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한 줄 묵상 2015.08.13 10:17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의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직행하려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에 있는 장성 갈재 때문에 그 태산을 넘을 길이 없어서 그 태산 속에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연결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갈 때 터널이 뚫려있는 길을 신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산 앞에 서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터널을 뚫[음으로써] 가서 보고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므로 내세가 저희들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광주에서 서울을 간 사람이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 없이 가는 것처럼 주님이 부활하시고 천상으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사람이 금세에서 내세를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 김금남, 《동광원 사람들》, 217-8.

헨리 나우웬이 말한 “죽음과 친해지기”(befriending with death)는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분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Brother Sun)를 보면,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토착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의 글을 읽다가 ‘아, 이분도 죽음을 초월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부활이 죽음이라는 산을 통과하는 터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사실 김 원장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 그리고 이현필 선생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류영모 선생이 그 무덤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선생, 얼마나 시원하오. 얼마나 시원하오. 이 선생 잘했소. 부럽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이 부활 신앙의 기개가 죽음의 권력 아래서 답답하고 어두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 좋겠다. / 이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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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 삶을 하나로 묶기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4 13:45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삶을 하나로 묶기



앞선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삶을 하나로 묶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하나로 묶기  

    헨리 나우웬은 현대 신앙의 위기는 신앙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체험이 피상적이고 연속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며 깊은 차원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려면침묵 기도로 형성된 내적인 고요 속에서 삶 그 자체를 주목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삶 그 자체를 주목하면서때로는 깊은 기도 후때로는 간단한 성찰 후 삶에서 올라오는 느낌들을 간단히 기록해 놓습니다우리 삶이 깊은 일관성으로 빛을 발하는 때는 삶을 구성하시는 든든한 뒷배경이신 하나님 그분을 발견할 때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삶을 구성하는 큰 요소를 주목하면서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주목하는 시간을 가집니다단위는 한 달로 합니다삶의 각 영역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초점은 내면의 움직임이라고 일컫는 마음의 흐름마음의 반응을 의미합니다시시비비를 따지거나 행위의 선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음 항목 별로 한 달의 삶을 성찰해 봅니다. 

   

1. 영성 생활은 어떠했나?

a. 예배는 어땠는가?

    예배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받은 은총은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가?

b. 기도는 어땠는가?

   얼마나 하고 있나그 횟수가 적절한가기도 분위기나 흐름이 어떤가크게 깨닫거나 응답받은 것이 있는가?

c. 영적독서는 어땠는가?

   성경이나 영적성장을 위해서 읽는 것들이것이 나에게 무슨 자극이 되는가 어떤 점에서 성장에 기여하는가새롭게 알아듣고 깨닫게 된 것이 있는가?


2. 몸은 어땠는가?

   몸에 대한 전반적인 상태수면식욕 등의 욕구질병 등의 영향.

   몸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

   몸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는지 알게 된 점이 있는가?


3. 직장이나교회 사역 등 일은 어떠했나?

   일에 대해 드는 느낌은 어떠한가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가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는가?


4. 가족 관계는 어땠는가?

   주된 정서는 무엇인가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고하나님은 어떻게 임재하시며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는가?


5. 기타

a. 우리 사회정치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사건.

b. 친구 관계사적 모임 등.


이렇게 보면우리 삶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체라기보다는 경험적 사건들로 구성된 의미의 결합체라는 것이 다가옵니다그러면 이렇게 삶을 바라보면서 각각의 경험을 하나로 묶고 꿰는 기도를 해 봅니다.


첫째기도 준비를 합니다.

둘째삶의 사건 항목들을 머리 속에 천천히 떠올리며 기억합니다.

셋째하나님께 청합니다. '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나타내 보이신 삶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혹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당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넷째각 항목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하고전체적으로 떠올리기도 하면서 삶을 주목합니다그 사이에서 올라오는 느낌들기운들통찰들에 머물면서하나님과 교제합니다마음이 깊어지는 부분에 충분히 머물러 봅니다.

다섯째기도 알람이 끝나면한 달의 삶에 대해 감사합니다다음 달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주님께 자발적으로 대화합니다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여섯째물론 기도반추를 합니다.


