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형제로 찬양 받으소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5.07.29 16:26
바람 형제와 공기, 흐리거나 청명한, 모든 종류의 날씨로 인하여 

나의 주님, 찬양 받으소서. 그들로 인하여 당신의 피조물들이 

그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각주:1]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2-1226), "태양의 찬가" (The Canticle of the Sun) 중에서

 


'도시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신학적 사상 중에 하나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에서는 부모를 떠나 에돔이란 민족의 아비가 되고, 에돔인들은 철을 다루는 전문가들로서, 도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영화 "노아"는 이 대목을 영상화하는데 탁월한 면을 보여준다) 

인간 탐욕의 상징물이 되었던 바벨탑도 타락학 욕망들이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 정당화하고 확장되고 구현되어 가는 과정속에 세워진 구조적 상징체였다. 바벨탑의 붕괴는 도시 문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인생의 여정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다면, 그 첫 걸음은 도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 안에서,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순응하며
생과 사의 순환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배워나갔던 것이 믿음의 선조들이 걸었던 영적이 여정이었다. 

도시는 인간 탐욕의 집합체이며 끝없는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탐욕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문화적 생산 행위의 산물이다.
 
그 도시에서의 삶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살아내기에 턱없이 버겁고 힘겨운 영적 전쟁터이다. 물질적 풍요로 포장된 성공에 대한 허황된 이상은 탐욕과 욕망을 불러 모으고, 경쟁과 생존의 몸부림을 감내하도록 강요한다. 창조적 질서가 녹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소생시키며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자연에 대한 열망은 등한시하도록 부추기는 세속적 욕구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도시의 삶에 적응하다가 "이명"이란 낯설고 괴로운 질환을 얻고 돌아본다. 

우리는 왜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는 삶은 
도시에서 가능한가?

성인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가뭄 속에 천지를 깨우는 천둥처럼 이 세상에 울린다.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메말라 버린 호수와 밭에 
단비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바람과 비구름의
치유와 생명력을 당신들은 아느냐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느냐고! 
창조의 질서를 누리며 사느냐고!

 / 이주형

 


 


  1.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Wind, and Through the air, cloudy and serene, and every kind of weather through which You give sustenance to Your creature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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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사랑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10.16 09:06

아직도 누에[자기 자신]는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마치 요나의 칡넝쿨을 갉아먹던 벌레와 같이 우리의 자애심, 자존심, 그리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든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아낄 줄 모르는 사랑의 결핍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덕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껏 한다는 노릇이 죄짓지 않으려는 것뿐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 필요한 그 마음가짐에는 너무나 먼 것입니다. …… 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인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5궁방, 3장. 6절., 4장,10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묘사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다섯 번째 궁방(mansion)을 소개한다. 그녀는 누에가 고치를 틀고 죽어 마침내 나비가 되는 변화의 순간이 바로 이 연합과 같다고 밝힌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기까지 이른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외적 신앙 활동에만 관심을 둔 영혼은, 테레사의 말대로 칡넝쿨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을지 모른다. 기껏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적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자기 수련일 수 있다. 자기 자신인 누에의 행실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누에를 죽여야 하는 것이 영적 여정의 숙명이다. 자애심과 자존심을 먹으며 한가롭게 사는 삶 대신 차라리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불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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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은혜?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02.09 02:22
여러분이 거듭거듭 들으신 것처럼, 주님은 당신이 주고 싶으신 때에, 주고 싶으신 대로, 주고 싶으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고, 또 그 은혜는 당신의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으십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4궁방, 1장. 2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내면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묘사합니다. 영혼을 여러 연결된 방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궁전으로 그리면서 그 중심이 사랑하는 임이신 하나님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 중에 사람의 노력과 달리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은혜가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테레사는 그것을 초자연적 은혜라고 말하면서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은 더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명상가들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집중의 훈련을 어떤 초자연적 경험을 위한 기술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초자연적인 은혜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의 권리나 능력 밖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녀는 항상 은혜의 결과와 효과보다 은혜를 주시는 분께 초점을 두었습니다. 초자연적인 분께서 주시기 때문에 그 은혜는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라고 말한 욥과 같이 그녀는 이 모든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인하여 그분께로 더 나아가게 됩니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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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문 앞의 지옥길

한 줄 묵상 2013.08.29 02:36

나는 멸망의 도시뿐 아니라 이곳 하늘문에서도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존 버니언 (John Bunyan, 1628-1688),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in Modern English), (Gainesville, FL: Bridge-Logos, 1988), 211.


