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있어 진지함을 견지한다면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러한 참된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미국 코네티컷주 이스트 윈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목회자였지만, 그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목사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였다. 에드워즈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는데, 이것이 그가 신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적으로도 매우 총명해서 불과 13세에 당시 새롭게 문을 연 지역 대학(현 예일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그는 존 로크의 사상과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졸업 후 에드워즈는 외조부가 목회하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햄턴 소재 회중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으며, 외조부가 사망한 1729년에는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부흥을 목격했다. 먼저 그가 목회하던 곳에서 사람들이 악습을 개선하고 청년들이 회심하면서 교회가 부흥했다. 그리고 부흥의 불길은 인근으로 번져서, 1734년에는 코네티컷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1740년에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부흥의 불길에 휩싸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부흥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앙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저서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은 그러한 그의 경험과 탐구에서 나온 설교들을 모은 책이다. 



부흥의 시대와 분별의 필요성

    에드워즈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신앙 감정을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과 결부시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결합을 통해 성령 체험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한 방법들을 탐구했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미덕과 거룩함을 구별해 주는 표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부는 감정의 본질과 중요성을 다룬다. 이어서 제2부는 신앙 감정과 관련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판단근거가 될 수 없는 열두 가지 표지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제3부는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고 보여주는 확실한 열두 가지 표지들을 다루고 있다. 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춰보자. 오늘날 우리는 ‘영성’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덕목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 때를 살고 있다. 바야흐로 ‘영성이라는 말’이 부흥하고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참된 신앙’을 분별하려고 노력했듯이, 지금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의 참된 신앙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거룩한 감정

    에드워즈에게 있어 중요한 신학적 명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147)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안에 ‘지성’(understanding)과 ‘성향’(inclination)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다고 이해했다. ‘지성’은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말하며, ‘성향’은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기능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향’이 ‘행동’과 관련되면 ‘의지’(will)가 되고, ‘정신’(mind)과 관련되면 ‘마음’(heart)이 된다. 그리고 ‘마음’이 뚜렷하게 움직일 때 이를 ‘감정’(affections)이라고 부른다.(149) 


    그렇다면 이 감정이 왜 그리 중요할까?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행동의 근원이 바로 감정이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이 감정 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속한 일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에 생생하고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곧,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은 믿음에 관한 일이 감정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믿음은 이러한 거룩한 감정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가 “대체로”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모든 감정을 긍정하거나 반대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였다. 대신 그는 감정들을 잘 구별하여, 그 중에 참된 감정을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앙 감정을 분별하는 판단근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 자신이 경험한 부흥운동을 통해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는 표지들(signs)을 제시하였다.



거룩한 실천 : 표지 중의 표지

    이 짧은 글 안에 에드워즈가 말한 모든 표지들을 모두 다룰 수 없기에, 필자는 그 중에 마지막 항목인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드워즈는 앞선 열한 가지 표지들을 실천의 개념으로 재조명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다른 모든 표지들을 검증하는 최후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표지 중의 표지요, 최고의 표지이다. 그는 실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참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크고 확실한 표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은혜의 모든 표지 가운데 최상의 표지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567) 


    에드워즈는 부흥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을 통해 변화를 보인 후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실천의 지속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실천이 지속되어 질 때 우리는 그 마음의 동기를 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직접 보시지만, 사람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실천의 내용이 동기와 함께 연결되어있어야, 참된 은혜와 참된 신앙을 거짓된 것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단순히 실천을 했다고 해서 그의 내적인 동기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실천이 내면의 성향을 모두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으로 볼 수 없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는 몸의 행동과 영혼의 행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신앙이 참된지 아닌지를 분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천을 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는 당시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내적인 체험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한 체험이라고 주장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부분은 영적인 실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작용들에는 영적인 실천을 하고자 하는 체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실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체험적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지 않다. (626)



이신칭의와 영적 실천

    그렇다면 실천에 대한 강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와 부딪히지는 않을까? 개신교인들이 흔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주저하는 이유는 이러한 강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행위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의 가치로움이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상쇄하는 것으로서 여기시지 않으시며,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야 할 이유로 여기시지 않는다.(631)


    이처럼 실천은 은혜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를 증명하는 표지다.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한다면,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이신칭의론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 된다. 더욱이 에드워즈는 오히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의 말씀 뒤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약속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배우고 본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 여러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면서, 성경은 이신칭의와 실천의 필요성을 연결하고 있기에 서로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증거할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실천]을 경시하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적이요, 옛 언약에 속한 방식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또한 실천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작용들과 효과적 역사를 무시하고, 철학이나 체험에서 얻은 명상으로 은혜와 양심의 내적 작용들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과 바르게 구별하는 능력만 믿고 거의 전적으로 깨달음과 이런 내적 작용들의 방식과 방법만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경건의 표지로서 성경이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고, 가장 자주 강조하는 것들 외에 어떤 더 나은 또는 더 높은 수준의 표지를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636) 