침묵 기도를 일상 속에서 먼저 실천하고 계신 분들의 조언

 (1) 기도의 삶을 구조화하세요. 통성으로 주제를 외치는 기도보다 침묵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특히 이것을 원하고 이것이 기도를 바르게 하고 있다는 것에 깊게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기도가 밀려나게 되면나중에는 자포자기 된답니다기도를 제일 중요한 자리에 놓고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하세요영 놓아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하려고 했더니만하나님께서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들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2) 혼자하지 말고 함께 하세요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혼자 집에서 하다말다 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고 합니다매 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기도를 나누고한 주간 함께 기도할 본문들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3)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몇 주간에 걸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나피정을 받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특히 기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기도 방법을 배우는 데는 집중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하나님의 사랑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침묵과 고독’ 속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피정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항해 이후

배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까요우리는 그 배에서 내릴 것입니다그렇다고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이것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입니다우리 육신의 삶이 마치는 날우리는 몸이라는 우리 배를 벗지만그렇다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그 사랑을 확장하고 팽창해 나가면서우리를 무한히 성장시켜 나갑니다사랑의 각성은 죽고 나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한때면 끝나는 우리 삶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어나기 위해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며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일상 중에 침묵 기도를 실천하시려는 분들은 눈을 좀 더 멀리 두십시오배가 도착하는 항구 그 이후까지 눈을 멀리 두십시오그 너머까지가 명백히 자각이 된다면결코 포기할 수도 없고게으를 수도 없으며그렇다고 조바심내거나 안달내지도 않게 됩니다그저 고요히 오늘의 항해를 할 뿐입니다오늘이라는 날하나님을 오늘만큼 알고 오늘 만큼 사랑하고 오늘만큼 함께 했으니오늘 배부를 것입니다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면 됩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백투더클래식 2014.09.01 18:01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고통하는 이웃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스물여섯 살의 젊은 의사였던 아들을 잃고서 자신의 피 끓는 심경을 토해놓은 소설가 고 박완서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의 한 구절이다. 참척을 당한 어미의 깊고도 깊은 절망과 좌절감이 그대로 뼛속 깊이 전해져 올 때는 필자의 둘째 딸이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두 번째 골수이식을 마칠 즈음이었다. 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딸에게 고통을 주셨다는 말이었다. 위로 차원에서 던져진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짐을 경험했다.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쓰시기 위해 자식을 오 년이 넘도록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물과 가슴 졸임으로 지내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믿고 싶지도, 또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크게’ 쓰이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하는 딸이 죽음의 늪에서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참척을 당한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내게 다가와 일상의 삶이 완전히 정지될 정도였다. 그즈음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설교한 것을 들었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유사한 발언들이 공공연히 한국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것을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신정론이란 신학의 이해의 폭을 제쳐두고서라도, 박완서가 “주변 사람들의 아무리 사려 깊은 위로일지라도 그것이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라고 토로할 만큼 극한의 고통과 좌절감 속에 있는 부모의 심정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했다면 이런 설교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전 졸렬한 신학이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 민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잡아 먹어버려 공감능력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예수의 타자를 향한 사랑의 정신은 실존적으로 거부를 당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삶과 거룩함(Life and Holiness)》이란 책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공감(empathy)’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과 필요에 대하여 견지해야 할 신앙의 태도가 단지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공감과 더불어 긍휼(compassion)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안토니우스의 긍휼의 삶

   긍휼이란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심지어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긍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긍휼이 시작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됨으로써 마음이 요동하고, 마침내 그들을 도와줄 방도를 찾아 움직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긍휼은 단순히 인식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공감과는 구분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감(imitatio Christi)’이란 덕 안에서 긍휼의 삶을 살았음을 보게 된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음을 받으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ca.35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수도생활을 위해 이웃들을 등지고 사막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사회와 단절되지 않았고 긍휼이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가 기록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The Life of Antony)》가 증거 해주고 있다. 그 한 예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그들[각주:1]은 안토니우스에게 자신들을 방문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단지 그를 보기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그들에게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매달렸고 심지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산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군대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탄식과 필요를 보게 되자 안토니우스의 마음은 요동했고 마침내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안토니우스의 애씀은 무위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당도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과 혜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84장

     안토니우스의 초미의 관심은 금욕 생활을 통한 영성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웃들의 필요와 슬픔 앞에서는 자신을 위한 그 굳은 갈망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안토니우스의 수행은 영적인 엑스터시(ecstasy) 체험이나 사막의 수실(壽室)과 수도공동체에서만 인정받고 통용되는 갇혀버린 창백한 영성이 아니라, 이웃의 눈물 앞에서 마음이 요동하며 자기 신앙의 어젠다(agenda)를 내려놓게 되는 열리고 살아있는 영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수행의 삶을 위하여 사람들을 피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홍해 인근 깊은 광야로 들어갔지만, 그 후에도 안토니우스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찾아 그를 만나러 왔고 또 자신도 간혹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행의 삶이 얼마나 이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그의 초기 수행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또래 사람들에 대하여서 경쟁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도덕함양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했던 연유는 다른 사람들 아무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로 인해 기쁨을 누리게끔 하려는 데 있었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4장.

