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기타/영성 관련글 2017.05.0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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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종태

그림자나라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간디》(1982)의 감독자로 유명한 리차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ough)의 1993년 작(作)으로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 받았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안소니 홉킨즈(Anthony Hopkins)와 데브라 윙거(Debra Winger)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는데, 어떤 비평가는 안소니 홉킨즈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이 영화를 최고로 뽑기도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을 가르쳤던 C. S. 루이스와 미국 출신 작가 조이 그레샴(Joy Gresham)의 만남과 결혼과 사별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멜로드라마적 재미와 비극적 감동을 넘어 관객들을 삶과 사랑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종교적 물음으로 인도해주는 영화입니다.


C. S. 루이스(1898-1963)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 저서의 판매량과 인용횟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난 세기 영미권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저술가의 자리는 이 옥스브리지(Oxbridge) 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견(異見)을 달 역사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계에서 루이스는 주로 《순전한 기독교》와 같은 기독교 변증서를 남긴 저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계 밖에서는 루이스는 판타지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서 더 유명합니다. 7권으로 구성된 이 연대기의 마지막 책인 《마지막 전투》는 아슬란의 창조물인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는데, 나니아의 종말을 보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루이스는 한 작중 인물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보렴. …그건 진짜 나니아가 아니란다. 그 나니아는 시작과 끝이 있었지.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진짜 나니아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해. 우리 세계인 영국과 다른 모든 나라가 아슬란이 계시는 진짜 세계의 그림자(shadow)나 사본(copy)인 것과 마찬가지이지. 루시, 나니아 일로 슬퍼하지 말아라. 옛 나니아에 있던 모든 귀중한 것들과 소중한 짐승들은 다 그 문을 통해 진짜 나니아로 들어왔으니까. 물론 다르기야 하지. 실물이 그림자와 다르고, 생시가 꿈과 다르듯이 말이다.”

루이스는 서구 기독교 신학과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354-430)처럼 플라톤 철학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복음적 세계관을 설파한 사상가요 영성가였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땅’, 즉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 영원한 진짜 세계의 사본이요 그림자입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스승의 철학을 이원론으로 발전(혹은 변질)시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초기교회 교부들(Church Fathers)은 이 땅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건 저 하늘에 있는 ‘진’ ‘선’ ‘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참 철학’인 기독교의 ‘말씀’의 신학과 영성으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paidagogos)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교부들은, 또 어거스틴과 루이스는 하늘의 진선미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Logos)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바로 이 세상 모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흘러나오는 궁극적 원천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움

이런 식의 생각, 철학, 신학은 특유의 영성을 낳았는데, 바로 ‘하늘을 그리워하는’(eros) 영성입니다. 사람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 모든 ‘좋은’ 것들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하늘’에 있는 실체(reality)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한 것들이기에, 이 땅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할수록 사람은--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하늘’을 동경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의 루이스의 공헌은 무엇보다, 여러 이유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희미해진 이런 영성을 현대인이 지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 공명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루이스는 이런 영성을 ‘(천국)소망’이라는 신학적 범주에 넣어 다음과 같이 설명/변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acutely)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소망’에 대한 루이스의 변증은 루이스 자신의 ‘실 체험’(lived experience)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은 영적 회심기라 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루이스는 그가 “기쁨”(Joy)이라고 명명한 특별한 종류의 그리움에 대해 묘사하는데, 가슴을 벅차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아리게 만드는, 황홀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가져오는 그런 그리움이야말로 “내 인생 이야기의 주된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집필한 책인 《순례자의 귀향》도 루이스의 “기쁨의 영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루이스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 존은 어느 날 어떤 “섬”을 흘낏 보게 되는데,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존재들이 거하는 그곳을 향한 가슴 아린 갈망에 존은 “흐느껴 울”게 됩니다. 《순례자의 귀향》은 자신을 울게 만든 그 “기쁨”을 추구하며 그 “거짓 대상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거짓임이 드러나면 단호히 내버리는” 길을 걸었던 루이스의 철학적 여정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가 지닌 고유한 풍취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루이스는 하나님(“동쪽 산” “지주님”)을 믿기 전에 “하늘/초월/궁극적 실재”(“섬”)를 추구했으며, 그의 신학과 영성은 그 “섬”이 실은 “동쪽 산”의 일부라는, 즉 하나님은 “하늘의 님”이시라는 발견과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늘” 이야기를 “wishful thinking”이라 하여 의심하고 조롱하는 서구 근대 시대정신의 눈치를 보는 서구 신학자들과 달리, 루이스는 “하늘” 이야기를 철학과 신학 담론의 중심에 끌어들여,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thoughtful wishing”이 어떻게 우리를 진리/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늘

