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을 말하다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각주: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각주:2]과 15장 15절[각주:3]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각주:4] 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2. 명료화위원회[각주:5]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각주:6]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1.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2.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3.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4.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5.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6.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쉬지 않고 기도하기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3.03.01 05:30

이것은 그가 쉬지않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의 마음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주여, 내 입은 소리 없어도 당신께 향하여 있으며, 내 침묵은 당신께 말하나이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들어올려져 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못하며, 중단시키지는 더욱 못 한다. 홀로 있거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한가한 때나 일할 때나 대화할 때, 그의 마음은 늘 주님과 함께 있다. 자리에 눕든지 일어나든지 그의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의 영혼의 사랑하는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고있으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6.

 

이 글은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명하면서 감리교인의 성격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것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감리교인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신앙인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기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언제나 침묵의 언어로 주님 향해 아뢰는 것이며, 마음을 세상적인 일에서 거두어 들여서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며, 영혼의 눈을 주님께만 고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만 채우기 위해 그분을 쉼없이 떠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불이 붙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상태에 있게 되고, 그 기도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것에도 방해 받거나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기도 속에 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더하여 웨슬리는 이와 같은 쉬지 않고 기도하기는 우리가 소리내어 드리는 청원 기도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뢴후에 범사에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아무것도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않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하기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16).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청원의 기도가 신실한 것이 되려면 그 기도가 쉬지 않고 드리는 침묵의 기도에 의해 뒷바침 되어야 한다. 이렇듯 기도란 말로 하는 기도와 침묵 기도가 있는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각주:1] 침묵기도와 (청원과 간구를 포함해서) ‘말로하는 기도이 두 기도 실천은 서로 이어지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쉬지않고 드리는 침묵 기도말로 하는 기도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보고 깨달으며, 그분의 주시는 바, 즉 은혜에 대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새결새김

 

  1. “신앙의 요약: 교리 문답,” 『공도문』 영한대조 한국어판, (미국성공회, 1986), 699. [본문으로]
posted by 새결새김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 비밀댓글입니다

    2013.01.31 11:04
  • 교보문고 중고장터에 한 권 나와 있기는 한데, 역자와 출판사가 다른 책이네요.

    http://used.kyobobook.co.kr/product/viewBookDetail.ink?cmdtBrcd=7216616206771&orderClick=LKA&Kc=

    이후정 교수님의 번역으로 읽으시려면 (1) 인터넷 중고서점들을 뒤져보시거나, (2) 가까운 대학도서관, 공공도서관 중에서 이책을 소장하고 있는 곳을 찾아서 빌려 읽으시거나 아니면 (3) 감신대학교 출판부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 보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

    BlogIcon 바람연필 2013.02.01 11:34 신고
2013년 1월의 추천고전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44 .

 


1726년에 …내 마음, 즉 내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비록 내가 인생 전체를 그분께 드린다고 해도 내게 아무런 유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의도의 단순성(simplicity of intention)과 정감의 순수성(purity of affection),” 즉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의도와,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배하는 하나의 열망은 영혼의 두 날개이며, 이들 없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3, p.8).

 

성탄과 주현절이 있는 이 절기는 우리에게 오신 주님과 더불어 새로이 영적 여정을 시작하기에 좋은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절기에, 한 평생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열망으로 살았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분의 글을 통해 신앙 생활의 갱신과 진보를 갈망하시는 분들이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


이 책의 원 제목은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입니다. 이 책은 웨슬리에 의해서 1767경에 초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웨슬리는 그 당시까지의 자신의 영적 여정과 초기 감리교의 성장에 맞추어, 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 여러 해에 걸쳐 인도되어 온 단계들을 평이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있으며, 그가 "한 시기 한 시기에 무엇을 생각했으며 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 1, p.7).

 

웨슬리는 1730년 중반부터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던, 감리교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시작부터 일관되게 성화와 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파급력이 커져가는면서 웨슬리의 완전 사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또 그 사상을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논란들을 거치면서 웨슬리는 완전 사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반드시 강조되어야할 가르침이라는 점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이래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과의 논쟁의 논쟁을 거치면서 가다듬어온 자신의 완전 교리를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성서적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지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동료 감리교인들을 위해서 간결하지만 신중한 필치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모든 신자들의 삶의 목표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이 무엇인지를 간략한 몇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웨슬리 자신의 요약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완전은 삶 전체를 하나님게 바치는 의도의 순수성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한 소원과 한 의도만이 우리의 기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또 다른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 전체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 모든 내적 외적 불결함에서 깨끗해지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그것을 창조하신 분을 완전히 닮는 형상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27, p.135).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성화의 실천과 이의 전파를, 기독교 신앙생활의 요체요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에게 맡기신 지상至上 과제” (Grand Depositum)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의 완전 사상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줄곧 궁극적인 가치로 높이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게 제안할 행복도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을 지으신 분과 연합하는 것이요,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사귐이 있는 것이며,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것입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추구할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즉 시간과 영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일로 향하는 한에서 갈망하십시오 (§6, p.10).

