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생각을 태우소서

한 줄 묵상 2014.11.16 15:57

어떤 형제가 한 운둔자를 찾아와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생각이 저를 너무도 괴롭힙니다.”

은둔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가공할 무기,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던져버리고, 대신에 갈대로 만든 막대기, 곧 사악한 생각을 손에 쥐고 있구려. 다시 불을 움켜쥐시오. 불을, 가공할 무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움켜쥐시오. 그러면 사악한 생각들이 접근할 때에 마치 불이 갈대를 사르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것들을 온통 파괴할 것이오. 악한 생각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압도할 수 없소이다.”  

- 사막 교부들 지음, 배응준 옮김, 《깨달음》, (서울: 규장, 2006), 88-89.


꿈에서 이 분이 등장한 게 벌써 세 번째이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내 꿈에 등장하시는 분도 드물다. 현실에서는 교제할 수 없고, 소통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분이지만, 다행스러운 건 꿈에서 이 분과 유익하고 좋은 교제의 시간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나 융의 이론에 따르면, 꿈은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그대로 적용해서 해석하자면, 그 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고 대화하고 싶은 내 기대감과 갈망이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고 단절을 느끼기에 꿈에서라도 내 무너진 욕망이 위로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 꿈을 통해 내 안의 관계와 소통에 대한 갈망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갈망의 기저에 더 깊은 열망(desire)이 있는지 성찰해 본다. 인간에게 관계는 본능적인 갈망이기도 하지만 이 갈망이 얼만큼 순수한 것인지는 오직 내 자신 스스로만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분과의 관계를 복원한 뒤에 내가 얻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은가? 그 분의 명성과 사회적 위치를 통해 내가 덕보려고 하는 의도는 없을까? 우리 사회에서 관계는 재산이라고 하는데, 내 기대치는 혹시 내 재산을 더 늘리고 싶은 욕심인가?

사막의 은둔자는 내 영혼을 해부해 보길 원한다. 내 욕망과 갈망, 기대감의 기저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는지! 삶과 인생의 주권자를 하나님으로 말로는 선포하면서,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지는 않는가! 

“주여, 성령의 불을 드소서. 거짓되고 허망한 욕망의 갈대는 불사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주소서!"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백투더클래식 2014.03.04 03:52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생의 절정의 순간이 있다.” 테이블 위에 얹힌 진분홍 장미꽃의 도드라진 자태는 마치 이런 말을 건네 오는 듯하다. 도시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들은 아마도 그런 절정을 꿈꾸며 모이고 또 모였으리라. 많은 도시인들의 가슴에는 더 많은 소유와 축적은 생을 빛나게 해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듯하다. 이 글귀의 끝자락에 도종환의 시 한 구절은 의문부호를 하나 붙여 놓는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 드는 날일부.

 



떠나온 사람들


        버림과 떠남으로 생의 절정을 향해간 사람들이 있었다. 주후 3-6세기경,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비옥한 생활 터전을 버리고 훌쩍 떠나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구현하고픈 열망으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와 이야기들을 모아서 담아 놓은 책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숭앙했던 스승들의 금언들과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의 모태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각 금언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상황 가운데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어진 교훈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교훈들이 약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사막의 남녀 수도자들은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사막 수도자의 원조 격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356)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듣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어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른 사람들의 귓가에도 울렸다.


        이들의 떠남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자리는 정상적이지 않고 현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움직였다. 그들 당시 기독교회는 사막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황제까지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권력과 재물의 위력 앞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연했던 혹독한 핍박과 순교는 사람들에게 한 주인을 섬기도록 신앙의 절대성을 요구하였지만,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진 이후에는 오히려 신앙이 삶의 한 조각으로 전락하면서 영적 긴장감과 절박함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처럼 교회가 사막같이 메말라져만 갔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워 올린 사람들이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었다이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 것은 그들 나름의 보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화는 세상 가치관을 확실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압바 히페레키오스가 말했다. “수도자의 보물은 자발적인 가난이다. 형제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자. 안식의 시간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20.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영적인 절박함이 이처럼 포기와 가난의 삶으로 떠나게 했다. 떠남은 말 그대로 문제점들의 나열이나 예리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기 있는 행동이다. 간절한 염원이 스며있어야만 일어나는 삶의 양태인 것이다. 간절한 염원은 수도자적 삶을 낳았고, 수도자적 삶은 사막의 꽃, 즉 하나님의 향기 나는 사람들을 잉태했다.