   조지 폭스를 한참 읽다 천로역정을 지은 존 버니언이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천로역정의 책을 구해보니 영문 책인데도 두께가 상당하다. 그저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천국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관한 이야기를 영성을 공부하며 나이가 든 지금 읽어보니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나 여백이 새롭고 깊게 다가오는 것 같다. 버니언은 폭스와 마찬가지로 수 차례 감옥에 들어갔다가 그의 대작 천로역정도 감옥 속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성찰의 결과로 만들어진 열매이다. 

   글의 끝 부분에 숱한 고난과 유혹과의 분투를 통해 마침내 천성문에 다다랐을 때에 그는 여행 도중 가끔씩 마주쳤던 '무지(無知)'를 만나게 된다. 자신과는 달리 쉬운 길을 따라서 천성문에 도달한 무지는 여행의 목적지에 다다랐지만 손과 발이 묶여 공중으로 던져져서 동굴 속으로 처박히고 만다. 끝까지는 왔는데 결국 선한 열매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으로 향하는 영적 여정에 있어서 쉬운 길이 가장 좋은 길인 것은 아니다. /소리벼리(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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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기타/산책길 엽서 2013.07.12 07:54
  • 때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새로운 앎과 경험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를 엄한 분으로만 알고 있다면, 아버지의 자상하고 따뜻한 면모를 놓치기가 쉽지요.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과감히 버리고 그곳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새롭고 더 깊은 앎과 봄을 경험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모습입니다. 폭포는, 멀리서 볼 때도 참 웅장하고 멋있지만, 배를 타고 폭포 아래로 가까이 가보면 멀리서 볼 때와 다른 새롭고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안전지대(기존의 지식과 경험)를 떠날 때 새로운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깨달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BlogIcon 바람연필 2013.07.12 16:47 신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면 아는 데서 떠나고

보지 못한 곳을 보고자 하면 보는 데서 떠나라.


영계 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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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이 강해지기를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3.04.26 18:52

감옥을 향해가고 있을 , 주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왔다. "나의 사랑이 항상 너에게 있고, 너는 나의 사랑 안에 있다." 나는 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안에 있는 사람이 굉장히 강건해졌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Autobiography of George Fox, chapter III. 1649


신앙인들의 매일의 삶은 때때로 감옥을 향해 걸어가는약한 자의 모습일 때가 있다. 나를 헤칠 일들 또는 내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앞에 놓여있지만 피하지 않고 나아가야 때와 같이,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길을 걸어가야 때가 얼마나 많은가조지 폭스가 신앙적인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게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갑작스레 그를 휘감았다. "나의 사랑이 항상 너에게 있고, 너는 나의 사랑 안에 있다."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 그보다 내가 항상 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말씀, 느낌, 감격은 기독교 역사를 흘러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평안과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조지폭스가 표현 한대로 ' 사람이 강건' 지는 경험을 하였다오늘도 때로 감옥 같은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동료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머물고 내가 분의 사랑 안에 있음으로  우리 안의 사람이 강해지기를 소망해본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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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성 안나의 집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2.12.23 03:22
  • 집으로 가는 길, 그 분 품으로 가는길에 고독, 바람, 나무, 그리고 하늘까지 길동무가 되어주는 군요. 트랙터 조차 막을 수 없는 기쁨의 길.......

    BlogIcon 오래된 오늘 2012.12.24 14:33 신고
  • 저 헛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웬지 눈 앞에 하늘이 펼쳐질 듯.

