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예배당 십자가 밑에 앉아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를 아룁니다. 얼굴 하나에 고통 한 아름, 이름 하나에 눈물이 고이는 까닭은 지금이 사순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흐려진 눈동자, 거절과 배신, 상실의 잔을 마셔야하는 그 씁쓸한 입맛 다심, 세속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자꾸 격려하며 수줍은 미소로 괜찮은 듯 돌아서는 그 뒷모습은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각기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사람인 이상 따라붙은 그림자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우리는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수녀원 입회 2년 만에 얻은 중병

피터 루벤스가 그린 아빌라의 테레사 (출처 :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1515년 스페인 출신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신비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녀는 여러 편의 저술을 통해 기도, 인간 의식의 변형 단계, 그리고 문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또한 테레사는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는 성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점이 그녀를 친숙하게 느끼게 합니다. 테레사는 1562년에 쓴 글, 그녀 스스로 『천주 자비의 글』이라고 부르기 원했던 자서전에서 자기 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각주:1], 당신도 아시다시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적잖은 고생을 겪었습니다.”(자서전40,21)                                   

   여기서 말하는 ‘고생’이란 그녀가 자서전을 쓰던 시기인 40대 후반에 겪었던 개혁수도회 창설을 둘러싼 종교·사회·정치적 핍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테레사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테레사는 이즈음 자신이 겪고 있는 거센 고통, 곧 참아 견디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때로 나는 산다는 것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도 고통도 없이, 통 모든 것에 대해 일종의 냉담 상태와 어둠 속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자서전 40,21)


  테레사는 평생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후 만 2년 만에, 즉 수도 생활 2년 만에 중병을 얻었습니다. “심장의 극심한 아픔은 몸서리 쳐지는 것”이었고, “날카로운 이로 심장을 물어뜯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기운이 전혀 없었고 맥이 풀려 입맛을 온통” 잃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열”, “고열로 말미암아 심경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도록 오그라들기 시작” 했다고 설명합니다. 

   육체적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우리에게 쉴 틈을 허용해 주지 않는 폭군적인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레사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순간도 쉴 수가 없어 마침내 큰 비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고 한탄했습니다(자서전 5,7). 심지어 극심한 발작 후에 3일 동안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고 장례준비를 하고 있던 찰라 그녀의 숨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 테레사는 3년 동안 “둥글게 말아놓은 실뭉치” 같이 침대에 누워서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서 보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잠시 고통이 멈추기만 해도 살 것 같은,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가 있을 때면 병세가 좀 나아지나보다 하고 생각”(자서전 6,1)하며 테레사는 기뻐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의 전환점을 이룬 날, 그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땅바닥을 기어갈 수 있기 시작했을 적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자서전 6,2) 


   투병 생활을 해 보신 분들, 혹은 육체적 고통 속에 계신 분들에게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저는 상상이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공감이, 어떤 분들에게는 간절히 일어나길 기대하는 한줄기 희망으로 들릴 말입니다. 저도 한 30년 전쯤 쇠도 씹어서 소화할 십대 중반에, 학교 등굣길에 꼭 건너야 할 육교 아래 서서 “내가 죽지 않고 저 육교를 올라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움큼씩 먹던 약이 몇 년에 걸쳐 점점 줄어들고, 어느 날 육교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고 난 뒤, 제가 걸어 올라온 계단을 돌아보고 울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끼친 해악은 건강 때문” 

   병에 대해 테레사가 초기에 보인 관점은 그저 받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점으로 일관합니다. 당대는 인내와 오래 참음이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때때로 억압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지만 테레사는 병 자체를 그냥 받아들입니다. 테레사는 “이 기간 동안은 줄곧 모든 것을 완전히 단념한 채로 지냈고, 처음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큰 기쁨마저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달갑게 받고 있었습니다.”(자서전 6,2)고 말합니다. 

