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부른다

아름다움이 부른다


시인 박목월 선생님의 시 중에 「개안」(開眼)이라는 시가 있다.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는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시인은 술에 취했던 것 같다. ‘새 술’(행 2:13)에. 그렇기에 저리 ‘방언’을 쏟아 놓았을 터다. 산문 일색 세계에서 시는 새로운 언어, 곧 방언이다. 시인은 꽃을 ‘불꽃’이라고 명명한다. 아니 호명(呼名)한다. 꽃은, 모든 꽃은, 실은 그냥 꽃이 아니라 ‘불꽃’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꽃’은 사실 ‘불꽃’이기 때문이다. 불인 꽃, 꽃인 불, 꽃불이기 때문이다. 


꽃은, 이 땅의 모든 꽃은 실은 다 불붙어 있다. 그래서다. 꽃을 정말 보게 된 사람은 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 불에 놀라서다. 꽃에 붙어 있는 불.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떨기나무’에도 붙어 있는 그 불에 말이다.


그 불을 볼 수 있으려면 ‘눈이 열려야’한다. 시인은 ‘나이 60에 겨우’그 눈이 열렸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니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보지 못하는’자였으면서 스스로 ‘본다’고 여겨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으니라”(요 9:41)


우리는 정말 ‘보는’자일까? ‘꽃을 꽃으로 볼’줄 아는 사람 말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시인은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노래에 우리는 “아멘!”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고, 혹 우리는 조롱하는 사람은 아닌가? 대낮에 웬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느냐고 성령 받은 이들을 조롱했던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멈춰 세운다. 우리의 숨을 멎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숨이 멎고 말문이 막힌다. 말을 잃어버린다. 할 말을 잃고 그저 보기만 하게 된다. 그렇게 ‘봄’을 찾는다.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가히 죽음(臨死) 체험이다. ‘신’을 만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꽃을 보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있게’하시는 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신은, 모세가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만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분이시요, 또 만물을 ‘있게 하시는’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 10:28) 


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일까? 감히 용안(龍顔)을 올려다보았다고 해서 진노를 사서 죽게 되는 것일까? 성령 받은 시인이라면 달리 상상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게 되는 건,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얼굴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숨이 멎도록’아름다운 얼굴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사람은 숨이 멎는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사(反射)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그렇다. 너무 아름다운 것 앞에 서면 우리는 순간 숨이 멎고 만다. “헉!”우리는 신음소리를 낸다. “아...”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우리말 ‘아름답다’가 이미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온다. ‘그리움’때문이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바다’, 하늘을 그리는 마음 말이다. 


사람은 본래 그 바다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그래서 아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다시 사람이게 한다. 우리 안에 이 그리움을 일깨워줌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우리를 부른다. 자기 밖에 몰랐던 우리를, 세상 밖에 몰랐던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하늘을 향해 불러낸다. 아름다움(to kalon)은 부름(kaleo)이다. 


이 부름을 듣자.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이종태




두란노바이블칼리지 영성학과 여름 특강

"예기치 못한 기쁨(C.S.루이스와 소망의 영성)"



일시 : 2017년 7월 3일 (월) 10:00-16:30

수강료 : 6만원 (6월 26일까지는 4만 5천원)



루이스의 많은 책들을 번역하고, 그의 영성을 전공한 산책길 이종태 연구원이 강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
http://www.duranno.com/biblecollege/view/seminar_detail.asp?smrnum=2192)




세미나소개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루이스는 기독교가 전하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변호했던 변증가이자, <나니아 연대기>같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속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워준 영성문학 작가였습니다. 이번 특강은 루이스의 생애와 작품의 중심주제였던 '소망의 영성'에 대해 살펴보며, 영성과 인문이 만나는 자리로서의 '초월을 향한 갈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마음이야말로 주님앞에서 이 땅을 힘있게 살아가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을 의미로 채워주는 영적 원천임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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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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