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열매 2 : 맑은 눈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20 10:28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생명까지 위협 받는 불모의 땅 사막, 이곳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 맺히는 두 번째 열매는 '맑은 눈'이다. 사막에 들어 오기 전, 안목의 정욕(요한일서2:16)을 따라 살던 이들도, 또는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을 좇다가 시력을 잃어 버린 이들도, 그리교 교만, 의심, 미움, 세상 염려로 눈이 흐려진 이들도 사막에서는 금욕과 훈련을 통해 맑은 눈을 얻게 된다. 마치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수도자의 눈을 가리는 것들이 벗겨지고, 씻겨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황폐한 땅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이 간절히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 그가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컬른의 브루노는 여기에서 분명히 아가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아가서는 '신랑'으로 상징되는 주님과  '술람미 여인'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로 해석되어 왔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아가서1:15, 4:9 새번역)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남자이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여인 전체를 상징한다. 일종의 제유법이다. 여인이 이 아름다운 눈동자로 임을 바라보자, 남자는 그 눈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브루노는 이와같은 아가서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영혼이 그 눈으로 신랑이신 주님을 명료하게 바라볼 때에 신랑은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의 상처는 '실연의 아픔'과 같이 상대방의 배반이나 폭력에 의해 받게 되는 상처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의 사랑이 매우 깊어서 얻게 되는 역설적인 상처이다. 아가서에서 신랑과 여인은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브루노는 신랑이 이러한 '상처'를 입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주님을 향한 영혼의 바라봄은 매우 명료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도자가 이러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만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사람이 영성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맑고 아름다워지면, 주님이 그제서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눈이 맑아지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로 인해 사랑의 상처를 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1 : 자신과의 만남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12 18:00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카르투시오회(Ordo Cartusiensis)를 창설한 컬른(또는 쾰른)의 브루노는 사막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과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막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고독한 장소이다. 그곳은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entertainment)이 미치지 않는 메마른 땅이다. 그래서 사막을 탈출하지 않고 그곳에서 버티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외부의 즐거움(안목의 정욕)을 쫓던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다. 자신의 외적 자아(가면)가 벗겨지고, 대신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는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친다(고린도전서 3:16). 그래서 자신의 내적 자아와의 만남은 곧 그 내적 자아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는 삶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 곧 관상 생활(contemplative life)이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거창하거나, 복잡하거나, 일반 사람들이 엄두내기 힘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매우 단순한 삶이다. 또한 이것은 내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선한 씨앗들이 자라서 외적으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삶이다. 


브루노는 이러한 풍성한 삶이 황량한 사막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오늘날 사막은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막의 고독은 오늘날 분주한 도시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도 가능하다. 문제는 내 안에 이러한 메마른 고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고자 하는 갈망과 강한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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