     사실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안토니우스의 이웃을 향한 긍휼의 삶에 주된 초점을 둔 책은 아니다. 당시 기독교 내부에서 가장 큰 쟁점의 대상이었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견제 및 대항적 요소가 곳곳에 배어있고, 또 안토니우스의 삶에 대한 소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전형 및 수도자들의 본을 제시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후일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인물의 영성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책 안에는 금욕적 삶을 기반으로 기도에 매진하는 일, 영을 분별하며 사탄을 대적하는 일,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필요와 고충을 해소시켜 눈물을 닦아주는 일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영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일인지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고 권정생 선생은 이렇게 얘기한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서울: 녹색평론사, 2008), 20).



공감을 넘어서

     큰 교회를 목회한다고 해서, 신학지식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고 해서, 영성 훈련을 몇 가지 알고 받았다고 해서, 영성 관련 책자들을 접하여 새로운 지식이 생겼다고 해서 이웃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긍휼이 없어도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긍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예수의 길이 바로 다름 아닌 긍휼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영적 활동들 중의 하나인 기도의 삶과 긍휼의 삶의 연관성을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 어린 그리스도와의 좀 더 깊은 연합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 고통을 만난다. 섬김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 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 《긍휼(Compassion)》(서울: IVP, 2002), 188.   

지난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이웃의 고통에 공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또 한 번 우리나라 교회가 수모를 당하였다. 이웃에게 공감할 줄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감의 언덕을 넘어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긍휼이야말로 성육신과 십자가란 예수의 길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기도하는 일, 목회하는 일과 이웃의 눈물을 공감하며 도움의 발걸음을 내딛는 긍휼의 길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긍휼의 사람은 참척을 당하여 눈물 흘리는 이웃에게 소위 하나님의 섭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손수건 한 장이라도 건네는 사람일 것이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는 안토니우스, 그는 예수의 길, 긍휼의 길을 옹골차게 살아내었다.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자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87장.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재판관들을 가리킨다. 당시 안토니우스를 찾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고, 이들 때문에 사실 그는 자신의 수행 생활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산 바깥으로 이끌려 나가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재판관들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그런 요청을 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위대한 영적소명은 연대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영적 소명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동일한 실체와 존재가 되는 것, 남들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튀어 보일까싶어 삶의 주변부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거기서 모든 인간과 연대하게 된다.

-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두려움에서 사랑으로》(서울: 두란노, 2011) , 142.


   



posted by 진정한 열망

부모는 아이들의 '영성 지도자'

기타/영성 관련글 2014.05.06 11:01

가정의 달 특별 기획



부모는 아이들의 '영성 지도자'

- 영성적 자녀 양육을 위한 일곱 가지 조언 -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인, 소명을 찾아가는 것이다. 부모로서의 소명을 찾는 여정은 뜻밖에 찾아오는 복(blessing)임과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책임을 부여받는 과정이다. 한 아이의 부모가 됨으로써 그 아이의 인생의 기원이 되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또한 아이 인생의 동반자로서 주어진 동행과 나눔이라는 행복과 복을 선사받는다. 더불어 부모의 양육은 자녀들과 이후의 세대에게 유/무형의 유산과 영향력을 남기기에, 부모에게 주어진 인생의 중요한 책무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녀의 생물학적인 기원이기는 하나, 자녀 삶에 대한 소유권은 없다. 그리고 자녀가 장성하기까지 물리적, 재정적, 심리적 안전을 제공해야 하나, 그들이 건강하게 독립하여, 그들의 가정을 꾸리고, 다음 세대의 부모가 되도록 안내해주는 것이 부모의 존재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세상을 탐험하고 접하기 때문에, 부모의 삶의 궤적과 여정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가족과 부모는 자녀의 인생의 선택하지 않은 주어진 조건이 된다. 그 조건과 한계 안에서 자녀는 자신의 인생의 모판을 준비해가며, 모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욕망과 본능을 준비해간다. 모든 인간은 부모를 통해 자신의 인생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부모로부터의 독립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어간다. 


