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사랑처럼 : 대림절 그리고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대림절(Advent). 기다림의 계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기다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전화나 편지를 기다리고, 용돈날이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교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그 외에 모든 이들은 어떤 좋은 소식을, 또는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특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탄절이 있다.


저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성탄절을 과거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로 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늘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탄 절기 속에 새겨진 기억과 기다림은 마치 급행열차 같아서 ‘과거’에서 출발해서 ‘미래’를 향해 달릴 뿐, ‘현재’라는 역은 요란한 소리와 먼지만 남긴 채 무정차로 통과해 버리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과거에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미래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 사이에서 매년 반복되는 대림절과 성탄절은 올해도 바쁜 연말의 일상 속에서 연말 풍경의 하나로만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교회와 백화점에는 성탄 장식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데, 대강절은 별다른 감동 없이 내 삶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Photo by Gustavo Ampelio di Borgogna



기차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작품 중에 〈사랑스런 추억〉이라는 시가 있는데, 1연이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1연의 시간적 배경은 초봄이고,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다. 이 부분만 보면 시인이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아니다. 5연에 이르면 시인은 동경에 있고, 계절 또한 봄이 끝나는 때임이 나타난다.


봄은 다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동경의 릿쿄(입교)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이 시 〈사랑스런 추억〉을 썼고, 시의 제일 마지막 줄에 “5월 13일”이라고 시를 쓴 날을 분명히 적어 두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현재 일본 동경의 조그만 하숙방에 있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이른 봄 아침에 서울의 한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자신을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낯선 남의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시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이 배어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의 추억 속에 “옛 거리에 남은 나”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6, 7, 8연은 아래와 같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시인의 몸은 이미 서울을 떠나 동경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옛 거리에 남은 나”가 있어, 그가 오늘도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비논리적인 진술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시인이 지금 과거의 나를 추억하고 있고, 과거의 기다림이 오늘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연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리던 ‘초봄의 나’를 5연에서 ‘늦봄의 나’가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곧, “희망과 사랑”이 ‘과거의 나의 기다림’과 ‘현재의 나의 그리움’을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기다림은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리움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기억과 기다림은 현재를 무정차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현재라는 역에 분명히 정차하고 있다. 그래서 “옛 거리에 남은 나”는 빛바랜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추억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 청년 윤동주가 기다리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기차를 기다렸지만, 기차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올 “누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가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는 그 “누구를”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다. 그 희망과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시인은 자신을 희망과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에는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바란다. 그리고 사랑이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던 “누구”는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누구”는 어떤 특정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재 함께 있지 않은 가족과 친구도 될 수 있고, 암울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근원적인 그리움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난다고 해서 완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고백록》의 첫 부분에 쓴 것처럼, 우리의 모든 그리움의 종착역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각주:1]





벌써 대림절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 천여 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천사는 들의 목자들에게 오늘 구세주께서 너희에게 탄생하셨다[각주:2].”(눅 2:11)라고 전했다. 물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시고 육체적으로는 이 땅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마치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를 쓸 때, 일본에서 공부하던 윤동주의 몸이 서울이나 북간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번 성탄절에도 우리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실 수가 있지 않을까? 오신 주님, 그리고 오실 주님을 향한 깊은 그리움 속에서 마굿간과 같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 아기 예수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의 아기 예수, 미래의 재림주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태어나시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그리스도를 출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모습 속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과 사랑처럼” 그분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고백록》, Book I, i (1). [본문으로]
  2. born to you / ἐτέχθη ὑμῖν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의 생일(성 바실리우스)

한 줄 묵상 2014.12.29 14:24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의 생일이다.

 - 성 바실리우스(St. Basilius the Great, 29-379)On the Nativity of Christ (PG 31:1473A), 칼리스토스 웨어, 《정교회의 길》(서울: 은성, 1999), 109쪽에서 재인용. 

그리스도는 최초의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분의 탄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본성의 진면목을 온전히 이루실 첫 인류의 탄생이다. 그로인해 모든 사람은 그분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따라 지음받은 본성대로,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의 생일이며 인류 역사상 일어난 사건 중 가장 기쁜 날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에서 하나님 닮음(likeness)으로의 영적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그리스도의 탄생과 가치의 전복 (김교신)

한 줄 묵상 2014.12.20 13:18

성탄일은 벌써 조선에 있어서도 명절화하였습니다. 신자도 이 날을 축(祝)하고 불신자도 이 날을 하(賀)합니다. …… 이 날을 축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위 있는 자를 그 지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낮은 자를 높이셨고..." (눅 1:51-52).


마리아가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미한 것은 단지 평화의 신, 자비의 신인 연고가 아니었습니다. …… 예수의 탄강은 인간 가치의 총 전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인생의 갈구하던 행복의 표준이 전도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탄강으로 말미암은 이 변혁과 이 척도의 전도(거꾸로 넘어짐)에 능히 견딜 자가 누구입니까? 성탄을 축하하는 자에게 깊은 생각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김교신 지음 (1901-1945), KIATS 엮음,《김교신》(서울: 홍성사), 47-49.


