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부담 없는 입문서, 아쉬운 연구서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 문필가 ∙ 활동하는 예언자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

키스 제임스 지음 · 김은해 옮김 | 비아 | 2015년


    선교와 영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 초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5)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성공회 출판사 '비아'에서 나온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인데요, 문자적으로 옮기자면 "사명으로 형성된 은둔 수도자: 토마스 머튼, 선교와 영성"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서의 제목에 포함된 "Mission-Shaped" 운동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운동은 Mission-Shaped Church[사명으로 형성된 교회]라는 제목의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2004년 보고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가 서문을 쓴 이 책은 영국 사회의 세속화와 그로 인한 교인수 감소라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서 "선교적인 교회"(missionary church)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 이후로 "Mission-Shaped"라는 형용사구는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 영국 국교회에서 출판되는 많은 문서와 책들의 제목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키스 제임스(Keith James)의 Mission-Shaped Hermit도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각주:1]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영어 단어 'mission'[미션]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주로 '선교'라고 번역되고 있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어려운) '임무' 또는 '과제'라는 의미로 번역 없이 그대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사명' 또는 '천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마태복음 28:19-20)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명'은 일차적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머튼의 글에서 '미션'이라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우리말로 '선교'보다는 '사명'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읽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정작 머튼 자신은 비종교인 또는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선교에 대해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머튼은 그리스도인의(또는 수도자의) 사회적, 도덕적, 시대적 사명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책,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에는 '미션'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선교'와 '사명' 사이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책의 저자 키스 제임스는 '선교'라는 관점에서 머튼을 소개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토머스 머튼이 선교를 지향하는 운동을 점검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8)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입니다. 먼저 장점인 이유는 지금까지 머튼에 관한 책과 글들이 아주 많이 나왔지만, 선교의 관점에서 머튼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글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튼은 선교보다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주제로 더 많이 연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라는 바늘로 머튼의 인용구들을 구슬처럼 꿰매고 있는 이 책은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다소 실망스럽게도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선교에 대한 머튼의 직접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 주고 있지 못합니다. 

    저자는 본론에서 머튼이 수도생활을 통해 깨달은 지혜와 유산들을 (그것들이 선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몇 가지 간략하게 언급한 뒤에, 결론에서 그것들이 오늘날의 선교에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적용' 또는 '유추'하고 있습니다. 키스 제임스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제7장 머튼과 선교: 결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은연중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다른 이를 개종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교회는 다른 종교 집단을 그리스도교 선교를 방해하고 국가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교적 유산을 훼손하는 경쟁자로 곧잘 간주한다. 신앙과 다른 길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 머튼은 진리에 열린 태도를 가질 것을 권했다. 진리는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태도는 자신과는 다른 이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과는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따를 때 교회의 선교는 거듭나며 활력을 얻는다. 머튼은 교회가 행동만큼이나 침묵과 관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침묵은 행동과 예언자적 증언을 이끌어 낼 수 있다. (65쪽)