세상을 만나고 탐험하는 모든 과정은 아이들의 무의식과 자아 형성에 실질적 토대가 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경험되는 부모 삶의 습관, 부모와의 인격적 관계 형성은 아이들의 인격과 자아 형성에 중요한 모판이 된다. 일상의 모든 경험이 영적인 경험, 혹은 영성의 재료와 소재가 되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살도록 주어진 모든 시간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영적 자아, 하나님 형상과 이미지, 내적 자아와 소명, 관계적 사회적 자아 등이 형성되는 실재적인 교육의 시간이 된다. 


그러하기에 모든 부모는 자녀들의 영성 지도자(spiritual director)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녀, 혹은 한 영혼의 영성 형성과 영적 여정에 동행하면서, 온전한 길로 인도하며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영성 지도자의 위치와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하게 된다. 영성 지도자로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다음의 일곱 가지는 부모의 기도와 묵상 가운데 늘 확인되어야 한다. 




첫째, 관계의 기원(Divine Initiation) 


부모라는 역할은 주님이 부여하신 소명임을 잊지않는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은 아이란 존재는 주님이 우리 부부에게 보내주신 선물임과 동시에 손님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아이와의 관계가 주님에 의한 시작되었고. 그 분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이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임을 깨닫는다. 부모에게 있어서 아이는 삶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이 둘 사이의 긴장과 역설 속에서, 아이는 내가 책임져야 할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내게 머물렀다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인식을 늘 확인한다. 손님이 내 삶의 울타리에서 거하는 동안 안전하고 평안하게 느끼게 하며, 자신의 인생의 여정을 출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둘째, 영적 자유(Spiritual Indifference) 


주님이 내게 보내신 손님이기에 부모로서의 나의 기대와 양육 방향을 늘 조심스럽게 확인한다. 아이에 대한 나의 기대치를 내려놓고, 주님이 맡겨주신 아이를 향한 마음을 우리 마음과 영혼에 새기기에 힘쓴다. 내가 원하는 아이를 만들어 내고 인도하려는 의도와 욕망이 절대적 선이 되어서 양육과 교육에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건강한 아이로의 성장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우리 아이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영혼의 창조주이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도록 돕는 것이다. 내가 의도한 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자녀에게 부여해주신 주님의 뜻을 부모로서 먼저 발견하고 수용하여 자녀의 잠재력과 소명의 씨앗이 움틀 수 있도록 기도한다. 


셋째, 산파됨(Being a Midwife) 


영성 지도자로서 부모는 자녀들이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가장 든든한 조력자요 협력자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은 곧 자기 분화(self-differentiation)와 자아 실현(self-realization)을 의미한다. 자녀가 생물학적 성장을 거치며 더불어 심리적 성장을 경험할 때, 자신이 부모로부터 다른 존재이며 독립해야 한다는 인식 과정이 수반된다. 이 자아 형성의 과정을 부모가 먼저 인식하고 준비하여, 건강한 자아 분화가 이뤄지도록 협조한다. 자아분화, 곧 독립된 존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참 자아(true self)를 찾아가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에 따르면,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성장과정에서 겪는 미숙했던 욕망의 분출구가 되었던 여러 이기적이고 파괴적 경험들은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영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감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제 자녀들이 그들의 영성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여행, 곧 참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이 여행은 또한 한 인생에 부여된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녀가 일생의 반려자를 만나며, 직업을 찾고, 인생의 여정을 통해 자아 실현을 이루어내는 결정적 기회가 되는 영적인 과정이다. 이 영적 산통의 과정에 동참하고, 동행해 주는 영적 동반자가 부모이다.


자녀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이 여정을 인도하고 동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영적 자산(quality)은 부모 자신이 먼저, 자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만큼, 내 자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적 은혜를 경험하며, 영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이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부모가 건강한 영성생활과 내적 자아를 추구할 수 있다. 영적 자의식과 성찰을 토대로 나의 '부모됨'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자아 인식을 세워갈 때, 인간으로서의 내 약점과 한계도 받아들이게 되며, 나아가 나의 이런 연약함이 부모됨에 있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다. 더욱 더 참자아를 찾아가는 영적인 여정은 부모됨 안에서 실현되고 확장된다. 즉, 자녀와의 영적 관계와 양육 방향 안에서 참 자아가 실현되어 나갈 때, 부모됨의 소명도 조금씩 실현될 수 있다. 참 자아를 찾아가려는 부모의 영적인 여정과 성찰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들의 참 자아를 찾아가려는 자녀들의 영적 여정에 가장 든든한 조건이며 확실한 양육 방법이다. 



