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4.07.08 01:02

"아들아, 너 자신을 떠나라. 그러면 나를 발견하리라."


"주여, 얼마나 자주 제 자신을 포기하리이까? 어떠한 것에서 저 자신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언제나 그리고 매순간,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든 그렇게 하여라."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구영철 옮김,《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울: 가이드포스트), 183.


"그리스도 본받기"의 기초와 절정은 "그리스도와 대화하기"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흉내낸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을 따라 사는 길은 그분과 나누는 쉽없는 대화에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하나님과 수도자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자아/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가르치는 "자아 사용법"은 혹독하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혹독하듯이. 


하지만 혹독한 그 말씀은 또한 달콤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대화 중에 주님께서 "나"를 꼭집어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 우리 사랑하자"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자기 부인의 무기 (로렌조 스쿠폴리)

한 줄 묵상 2012.12.26 17:04
  •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마르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생각나네요.

    BlogIcon 산처럼 2012.12.27 14:50 신고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당신이 원하는 승리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적의 작은 공격에도 저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 로렌조 스쿠폴리 (Lorenzo Scupoli: c. 1529-1610),

《보이지 않는 전쟁》, Unseen Warfare. (Ch. 2.)


로렌조 스쿠폴리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낯선 고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성 훈련에 대한 실천적 지침과 교리적 가르침은 동-서방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16세기 로만 가톨릭 사제인 로렌조 스쿠폴리(Lorenzo Scupoli)의 저작 Spiritual Combat은 18세기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승 니코데무스(Nicodemus)의 손을 통해 그리스어로 번역 및 편집되었으며, 이후 19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인 은둔자 테오판(Theophan the Recluse)은 이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 러시아 번역은 다시 영어판의 기초가 되었다. 번역 및 편집을 통해 Unseen Warfare 라는 제목을 붙였던 니코데무스는 이 책이 수세기 동안 갈라졌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다리 역할을 하길 소망했다. 그는 교회적이거나 교리적인 접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동일한 적에게 대응하는 영적 전쟁을 함께 할 때에 동서방의 반감이 해소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는 무엇보다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전장이 우리의 마음이자 내적 인간이며, 전투 기간은 우리의 전 삶이라고 명시한다. 이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앙의 온전함을 얻기 위한 네가지 무기를 제시한다. 그 첫번째 무기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음'이다.  그는 아담의 죄 이후 우리가 영적, 도덕적으로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는데 익숙해져있다고 밝힌다. 이 영적 질병은 너무나 교묘하기에 감지하기 어렵고, 자기 사랑에 갇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을 막아버린다.  사실 이 자기애는 모든 고통의 뿌리이며 실패의 근원이다.  그럼에도 현대는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영적 전쟁이 아니라 삶 자체가 패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로렌조 스쿠폴리, 니코데무스 그리고 테오판은 이 자기 부인이 필수적인 영적 무기임을 가르쳐준다. 또한 이것 없이는 강렬한 전투가 아니라 적의 작은 공격에도 넘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2013년, 이 신비한 자기 부인의 무기를 들고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더 많은 동료를 얻는 삶을 기대해본다. / 작은소리찾기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차라리…… (안토니의 생애)

한 줄 묵상 2012.11.15 17:12
  • "왜 갑작스럽게 '차라리......'이라고 말하는 것일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궁금해져서 영어본을 참조해 보니, 인용하신 기존 번역에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의 '갈망'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물질들'로 번역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차라리'라는 단어보다 '오히려'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는 비교대상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토니가 추구하고 가르친 것은 '이 땅의 물질을 소유하려는 잘못된 욕망을 바로잡는 것이지, 마음 안의 모든 열망(desire)을 제거하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안토니는 17장에서 집이나 재물과 같은 '물질'로 향하는 열망을 바로 잡아, 정의나 사랑과 같은 '덕(virtue)'을 열망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사막에서의 훈련은 우리 안의 열망을 뿌리 뽑는다기보다는 그 열망이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바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것도 열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른 것을 열망하는 것이 훨씬 쉬울 듯 합니다.

    목사님 좋은 본문을 선택해서 소개해주시고, 좋은 질문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존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바로 잡는 것도 지금 영성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17 04:04 신고
  • 유익한 첨언 감사합니다. 하나 둘 수정해나가면서 바른 의미들이 잘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부사'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다른 의미를 낳는군요^^

    나무 잎사귀 2012.11.18 05:51 신고

우리는 왜 덕을 위해서 갈망들을 포기하지 못합니까? 천국을 물려받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소유하려는 갈망을 품지 맙시다. 우리가 가져가지 못하는 이런 것들을 소유할 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들, 이를 테면, 사려깊음, 정의, 절제, 용기, 이해, 사랑,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성내지 않음, 친절 등을 소유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성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ony), 

안미란 옮김 (서울: 은성출판사, 1993), 17장. 


'소유'와 '비워 냄'은 모든 구도자들의 오래된 숙제이다. 인간을 '불 덩어리'(히/에쉬)로 정의한 히브리 문학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의 '욕망'은 불 이상의 화력을 품어내며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토니(Antony)는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를 거부한다. 물질의 소유를 다 버린 그가 광야를 찾은 이유 역시 마음의 소유까지 다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곧 문장을 바꿔 '차라리' 소유하라 한다. 대신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라 한다.


물론 천국에까지 가져갈 '소유해서 유익한 마땅한 것들'도 안토니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겠지만, 필자는 갑자기 '무소유'에서 '소유'로 화두를 바꾼 안토니(Antony)의 의중이 궁금해진다. 왜 더 강하게 '소유하려는 갈망 자체를 품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갑작스럽게 '차라지 가져갈 것이면…….' 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마치 기다리다 지친 부모처럼, 마치 어루고 달래다 지친 선생님처럼 '차라리'라고 말하며며 '독자들'의 수준으로 말을 맺는 것인가? 왜?


어렵다. 자기비움. 어렵다. 자기부인, 그리고  자기포기.  마치 이천 년 전에 '안토니'가 내 마음을 뚫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차라리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나 주워 담아라' '차라리…….' / 나무잎사귀

 

posted by 비회원

하나님이 매정하십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한 줄 묵상 2012.11.14 10:22
  • 하나님께서 매정하시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내가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매정한 존재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겠네요. '자기 사랑'의 치료제는 '자기 부인'이라는 것 잘 읽었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14 15:08 신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을 때에 당신은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의 간절한 요청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그저 자기애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매우 매정한 일입니까?[각주:1]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설교: 죄인들의 징벌에서의 하나님의 공의(The Justice of God in the Damnation of Sinners중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목사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한 설교에서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인식이 '자기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우리가 외면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비로소 알아 차리고 하나님께 사랑과 자비를 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밑바탕에는 우리 자신이 완전한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신학적인 함의가 있다.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죄의식이 아니라 나는 멸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철저한 '자기부정'이 구원의 출발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기도에서 말하는 '죄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고백이 철저한 자기부정의 인식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구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오는 '의식적 문구'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자기부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어느 정도의 자기부정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것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답은 이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 자비를 달라고 요청할 때 우리를 외면하시더라도 우리 자신을 돌아 볼 때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정도의 자기부정이 필요하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신앙의 고백들 혹은 간구의 기도가 과연 얼마나 자기부정의 토대 위에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나는 오늘 어떤 기도를 하여야 할까? / 빛으로질주




  1. "Was it no crime for you to refuse to hear when God called? And yet is it now very hard that God does not hear your earnest calls, and that though your calling on God be not from any respect to him, but merely from self-love?" [본문으로]
posted by 빛으로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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