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처럼, 동주처럼 :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예수처럼, 동주처럼”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한 책이 있나요?"


      며칠 전 우연히 만난 분으로부터 들은 질문이다. 필자가 신학교 졸업논문으로 윤동주 시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기신 모양이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이름은 알아도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필자가 윤동주의 영성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윤동주를 기독교 영성, 또는 신학의 관점에서 연구할 만한 내용이 있느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질문을 하신 분께 지난 2월 16일이날은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 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다에 발간된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렸다.


[「돌아와 보는 밤」은] 윤동주의 작품 중 유일한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장 6절)는 말씀처럼 윤동주는 좁은 방에 들어가 '숨은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좁은 방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외면적인 실천의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는 종교시라면 「돌아와 보는 밤」은 내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숨은 신과 대화하며 사상이 익어가는 기다림은 은밀하고, 숨은 신과 인간의 일대일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헌신을 다짐하는 키에르케고르와 윤동주의 공통된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 김응교,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파주: 문학동네, 2016), 354쪽.


 

     보다 정확히 말해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만 쓴 책이 아니다.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관점에서만 윤동주를 이해하고 소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거나, 그를 '기독교 교리' 또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될 위험이 있다. 대신 이 책의 저자 김응교 교수는 가능한 다양한 관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소개하려 하고 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환경은 물론이고 그가 교유했던 벗들과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 윤동주라는 한 인물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위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윤동주의 삶과 작품에 나타난 기독교적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대부분의 장들은 저자가 기독교 월간지『기독교사상』에서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윤동주와 함께 걷는 새로운 길"이라는 꼭지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고쳐 쓴 것이다. (또한 저자가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들을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쉽게 풀어 쓴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 가장 잘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처럼"이라는 독특한 제목이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제목은 윤동주의 유명한 시 「십자가」에서 가져온 것으로 저자는 책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처럼'이란 조사만 한 행으로 써 있는 시를 본적이 있나요. ……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 귀찮은 길을 '행복'한 길이라고 그는 씁니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도 '행복'한 주체가 되는 그 길을, 윤동주는 택합니다. (5쪽)


그는 '처럼'의 시인이었습니다. 국익이라는 헛것으로 보편성을 강요하는 파시즘 시대에 윤동주의 문학은 만들어진 보편성에 흠집을 내고 그 한계를 깨뜨리는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친일 문학 같은 굴레에 갇힐 수 없었습니다. 문학은 한계와 제약으로 구속해서는 안 되고, 구속할 수도 없다는 자유에 그는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릴 희생을 각오했고, 그 결단의 순간을 위해 그는 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서시」)며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509쪽)


기독교 영성사에서 '제자도'(discipleship),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기독교적 삶의 본질적인 이상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각주:1]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급진적인 삶을 살았고, 어떤 이들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삶과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한 오랜 흐름에 맞닿아 있다. 『처럼』은 이러한 제자도를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시대에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윤동주의 영성은 '제자도'라는 주제가 그러한 것처럼 오늘날 전쟁과 자본의 폭력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동만이 아니라 유효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존의 윤동주에 대한 평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존에 출판된 윤동주 연구서들 중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책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일 것이다. 김응교 교수는 『처럼』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윤동주가 곁에 있다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송우혜 선생님의 저서가 역사적 실증주의에서 시인 윤동주의 삶을 구성한 평전이라면, 제 글은 시의 원전을 분석하여 시를 통해 윤동주를 재구성하는 '시로 만나는 윤동주'라는 입장입니다. (515쪽)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시인과 관련된 현존하는 문서들과 증언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역사적(historical) 윤동주'를 제시하고 있다면, 김응교의 『처럼』은 작품 속에 표현된 시인을 추적하는 독특한 형식의 평전이다. 물론 송우혜의 평전 또한 시인의 여러 작품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새로운 평전은 그동안 윤동주에 대한 연구서들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던 동시를 포함해서 시인이 남긴 대부분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다.