   병이 주는 유일한 유익이 있다면, 가장 최소한의 것,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것만을 붙들게 하는 가난한 정신을 갖게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를 하고 지냈던 관계로 언제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해도 달갑게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자서전 6,2) 테레사가 오히려 투병 생활이 끝난 후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를 회고한 것에 비하면, 병상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 가운데 보냈다는 것은 아련한 소녀시절의 풋풋하고 순진한 첫사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것이 육체적 고통을 겪는 동안 얻어야 할 더할 나위 없는 삶의 보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여 순진하기까지 한 가난한 정신상태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얼마나 먼지요! 필요 없는 것들, 부차적인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 단 하나에만 마음을 기울이며 삶을 정돈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지요! 고통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저 끙끙 앓게 만들뿐입니다. 그저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아니면 고통만 벌컥벌컥 들이키느라 숨이 멎을 지경이 되니 말입니다. 

   고통은 철저히 당하는 자의 몫으로만 돌려지는 외롭고 고독한 심연입니다. 도와주고 싶고 돕기도 하지만, 함께 하고 싶고 함께 있지만, 혼자 겪어 내야만 하는 그 영역이 있기에 바라보는 자의 고통도 커져 갑니다. 그러니 고통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겪은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수는 없는 일입니다. 

   혼자 묵묵히 투병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어느 날 혼자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뜻의 일치”를 이루고 있으니 괜찮다던 마음에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병실에 누워 꼼작도 못하던 그녀에게 이른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면서 서로를 깨우는 수녀들의 찬미 소리를 듣고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은 무엇보다도 습관대로 고요 중에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자서전 6,2)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다는 갈망이 병을 고쳐달라는 간절하고 적극적인 기도로 바뀌고, 마침내 테레사는 기적처럼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일이 몰고 온 결과에 대한 테레사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더 잘 섬기고 싶었기에 건강을 원했습니다만, 내 영혼에 끼쳐진 갖은 해악은 그 건강에서 왔던 것입니다.”(자서전 6,4) 좀 더 건강하면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것이라는 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 그리스도’를 만나다.

   병을 털고 일어난 테레사의 이야기로 도시 아빌라가 들썩거렸습니다. 귀족들, 기사들은 기적을 몰고 온 젊고 아름다우며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테레사를 찾아 왔습니다. 모름지기 봉쇄수도원이었지만 종교가 일상인 시대에 수녀원의 응접실은 공식적인 사교 장소였습니다. 특히 180명이나 되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은 대단한 짐입니다. 테레사를 찾는 방문객이 많을수록 희사품도 많아지고 혹여, 귀족의 초청으로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딸려나가는 수녀까지 있으니 입을 몇이나 덜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소망했던 테레사도 “페스트와 같은 기분 풀이” 같다고 스스로 표현한 이런 교제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당시 이런 일은 크게 흠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레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가책을 토로해 보았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괜찮다고만 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한탄했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육체적 질병을 3년 만에 털고 일어난 것과 달리, 내적 고통은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의 성상” 앞에서 회심한 39세까지 계속 됩니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활은 무척 괴로웠습니다. ……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세속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일이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위로를 안겨 주는 반면, 세속 일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적 생활과 거기에서 오는 위로와, 관능적 생활의 향락과 기분 전환이라는 전연 반대되는 이 두 가지를 타협시켜 보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자서전 7,17) 