신앙 감정과 영성 목회

    오늘을 사는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영성이란 무엇일까? 영성이란 단어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영성이란 단어를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영성을 ‘개인적인 기도생활과 방법’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교회의 기도원들이 영성훈련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성에 대한 이해는 영성을 극히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개신교 영성학자 조셉 드리스킬(Joseph Driskill)은 개신교 영성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회참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영성이 자기 자신의 사적인 영적 추구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고 바른 기독교 영성이라 하기 어렵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약 지금 생존해 있다면, 참된 영성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조언할까? 에드워즈에게 있어 신앙 감정은 그저 뜨겁게 찬양하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구하도록 이끌고, 더 나아가 실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 감정은 행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그러기에 참된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 우리의 영성을 살펴보면, 영성은 그저 기도 생활의 한 방편이나 바쁘고 지친 현대의 삶에서 우리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라고만 할 수 없다. 특히 개신교 영성은 이신칭의의 믿음을 작은 예수의 삶으로 살아내는 참된 신앙의 요체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성 목회란 목회자가 회중 안에 한 순간의 ‘뜨거운 감정’을 부추킴으로써 교회의 외적 부흥을 만들어 내려하는 기술이 아니라, 교인들이 참된 신앙으로 세상에서 지속적인 실천의 삶을 살아가도록 목회자 자신이 먼저 ‘거룩한 감정’을 품고 함께 걷는 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권철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기독교 영성)에서 수학하였고, 현재는 미국 유마장로교회 담임목사이다. 《백투더클래식》을 공저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해왔습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2월 호에 실린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11.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지난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국토의 곳곳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여러 언론들은 광복 직후의 낙후된 모습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잠시 감격에 젖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 팽팽한 군사적 대치는 온 민족을 다시 ‘오래된 위기’로 몰아넣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계기로, 북한은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고, 남한은 전면전 돌입을 경계하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비록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서 긴장이 평화적으로 완화되고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전쟁을 그저 ‘쉬고 있는’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더욱 더 이웃나라 중국은 지난 9월 전승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으로 자국의 군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전쟁 참여를 금지하는 ‘평화헌법’ 수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정세는 뜨거운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처럼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무엇이라 설교해야 할까?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비밀스러운 공개편지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Cold War Letters)는 일종의 ‘목회 서신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목회(牧會)는 좁은 의미에서 한 목회자가 특정한 교회를 맡아 회중들을 지도하는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한 영적 지도자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관한 지혜와 권면을 전달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의 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도 이렇게 편지를 통해 영적 지도를 행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약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쓴 111통의 편지 모음집이다. 49통의 편지를 모은 첫 번째 묶음은 1962년 4월에 나왔고, 거기에다 62통의 편지를 추가한 두 번째 묶음은 1963년 1월에 나왔다. 모두 등사되어 스프링으로 제본된 형태로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그런데 갖가지 통신, 인쇄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중반에 이렇게 머튼이 ‘편지’와 ‘등사’라는 수단을 활용하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은 베네딕트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Trappist)의 수도자였다. 그는 1941년 12월 미국 켄터키의 겟세마니 수도원(Abbey of Gethsemani)에 들어간 이후, 줄곧 수도원 안에서 침묵과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젊은 수도자 머튼은 수도원 담장을 넘어 매우 영향력 있는 영성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서전 외에도 기도와 영성 생활에 관한 에세이집과 시집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그의 글에 감명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엽서와 편지들이 수도원으로 날아들었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수도원 안에 살던 머튼에게 ‘편지’는 친구들과의 소통이나 영적 지도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이유는 머튼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공적으로 출판하는 모든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침묵을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의 당시 장상(長上)들은 머튼이 영성 생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장려했지만, 정치적 이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머튼은 1961년 이후 전쟁과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가톨릭계 간행물들[각주:1]에 기고하였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트라피스트 수도회 총장 가브리엘 소르떼(Dom Gabriel Sortais: 1902-1963)는 마침내 1962년 4월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에 관한 주제로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정식 출판된 책이 아닌, ‘등사된 편지 묶음’이라는 형태는 머튼이 장상들의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수도회의 검열을 피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이었다. 사실 검열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오던 머튼은 공식적인 출판 금지 지시가 내려지기 이전인 1961년 말부터 자신의 편지들을 ‘비밀스러운 공개편지’로 유통시킬 계획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냉전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2006년에야 정식 출판되었다. 또한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 모음집인 《기독교 이후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역시 1962년 4월에 완성되었지만, 등사본으로 읽히다가 그의 사후인 2004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각주:2] 