 

웨슬리가 제시하는 완전/연합은 자기을 비움을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주여,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께 돌려드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나 자신의 무(nothingness)로 돌아갑니다. 마치 공허하고 어두운 공기가 태양의 빛으로 충만해질 수 있듯이, 당신에 의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공허함 외에 무엇이 천지간에 당신 앞에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겠습니까? …… , 이와 같이 당신의 은혜와 선행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되돌려드릴 수도 있는 기능을 저에게도 주십시오! (§25, p. 130-31)

 

이 기도문이 담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통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 (imputation)와 우리의 응답의 순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다가가게 된다(impartation)는 점입니다. 인간의 선행(善行)은 바로 은혜에 대한 이러한 응답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선행보다 은혜의 역할을 극히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의 사람들에게 큰 시사점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혹은 오직 은혜로만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유신론자唯神論者, Solifidians)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강물이 모두 바다 속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의인들의 몸과 영혼과 선행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거기서 그의 영원한 안식 속에 살게 됩니다” (§25, p.121).

 

선행은 이를테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잃어지기 전에는 마지막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선행에게는 일종의 죽음으로서, 우리의 육체의 죽음과 흡사하다. 즉 육체는 자신에게 충만해질 우리의 영혼, 혹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자신을 잃기 전까지는 그 최고의 생명 즉 불멸의 생명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선행이 이 영적 죽음으로 잃는 것은 그 선행에 들어 있던 지상적인 필멸의 요소뿐이다 (§25, p.130).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온전한 사랑의 실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웨슬리는 성화와 완전을 일차적으로 교리로 보다는 기독교적 삶의 주제로보았던 것입니다 (“머릿말,” p.3). 그래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완전한 사랑, 순결한 사랑, 거룩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최선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 말로 기독교적 삶의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이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의 중요성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을 이 세상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느냐는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점을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시며, 인간의 사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 그리고 올바른 응답을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전제하고, 각자의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실천적, 경험적, 윤리적 차원을 포괄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성도의 인격과 성품, 기질과 이의 변화 등에 관한 실천적 제안과 충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웨슬리는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문답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감리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각종 모임들 (신도회, 속회, 밴드, 연회 등)에서 신자들의 영적 지도를 위해 사용되었던 정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런 문답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의 영성 생활에도 도움이 될만한 제안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가지는 의미: 이성과 경험의 시대에 완전의 삶을 검증함

 

웨슬리가 살았던 18 세기 영국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 통하는 면이 많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로 인해 사회구조가 급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문화 사상적으로도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추론, 경험과 실증 등을 통해 전통적 가치들을 재평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 실천 전통들 중에는 18세기 영국의 신앙운동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인지, 웨슬리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그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행태를 보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현실에 와닿은 웨슬리의 제안 한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웨슬리가 당시의 열광주의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저 교만의 딸, 열광주의를 경계하라. , 그것을 극도로 멀리하라. 과열된 상상을 결코 용납하지 말라. 아무 일이나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속단하지 말라. , 음성, 인상, 환상, 계시 등을 쉽사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상정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도 있고, 본성으로부터 올 수도 있으며, 마귀에게서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들을 다 믿지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라.’ 모든 것은 기록된 말씀으로 시험해 보고 모두 그 말씀 앞에 굴복하게 하라. 당신이 만일 조금이라도 성경에서 떠난다면, 실로 혹은 어느 본문에 관해 그 문맥에 비추어 문자 그대로의 명백한 뜻에서 떠난다면, 당신은 언제나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理性)이나 지식 또는 학문을 멸시하거나 경홀이 여겨도 마찬기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탁원한 선물로서 가장 고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 (§25, p.110).