   하나님과 세속 사이의 괴로움 속에서 테레사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기나긴 세월 동안 시간만 보냅니다. 하나님과 세속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살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해야 할 싸움의 방식이 아닙니다. 테레사는 단지, 세속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자신이 싸운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세속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모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그런 끔직한 일에 대한 자각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십니다. 세속은 무(無)일 뿐입니다. 따라서 전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전부이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기울어지는 것이 우리 싸움의 방식입니다. 선택과 결단을 유보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된 행복을 괴로움이 좀 먹게 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테레사는 우연히 기도소에 놓인 “상처투성이의 그리스도를 표상한 성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테레사는 “그 상처가 말해 주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테레사는 하나님을 향해 삶을 완전히 정향(定向) 짓는 깊은 통회를 경험합니다.(자서전 9,1)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내적으로 고생한 것에 비례하여, 테레사의 결단은 아주 확고하게 나타납니다. 그후로부터 테레사의 영적인 걸음은 눈에 띄게 보폭이 커집니다.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의 문제점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한 테레사에게 이후로는 병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레사는 여러 가지 병을, 그것도 상당히 중한 병을 평생에 걸쳐 앓았습니다. 그렇다고 테레사가 병에 대해 완전히 초연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육체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써야 할 때, 기도를 하고 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간을 두어야 할 때, 테레사는 스스로 육체의 노예가 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테레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과 솔직하게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약함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다시 털고 일어섰다는 점입니다. 테레사는 그때마다 “주님께서 자신을 홀로 두지 않으셨고” 아주 “부드럽게 대해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서전 40,20)

   글머리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 자연스러운 갈망을 시작으로 개혁수도회를 창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테레사의 경우 육체의 질병은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이고, 내적인 고통은 더 나은 삶으로 깨어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었다면, 사역을 위해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내는 즉, 생명을 출산하는 산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방식을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혹자는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합니다만, 만일 그랬더라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을 까닭도 없었겠지요. 분명, 고통은 항상 도전을 제기하는 위험스러운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고통을 미리 두려워할 까닭도 없겠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를 염려하여 미리 보험 들 듯 안전한 환경을 위해 주문을 거는 소아적 신앙생활을 할 일도 아닙니다. 

   저는 테레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겨 쓰는 유비(類比)인 결혼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항상 사랑이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에 눈을 뜹니다. 테레사는 “네 소원, 님을 뵈옴이요, 네 두려움, 그를 잃을까 함이요, 네 고통, 그를 못 누림이요, 네 기쁨, 그리로 갈 수 있음이어야 하나니, 이제야 너는 크나큰 평화와 더불어 살으리라” (수녀들에게 타이르는 말, 69번)고 노래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이 몰고 오는 두려움을 넘어서 테레사는 예수님을 두 눈에 가득 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님을 사랑할 것을 오늘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님께서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이 오면, 님의 사랑에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이 봄눈처럼 깨어나길 청합니다. 


글쓴이  주선영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영성학을 전공했으며(Th.M), 현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과 <모새골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영성 생활에 안내가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테레사의 자서전은 도밍고회의 페드로 이바네즈 신부의 분부대로 쓰여졌습니다. 자서전은 이 신부에게 고백하는 형식의 문체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 사랑을 위해 결연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 로렌스 형제 (1605-1691) 지음, 오현미 옮김하나님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좋은 씨앗, 2006), 114.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난 군대 생활이 좋았다. 무질서 하던 대학 새내기 생활을 뒤로하고, 규칙적인 삶과 규칙적인 식사 속에서 난 내 몸이 처음으로 건강해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처음 몇 주간은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눈동자 하나라도 흔들리면 바로 장교들이나 고참들의 소리와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져 왔다. 훈련소에서 처음 행군 나가서 몇 주만에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던 바깥 세상의 가게며 마을이며, 집들을 보았을 때, 난 처음 탈영을 하고 싶은 강한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참아서였는지 용기가 없어서였는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사격 훈련에 앞서 군기를 잡기 위해서 심한 얼차려를 받았다. 속된 말로 구르고 또 굴렀다. 군복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며 코는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육체의 한계라는 말이 오래간만에 생각나는 날이었다. 무사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땀투성이, 먼지 투성이가 된 훈련병들을 향해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소대장이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 말이 내 군생활을 건강하게 했던 힘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하루 즐기며 견디었고, 제대할 때에는 난 정말 건강해져 있었다. 