 

긴급한 위기

그렇다면 머튼은 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을까? 그의 “냉전 편지들”은 역사적으로 “베를린 위기”(Berlin Crisis)가 일어난 1961년 10월부터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있었던 1962년 10월 사이, 곧 군사적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 졌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소련 사이에 일어난 군사적 대치로, 두 강대국은 서로를 향해 포문을 열고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행히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 Kennedy)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냉전’(cold war)이 실제 무력을 사용하는 ‘열전’(hot war)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한 제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전 세계를 휘감았던 시기였다. 머튼은 당시의 위기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는 1961년 12월 런던의 한 대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사실상 도덕적 붕괴에 이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국가의 정책은 거의 노골적으로 멸망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운명론적인 무관심으로 수용하거나, 무책임성과 수동성 속에서 무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해왔다는 사실입니다.(9)[각주:3]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핵미사일을 운송하는 소련의 군함과 그 위를 비행하는 미군 항공기. Image from Wikipedia.org베를린 위기 당시, 베를린의 찰리 포인트에서 동독군과 대치중인 미군 탱크. Image from Wikipedia.org

머튼이 느낀 위험은 일차적으로는 핵폭탄,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여긴 것은 그러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다루는 인간들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책임한 태도였다. 호전론(戶錢論)자들은 소련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과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머튼은 무기 산업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의 무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고 있습니다. …… 무기가 우리를 분노하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손가락을 [미사일 발사] 버튼 위에 올려 두고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17).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자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교부 신학이나 전례 등에 대한 작은 문제들에만 신경을 쓸 뿐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5). 그래서 머튼은 지금 서구 기독교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추상적인 형식”(8)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불확실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3). 이러한 사실들이 그로 하여금 긴급히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머튼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수단을 다하여 전쟁을 폐지하고,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 자신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임을 확신하였다(2).


새로운 길을 찾아서

머튼은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 영적 관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는 호전론자들이 “공산주의는 악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비도덕적이고 세속적일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기독교적임을 폭로하였다(6). 구체적으로 머튼은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 또는 그가 속한 무리의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악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형제자매가 아닌 죄인과 악당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향한 우리의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11). 나아가 그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아내이며,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제수였던 에설 케네디(Ethel Kennedy)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입니다. ……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옳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육신을 입은 악마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거대한 환상입니다.”라고 말하며, 증오와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상대편을 진실하게 직면할 것을 역설하였다(10). 곧, 머튼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할 것은 상대진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쟁의 뿌리가 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과 증오라고 믿었다.[각주:4] 

     머튼의 이런 견해들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부의 정책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충(不忠)한 국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면적인 핵전쟁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튼은 비록 콜롬비아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잠시 기웃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가 교회와 자유세계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임을 지적한다(32). 또한 그는 전쟁에 저항하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운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도 경고하였다. 구체적으로 머튼은 평화운동가인 제임스 포리스트(James Forest)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비폭력운동에 공격성과 도발성이 은밀히 내포됨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으며(31), 평화운동가가 행동주의(activism)의 파도에 휩쓸리면 또 다른 종류의 “대중적 인간(mass-man)”, 곧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69). 이와 같이 머튼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거칠고 무분별한 평화운동은 전쟁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추구하였을까?

     이처럼 당대의 문제를 도덕적 위기로 파악했던 머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도덕원리를 세움으로써 전면전을 피하고 전쟁 폐지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분열과 대치를 해결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기독교 인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머튼이 주장한 “인간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8) 이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바탕을 둔 비인간적인 “정글의 법칙(jungle law)”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자연의 법칙(natural law)”에 따라,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자연적 본성’(nature)을 지닌 형제자매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태도이다(11).