      저자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에 윤동주의 작품에 대한 그의 이해와 표현이 '분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적'이며, 그 깊이가 남다르다. 곧, 작품의 구조를 해체하고 의미를 분석하기보다는 시적 표현들 속에 녹아 있는 시정신 또는 시혼(詩魂)을  밝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에 대한 여러 책들과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작품(text)과 환경(context)을 균형있게 고려하고 있는 이 책에 담긴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에서 수년 간 디아스포라(diaspora)로 생활한 저자의 경험이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배경을 이루고 있어서 그의 해석은 더욱 공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해석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책도 없고, 시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근 4쇄를 낼 때에 몇 가지 잘못된 정보와 오자를 바로 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평생 이 책을 살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여름, 한 교회 청년부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만주 땅으로 역사탐방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이면 많은 교회들이 주로 단기선교를 떠나지만, 한 번씩 국내외 기독교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 의식과 통찰력을 갖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의 선배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김응교의 『처럼』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과 더불어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마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자는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예사말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높임말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더 쉽고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윤동주를 소개하려는 저자의 노력인 듯하다. 그리고 각 장도 분량이 길지 않아 한 자리에 앉아서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결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한 번에 여러 장을 읽기보다 한 번에 한 장씩 읽으며, 더불어 그 장에서 언급된 윤동주의 시를 생활 속에서 묵상한다면, '저자의 윤동주 이해'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윤동주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동주는 침묵으로 최초의 악수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슬픔 곁으로 가라고, 웃음 곁에서 웃으라고, 그게 축복이라고, 윤동주도 곁에 있다고. (519쪽) 


이 마지막 구절을 읽는데 눈앞에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그 손을 잡는다면, 또한 다른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만지고 잡게 될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Philip Sheldrake, A Brief History of Spirituality (Malden, MA: Blackwell, 2007), 14-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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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버린 사람들 (파스칼)

한 줄 묵상 2015.09.12 16:51


예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최소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세 친구들로부터 어떤 위로를 구하다. 하지만 그들은 잠자고 있다. 그분은 그 친구들에게 당신과 함께 잠시라도 깨어 있기를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그분을 버린다. 제자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긍휼은 그들이 잠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분노에 내버려지셨다. 예수는 세상에서 혼자이시다. 그분의 고통을 느끼거나 공유하거나, 심지어 알아줄 이가 아무도 없다. 오직 그분과 하늘만이 그것을 알 뿐이다. …… 예수께서는 사람의 동료애와 위로를 찾으신다. 내 생각에는 이것은 그분의 생애에서 매우 독특한 경우이다. ……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간청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의 기도를 듣지 않았다.[각주:1]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팡세》(Pensées) VII, 553.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세 명의 친구들로부터 우정과 위로를 기대하셨지만, 제자들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그분의 기도를 듣지 않았고, 그 결과 주님은 홀로 하나님의 분노에 내버려지셨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최근 유럽으로 몰려드는 시리아와 아프리카 난민들의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리아 난민도 현재 7백 명이 훨씬 넘는데, 이중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단 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시리아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2013년 이후 한 해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하는데 인정되는 경우는 극소수라고 한다(한겨레신문 2015.9.7.). 


주님은 배고픈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이런 이들을 주님처럼 영접하고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태복음 25:31-46). 오늘 '예수의 제자이자 친구'라 자처하는 우리들은 그 옛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 친구들과 같이 무정함의 잠에 빠져, 자유와 생명을 찾아 나그네된 이들의 간청을 냉담하게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역사에는 "2015년에도 예수께서는 난민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간청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기도를 듣지 않았다."고 기록되지 않을까? / 바람연필 권혁일


Sandro Botticelli(1445-1510), "Sleeping Disciples"



  1. 강조는 번역자가 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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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한 오늘의 고난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4.17 03:56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찾았는지 확인하는 길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모든 고난들을 거부하며 투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를 미워할 뿐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난으로부터 빠져다갈 시도(궁리)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Discipleship and the Cross," The Cost of Discipleship, part 1, ch.4.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오늘보다 더 성공하여, 내 자유를 극대화하는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풍요로운 내일이란, 더 많은 돈을 벌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된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이란, 내 능력과 세력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내일이라고, 


세상은 그렇게 현혹하고 강요한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현재의 고난이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생산적이기 위해서,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면,  

내일은 오늘보다 덜 고통스러워하며, 덜 불행해야 하며, 덜 불명예스러워야 한다고. 


오늘은 성목요일(Maundy Thursday)이다. 

내일(Good Friday),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하신다.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큼, 

다가올 고난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고통스러우리라.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며, 장차 올 고난과 운명을 감내하려는 본회퍼의 여정은, 

내일의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오늘의 고난이었으리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안중근의 발걸음은, 

내일 주어질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영적 순례이었으리라. 

본회퍼는 단호하다. 고통받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제자도이다.   


주님, 저는 제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 십자가의 고통에 참예함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제 이웃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오늘 주어진 고난의 열매가 장차 올 영광이 아니라, 내일의 십자가라 할찌라도, 

당신의 십자가 옆에, 그 고통 곁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당신의 길을 철저하게 따르다, 

십자가에까지 이르렀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당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르다, 

만나게 되는 그 십자가를, 

그 고통을 오늘이라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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