곧, 타종교인을 개종의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열린 태도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교회가 선교 활동을 할 때에는 활동 자체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고, 침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예언자적 증언이라는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 견해에는 위의 구절에는 (이 책의 다른 구절들에도 종종 그런 부분이 발견되지만) 머튼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관상과 활동의 관계,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머튼의 사상을 가져와서 저자가 선교의 관점에서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맞는 것 같기도 하나 다른 한 편으로는 양복 옷감을 잘라서 한복에 갖다 붙인 것과 같은 부자연스러움과 논리적 비약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진리는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은 문맥상 모든 종교에, 또는 모든 종교의 바깥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입니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머튼의 어떤 글에 근거해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머튼은  타종교에서 수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자연적인 깨달음과 하나님의 선물로 얻게 되는 초자연적인 비전을 구분하였고, 타종교와 대화할 때에는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경험적 차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시도한 것처럼 머튼의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선교의 영역으로 가져와 적용하기 위해서는 짧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신중하고 정확한 해석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저자도 위에 인용한 구절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지역 교회가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를 명료하게 도출해 설명할 수는 없다."(65쪽)라고 말하고 있으며, 몇 장 뒤에서는 "머튼의 통찰과 비전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직 이를 행할 때에만 알 수 있다."(68쪽)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키스 제임스는 이 책에서 머튼의 영성이 오늘날의 선교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 지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는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선교를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추상적인 선언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68쪽).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읽은 후에 남는 가장 진한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본론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경청', '사랑', '침묵', '예언', '초연함' 등에 관한 내용들은 이미 머튼에 대한 다른 책들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머튼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정보가 발견되는 점, 때로는 인용문이 머튼의 것인지 다른 인물의 것인지 책 뒤에 있는 미주를 찾아 보지 않으면 본문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 점, 그리고 (이것은 한국어판 편집 과정에서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인용구는 미주의 참고문헌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점 등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망은 머튼을 여러 해 동안 공부해온 저만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머튼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면, 100여 쪽 밖에 되지 않는(원서는 28쪽) 짧은 그 내용들이 쉽고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이 책은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아서 손에 들고 다니기도 좋고, 독서에 대한 부담도 줄여줍니다. 또한 사실 이 책에 인용된 머튼의 많은 구절들은 문맥에서 그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더라도, 그 구절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사고와 성찰의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뒤에 실린 토마스 머튼에 대한 참고도서 소개는 머튼 입문자들에게 유용한 정보임에 틀림 없습니다. 또한 번역자와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국내에 번역된 머튼 참고도서에 대한 소개까지 추가해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외 이 책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각 장의 주제와 관련한 성찰을 위한 질문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서에서는 각장의 마지막에 질문이 달려 있지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각 장의 처음에 질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먼저 그 장의 본문을 읽은 후에, 그 질문을 가지고 숙고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한다면 글을 마음에 새기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키스 제임스가 이 책에서 머튼의 선교 이해를 밝히는 데에는 그리 성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자는 '선교와 영성'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미셔널(또는 미션얼) 처치(Missional Church)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영국의 "미션 쉐이프드 처치 운동"과 비슷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해외 선교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갱신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각주:2] 이와 관련하여 선교와 영성, 또는 교회 갱신과 영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보다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 외에도 출판사 '비아'에서는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1932-1996)이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등에 대한 짧은 입문서들을 시리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찾아 보니 모두 영국 국교회 출판사인 Grove Books의 영성 시리즈를 번역 출간한 것이네요. 이런 이유로 비아에서 머튼의 입문서로 키스 제임스의 책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굳이 Grove의 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면, 역시 성공회 작가인 전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의 A Silent Action: Engagements with Thomas Merton(Fons Vitae, 2001)을 번역 출간하는 것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훨씬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수도자와 사회 비평가로서의 토마스 머튼을 정교회 신학자 파울 에브도키모프(Paul Evdokimov: 1901-1970)와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시 비아에서 머튼에 관한 책을 한 권 더 출간할 계획이 있다면, 윌리엄스의 이 책을 고려해 준다면 고마울 것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1. "Mission-Shaped Movement"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Angus F. Stuart, review of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 The Merton Seasonal 35 no. 4: 40. [본문으로]
  2. 2. 참고. http://goo.gl/5GjlxI; http://goo.gl/SyCFSB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체험' 이상의 것 (본회퍼)

한 줄 묵상 2015.06.06 08:4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7). 우리는 하나님 '체험'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 받는다.  '은혜 체험'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다. 은혜는 은혜 '체험' 이상의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무엇이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Spiritu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 55. 


자신에게 하나님 '체험'이 부족하다며 근심하는 이들에게 주는, 루터교 목사 본회퍼의 영적 조언이다. 


