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의 신비

한 줄 묵상 2016.06.23 10:42

여러분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거하실 자리를 열어 두기 위해 그대들이 해야 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To open up the place of the Holy Spirit in your heart, what you have to do is to learn how to make joys and sorrows of brothers your own.)

-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각주:1]


순전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한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전3:16)는 진리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그것은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그는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십자가의 요한과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인용하며, 우리가 다른 이들의 필요에 얼마나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느냐에 비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에 있다. 곧, 다른 이들의 기쁨과 슬픔이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께서 거하실 공간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또는 "내 코가 석자다."라는 속담은 우리가 얼마나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마음이 닫힌 존재인지를 잘 보여 준다. 바쁘고 힘겨운 삶이지만, 잠시 멈추고 마음의 창을 열어보자.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으로 삼아 마음에 간직해 두자.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그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The Monastic Life: Sharing Joys and Sorrows" in Thomas Merton on Monastic Spirituality, Now You Know Media, Gethsemani Classroom Series (CD), 2016.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배운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한 줄 묵상 2014.06.16 23:03

사랑없는 배움의 좋은 점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단지 그것은 우리를 허황되게 할 뿐이다.  배움 없는 사랑은, 헛된 길로, 타락으로 인도할 뿐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evallensis), "아가서" 설교 69: 2.


현대의 기술 위주의 지식 교육과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지식의 대상을 도구화해왔다. 한 가지 기술과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techne)로 취급하여왔다. 또한 한국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입신양명의 수단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사람들은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설정해 놓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교육을 전락시켜버렸다.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이 '남보다 뒤떨어질까" 두려워, 오늘도 아이들을 사교육의 굴레로 내몰고 있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성경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 교육의 진리탐구는 허황된 길로 달려가는 사회를 자유와 정의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중세의 성인 베르나르두스는 말한다, 배운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습득된 새로운 지식과 교제하고 나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과정을 배움, 즉 교육이라 한다. 그 습득된 지식을 마음에 새기는 것, 그 지식을 통해서 마음과 삶이 변하여 성숙하는 것, 사람과 세상을 사랑으로 품는 것이 지식습득의 목표이며, 배움의 최종 목적지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성 생활에서 배움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배움과 지식의 목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랑의 대상과 깊은 교제를 바탕으로 한 본질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적 접근으로의 배움은 존재의 변화와 성장을 일으키는 본질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 이주형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의 강의실 한 편에 위치한 현판. Originated from "Bernard of Clairvaux, Cantica, Serm. LXIX, 2; Migne, P. L., CLXXXIII, 1113-a."


posted by 구름위 햇살

노예, 장사치, 자녀(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한 줄 묵상 2013.04.20 09:18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두려워하는 노예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을 위해 이익을 갈망하는 장사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아들[딸]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Bernardus Claraevallensis, 1090-1153) 지음, 김재현 옮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서울: KIATS, 2011), 90.


하나님은 그냥 뜨겁게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2세기의 신비가이자, 수도원 개혁가였던 베르나르두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이익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사치이다. 오늘날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 아닌가? 상대방을 순수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의 집안이 가진 권력이나 경제력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들 말이다. 베르나르두스는 이 두 유형 모두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른 사랑과 섬김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유형의 사람은 두려움이나 탐욕 때문이 아닌 순전히 하나님 그분을 즐거워해서 그분을 찬양하고 섬기는 자녀이다. 베르나르두스는 이러한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린도전서 13:5)고 말한다.

 

사랑은 관계이다.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누구인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노예인가? 그분과 딜을 하려는 장사치인가? 아니면 어떤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분의 자녀인가? 이러한 관계에 따라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결정된다. 이제 또 주일이 돌아오면 많은 그리스도들이 교회로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뜨거운사랑을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는 노예도 있고, 장사치도 있고, 자녀도 있지 않을까? 른 이들을 판단하지는 말고,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자. 그분이 여전히 우리를 아들과 딸로 여기시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한 사랑 이야기가 될 희망이 아직 있다. / 권혁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

저자
베르나르 지음
출판사
KIATS | 2011-03-2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배출된 신앙인들의 삶과 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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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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