그리스도의 탄강(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오후.

김교신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단순히 '평화와 자비'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가치를 '뒤집기'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내가 꿈꾸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전복되어야할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의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무너져야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떠들석하고 분주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탄강(탄생)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믿는 그 가치를 분별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탄강(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오후, 

그 전복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심히 무겁다.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하늘을 향해, 또 땅을 향해 (조지 허버트)

한 줄 묵상 2013.12.26 11:49

"한 인생은 육체를 입은 채 땅을 바라보고, 

다른 인생은 그 분을 향해 있다." 


-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The Works of George Herbert in Prose and Verse (New York: John Wurtele Lovell, 1881), 172.



이것은 조지 허버트의 <골로새서 3:3>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시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육체를 입은 채 땅을 바라보며 동시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래,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동시에 땅에서 사는 존재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였지만 가장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다. 가장 높은 자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로서 삶을 사셨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렇게 성탄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가장 높으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가장 높지만 가장 낮은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문과 초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높은 것도 지극히 낮은 것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낮음에 처한 자로서의 겸손과 순종함도 없이, 또 높음에 대한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성탄은 예수와 더불어 높은 곳에--"하늘에"(엡2:6)--올려진 우리에게, 너희도 가서 낮은 이들의 발을 씻겨 그들도 왕의 자녀가 되게 하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내가 너희를 높여주었으니 이제 낮은 곳을 찾아가라는 초대이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초월하며 살라는 초대이다.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왕으로 오신 예수 (안토니의 생애)

한 줄 묵상 2013.12.24 22:49

안토니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답장을 썼고 아울러 구원에 관한 일을 조언했다. 즉 현실 세계의 일들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장차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 한 분만이 참되고 영원한 통치자이심을 깨닫도록. 그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며 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를 간청했다. 그들은 안토니의 답장을 받고 기뻐했다. 그래서 안토니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모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81.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아들들이 사막 수도승인 안토니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을 소개해 주고 있다.


제국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임을 일깨워 주는 진정성이 담긴 조언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안토니에게는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는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이 마땅한 일이었나 싶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며 되새기는 12월25일!


우리의 기쁨 만큼 정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또한 솟구치는 성탄이 되었으면!


 임택동

(오래된 오늘)


posted by 오래된 오늘

크리스마스의 기적 (W.H. 오든)

한 줄 묵상 2013.12.06 13:19

죽을 인생에 절실한 건 기적. 

영원이 시간 속 사건이 되고

무한이 유한한 사실이 되는 것이 어찌 가능할까. 

가능한 일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나니. 

죽을 인생에 절실한 건 기적. 


We who must die demand a miracle.

How could the Eternal do a temporal act,

The Infinite become a finite fact?

Nothing can save us that is possible:

We who must die demand a miracle.


W. H. Auden, FOR THE TIME BEING, 'A Christmas Oratorio'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적. 


그래서 주신

'크리스마스의 기적'.


예수님은 '기적'이시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기적. 


이 기적을 믿고

영의 눈이 열려

이 세상을 있게 하고

너와 나를 있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알아보고 

오늘도 다시 살게 하소서. 

기적처럼.


/ 대림절 첫째 주.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위-디오시니우스와 성탄절

한 줄 묵상 2012.12.14 12:51

우리는 보다 높이 올라가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분[각주:1]은 영혼이나 정신이 아니다. 또한 상상력, 확신, , 또는 이해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말 그 자체도 아니며, 이해 그 자체 아니다. …… 그분은 긍정(assertion)과 부정(denial)을 넘어선다.”


위-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 5세기-6세기 경 활동), The Mystical Theology

Ch. 5 in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Mahwah, NJ:Paulist, 1987),141.


고대 영성가 위-디오니시우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모두 버려 두고서 부정을 통해서상승하여, 더 나아가서 '긍정과 부정을 모두 초월하여' 완전히 하나님에 속한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고 가르친다. 부정, 상승 그리고 엑스타시 (ecstasy).’ 이렇게 이르는 하나님과의 합일(unity). 


그가 말하는 '부정'영적상승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이 부정은 그런 부정 자체를 거부하고 초월하는 것이다그게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그 분이 생각이 난다당신이 누릴 영화를 다 포기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엑스타시로 다시 아버지와 합일되신 예수님. 대강절 보내고 있는 오늘 그 분이 생각난다.


그분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부정을 우리가 배울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통해 주님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될 때,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참으로 알게 되리라! 나무잎사귀


 

  1. 원어에서 3인칭 대명사로 되어 있는 '그것'은 문맥상 모든 개념적인 것들의 최상의 원인(the supreme Cause of every conceptual thing),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 편의상 '그분'이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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