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리처드 로어의 《불멸의 다이아몬드》

불멸의 다이아몬드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 

Immortal Diamond: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리처드 로어 지음 ·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5년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에 갇혀 끙끙거리다가 어느 순간 하고 벗어날 때, 그 사람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무덤 같은 고치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태어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를 하고 벗어나게 해 주는 방법이 있다. 스승이신 장신대 유해룡 교수께서 신학생들에게 늘 이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자기 초월로 이끄는 세 가지가 있다. 인격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기도, 독서, 이웃 사랑이다.” 이 셋은 자기를 온전히 개방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수행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낯선 세계, 낯선 생각, 낯선 이에게 자기를 '탁' 개방하고 내어주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그 낯섬과 하나가 되는 것. 사람이 아름다워지는 때, 이를 두고 영적 수련이라고 하며, 이 셋은 기본이다.  그리고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근에 좋은 책을 한 권 추천받았다. 이 책이 얼마나 맘에 드는지! 추천해주신 분, 이 책을 선별하여 번역한 번역자와 출판사, 출판비를 후원하신 분까지 책을 만지고 읽을 때마다 마음에 담고 기도를 드릴지경이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의 《불멸의 다이아몬드》, 요즘 푹 빠져있는 참 좋은 벗이다.

    이 책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답을 진짜 자기로 정의한다. 저자는 진짜 자기를 불멸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 13장의 밭에 감추인 보물에 대한 유비(analogy)이다. , 16세기의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가 영적 생활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기도 중에 문득 떠올랐던 맑디맑은 수정궁의 상징과도 유사하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진짜와, 이 진짜를 대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자기와, 가짜 자기가 구축한 세상, 그리고 이 둘의 체제(system)를 놀랍게 통찰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개인적 수행과 폭넓은 영적 지도의 경험 없이는, 쓸데없이 사서 고생하고 있는 신자들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종교에 대한 깊은 애정 없이는, 결코 쓸 수 없는 말들이 수놓아져 있다.

    문장 사이를 서둘러 걸어가 마지막 끝에 빨리 도달할 수 없다. 머물고 맴돌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기도하다. 무엇보다 이런 책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나와 주길 기다려왔다. 내 스스로도 너무 사서 고생을 많이 했다. 다른 이들에겐 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싶다.


기도하며 읽는 책

    이 책은 기도하며 읽어 가면 좋겠다. ‘센터링 침묵기도’(향심기도)로 시작한다.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잠시 머물며 글을 음미하기도 한다. 책 내용 중에 기도하기 좋은 말씀과 상징들은 좀 오랜 시간 묵상으로 기도한다. 예를 들어,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읽고 나면, 내 마음 밭을 바라보고 그 밭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찾아 주목해 보는 기도를 각자 하고 싶은 방법으로 기도한다. 기도 자료가 더 필요하면 부록을 사용하면 된다.

    나는 지금 교회 기도 모임에서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자매님들과 함께 천천히 읽어가면서, 어려운 부분은 보충 설명을 해 주고, 함께 기도한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런 책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빌라의 테레사가 살던 시절, 1559년 교회에서 금서목록이 발표되었을 때, 테레사는 자신이 즐겨 읽던 대다수의 책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때 테레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살아 있는 책을 주리라.”는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천주자비의 글》, 26.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아는가, 어쩌다가 진실로 "살아 있는 책" 자체이신 주님을 힐긋이라도 읽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 될런지! / 해'맑은우리  주선영

 


 

posted by 해'맑은우리

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한 줄 묵상 2015.08.13 10:17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의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직행하려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에 있는 장성 갈재 때문에 그 태산을 넘을 길이 없어서 그 태산 속에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연결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갈 때 터널이 뚫려있는 길을 신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산 앞에 서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터널을 뚫[음으로써] 가서 보고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므로 내세가 저희들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광주에서 서울을 간 사람이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 없이 가는 것처럼 주님이 부활하시고 천상으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사람이 금세에서 내세를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 김금남, 《동광원 사람들》, 217-8.

헨리 나우웬이 말한 “죽음과 친해지기”(befriending with death)는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분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Brother Sun)를 보면,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토착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의 글을 읽다가 ‘아, 이분도 죽음을 초월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부활이 죽음이라는 산을 통과하는 터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사실 김 원장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 그리고 이현필 선생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류영모 선생이 그 무덤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선생, 얼마나 시원하오. 얼마나 시원하오. 이 선생 잘했소. 부럽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이 부활 신앙의 기개가 죽음의 권력 아래서 답답하고 어두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 좋겠다. / 이강학




posted by 아우의 마음

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 삶을 하나로 묶기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4 13:45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삶을 하나로 묶기



앞선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삶을 하나로 묶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하나로 묶기  

    헨리 나우웬은 현대 신앙의 위기는 신앙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체험이 피상적이고 연속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며 깊은 차원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려면침묵 기도로 형성된 내적인 고요 속에서 삶 그 자체를 주목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삶 그 자체를 주목하면서때로는 깊은 기도 후때로는 간단한 성찰 후 삶에서 올라오는 느낌들을 간단히 기록해 놓습니다우리 삶이 깊은 일관성으로 빛을 발하는 때는 삶을 구성하시는 든든한 뒷배경이신 하나님 그분을 발견할 때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삶을 구성하는 큰 요소를 주목하면서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주목하는 시간을 가집니다단위는 한 달로 합니다삶의 각 영역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초점은 내면의 움직임이라고 일컫는 마음의 흐름마음의 반응을 의미합니다시시비비를 따지거나 행위의 선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음 항목 별로 한 달의 삶을 성찰해 봅니다. 