     물론 머튼은 자신이 정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구처럼 그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자유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전한 중도(sane middle path)를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32) 그런데 이때의 ‘중도’는 보통 정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또는 회색주의자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머튼은 《냉전 편지》를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을 맡아 주었던 윌버 페리(Wilbur H. Ferry) 민주제도연구소(Center for Democratic Institutions) 부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제가 시도해온 것은 기본적인 도덕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덕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심각하게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원칙 말입니다.”(48) 또한 그는 다른 편지에서 “제3의 위치, 통합의 위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정치적인 신조와도 상관없는 새로운 위치이다.[각주:5]  


‘행복을 주는 약’을 버리라

로널드 W. 드워킨(Ronald W. Dworkin)은 《행복의 역습》(Artificial Happiness, 2006)이라는 책에서, 1950년대 이후 미국의 교회는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적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설교하기 시작했는데(‘행복’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조가 대표적 예이다),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늘날 종교를 ‘정신작용약물’을 사용해서 ‘인공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의료산업과 비슷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고 논증한다.[각주:6]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당시 기독교 매체와 교회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면서도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믿음은 그저 “행복을 주는 약(happiness pill)”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3). 

오늘날 우리 한국의 설교단과 서점 진열대도 “행복을 주는 약”들이 오랫동안 점령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 한국 교회의 도덕적, 영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비록 반세기 이전에 쓰여 진 것들이지만, 시대의 도덕적 영적 위기에 대한 그의 통찰과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머튼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영적 갱신에 달려있습니다. 이 갱신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며 심원한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갱신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입니다. 이것은 그 위기들을 내적 의의와 인간의 성장과 인간 세계에서의 진리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69)


분명히 기억해야 것은 ‘영성 목회’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목회자와 회중의 만족을 위한 ‘행복을 주는 약’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설교자는 당면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약’을 던져 버리고, 정치적 좌우를 넘어서는 도덕원칙, 통합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긴급한 의무가 있다. 그래야 영적 갱신이 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글쓴이 : 권혁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Ph.D. Candidate(Graduate Theological Union, 기독교 영성학). 《백투더클래식》을 편저하였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1월 호에 "도덕적·영적 관점에서 본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열한 번째 글입니다.


  1. 1. 대표적인 매체로는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가 이끌던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s)가 있다. 도로시 데이는 비폭력 사회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생전에 머튼과 데이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냉전 편지》에도 머튼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2통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2. Cold War Letters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는 분도출판사에서 《머튼의 평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 3. 인용문은 필자가 Cold War Letters (Orbis, 2008)에 수록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며, 괄호 속의 번호는 냉전 편지 번호이다. 토마스 머튼은 《냉전 편지》를 직접 편집하며, 각 편지에 배열 순서대로 번호를 달아 두었다. [본문으로]
  4. 4. 머튼은 그의 책,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16장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에서 이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5. 5. Thomas Merton, The Courage for Truth: Letters to Writers (Harcourt Brace & Company, 1994), 54. [본문으로]
  6. 6. 로널드 W. 드워킨, 《행복의 역습》(아로파, 2014), 220-222.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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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고, 내가 피할 곳이 없고,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내가 받은 분깃은 주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42:4-5, 표준새번역)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씀을 근거로, 한국 개신교회는 예배, 소그룹, 심방, 성경공부, 봉사와 교제 등의 형식을 통해 다양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목회자 또한 이런 기회들을 통해 성도들을 만나며, 그들의 영적 상황을 확인하며,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도들은 영적인 갈급함을 해갈하지 못하고, 시편의 기도처럼 외로이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 듯하다. 성도들은 영적으로 인도해줄 사람을 찾으며, 진정한 만남을 통한 영적 교제를 갈망하지만, 우리의 목회 사역이 성도들의 다양한 영적 필요를 채우고,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상황이 한국 개신교회 현실이다.


    유태인 신학자요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명제, “모든 실재적 삶은 만남이며, 나와 너가 만나 소통하며 교제함으로 내가 완성되며, 실현된다.”[각주:1]는 한 영혼이 하나님과 전인적 만남을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존재와 존재의 전인적 만남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의 그림자이며, 하나님 임재 경험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목회자는 성도와의 만남, 교제와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안내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한 영혼의 삶 한 가운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과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자가 목회자이며 성숙한 평신도 사역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혹은 사역자는 본질적으로 영적 지도자(spiritual director)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영적 대화는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필수적인 목회 돌봄 사역이다. 목회 돌봄에서 영적 교제와 대화의 중요성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꾸준히 강조되어 왔다. 영적 교제와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존 카시안(John Cassian, 약365-435 AD)을 통해 영성 목회 규칙으로 세워갈 만한 건강하고 바람직한 영적 대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존 카시안의 <담화집>