하나님의 임재/현존을 '느끼는' 것은 귀한 체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현존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말씀'에 입각해 하나님의 임재/현존을 '믿는' 이는, 

믿고 걷는 이는 

하나님의 임재/현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믿음은 걷는 것이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 만을 가지고서 늘 걷는" 것이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다면,

정말 '믿는 이'다.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재의 수요일, 그 분을 닮다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5.02.17 10:06

우리 안에서 형상을 취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고, 그리스도 자신의 형상이다(갈 4:19). 그것은 우리 안에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기까지 우리 안에서 일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된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변모된 자의 온전한 형상이다.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지음, 이신건 옮김《나를 따르라》(서울: 신앙과 지성사), 372.


"인간이 된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변모된 자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변화되어 내 삶에서 그분을 나타내기 원한다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하고, 나를 게워내고 나를 죽여야 한다. 


그런데 어찌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기 원하다고 하면서, 

어찌 그분을 닮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살려하고, 더 크게 목소리를 내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하고, 더 많이 박수받으려하면서 

비루하게 살아가는가. 


재의 수요일, 

이제 그 비루한 냄새 걷어내고 

그분을 내 그릇에 담아 

그 형상을 닮자.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너희는 이미 소금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9.30 14:38

예수는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했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호소하지도 않았다. 원하든 거부하든, 자신들에게 주어진 부름의 힘 안에서 제자들은 소금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지음, 이신건 옮김, 

《나를 따르라(Nachfolge), (서울: 신앙과 지성사), 121. 


대인 관계에 있어서 많은 오해는 대상의 말을 '경청'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 Contemplative Listening)하지 않음에 있다. 잘 듣지 않고 자기 편의로 해석해서 짐작하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도 우리는 '경독' (공경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Contemplative Reading)하지 않고 제 편의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본회퍼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너희는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라고 오독(誤讀)하지 말것을 권면한다. 왜 본회퍼는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오독하지 말라고 했을까?


소금이 되려고 애쓰고 애썼지만 소금이 되지않으면 (그렇다고 느끼면), 실망하고 좌절하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소금이 되려고 애쓰고 애써서 소금이 되면 (그렇다고 느끼면), 자기 의를 주장하고 우쭐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미 소금이다. 무엇을 해서 소금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너는 이미 소금이다. 

지금 네가 있는 그 현장(가정, 교회, 학교, 공동체)에 아주 필요한 소금이다.


그래! 더 큰 소금이 되려하지 말자! 더 쎈 소금이 되려하지 말자! 지금 주어진 부름에 맞는 소금임을 직시하자. 이미 소금된 너를 도닥여주고, 보듬어주고, 많이 애쓰고 있다고 정말 수고 많다고, 네 맛으로 이만큼 세상이 웃고 있다고 말해주자. 소금이 되려고 무엇을 하지않아도, 너는 이미 소금이라고 말해주자/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원수와 함께 사는 삶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8.28 14:17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 그가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수도원적인 은둔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 살아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1.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고 즐겁다고? 정말?

난 반댈세!! 


형제자매, 공동체로 함께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름답다 했는가? 그것은 공동체를 그리고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자들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마치 습지가 땅의 공해와 더러운 먼지를 흡수해 정화시켜주듯이,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공동체가 아름답다고 한 것이다. 


본회퍼는 그런 원수들을 품는 사람들을 '제자'라 부르고, 그런 제자들이 있는 곳을 '공동체'라 부른다. 내게 편한 사람, 내게 잘해 주는 사람과 함께 누가 못 지내겠는가? 말씀을 이루는 것은 우리 안에 원수를 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도 다짐한다. 내 원수를 품기 위해 원수들 가운데 살아갈 것을. 그것은 그들도 나의 원수된 모습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주었기 때문이다.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일상은 하늘에 닿아있는 일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7.24 04:15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상에서 사랑과 자비의 일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말씀을 기쁘고도 믿을 만하게 선포할 수 있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04.


깨닫고 느끼고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이 바로 나 자신인 줄 착각할 때가 많다.

