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한 줄 묵상 2015.08.13 10:17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의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직행하려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에 있는 장성 갈재 때문에 그 태산을 넘을 길이 없어서 그 태산 속에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연결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갈 때 터널이 뚫려있는 길을 신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산 앞에 서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터널을 뚫[음으로써] 가서 보고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므로 내세가 저희들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광주에서 서울을 간 사람이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 없이 가는 것처럼 주님이 부활하시고 천상으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사람이 금세에서 내세를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 김금남, 《동광원 사람들》, 217-8.

헨리 나우웬이 말한 “죽음과 친해지기”(befriending with death)는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분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Brother Sun)를 보면,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토착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의 글을 읽다가 ‘아, 이분도 죽음을 초월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부활이 죽음이라는 산을 통과하는 터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사실 김 원장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 그리고 이현필 선생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류영모 선생이 그 무덤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선생, 얼마나 시원하오. 얼마나 시원하오. 이 선생 잘했소. 부럽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이 부활 신앙의 기개가 죽음의 권력 아래서 답답하고 어두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 좋겠다. / 이강학




posted by 아우의 마음

죽을 생각을 하고 살면 - 스데반의 순교 축일에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59-60)


 12월 26일,  초대 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의 순교를 기리는 날이다.  성탄절 다음 날인 12월 26일이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축일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조용한 아침,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순교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은 똑같이 하늘의 영광을 가리킨다. 바로 전장에서 사도들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초대교회의 집사로 임명된 스데반은 뜻밖에도 사도들처럼 기사와 표적을 행하다가,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히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예수님처럼 그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긴다.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추구한다. 


몇 주 동안 아팠다. 아프면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가장 아쉬운가 생각하다가 참느라, 기다리느라, 다하지 못한 설교가 가장 마음에 걸린다. 혹시라도 상처 입을까봐,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천천히, 느리게 가기 위해서 아끼고 아껴왔던 말씀들…….


결국은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미운 채로, 화해하지 못한 채로, 용서를 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하루를, 또 한 해를 그렇게 넘긴다. 차라리 죽을 생각하고 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워해야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꼭 말하고 싶은 말들, 편히 말할 수 있다. 설교자는 살 생각 말고 죽을 생각하며 말해야 한다. / 소리벼리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사막 교부)

한 줄 묵상 2014.11.06 14:44

임종이 가까이 왔을 때 압바 아가돈은 삼일 동안이나 계속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제자들이 그의 몸을 흔들며 물었다, "압바 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네." 그들이 물었다, "두려우신가요?" 그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고자 최선을 다해왔지. 하지만 나는 인간일 뿐. 내 행한 일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제자들이 물었다, "경건하게 살아오신 삶에 대해 확신이 없으신가요?" 압바가 말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하나님의 심판/판단과 사람들의 심판/판단은 다르기 때문이지." 그들이 계속 더 말씀해주길 청하자, 그가 말했다, "청컨대, 내게 말을 시키지 말아주게나. 나는 지금 바쁘다네." 그리고는 그 순간 그는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제자들이 보니, 그가 숨질 때 모습은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포옹하는 모습 같았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늘 깨어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깨어있지(vigilance) 않고는 사람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네. 하나의 덕도 이루지 못하지."


The Book of the Elders: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The systematic collection 

(Collegeville, MN: Cistercian Publications, 2012), 190 (Agathon 29b).


"나는 지금 바쁘다네(I am busy)."

했다는 말에 오래 생각이 머물렀다. 


하나님 앞에서 정신 차리고 깨어있는 일로 바빴다는 것인데, 

죽는 순간까지 그런 일로 바빴다니..


죽는 순간 

죽음이 그에게 친구요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였을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늘 서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눈을 뜨고 살고 있나..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토마스 머튼의 <동생을 위해> 그리고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고난주간 수요일, 세월호가 조난당하고 삼백 여명의 꽃다운 생명이 바닷속에 잠겼다. 

1943년 4월 16일, 고난주간 금요일 밤, 토마스 머튼의 동생 존 폴 머튼이 영국 해협에서 조난 당하고, 다음날 이른 새벽 바다 위에서 숨을 거뒀다.


