤처져있지만 우리집에 있는 것이 있다그것은 우는 애기이다우리집에 새벽이 오는 것은 시계가 울리기 때문이 아니라닭이 울기 때문이 아니라애기가 배고프다고 울기 때문이다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새벽이 되면 애기가 젖달라고 운다라고 써야 한다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애기가 젖 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새벽이 된다고 노래한다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울 때 찾아 온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가난하고 낙후된 우리집은 일제 식민지 시대 힘없고 약한 우리 나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새벽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애기는 당시 힘이 없던 한국인이다흥미로운 것은 윤동주 시인은 우리집의 새벽곧 조선의 독립은 한국인들이 울 때 온다고 노래한 것이다시편 137편에 나오는 것처럼 울음은 단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다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이며 호소이다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다울어 보지 못한 사람은 위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4)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