 


사막에 핀 꽃


        사막은 메마르지만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강같이 흐르는 곳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불꽃 속에서 또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과 강렬한 대면을 가졌던 곳이 광야였다. 세례 요한이 외친 곳도 광야였고,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곳도 광야였으며, 바울 역시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는데 그것도 광야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여정(고전 10:11)의 한 형태라고 가르친다. 이들 모두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대끼며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었고, 때로는 사탄과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 형성되고 꽃을 피웠다. 사막의 수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막에서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열망으로 채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줄여나가는 고행과 침묵, 규칙적인 기도와 자신을 성찰하는 삶에 투신하였다. 이 모든 훈련에는 절제와 분별이 밑받침 되었다.

 

한 원로가 오이가 좀 먹고 싶었다. 그는 오이를 가져다가 그걸 눈앞에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욕망에 지진 않았으나, 스스로 벌주면서 그 욕망을 뉘우쳤던 것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79.

  

      수도자들은 세상을 떠나옴으로써 상대적으로 외부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지만,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절제하며, 깨어 분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그 유혹에 흔들리는 내면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항상 속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생활한다는 경각심을 지닌 채, 삶의 모든 조각들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원했다사막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가 어렵고, 생명이 있는 존재는 항상 존립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친근한 곳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안팎의 연약함 때문에 거룩한 삶을 단 하루라도 지탱해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했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수도자들은 물과 빵이 아닌 겸손으로 살아야 함을 체득해야만 했다.

 

복된 신클레티케가 말했다. “쐐기가 없으면 배의 나사를 조이는 것이 불가능하듯, 겸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302.

 

        유혹을 이기기 위해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겸손과 자비와 인내라는 꽃들을 피워나갔다. 사막은 아프지만 치료를 제공해 주었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을 던져다 주었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그들이 평생 걸쳐왔던 옷가지들을 벗기기에 충분하였다. 감정과 지식에 치우친 껍데기와도 같은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만남은 이글거리는 햇볕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져 내렸다. 뜨거운 숨결을 지니신 하나님과의 대면은 영혼의 가식적인 껍데기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땅속에 깊이 박힌 단단한 바윗돌처럼 확고하게 안다고 믿어왔던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다밤하늘이 쏟아놓은 뭇 별들보다 많은 분심들과 유혹들이 자신들의 호흡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이것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위협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자신이 얼마나 목이 뻣뻣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현존과 천상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회개의 삶은 더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로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디든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눈물과 애통이 뒤따라야 한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61.

 

애통함과 눈물 속에 그들은 다듬어져 갔다. 사막은 이처럼 표면적인 나가 아닌 근원적인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궁극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겸손과 환대, 자비와 인내가 싹터 나오면서 사막 곳곳에 꽃이 만발하였다. 이 같은 생생한 체험들이 깊어져 사막에 영적인 스승(Abba, Amma)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의 말 한 마디는 타들어가는 제자들의 목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 왕과 법관들도 그 지혜를 듣기 위해 사막으로 찾아 왔다. 결국 나일강의 넘쳐나는 물이 사람들의 타는 가슴을 해갈시켜 준 것이 아니라, 건조한 바람이 가득한 사막이 사람들과 도시에 생명수를 공급해주었다.



 

절정에 서는 떠남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면면이 살펴보면 한결같이 교회 토양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간다는 내용이다. 생명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증상이 만연하다는 암울한 진단이다. 사막화가 먼 나라 몽골에서만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막화되어가는 한국 교회에 생명수가 절실하다. 생명수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 저항은 과거 교회의 사막화에 저항하여 사막으로 떠났던 수도자들처럼 우리의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결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권력과 성공과 명예와 부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새 땅을 밟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황폐화는 완연하다. 하지만 만약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그리고 공동체의 사막을 찾아 떠난다면, 그래서 그들이 과거 이집트 사막이 수도자들로 도시를 이루었던것처럼 많아진다면, 한국 교회는 떠남을 통해 피어나는 새로운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지금 이 자리는 어떤 곳인가? 지금 이 자리를 저항하며 사막을 향한 떠남이 있었던가? 나의 사막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일상에서 나는 무슨 꽃들을 피워내고 있나? 우리야 말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사막의 독방(cell)에 거하며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수도자들이 스승에게 찾아와서 절박한 심정으로 외쳤던 말,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그러면 우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건져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한 원로가 말했다. “말만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이 많다.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200.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4 : 평화와 기쁨 (컬른의 브루노/정호승)