존 폴 머튼(John Paul Merton, 1918-1943)은 당시 캐나다 공군 소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탄 비행기가 고도를 잃고 바다에 추락했고, 그 충격으로 그는 척추가 부러져 버렸다. 함께 탑승하고 있던 동료 두 명이 그를 간신히 고무보트로 끌어 올렸지만, 그는 세 시간 정도 갈증 속에서 버티며 기도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표류 넷째 날 존의 시신을 수장하였고, 다섯째 날에 구조되었다.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에 토마스와 존 두 사람에게 서로는 참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토마스 머튼은 동생의 죽음 소식에 크게 슬퍼했고, 그의 세 시간의 목마름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목마름을 보았다. 아래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이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애가(歌)인데, Thirty Poems(1944)라는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실렸다가 후에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 초판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세월호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애도하며, 머튼의 시를 한글로 다시 옮긴다. 




동생을 위해 : 1943년 작전 중 실종됨

 


사랑스런 아우야, 내가 잠들지 않으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에 놓는 꽃이란다

그리고 내가 빵을 먹지 못하면

나의 금식은 버들처럼 네가 죽은 곳에 살리라

내가 뜨거운 열기 속에 갈증을 적실 물을 찾지 못하면

나의 갈증은 너, 가련한 여행자를 위한 샘이 되리라

 

네 가련한 몸은 어디,

어느 적막하고 연기 자욱한 나라에

누웠느냐, 실종되었느냐, 그리고 죽었느냐?

그리고 네 불행한 영혼은

어떤 처참한 풍경 속에 길을 잃었느냐?

 

오라, 나의 노동 속에 안식처를 찾으라

그리고 내 슬픔 속에 네 머리를 눕혀라,

아니 차라리 내 생명과 피를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침대를 사라

아니 내 숨과 내 죽음을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안식을 사라

 

모든 전사들이 총탄에 맞고

깃발들이 먼지 속으로 추락할 때

너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여전히 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우리 모두를 위해.

 

네 사월의 잔해 속에 그리스도가 학살당하고

내 봄의 폐허 속에 그리스도가 눈물을 쏟는다.

그의 눈물의 돈이

너의 약하고 외로운 손으로 떨어지리라

그러면 너를 다시 사서 너의 땅으로 돌아오라.

그의 눈물의 침묵이 

종소리처럼 너의 낯선 무덤에 떨어지리라.

그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오라그들이 너를 집으로 부른다.

 

 

/ 토마스 머튼 지음, 권혁일 옮김.

Thomas Merton(1915-1968), "For my Brother : Reported Missing in Action, 1943," in The Collected Poems of Thomas Merton (New York: New Directions, 1977), 35-36.




posted by 바람연필

자매 죽음을 통한 찬양

한 줄 묵상 2014.05.12 11:06

“(12) 찬양 받으소서, 나의 주님, 우리의 자매인 육체적 죽음을 통해,

아무도 그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13)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안에서 죽은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장 거룩한 뜻 안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죽음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raised by You, my Lord, through our Sister Bodily Death,

from whom no one living can escape.

Woe to those who die in mortal sin.

Blessed are those whom death will find in Your most holy will,

for the second death shall do them no harm.)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1182-1226),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the Sun) 중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임종을 앞두고 위의 구절을 그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the Creatures, 1225)에 덧붙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죽음을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프란치스코의 태도입니다. 그에게 육체의 죽음은 자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형제자매입니다.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그러나 아무나 죽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는 죽음이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죽음을 누이가 다가오는 것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던 사람은 두 번째 죽음(요한계시록 2:11, 20:6)으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은 죽음을 프란치스코처럼 맞이할 수 있겠지요. 초월된 죽음은 누구도 겁박할 수 없고 그저 온순하기만 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무기로 삼는 세력이 맹렬한 파도를 일으키는 계절에, 오늘이든 먼 훗날이든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이강학



posted by 아우의 마음

심판이 아닌 완성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3.12.13 16:13

죽음은 사실 신체와 영혼에게는 – 결코 취소될 수 없는 - 쓰라린 종말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회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39, 102). 그러나 죽음 저편에 영원한 하나님이 계신다( 90, 102). 따라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삶이 승리하게 된다( 16:19, 56:13, 49:16, 73:24, 118:15).”