기독교를 전하며 복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한다고 해서 그 일이 내가 그 복음 안에서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고전의 명문을 소개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 강단에서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목회자들 역시

좋은 신학 지식을 갖추고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설교문을 생각해 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항상 긴장하며 먼저 힘써야 할 일은

일상이 하늘과 맞닿아 있음을 알고, 그 일상을 향기롭게 일구어 나아가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잿빛 이론과 말에 가두어져 버리고 말것이다.     


/ 오래된 오늘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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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한 오늘의 고난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4.17 03:56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찾았는지 확인하는 길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모든 고난들을 거부하며 투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를 미워할 뿐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난으로부터 빠져다갈 시도(궁리)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Discipleship and the Cross," The Cost of Discipleship, part 1, ch.4.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오늘보다 더 성공하여, 내 자유를 극대화하는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풍요로운 내일이란, 더 많은 돈을 벌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된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이란, 내 능력과 세력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내일이라고, 


세상은 그렇게 현혹하고 강요한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현재의 고난이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생산적이기 위해서,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면,  

내일은 오늘보다 덜 고통스러워하며, 덜 불행해야 하며, 덜 불명예스러워야 한다고. 


오늘은 성목요일(Maundy Thursday)이다. 

내일(Good Friday),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하신다.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큼, 

다가올 고난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고통스러우리라.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며, 장차 올 고난과 운명을 감내하려는 본회퍼의 여정은, 

내일의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오늘의 고난이었으리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안중근의 발걸음은, 

내일 주어질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영적 순례이었으리라. 

본회퍼는 단호하다. 고통받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제자도이다.   


주님, 저는 제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 십자가의 고통에 참예함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제 이웃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오늘 주어진 고난의 열매가 장차 올 영광이 아니라, 내일의 십자가라 할찌라도, 

당신의 십자가 옆에, 그 고통 곁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당신의 길을 철저하게 따르다, 

십자가에까지 이르렀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당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르다, 

만나게 되는 그 십자가를, 

그 고통을 오늘이라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내가 무너져야...(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3.24 20:33


기독교 공동체 삶에 처음 들어오게 된 그리스도인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대한 특정 형상을 갖고 들어와 그것을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같은 꿈들을 곧바로 깨뜨려 버린다. 다른 사람에 대한 커다란 실망, 그리스도인 전반에 대한 실망,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이 우리를 짓누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참된 기독교 공동체를 알아가도록 인도하신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31.


서울에 있을 때 몸 담았던 교회는 기존 교회들의 구조와 행태에 문제의식을 갖고 소위 평신도들이 모여서 시작된 공동체 였다. 자연스레 각 성도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교회는 최소한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특정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그 형상을 이루고자 소망과 꿈을 지닌 채 교회생활에 헌신을 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꿈들이 더디 이루어지고 또 깨어지면서 실망과 불만이 쌓여 갔다. 사람에 대한 실망, 교회에 대한 실망,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반응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었다. 소위 더 나은 교회로……. 심지어 기독교를 등지는 이도 있었다. 지금 이들을 조금이라도 나쁘게 생각하거나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다. 당시 어려웠던 국면들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더라면…….

본회퍼는 이야기 한다. 이러한 실망과 좌절을 통해서라야만이  참된 공동체를 알게 된다고. 우리 자신들이 무너져야 만이,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우리의 어젠다가 내려져야만이 비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만이 유일하게 우리 사이에서 역사하실 수 있기에……. 그는 덧붙여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보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 자신을 정직하고 진지하며 희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 결국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31쪽) 

한국 개신교가 피폐해 짐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 대안적인 교회와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와 움직임들이 활발하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전반부에는, 이런 움직임에 관계되신 분들이 새겨 볼 말씀이 많다./ 오래된오늘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찬 바람이 불면, 그대 무슨 생각하시나요? : 본회퍼의 《옥중서간》

2013년 12월의 추천고전


찬 바람이 불면, 그대 무슨 생각하시나요?