그런지가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신앙의 여정은 언뜻 보면 지루하고 더딘 여정 같지만, 어찌 보면 군대보다 더 힘들고 더 농도 깊은 고통의 시간일 때가 있다.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알고 그 속에서 말씀을 붙잡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군인보다 더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 여전히 느끼는 내 모습은 될 수 있는 대로 고통을 피하고 싶고, 두려움에 맞서기를 꺼리는 그런 소심한 나다. 군대에서는 군기가 견딜 수 있는 힘이었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여전히 피하지 말고 감당해야 한다. 그 분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맞서야 한다. 그래서 또 무릎 꿇고 그 분 앞에 엎드린다. 


"주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 소리벼리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마땅한 삶 (안토니우스)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4.05.22 17:58
마땅한 삶


불의와 불법 
몸과 가슴이 짓밟힌 이들의 신음소리가 
5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겠노라고
옛 집을 떠나 온 사람들

소낙비로 전신을 노크하는  
하늘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막 수도승이었던
안토니우스,
예수의 삶을 옹골차게 살아내었구나. 

/ 오래된 오늘 (임택동)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사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안토니우스의 생애》, ch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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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래된 오늘

내일을 향한 오늘의 고난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4.17 03:56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찾았는지 확인하는 길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모든 고난들을 거부하며 투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를 미워할 뿐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난으로부터 빠져다갈 시도(궁리)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Discipleship and the Cross," The Cost of Discipleship, part 1, ch.4.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오늘보다 더 성공하여, 내 자유를 극대화하는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풍요로운 내일이란, 더 많은 돈을 벌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된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이란, 내 능력과 세력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내일이라고, 


세상은 그렇게 현혹하고 강요한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현재의 고난이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생산적이기 위해서,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면,  

내일은 오늘보다 덜 고통스러워하며, 덜 불행해야 하며, 덜 불명예스러워야 한다고. 


오늘은 성목요일(Maundy Thursday)이다. 

내일(Good Friday),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하신다.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큼, 

다가올 고난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고통스러우리라.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며, 장차 올 고난과 운명을 감내하려는 본회퍼의 여정은, 

내일의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오늘의 고난이었으리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안중근의 발걸음은, 

내일 주어질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영적 순례이었으리라. 

본회퍼는 단호하다. 고통받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제자도이다.   


주님, 저는 제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 십자가의 고통에 참예함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제 이웃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오늘 주어진 고난의 열매가 장차 올 영광이 아니라, 내일의 십자가라 할찌라도, 

당신의 십자가 옆에, 그 고통 곁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당신의 길을 철저하게 따르다, 

십자가에까지 이르렀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당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르다, 

만나게 되는 그 십자가를, 

그 고통을 오늘이라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한숨과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감 때문에 다리가 휘청이고 무릎을 땅에 꿇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게 될까? 특히, 그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어쩔 수 없이 꼭 따라 붙는 그림자와 같다면, 나와 당신을 위해 고통을 포기하고 도망치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함께 가자고, 도와 주겠노라고, 나도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자고, 힘을 보태고 격려하게 될까? 아니면, 고통당하는 그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그를 떠나버리게 될까? 《영신수련》 첫 페이지에 실린 오래된 기도문 "Anima Christi"[그리스도의 영혼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 라고.


그리스도의 영혼은 (Anima Christi)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하소서.

그리스도의 성혈은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물은 저를 씻어 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하소서.[각주:1]


Diego Velazquez,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1632)의 부분


      평상시에는 주님과의 관계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서, 제대로 살고 있기나 한 건지 긴가민가 할 때가 많다. 싸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열렬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막상 혼자 쓸쓸히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제자들이 떠나간 깜깜한 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 마침내 십자가 길을 처참히 걸으시는 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고, 주님 곁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고, 주님께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강한 갈망과 용기가 솟아 오른다. 


     "저는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저라도, 저만이라도 그 곁에 머물러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겁도 많고 두려움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거 상관없어요. 저는 주님을 못 떠나요. 안 떠나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던 한 벗의 고백을 들었을때, "Anima Christi"의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저에게 힘을 주소서)"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 우리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을 강하게 깨워내는 것이리라.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따뜻한 봄볕이 부드럽게 녹여내고 새순을 틔워내는 것처럼.