존 카시안은 서방 교회에 동방 교회의 수도 영성을 최초로 소개하고 확립시킨 성인으로 기독교 영성 전통에 알려져 있다. 동방 교회, 특히 이집트 지역에 산재해 있던 사막 교부와 수도 공동체를 탐방하여 수도자 혹은 은둔자들과 나눈 대화와 인터뷰를 기록한 ‘담화집’은, 카시안이 기독교 영성사에서 미친 결정적인 공언이 되었다. 그의 <담화집>은 두 가지 측면에서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적 지침서가 되고 있다. 첫째, <담화집>의 기본적인 구성은 수도자 혹은 은둔자가 영성 수련과정 속에서 경험된 시행착오와 오류를 통해 깨달은 바를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단적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영적 독선과 교만을 미연에 예방하는 영적 기술로서 영적 교제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영적 경험을 성경의 이해와 신학적 고백 안에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동행자들과의 영적 대화와 소통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각주:2] 


    둘째, 담화집의 두 번째 주제인 분별에서, 카시안은 50여 년을 수행한 한 은둔자가 사탄적 환영(satanic illusion)에 빠져 시험에 드는 예를 든다. 영적 동반자 없이 오직 독거와 은둔을 통해 영적 균형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수행의 오류를 기술하며,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영적 스승과의 대화와 소통을 영적 식별의 도구로 삼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담화, 제 5장) 


    <담화집>에서 영적 대화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기도에 관한 대화 (열 번째 담화, 제 8장)에서 한 수도자는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다시 온 이유는 지난 번 대화가 우리를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이 경이로움은 더욱 커져갔죠. 당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온전한 복에 대한 열망의 불꽃을 불붙여 주셨습니다.” 영적 멘토 혹은 영적 지도자와 대화가 수도자의 마음에 성령의 뜨거운 임재와 역사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영적인 갈망이 더욱 심오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후, “골방에서 기도하는 동안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을 당신에게 말씀 드릴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 대화를 통해 영적인 자각과 깨달음을 경험한 수도자들은 자신의 기도 시간에 떠오른 여러 마음의 정보들—기억, 내면의 상처, 아픔, 상상, 그에 대한 분별 등—을 발견하고 사막교부인 영적 지도자에게 찾아와 그 경험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들의 영적 여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영적 정보와 내적 변화를 표출해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영적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성도들이 어떻게 영적 경험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영성 고전은 영적 대화법에 어떤 목회적 지혜를 선사해주고 있는가? 한 영혼을 변화와 성장으로 이끄는 영적 대화 방법은 어떤 요소들을 담고 있어야 할까? 영적 대화법의 구체적 내용을 그 목표와 기본적 전제를 확인하면서 파악해보도록 하자. 



영적 대화의 씨줄과 날줄

이 대화법의 궁극적 목표는 영혼과 영혼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고백하는 데 있다. 이 대화의 주된 대화자, 말을 걸어오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며, 목회자/사역자는 영적 대화를 통해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한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대한 뚜렷한 믿음과 영적 민감성이 갖추어질 때, 목회자는 각 영혼을 주님의 임재로 인도하게 된다. 성도의 영적 갈급함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고, 그를 통해 치유와 회복과 분별로 이끄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사역이 영적 대화법 안에 전제되어 있다.


1. 경청하기 : “영적 대화의 시작이자 마지막”

경청은 기도와 대화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첫 번째 반응이다. 성도가 대화 가운데 전달하는 정보의 영적 의미를 파악한다. 이 때, 언어적 표현뿐 아니라, 표정, 눈,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에도 집중함으로 경청한다. 경청해야 할 내용은 이야기와 경험이 담고 있는 내면 정서와 영적 상태이다. 따라서, 성도와의 대화는 그들의 영적, 개인적, 내적 고민과 아픔을 토로하도록 도와주어, 성도의 영적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감정들을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판단이나 심판자적 위치에서의 언행은 삼가하고, 공감, 위로, 격려의 표현을 통해 성도의 친구가 되어주길 자처한다. 영적 대화 사역에 있어 침묵 훈련은 필수적이다. 침묵 기도를 통해 주님의 임재와 인도를 수련해온 목회자는 대화 가운데 침묵을 견뎌내며, 그 침묵 속에서 주님이 성도의 영혼 가운데 일하시고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에 경청을 훌륭하게 실천하게 된다. 