: 디트리히 본회퍼의《옥중서간》


 

이 달에 함께 나누고 싶은 고전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옥중서간》이다


본회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지가 벌써 68년이 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신학이 녹아 있는 옥중서간》은 작금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더욱 회람되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특히 한 대학생의 대자보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의 물음은 예외 없이 우리 기독인들이 답해야만 하는 경건과 저항에 관한 물음이라고 하겠다


찬 바람을 견디다 못해 이미 얼어붙은 농토처럼 굳어 있는 우리네 영혼에 경건의 의미세상에 대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책, 옥중서간》! 이 글에서는 먼저 본회퍼의 생애과 배경을 다루고, 그의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한 후에옥중서간》에 나타난 그만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을 다루고자 한다.

 

디트리히트 본회퍼는 1906년 독일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아버지 카를(Karl)과 어머니 파울라(Paula)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학적 전통이 유명한 튀빙겐(Tubingen)에서 공부했으며 <성도의 공동생활(Sanctorum Communio)>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3년 히틀러 폭정하에 독일 교회들이 히틀러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에, 본회퍼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세워 나치에 대항했다. 그 후, 본회퍼는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의 권유로 뉴욕으로 건너갔지만 내가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조국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다시 재건될 때에 나는 내 조국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조국 독일로 돌아 간다. 계속되는 반 나치 운동을 펼치던 본회퍼는 1943년에 체포되어 테겔 형무소(Tegel Prison)에 수감되어 2년을 지내고 광복을 몇 달 앞둔 1945 4 9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운명을 다하고 만다. 이 시기에 그는 부모 그리고 절친인 베트게(Bethge)와 그의 원숙한 신앙을 교류하게 되었고, 또한 기도문과 시 그리고 다른 에세이 등을 써 보내게 된다. 그의 서거 후, 베트게가 그의 글들을 모아 정리하였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의 손에 안긴 옥중서간》이다.

 

옥중서간》에 녹아 있는 본회퍼의 사상, 즉 ‘(머리가 커져버린) 세상에 대한 이해 (The secular interpretation)’, ‘비종교로서의 기독교 (Religionless Christianity)’ 그리고타자를 위한 기독교 (Being there for others)’는 그의 철학적, 신학적 이해를 보여주는 주요한 개념들이다.

 

먼저, 본회퍼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영향하에 있다. 딜타이에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 자신의 주체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신의 존재를 긴급할 때 부르는 임시방편의 존재나 자기 편의를 위해 임의로 쓰는 존재로 더 이상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딜타이는 신의 존재를 정치나 법 그리고 일반과학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본회퍼는 이런 딜타이의 영향으로 성인이 된 세상(A World come of age)’을 언급하였다. ‘성인이 된 세상의 의미는 이미 머리가 커져 버린 세상을 의미하는데, 이는 더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도 않고 의지하려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본회퍼는 또한 칼 바르트(Karl Barth)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칼 바르트는 종교적 선험성(Religion a priori, 경험 이전의 직관 혹은 감정)에 빠진 자유주의자들의 모순을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이 믿음과 신학의 영역을 감정에 국한시키고 형이상학적으로만 치부하며 세상의 일들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다고 비판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본회퍼는 <옥중서간>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약점은 그들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자리를 결정할 권리를 세상에 양보했다는 것이다그들은 세상과 교회의 싸움에서 비교적 쉬운 길을 선택했다” (180)[각주:1]  

 

본회퍼는 바르트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또한 바르트의 실증주의적 입장을 비판했다. 즉, 바르트는 종교적 선험성으로 치닫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였지만 실제적으로 아무런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바르트]는 교의학적 측면이나 윤리학적 측면에서 어떤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 이것 때문에 그의 계시신학은 실증주의적[경험과 실증적 기반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는 주장]이 되었다”(181).