한 줄 묵상 2013.09.13 02:53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컬른의 브루노는 불모의 땅 사막, 어떤 위로도 자라지 않을 것 같은 메마른 곳에 역설적인 평화와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쟁과 다툼과 분주함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고 욕구를 채우려는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의 현란한 유흥과 최신 과학기술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그러나 결코 그러한 것들로는 대체될 수 없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브루노의 시대에 이러한 평화와 기쁨이 '지리적인 사막'으로 옮겨 간 이유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실존적인 사막'을 쫓아 내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현대인들도 인간적인 의지와 힘으로 도시를 개발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도시 속의 사막을 없애려고 한다.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사막으로 담대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사막에 들어가는 자, 사막에 거하는 이들은 자신의 외적 자아와 또는 악한 영과 고생스러운 전투를 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며(딤후2:3-4[각주:1]),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빌3:12-14[각주:2])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막에서의 참된 평화와 기쁨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너무나 쉽게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쉽게 얻은 즐거움과 평화는 아침 이슬보다도 더 빨리 사라지고 만다. 


이 글과 함께 정호승 시인의 <물 먹는 법>이라는 시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역설적으로 목마를 때에는 오히려 소금 같은 사막의 모래를 마시라고 권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절벽을 깨뜨려 마시는 물은 하나님께서 사막의 바위를 깨뜨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신 사건(출17:1-8, 민20:1-13)을 연상시킨다. / 권혁일



물 먹는 법


목마을 때 오히려 사막을 마셔라

소금 같은 사막의 모래를 마셔라

목마른 낙타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걷다가

잠든 사막의 별을 마셔라

나는 오늘 사막에 떨어진 별 하나 주워

별 속에 출렁이는 바닷가

새들이 마시는 물을 마신다

새들이 알을 낳은 절벽을 깨뜨려

절벽의 물을 마신다


정호승, 《여행》(서울: 창비, 2013), 84.



  1.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본문으로]
  2.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3 : 바쁜 여가, 조용한 활동(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7.18 16:08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컬른의 브루노는 사막에서의 수도 생활을 '바쁜 여가'와 '조용한 활동'으로 묘사한다. 보통 '여가(leisure)'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즐기는 시간을 말한다. 그런데 '바쁜 여가'라니!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가(otium)에 대한 고대 사람들의 생각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때에 여가란 공적인 활동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거나 완전히 은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공의 선을 중시하던 이들에게 이런 여가는 결코 한가함 속에서 늘어지는 '게으름'이어서는 안 되었다. 고대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명예로운 여가(otium honestum)' 또는 '품격있는 여가(otium liberale)'는 공공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학적, 철학적 탐구를 의미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는 용납 가능한 여가는 역설적으로 활동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공적인 일'과 '여가' 사이의 긴장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도 흘러 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긴장을 기독교적인 바탕에서 풀어내면서 여가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여가는 관상(contemplation)과 성경 연구를 위한 선행조건이었으며, 하나님 나라 추구를 위한 환경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대의 기독교 작가인 놀라의 파울리누스(Paulinus of Nola, c.354~431)와 비슷하게 여가를 수도생활과 관련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생활을 '성스러운 여가(sanctum otium)'로 묘사하였으며, 수도자들이 게으름과 한가한 잡담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여가는 활동적이다. 