 

웨슬리는 여기서 하나님 체험을 추구함에 있어서 주관적 느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하는 중요한 하나의 수단(means)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옳바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웨슬리가 지적하듯이 우리의 감각과 욕망과 감정이 자기 부정을 통한 정화purification를 거쳐야 합니다. 또한 자기 경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검증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성서는 언제나 중요한 표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가 문자 그대로읽어야 한다는 것은 문자주의적 해석이나 축자영감설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부분이 속한 성경의 넓은 문맥과, 역사적 정황을 감안해서, 신학적 성과와 교회의 전통의 토대 위에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완전 성화의 삶에 중요한 여러 주제들을 웨슬리는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만, 율법무용론(율법주의), 유신론(唯信論, Solifidianism), 분열 (이들은 경계의 대상들이다), 그리고 의도의 순수성, 환대, 복종과 자기포기, 경청, 인내, 끊임 없는 기도, 실천, 깨어있음, 선행 (이상은 수련의 덕목들이다)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5, pp. 86-121).

 


신앙 생활의 새로운 활력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새롭운  활력을 얻는 일은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 모습이 무엇이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얼마나 좋고 기쁘고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은 우리 속에서는 그것을 이루고 싶은 열망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이 신앙 생활을 일신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책은 우리 신앙 생활의 궁극적 목표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이며,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게 되는지를 소개해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 새결새김



그리스도인의 완전

저자
존 웨슬리 지음
출판사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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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결새김

그리스도인의 품격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2.21 04:58
  •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가슴 아파하고 있는데, 오히려 저의 불완전함을 직면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그리고 웨슬리가 말한 '마음의 순결'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전 삶을 걸고 추구한 '마음의 순수함(purity of heart)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8).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볼 것이니!

    BlogIcon 바람연필 2012.12.20 15:08 신고

[감리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한다. 그는 자기 원수들, 참으로 하나님의 원수들까지 사랑한다.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힘 밖에 있을지라도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쉬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그의 사랑을 멸시하고 오히려 그를 모욕하고 핍박할지라도말이다.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6.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한 발현이라고 웨슬리가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의 완전이 신자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웨슬리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의 마음이 순결하게 될 때 이러한 완전에 이를 수 있다. 즉, 신자의 감정과 의지(욕망)가 자기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신자의 삶 속에서 구현된다


이런 마음의 순결을 위해서 신자는 그의 모든 소원이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만을 기억하도록 늘 힘써야 한다. 그러면 그의 영혼의 눈이 순일(純一)해진다. 그리고 그의 눈이 성하므로 온 몸은 빛으로 충만해진다이 때 그에게 떠오르는 생각마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한다. 또한 그의 사랑이 질투와 악의와 분노와 모든 불친절한 기질로부터 그의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 (위의 책 17쪽).


이런 사랑의 완전을 내 살아 생전에 이룰 수 있을까? 웨슬리는 그의 동생 촬스 웨슬리의 찬양시를 인용하여 그렇다, 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을 갈망하라고 말한다.


         거짓말 못하시는 당신이 당신의 법을 내가 지켜 행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이까

           주여, 사람들이 부인해도 나는 믿나이다 …… 당신은 참되심을.


 (촬스 웨슬리, 성화의 약속, p.141)



이런 완전을 바라는 것이 감리교인의 품격이라고 말한다. 이런 성품이 나에게서 나타나기를……. 그리스도님, 성령님 저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인의 완전

저자
존 웨슬리 지음
출판사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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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전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09.11 18:00
  • "이웃의 약함과 결점들을 내것으로 여기게 하소서"라는 구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의미가 깊어지고 넓어지네요.

    다른 이들의 결점을 내것처럼 여기고 용납하며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약함을 돌보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되는 듯 합니다. 이웃들의 배고픔 또는 부정의(injustice)로 인한 고통을 내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동정심이나 위로의 말 그 이상의 열매로 맺어져야 할 테니까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09.13 17:28 신고
  • 웨슬리가 말한 '완전'이란 '사랑의' 완전을 뜻하고, 사랑의 완전이란 사랑의 '충만'을 뜻하는 것이었네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더 깊이 이해됩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09.14 01:20 신고

주님……당신의 사랑으로 내 영혼을 가득히 채워 주시고 다스리소서……. 저로 하여금 이웃의 약함과 결점들을 내 것처럼 여기게 하소서……. 복되신 구세주여저에게 베푸신 당신의 사랑이 제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모양을 정하는 틀(pattern)이 되게 하소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Monday Morning” in John Wesley’s Spirituality: 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 Day in the Week, (1733).

 




이 구절들에서 웨슬리가 강조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의 완전 ‘무결점이나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치 않은 신인 합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가 말한 완전은 사랑의 완전즉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와 동등히 여기는 타자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오늘 이 구절들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완전을 이룰 수 있다고 과감히 선언했던 웨슬리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언젠가는 내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이 기도를 드린다. / 새결새김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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