루이스는 독창적인 신학사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사상들은 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보편적(catholic) 교회의 지적 영적 전통에 전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한 그리움’(Joy)에 대한 문학적 묘사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작가보다도 탁월했고 독창적이었습니다. 루이스는 천국/하늘/초월을 향한 인간의 ‘불멸의 그리움’을 자신의 내적 여정과 인간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 보았고, 더 나아가 복음전도를 위한 일종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습니다.


천국소망을 영성과 전도의 중심으로 삼았던 루이스는 ‘도피주의자’였을까요? 뜻밖의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기를 즐겼던 루이스는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피(escape/탈출)에 대해 반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간수임에 틀림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하늘/천국/초월에 대해 닫혀 있는(immanent frame)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좁디좁은 감옥 안에 갇혀 지내는 수인(囚人)들입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그 삼위일체 댄스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죽음 너머 누리는 개인적 행복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천국을 희망하는 것은 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 같이 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는 곳으로서, 천국 소망은 하나님 자신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론 같은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천국을 희망하고 누리기 위해선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누리고 싶어 하는 갈망’(appetite for God), 요즘 말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갈망, 소망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역사를 읽어보면, 이 세상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고 루이스는 강조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그들이 내세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국도 잃고 이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우리가 우리의 문명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는 우리는 이 문명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갈망을 불온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갈망은 이 세상을 안으로부터 전복시키는 혁명적 힘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이의 마음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루이스의 글들은 분명 스크루테이프(루이스가 쓴 동명의 소설에 나오는 원로급 악마)의 불온서적 목록 상단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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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미국 GTU에서 영성학을 공부했다. 'C. S. 루이스의 경이의 영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한남대 등에 출강하며 서울여대 대학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C. S. 루이스 저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시편 사색》, 네가지 사랑》, 기적 등을 번역했다.



- <빛과 소금> 2017년 4월호



posted by 산처럼

감옥을 채운 성도들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4.02.28 19:20

 

"찰스 통치 말년에 감옥을 퀘이커 교도로 가득 채우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다. 언제 어디서건 비국교도의 비밀 집회 강령이 실시 되기만 하면 친우회 교우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고통이 뒤따랐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The Journal, chapter 20.  (1679-91)년의 글 중에서



웨슬리의 전기에 익숙한 나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감옥이 텅텅비는 이른바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웨슬리가 태어나기 10여년 전에 삶을 마감했던 조지폭스의 시대는 이와는 반대였다. 조지폭스는 인생의 말년을 쇠약한 육신을 이끌고 감옥을 채우고 있는 자기 공동체의 일원들을 방문하고 본인도 끊임없이 재판을 받으며 위험과 낙망에 빠져있는 믿음의 동료들을 권고하고 격려하면서 보냈다.  

  

감옥에 온통 내 믿음의 동료들로 넘쳐난다면! 

낯설기만 한 이 문구가 갑자기 눈앞에 그려지면서 아찔한 충격이 전해져 온다. 예수의 십자가도 이렇게 이뤄졌겠구나. 바울도 이렇게 말년을 보냈구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도 그렇게 믿음을 지켰구나! 어쩌면 그들이 머문 감옥은 감옥이 되어버린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주님의 보호 아래 두는 하늘의 특별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바울의 서신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그리고 폭스의 전기가 결국은 이 감옥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쓴 일기요, 편지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지금의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세상에서 너무 박해를 받지 않기에 이루어지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감옥을 감옥인지 모르고 살기에 천국을 천국인지도 모르고 소망하지도 않는지도 모른다. 


/정승구 소리벼리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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