- 본회퍼 지음(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61. 


죽음은 개인의 종말이다.

저편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연말은 한 해의 종말이다.

저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봐야하는 순간이다.

 

한 해의 종말을 맞는 이 순간, 나의 종말을 계수하고 있는가?

 

종말은 심판(패배)이 아니라 완성(승리)인데

그 시간이 다가오면

왜 이리 두려워지는지….

 

심판이 아닌 완성과 연합의 기대로

오늘도 한 해의 종말, 나의 종말을 기대해본다.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존 던)

한 줄 묵상 2013.10.09 05:20

죽음아,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러

힘세고 무섭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불쌍한 죽음아, 또한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단지 너의 영상에 불과한 휴식이나 잠으로부터, 

많은 쾌락이 흐르니, 그러니 네게서 더 많은 쾌락이 흘러야 하리,

...

... 그런데 너는 왜 으시대는가?

짧은 한 잠이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으리.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 존 던, '거룩한 소넷 X', (<존 던의 거룩한 시편>, 김선향 편역, 청동거울)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 1582-1631)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교회 조종(弔鐘) 소리를 듣거든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종 소리인가?" 굳이 알아보려 하지 말라고 설교했다. 


인간은 외딴 섬들 같이 서로 떨어져있는 존재들이 아니요("No man is an island"), 다 하나로 연결된 대륙과 같아서, '그'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 최인호 선생님의 소천 소식은 내게 특별한 소식으로 다가왔다. 그 소식은 마치 내게, 

<샘터>에 실리는 그의 재미난 '가족' 이야기를 착한 웃음을 웃으며 읽던 어린 시절의 나도 

이미 죽었음을, 

죽어 여.기.없.음.을. 말해주는 조종(弔鐘) 소리 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죽어가고 있다--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맞으며 작가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은 

조종 소리를 듣고 교회당에 모인 우리 '죽을 인생들(mortals)'을 향해 

사제가 선포하는 우렁찬 복음의 말씀 같았다. 


"주님이 오셨다."


그렇다. 그렇다! 

주님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다! 

신앙인 최인호 작가는 죽음을 맞지 않았다--다만 주님을 맞이했을 뿐! 


어떤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신 말씀, 그대로이지 않은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외침, 그대로이지 않은가?


"주님이 오셨다."


주님이 오시면

죽음은 없다. 

물러간다. 


죽음에 빼앗겼던 모든 것이 다 회복되리라. 


착한 웃음 짓던 나도 다시 살아나리라. 


'그'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메멘토 모리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11.20 03:12
  • 글뿐만 아니라 함께 올리신 그림과 책도 흥미롭습니다^^ 찾아보니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해골이 여러 번 등장하네요. 아래의 링크에 있는 그림에서 프란시스가 해골을 들고 묵상하고 있는데, 카라바조에게 '해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http://en.wikipedia.org/wiki/Saint_Francis_in_Prayer_(Caravaggio)

    BlogIcon 바람연필 2012.11.20 12:32 신고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라.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고

죄로부터 도망쳐라.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1, ch.23.


영성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말한다. 


죽음을 기억(re-member)한다는 것은, 

보기 싫어 멀리 내쫓아버린 죽음을 

다시(re) 나의, 내 삶의 일부(member)로 받아들여 

자주 들여다보며 생각한다는 것일 것이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병적인 태도가 아닐까? 

토마스 수사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죽음 생각이 싫은 것은, 

죽음이 그저 두렵기 때문이고, 

죽음이 그저 두려운 것은 

죄와 싸우는 삶 ― 경건한 삶, 영적인 삶 ― 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 기억하기'는, 

어떻게든 죽음을 망각하게 만들어

사람을 아무 생각없는 '소비자'로 살다 죽게 만들어 버리려는 

현대사회 ― 세상! ― 음모와 술책에 맞서는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라이프스타일이요, 영성이다. 


/ 산처럼

Caravaggio(1573-1610), 'San Gerolamo' (Saint Jerome)


posted by 산처럼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