대화에서 목회자는 이성적 언어보다 감성적 언어로 반응하고 대답한다. 성도의 고민과 고통, 영적 여정에 있어서의 어려움 등을 감성의 언어로 표현해 낼 때, 성도는 안전함과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며 보다 깊은 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청자로서 나의 역할이 소극적으로 느껴질수록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은 더욱 적극적으로 경험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서두르지 않기 :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 3:30)

성도들은 대체로 처음부터 자신의 연약한 부분까지 목회자에게나누지 않는다. 작은 부분을 나눈 다음에 안전하다고 느낄 때 또 다른 근심을 나누고, 이를 통해 신뢰가 구축되면, 더 깊은 내적 상처와 수치심에 관련된 경험들을 나눈다. 이 때, 사역자의 자의적 해석과 판단에 근거한 반응은 성도의 마음에 오히려 상처를 주게 되고, 대화의 통로를 닫아버리게 된다. 기다리는 시간은 내 의도와 욕구를 내려놓는 시간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를 내려놓을 때,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또한 성도의 문제를 내 지식과 경륜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야 컴플렉스’도 내려놓아야 한다. 내 의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주님의 임재와 일하심에 대한 영적 의존성과 영적 민감도가 향상된다. 


3. 나의 필요 내려놓기 : “사역자는 문제 해결사가 아니다.” 

목회자가 성도와의 대화에서 범하기 쉬운 실수를 최소화 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대화를 통해 성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 깨닫도록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영적 대화의 핵심이다. 성도가 자신의 문제와 한계를 깨닫고 기도의 자리로 옮겨 가도록,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의지하도록 이끄는 것이 영적 대화의 목회적 목표이다. 둘째, 대화가 토론으로 바뀌지 않도록, 영적 돌봄과 영적인 환대와 격려, 치유와 회복을 위한 동행과 공감으로 채워져야 한다. 세째, 상황의 정확한 이해를 위한 질문을 필요하나, 성도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는 질문은 삼가해야 한다. 성도가 전달하고자 하는 영적 정보의 핵심은 대화 마지막에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성경 구절을 급하게 인용하는 것 또한 신중해야 한다. 성경의 부적절한 인용은 성도에게 판단 혹은 심판받는 느낌을 줄 수 있고, 동행의 관계를 보혜사 입장이 아닌, 상하구조, 혹은 권위주의적 관계로 변질시킬 수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꾸중드는 학생들은 절대 자신의 진심을 선생님에게 표현하지 못한다. 



4. 성도의 필요 우선하기 : “대화의 수혜자는 성도이다.”

성도의 내면과 감정의 근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성도의 내면과 영적 상황을 진단하는데 중요한 정보와 기술을 제공한다. 감성언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들의 주관적 세계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경험과 그에 대한 해석을 들어주는 것이 영적 경청이다. 영적 대화에서는 성도의 상황을 객관화시키는 모든 의도를 내려놓는다. “어떤 집사님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아진다고 하던데요!” “인생을 살다보면, 다 거치는 경험입니다!” “나이들면 다 그렇게 되는 거죠!” 식의 일반화 혹은 객관화는 결국 성도의 영적 노력과 시도를 좌절시킬 뿐 아니라, 성도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성도가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고 느낄 때, 영적 대화의 일차적 목표는 달성되었다고볼 수 있다.  


5. 열린 질문 활용하기 : “성도의 세계 안으로 한발짝 더”

열린 질문은 성도가 상황과 경험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표현하도록 돕는 소통 장치이다. 좋은 질문은 성도가 대답하면서, 스스로 다른 시각을 얻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과 영적 상태를 살피고 발견하도록 돕는다. 열린 질문은 내가 얻고자 하는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와 문제에 더욱 깊게 들어가도록 돕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때에 따라서, 열린 질문은 질문자의 의도와는 다른 반응을 성도로부터 듣게 된다. 성도가 깊은 영적 성찰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임재안에 더 머물게 되었다면, 그 질문은 대답의 내용과 상관없이 훌륭한 기도와 성찰의 도구가 된. 


6. 사려깊은 조언과 영적 인도 : “주님의 임재로 안내하기”

평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고, 말씀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살피며, 하나님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드리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영적 지도자와 목회자는 영적 조언과 충고에 있어 조심스럽고 사려깊다. 즉흥적이기보다 느리며, 사변적이기 보다 단순하다. 영적 경청과 개인 기도 시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들리는 영적 깨달음과 지혜들이 떠오른다면, 성도와 나누어 보면 좋다. 그 내용이 굳이 성도의 기도제목이나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될 필요는 없다. 영적 대화의 교류는 성경과 같이 은유적이거나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언과 인도는 깊은 기도의 산물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 성도도 더욱 깊은 기도를 갈망하고, 주님의 임재안에서 기도와 성찰의 시간으로 인도받는 내용이어야 한다. 


7. 대화 후 사역 : “대화는 기도로 이어진다.”