 

이런 딜타이의 철학에 근거한 성인이 된 세상이해와 바르트의 종교적 선험성을 극복하려했던 신학적 이해가 그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인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타인을 위한 기독교(Being there for others)’를 만들어 내었다. 이 본회퍼의 이 두 용어 안에 들어있는 경건과 저항의 영성은 (종교적 선험성을 비판했지만 아무런 방법을 말하지 못한) 바르트와 달리,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예수의 길을 보여주는 현장의 영성이다.

 

그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을 나타내는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타인을 위한 기독교(Being there for others)’는 무엇인가? 딜타이(Dilthey)의 철학적 개념에 영향을 받은 본회퍼는 기존의 종교의 개념 - 라인홀트 지베르크(Reinhold Seeberg)나 칸트(Kant)의 선험적 개념, 즉 임시방편의 신 또는 복을 주는 신 - 을 거부하고 삶의 매 현장(정치, 입법, 자연 과학등)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따르는 비종교적 행위를 경건이라고 불렀다. 즉 기존의 종교 개념은 끝이 났고 삶으로 종교개념’ – 비종교적 개념 - 만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우리는 정말 비종교의 시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정말 종교적이기를 거부한다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의 주인이 아닌 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153-4).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종교를 하자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세상 안의) 새 삶으로 초대하기 위해서이다(199).

 

 

그래서 그는 인간들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 혹은 자기가 자기 꾀를 가지고 고전하다가 안 되면 다급하게, 슈퍼맨을 부르듯, 부르는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에게 이것은 신앙도 경건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함이 아닌 하나님의 약함과 고통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인간의 인식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라든가 (대부분 본인들이 치밀하지 못하거나 자신들이 게을러서 생기는 경우지만)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할 때 신을 찾곤 한다. 사실 이런 신은 대부분 기계장치의 신’ (deux ex machina)이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거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일 때만 이런 신을 부른다(154).

 

교회는 인간들 자신들이 해보다가 안 되면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삶의 끝자리가 아닌, 삶의 중심에 세워져야 한다(155).

 

마태복음 8장 17절은 그리스도가 그의 전지전능함으로 우리를 돕지 않으시고 그의 약함과 고통으로 우리를 돕고 계심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196).

 

  

이런 기존의 선험적 종교개념을 거부한 본회퍼는 그의 매 삶 속에서 '비종교적' 행보를 걷게된다. 그리고 이런 삶은 고통받는 타인과 함께 있는 행동(프락시스 praxis)에서 구체화된다. 고통을 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그의 비종교적 기독교의 경건은 가해자들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본회퍼는 예수님의 경건 역시 세속적 삶에 기반한 타자를 위한 삶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타자를 위한 삶은 기득권들에게는 저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세속적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세상의 무신성(ungodliness)을 어떤 방법을 써서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신성화해서도 안 된다 (198).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는 절대적 변화의 경험이다. 이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험이다(209).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고 가장 힘이 있고 가장 좋은 이미지로써의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가 거하는 현장에 참여하는 것을 통한 이웃과 함께하는 실재의 행동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이다. 그 하나님은 동방의 제의 종교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괴하거나, 혼돈적이거나, 무서운 야수의 모습도 아닌 그저 타인을 위한 인간으로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저 이웃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다(210).

 

 

옥중서간》에 나타난 본회퍼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그저 선험적으로, 추상적으로, 현실도피적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게하는 그런 종교를 거부하는 비종교적 영성을 지니고, 가장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고통주는 자들에게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외칠 수 있는 저항 정신을 지닌 자였다. 박근혜 정부하에서 살아가는 기독인들이 참으로 답답해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숨통을 터줄 수 있을까? 로마서 13장 1절을 들이대며 무조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의 사람, 본회퍼를 통해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깃든 경건과 저항의 영성이 팍팍한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을까?/ 이경희




옥중서간 - 디트리트본회퍼

저자
에버하르트 베트게 지음
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 1995-08-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잘못된 국가 권력과 신앙인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목숨을 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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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글에서 인용하는 《옥중서간》본문은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ed. Eberhard Bethge (SCM Press, 1967)의 본문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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