다음 주면 고난주일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을 벗 삼아, 주님의 수난머물러 봐야겠다. 특히, 수난의 현장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삶이 구체적으로 발견되길 청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 해'맑은우리 주선영


  1. 작자 미상, "그리스도의 영혼은" 중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지음, 정한채 옮김 ,《영신수련》, 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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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겸손을 훈련할 때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3.11.05 18:06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상급자]에게 순종할 때에 그것이 어렵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마음으로 잠잠히 고통을 품고, 약해지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7장. 35-36. (서울: KIATS, 2011), 43.


베네딕트의 규칙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겸손의 열두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 제7장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수도자가 높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리고 그 겸손을 훈련하는 방법이 바로 공동체 안에서의 상급자와 동료 수도자들에 대한 '상호 순종'이다. 특히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비록 상급자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 어렵고, 자신의 소원과 반대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통해서 어떤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할지라도 도망치지 않고 잠잠히 그 고통을 품고 감내하는 것이다.


베네딕트의 이러한 가르침은 윗사람의 명령이 부조리하고 불법적이어도 무조건 복종하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기본적으로 수도 공동체(monastic community)를 배경으로 한다. 수도 공동체에서는 '아버지(abba)' 또는 '어머니(amma)'라고 불리는 수도원장이 수도자들의 영혼을 책임진다. 그(그녀)는 수도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구성원들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의 자질과 역할에 대해서 여러 번 그리고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간의 신뢰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무조건적인 순종과 인내'의 이상적인 환경이다.


하지만 이 규칙이 수도원 밖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전혀 관계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나 가정, 직장, 삶의 환경 등에서 상급자(연장자)에게 또는 서로에게 순종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어려운 일,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일, 또 (스스로의 눈에는) 자신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는 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방법을 찾는 데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혹시 주님께서 지금 내가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라. 겸손하며 인내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요나처럼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향 전환을 해야 할 때인지 주님께 여쭈어 보고 깊이 생각하라. 혼자서 기도만 하기보다는 신뢰하는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로 자신의 욕망과 뜻을 합리화하는 것을 피하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세 가지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2.12.01 13:55
  • 요즘 세상에서는 '트라우마'라는 말이 유행이지요. 상처는 트라우마를 주어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는....
    신앙 안에서는 상처가 곧 우리를 낫게하는 치유라는 것.
    신앙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 것 같아 기쁨니다. 나도 상처를 약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12.02 06:37 신고

나는 사는 동안 세 가지 상처를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참된 통회라는 상처, 깊은 동정이라는 상처, 그리고 하나님 향한 갈망이라는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가지 계시'를 체험하고서 평생을 잉글랜드 노리치의 한 교회 부속건물에서 은수자(anchoress)로 살았던 여인 줄리안. 그녀가 1373년 '계시'(showings)를 보기 전에 늘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세 가지 상처"를 지니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통회'(contrition)라는 상처, '동정'(compassion)이라는 상처, (하나님을 향한) '갈망'(yearning)이라는 상처. 


왜 통회와 동정과 갈망이 '상처'일까? 

아마 그것들은 모두 '아픈'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마음 아픔'과 관계된 것들이다. '통회'란 자기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동정'(com-passion)이란 다른 이의 고통(passion)에 대해 같이(com)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영적) '갈망'이란 하나님을 마음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것이다. 


후에 줄리안은 그 세 가지―통회, 동정, 갈망―를 "약"이라고 부른다. "통회는 우리를 정결한(clean) 사람으로, 동정은 우리를 준비된(ready) 사람으로, 갈망은 우리를 존귀한(worthy)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 세 가지는 죄인인 우리를 치료해주는 약들이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 '상처'들이 바로 '약'이다. 

통회하며, 동정하며, 갈망하며 우리 마음이 아파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는다. 내 죄 때문에, 타인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우리 마음이 아플 때, 우리 마음이 찢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기 시작한다. 병들었던 우리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아픈가? 

하나님이 주시는 아픔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아픔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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