마침 기도를 통해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고, 확인된 영적 정보를 감성적 언어와 성경적 은유로 표현하여 기도하면 좋다. 이를 통해 대화가 목회자의 기도로 옮겨지게 된다는 사실을 성도에게 알린다. 대화는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영적 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비밀보장이다. 성도를 돌보고 보호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음 대화를 기대하고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비밀보장은 절대적이다. 


나가는 말: 영혼의 신비를 캐는 사역

영적 대화법이 목회사역과 돌봄에 주는 통찰은, 각 성도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신비로와서 단순한 몇몇의 언어적 표현으로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주님의 임재와 역사하심만이 한 영혼을 온전하게 치유, 회복, 변화시키신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사역이 영적 대화법이다.



필자소개 : 이주형은 장로교 목사이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연구원이다. 올 해 5월, 미국 클레어몬트신학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기독교 영성 형성학 박사 학위(Ph.D.) 수여 예정이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2월 호에 실린 두 번째 글입니다.



  1. Martin Buber, I and Thou, translated by Walter Kaufmann (Kindle: Amazon Digital Service Inc., 2014), 61-62. E-book. 한글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본문으로]
  2. John Cassian 지음, John Cassian: Conferences (New York: Paulist Press, 1985), Introduction by Owen Chadwick, 5-6. 이 후에 나오는 인용문은 같은 책에서 가져 왔으며, 한글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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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일부.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을 하여 교인들의 종교적 열광을 만족시키는 뜨거운목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학생회 소년들과 텃밭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기도 하고, 읍내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는 목사 같지 않은사람이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설교는 집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마통에 교인이 반으로 줄고, 그의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죽자, 실망한 교인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도, 신유의 능력도 없는 그를 내쫒았다.


    이 시는 약 2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라는 전통적인 상식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목사들이 추구하거나 교회의 지도층들이 바라는 목회자상은 교인수와 헌금액수를 높이는 데에 유능한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궁극적인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너무나 뼈아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신제품을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의 쇼맨십을 흉내 내어 설교단에서 복음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재로 변질시켜 온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탁월한 목회 지침서로 사랑받아 온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I: 540-604)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목회자들에게 도움 될 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목회를 하는 이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며칠을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도 그의 목회 규칙을 시작하며, 리더가 지고 있는 부담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어려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목회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거룩한 직함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 죄인이 그 성직에 주어지는 존경을 받는다면, 그의 불법이 예가 되어 멀리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I.2). 오늘날 목사또는 장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각종 불법으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그저 좋은 옛날 말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가 이처럼 부담이 큰 자리이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말로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겔 3418-19절을 인용하며, 자신은 맑은 물을 마시면서 양들에게는 자신의 발로 더럽힌 흙탕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양떼는 그들이 귀로 들은 가르침이 아닌, 그들이 목격한 목자의 오염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I.2). 그러면 말과 행동또는 앎과 삶사이의 간극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 책 111장에서는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의 유형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자신이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결한 삶의 습관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종종 악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규칙은 습관과 리듬을 만들고, 습관과 리듬은 규칙을 실천하는 사람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과 허버트의 시골 목사는 목회자가 바람직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습관은 단순히 행위의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는 내면의 생각과 바람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는 습관을 형성하는 내면의 생각과 동기에 주목한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육체의 음탕함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 또는 탐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정욕과 탐욕이 생각의 영역에서 진압되지 않으면, 외적인 행동에서 주도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다른 악들과 쉽게 결합해 그 사람 전체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뿌리 뽑혀야 한다. 또한 무거운 땅의 염려는 아예 사람의 등을 굽게 만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I.11).


    그런데 이 유형들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I.11). 이것은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옳고 그름의 구별이 뚜렷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은 그 본질이 미묘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I.1). 비슷하게 조지 허버트는 시골 목사에서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24).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집을 구입한 교인의 집에 가서, 집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ho Nazianzos: 329-390)의 견해를 받아들여, 영혼을 돌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함을 필요로 하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목회자는 마음과 생각의 의사라고 높이 평가한다(I.1).


    목회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만에 빠질 위험도 매우 높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겸손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지혜나 진리에 대한 오만한 추측으로 눈먼 자또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보편적 진리로 절대시 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이런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신성한 관조(contemplation)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여, 곧 우리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빛을 비춰주는 하나님 경험이 매우 얕거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이다(I.11).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유형들 중에 자신이 속해 있고, 그러한 약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면,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악한 모델로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것보다는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형벌이 덜할 것이라고 권면한다(I.2).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좀 더 영성적인 목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살펴보자.