    토마스 머튼.
    그도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았겠죠?

    하늘 장관에
    어질어질해져
    바닥에 쓰러졌겠죠?

    트랙터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겠구만.

    "여기서 나가!"
    하는 그 죽비소리가 고마웠을 터.

    BlogIcon 산처럼 2012.12.25 05:01 신고
  • 성 안나의 집의 실재 모습이 낯선 만큼 그리고 평안함의 자리로 다가오지 못하는 만큼
    제 삶은 고독에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닐런지요.

    토마스 머튼은 진정한 자신이 되는 자리가 고독임을 발견했건만,
    나는 오늘 하나님과 혼자 있기를 조심스레 거절하며 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BlogIcon 작은소리찾기 2012.12.26 17:14 신고

집으로 가는 : 안나의 

(A Way to Home: Saint Anns)

 


1.

들판을 가로질러

낮은 숲으로 향하는

호젓한 시골길

 

발밑에서 돌멩이 형제들이

자글자글

나무 위에서 참새 자매들이

쫑알쫑알

한낮의 뜨거운 땡볕에

삭발한 정수리가 익어가도

길옆의 들꽃도 덩달아

설레는 , 즐거운

 

낮은 담장 옆으로 마차의 행렬이 지나가고

대문 앞에서 엄마가 손짓하고

나도 모르게 어린 아이가 되어

아장아장 서섹스(Sussex) 걷는

어제를 걷는

 


2.

세상과 갈라진 샛길

마침내 발견한

외딴 판잣집

평생 찾아온 그곳

페인트로 흰색의 튜닉과

검은색의 스카풀라를 입히고

붉은 색의 십자가를 다니

대리석이 빛나는 대저택보다

호화스런 침묵이 찬연한

 


3.

태초부터 속해 있던

고독

나를 반기고

 

헛간 구석까지 가득 채운

바람

열망을 태워 하늘을 내달리고

 

묵묵히 주위를 둘러싼

나무

함께 교회를 이루고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하늘

통해 세상 모든 나라 하나가 되는 사막

 


4.

낮의 짧은

낭만 속에 안주하게 될까봐

고독을 소유하려 할까봐

 

과묵한 트랙터 수사가

굉음으로 떠밀어

다시 여행에 오르는

집으로 가는



2012. 9. 1.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하나님과 고독에 대한 열망으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더 깊은 고독을 찾아 공동생활을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아닌 은둔생활을 하는 다른 수도회로 옮기고 싶어했다. 이러한 그를 위해 수도원장은 그가 겟세마니 수도원 안에서 은둔자(hermit)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953년 머튼은 숲속에 버려진 헛간에서 하루의 낮 동안 몇 시간을 머물러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것은 머튼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그곳을 '성 안나의 집'(St. Ann'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옷과 같은 검은색과 흰색의 페인트로 칠했다.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 안나의 은수처는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 내 일생 동안 바라던 것이었던 것 같다 …… 나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자리를 찾은 느낌이 어떤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서섹스(Sussex)를 온통 걸어 다녔던 어린아이를 생각한다. 나는 이 오두막집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또는 언젠가 그것을 찾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하늘 아래 하나이다."


"나는 이 집을 알지 못했던 11년 전부터 이 은자의 집으로 옷 입혀졌다. 이 희고 검은 집은 실제로 일종의 확장된 수도복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여행할 필요가 없다 …… 성 안나의 집의 조용한 경치는 다른 어떤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나를 허락하기만 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


이곳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기도인 "나의 주님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릅니다"가 쓰여졌다. 그러나 머튼은 성 안나의 집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수도원 경내의 각종 공사를 위해 동원된 트랙터의 굉음이 그의 고독을 방해했다. 그는 1965년 수도원 내의 에큐메니컬 대화 위해 마련된 장소를 새로운 은수처로 사용하도록 허락받는다.  


성 안나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와 위의 인용문은 《고요한 등불: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윌리엄 셰논 지음, 오방식 옮김 (서울: 은성, 2008), 304-309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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