컬른의 브루노가 말한 '바쁜 여가(otium negotium)'는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세상에서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사막으로 들어가 고독과 관상에 속에 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한가하고 게으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바쁜 여가이며 조용한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브루노가 말하는 조용한 활동은 외적인 수도 생활 뿐만 아니라, 기도 안에서 정점을 이루는 내적 활동을 의미한다. 실제로 브루노는 당대의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며 행정가였지만, 거의 오십 세가 되었을 때에 대학과 교회에서의 모든 직책들을 내려놓고 몇 명의 지인들과 함께 사막으로 은거하였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자신들의 물러남이 세상으로부터의 이기적인 도피나 열매 없는 게으름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한국은 휴가철이다. 굳이 휴가를 운운하지 않아도, 속도가 빠르고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많은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많은 이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균 수명의 연장과 더불어서 우리가 은퇴 후에 보내야할 시간도 더 길어 졌다. 여가 시간 또는 휴가 기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한 것처럼 성경을 연구하며 바쁘게 보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브루노와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여가, 휴가, 은퇴가 게으름 속에서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여가는 좀 더 깊이 있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데에 사용되어져야 한다. 사막이 거룩한 여가를 보내기 위한 적당한 장소인 이유는 다른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이 고립 속에서의 성경 읽기와 기도만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서 열매맺는 공적 활동을 위해서도 사적인 고독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고독은 게으름이 아니라 '바쁜 여가, 조용한 활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여가, 휴가 또는 은퇴 계획 속에 고독 속의 독서와 기도를 넣어 보면 어떨까?  다시 말해 지리적인 사막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사막을 찾아 가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또는 평소에는 일상에 매여 하지 못했던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일을 실천하는 계획을 세워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품격 있는 여가 속에 사막의 열매인 '쉼'이 있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2 : 맑은 눈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20 10:28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생명까지 위협 받는 불모의 땅 사막, 이곳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 맺히는 두 번째 열매는 '맑은 눈'이다. 사막에 들어 오기 전, 안목의 정욕(요한일서2:16)을 따라 살던 이들도, 또는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을 좇다가 시력을 잃어 버린 이들도, 그리교 교만, 의심, 미움, 세상 염려로 눈이 흐려진 이들도 사막에서는 금욕과 훈련을 통해 맑은 눈을 얻게 된다. 마치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수도자의 눈을 가리는 것들이 벗겨지고, 씻겨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황폐한 땅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이 간절히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 그가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컬른의 브루노는 여기에서 분명히 아가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아가서는 '신랑'으로 상징되는 주님과  '술람미 여인'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로 해석되어 왔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아가서1:15, 4:9 새번역)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남자이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여인 전체를 상징한다. 일종의 제유법이다. 여인이 이 아름다운 눈동자로 임을 바라보자, 남자는 그 눈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브루노는 이와같은 아가서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영혼이 그 눈으로 신랑이신 주님을 명료하게 바라볼 때에 신랑은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의 상처는 '실연의 아픔'과 같이 상대방의 배반이나 폭력에 의해 받게 되는 상처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의 사랑이 매우 깊어서 얻게 되는 역설적인 상처이다. 아가서에서 신랑과 여인은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브루노는 신랑이 이러한 '상처'를 입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주님을 향한 영혼의 바라봄은 매우 명료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도자가 이러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만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사람이 영성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맑고 아름다워지면, 주님이 그제서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눈이 맑아지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로 인해 사랑의 상처를 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1 : 자신과의 만남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12 18:00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카르투시오회(Ordo Cartusiensis)를 창설한 컬른(또는 쾰른)의 브루노는 사막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과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막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고독한 장소이다. 그곳은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entertainment)이 미치지 않는 메마른 땅이다. 그래서 사막을 탈출하지 않고 그곳에서 버티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외부의 즐거움(안목의 정욕)을 쫓던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다. 자신의 외적 자아(가면)가 벗겨지고, 대신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는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친다(고린도전서 3:16). 그래서 자신의 내적 자아와의 만남은 곧 그 내적 자아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는 삶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 곧 관상 생활(contemplative life)이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거창하거나, 복잡하거나, 일반 사람들이 엄두내기 힘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매우 단순한 삶이다. 또한 이것은 내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선한 씨앗들이 자라서 외적으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삶이다. 


브루노는 이러한 풍성한 삶이 황량한 사막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오늘날 사막은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막의 고독은 오늘날 분주한 도시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도 가능하다. 문제는 내 안에 이러한 메마른 고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고자 하는 갈망과 강한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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