넷째, 거룩한 임재(Sacred Presence)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일상 속에 늘 발견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초월되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 일상의 삶은 아이들이 부모를 보고, 따라하며, 세상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배움의 터전이 된다. 부모는 자신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참여함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Emanuel)을 소개할 수 있게 된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의 임재를 분별하고 참여하는 삶은 우리에게 신앙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 통합하며, 일치시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건강하고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모는 신앙을 현실 안에서 통합하고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물질과 돈에 대한 가치관, 이성관, 건강한 양심, 도덕적 혹은 윤리적 삶에 가치관 등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부모의 삶이 아이에게 영적 삶의 본이 되고, 부모의 일상 영성이 아이들의 영성 형성에 모판이 된다. 


다섯째, 신령한 경청(Holy Listening) 


영성 지도자로서 부모는 경청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경청을 통해 아이들의 내면의 필요를 확인해 나간다. 한국인의 근대적 교육방법에서 부모는 말하는 사람이며, 아이들은 부모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수동적 존재였다. 이 접근은 오히려 자녀의 고유한 성품이나, 건강한 영성을 계발하고 성장시키는데 방해가 되어왔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아이들은 수동적이거나, 객체가 될 수 없다. 자녀들이 내면과 일상 생활 속에서 주님의 임재와 음성을 발견하고 들을 수 있다면, 이러한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성 생활에 있어서 스스로가 이미 주체임을 깨닫게 도울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영적인 여정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부모는 늘 따뜻한 시선과 열린 마음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경험 속 녹아 있는 그들만의 느낌, 생각, 욕망과 필요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와 대화할 때는 열린 질문을 활용하여 그들의 경험과 내면의 이야기, 기억과 감정들을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유용한 대화 방법으로는 비폭력 대화법(nonviolence communication)을 활용하면 좋겠다.  


여섯째, 지혜로운 코치(Wise Coaching) 


아이가 자라면서 홀로 세상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면, 부모는 아이에게 조언과 충고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인생의 험한 경기를 통해 고통스런 경험을 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먼저 찾아와 조언과 지도를 구하기도 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의 미숙한 조언과 권위주의적 지시가 오히려 아이들을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과 배려를 바탕으로 조언과 지도를 하는 부모는 자녀의 궁극적 인도자가 주님이심을 늘 자신의 기도와 마음, 대화 속에 상기시킬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권위적인 자세를 통해 복종해야 하는 규율로 조언과 지도를 선택하기보다는, 삶의 경륜을 통해 얻은 지혜와 전략으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전해주는 부모가 아이들을 지혜롭게 양육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 인생의 선생이요, 코치로서 부모는 자녀의 인생 게임을 치르고 있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자녀임을 깨닫고, 자신의 의도와 조언이 아이에게 절대적일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 나아가서는 신앙을 삶의 현장(게임)에서 실천해 보고, 스스로 찾고 정립해 나갈 수 있도록 부모는 자녀에게 기회를 주고,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코치로서 부모의 역할일 것이다. 아이의 모든 삶에 관여할 수 있고, 자신의 뜻이 자녀의 삶을 항상 이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은 부모의 환상이며 신화이다. 


일곱째, 소망 가운데 기다림(Hopeful Waiting) 


영적 지도자로서 부모는 자녀를 기다려 준다. 기다림을 통해 부모는 아이에게 관계의 주도권을 나눠 주며, 그들이 자발적이고 기쁘게 부모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아이들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약속을 지켰을 때, 부모와의 관계를 신뢰 관계로 성숙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으로 인도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부모는 아이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다시 만나, 그들의 영적인 여정을 점검해 줄 수 있는 만남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는데, 이것은 독립한 자녀들을 둔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기다림 속에 실천하는 데에 있다. 자녀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화가 인간의 시간과 방법에 있지 않다는 겸손한 고백을 바탕으로 일어 난다. 인간의 변화와 성숙의 주체는 오직 창조주이신 주님이시기에 그 분의 시간 안에서, 그 분이 정하신 시간에, 그 분이 정하신 방법으로 아이들이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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