 


조화로운 삶, 전인적인 돌봄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수도자이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 시의 집행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도 생활의 이상을 좇아 정치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들에 의해 그는 오십 세에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수도자가 된 그에게 교황의 직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적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만해지고, 자기 성찰을 빠뜨려서 죄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목회 사역의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하는 것과 외적인 활동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지도자들은 외적 문제들에 몰두하여 내적 생활에 태만해지거나, 내적 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외적 문제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적으로 피폐해지고, 반대로 내적 자아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이웃들에게 필요한 외적 돌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II.7).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종종 일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외적인 일들이 끝나면 내적 공허와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들의 삶도 점점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 중에 영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들의 설교에는 청중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들이 결여 되어 있는 것과, 그들의 말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II.7).


    조지 허버트 역시 시골 목사에서 목회자의 외적 활동에 대한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은 특히 영적 교만과 마음의 불결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9). 여기서 마음의 불결함(impurity of hear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5세기에 세속 도시를 떠나 마음의 청결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세속화되어 가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모의 땅 사막으로 나아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허버트는, 목사는 이와 같은 초기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종종 읽어서 그들이 평안할 때에 어떻게 매일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며, 유혹을 이겨내고, 겸손을 훈련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비록 허버트의 시골 목사나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역간되었으니, 오늘날 영성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라면 반드시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청결함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나 허버트가 이렇게 내적 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악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허버트에 의하면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탐욕과 식탐][그 악들에 사로잡힌]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해야 한다.”(24).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 위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되고 익숙한 것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다. 조지 허버트의 시골 목사에서 말하는 시골 목사17세기 영국 각 지방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위에 올라야 한다. 특히 한 주간의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을 성찰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허버트는 교구민들의 내적 생활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 또는 일상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골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필요하면 법률가와 의사의 역할도 도맡아야 하며, 교구민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날 법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하고 대비해야 한다(23).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의사와 법률가가 드물었던 ‘17세기 영국 지방 교구라는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오늘날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체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사역은 시간적으로는 주일’, 공간적으로는 교회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영적인 일들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들은 평신도들이 담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양떼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설교의 효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에게 있어서 목회또는 목양은 양떼들에 대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물질적인 삶,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은 오늘날, 목회자가 모든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그 일을 감당할 전문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목회 규칙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일흔두 가지 종류의 다양한 청중들에게 각각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허버트는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들의 질병뿐만 아니라 시대의 질병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목회 활동의 영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교구(교회)의 범위를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32).

 




나의 목회 규칙


목회자의 소명은 종교적 기업가들의 전략에 의해 사업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조건들은 예수의 방식 그대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매우 유해한 문화적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회고록 목회자(The Pastor)에서 오늘날 급변하는 미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목회자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의미를 잃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목회자의 소명 자체도 물질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면에서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시리즈의 첫 번째를 목회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글로 시작한 이유는 영성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삶으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일상 속에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영성 생활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각자 자신 만의 목회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목회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결심문들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의 삶에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규칙이 완결된 것이 아니며, 독자들의 첨삭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목회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회 규칙이 필요한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나의 목회 규칙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소개 : 권혁일은 장로교 목사이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팀블로그(spirituality.or.kr) 편집자이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잡지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원고가 축약되어 인쇄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첫 번째 글입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 (조지 허버트)

영성 목회 2014.11.18 13:28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과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1593-1633), 《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 제24장.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지만 보통 지역 교회(교구)를 섬기는 목회자는 참 바쁘다. 특히 조지 허버트가 살던 17세기 영국의 지역 목회자들은 종종 자신의 교구에서 의사 또는 법률 대리인의 역할도 담당해야 했기에, 그들이 '해야할 일 목록'에는 참 많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다. 허버트에 의하면 이런 바쁜 일상 중에도 목회자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분주한 매일의 생활 공간을 벗어나 "언덕 위에" 서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 사이에 있는 은밀한 악을 성찰해야 했다. 


허버트는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과 '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불필요하게 넓고 사치스러운 집을 산 교인의 집에 이사 예배를 드리러 가서, 그 교인에게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 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무엇보다 목회자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엄밀하게 성찰하고 정결한 상태를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은밀한 악덕에 지배당하는 목회자가 '양떼'를 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심한 경우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경고한 것처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양떼를 잡아 먹는 거짓 목자가 되고 말 것이다(에스겔 22:23-31).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된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하고,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들도 발견하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연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에 오르면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도 얻을 수 있어,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조지 허버트의 책 The Country Parson에서 말하는 목회자는 주로 지역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고,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허버트의 조언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또는 동료 목회자들과 몰려 다니며 자신의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 위에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교인들과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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