   

1. 영성 생활은 어떠했나?

a. 예배는 어땠는가?

    예배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받은 은총은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가?

b. 기도는 어땠는가?

   얼마나 하고 있나그 횟수가 적절한가기도 분위기나 흐름이 어떤가크게 깨닫거나 응답받은 것이 있는가?

c. 영적독서는 어땠는가?

   성경이나 영적성장을 위해서 읽는 것들이것이 나에게 무슨 자극이 되는가 어떤 점에서 성장에 기여하는가새롭게 알아듣고 깨닫게 된 것이 있는가?


2. 몸은 어땠는가?

   몸에 대한 전반적인 상태수면식욕 등의 욕구질병 등의 영향.

   몸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

   몸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는지 알게 된 점이 있는가?


3. 직장이나교회 사역 등 일은 어떠했나?

   일에 대해 드는 느낌은 어떠한가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가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는가?


4. 가족 관계는 어땠는가?

   주된 정서는 무엇인가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고하나님은 어떻게 임재하시며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는가?


5. 기타

a. 우리 사회정치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사건.

b. 친구 관계사적 모임 등.


이렇게 보면우리 삶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체라기보다는 경험적 사건들로 구성된 의미의 결합체라는 것이 다가옵니다그러면 이렇게 삶을 바라보면서 각각의 경험을 하나로 묶고 꿰는 기도를 해 봅니다.


첫째기도 준비를 합니다.

둘째삶의 사건 항목들을 머리 속에 천천히 떠올리며 기억합니다.

셋째하나님께 청합니다. '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나타내 보이신 삶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혹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당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넷째각 항목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하고전체적으로 떠올리기도 하면서 삶을 주목합니다그 사이에서 올라오는 느낌들기운들통찰들에 머물면서하나님과 교제합니다마음이 깊어지는 부분에 충분히 머물러 봅니다.

다섯째기도 알람이 끝나면한 달의 삶에 대해 감사합니다다음 달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주님께 자발적으로 대화합니다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여섯째물론 기도반추를 합니다.


침묵 기도를 일상 속에서 먼저 실천하고 계신 분들의 조언

 (1) 기도의 삶을 구조화하세요. 통성으로 주제를 외치는 기도보다 침묵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특히 이것을 원하고 이것이 기도를 바르게 하고 있다는 것에 깊게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기도가 밀려나게 되면나중에는 자포자기 된답니다기도를 제일 중요한 자리에 놓고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하세요영 놓아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하려고 했더니만하나님께서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들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2) 혼자하지 말고 함께 하세요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혼자 집에서 하다말다 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고 합니다매 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기도를 나누고한 주간 함께 기도할 본문들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3)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몇 주간에 걸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나피정을 받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특히 기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기도 방법을 배우는 데는 집중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하나님의 사랑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침묵과 고독’ 속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피정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항해 이후

배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까요우리는 그 배에서 내릴 것입니다그렇다고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이것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입니다우리 육신의 삶이 마치는 날우리는 몸이라는 우리 배를 벗지만그렇다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그 사랑을 확장하고 팽창해 나가면서우리를 무한히 성장시켜 나갑니다사랑의 각성은 죽고 나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한때면 끝나는 우리 삶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어나기 위해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며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일상 중에 침묵 기도를 실천하시려는 분들은 눈을 좀 더 멀리 두십시오배가 도착하는 항구 그 이후까지 눈을 멀리 두십시오그 너머까지가 명백히 자각이 된다면결코 포기할 수도 없고게으를 수도 없으며그렇다고 조바심내거나 안달내지도 않게 됩니다그저 고요히 오늘의 항해를 할 뿐입니다오늘이라는 날하나님을 오늘만큼 알고 오늘 만큼 사랑하고 오늘만큼 함께 했으니오늘 배부를 것입니다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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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즐겁게 질문하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4.07.20 14:23

누가 이것을 이해 못한다고 해도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도 그로 하여금 즐거이'이것이 무엇이냐?'고 계속 묻게 하소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할지라도 즐거움으로 당신을 찾아 만나게 하여주소서. 행여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어놓고 당신을 찾지않을까 두렵습니다. 

-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고백록》, Book I, vi (10)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일과 사건과 피조물속에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과 틀 안에서 왜곡되어 이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됩니다. 세월호 사고도 이스라엘의 가자공습에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쉽게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계속되면 우리는 지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알면 '질문과 대답'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질문은 사실 내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을 뛰어넘으려는 갈망이고 나의 이해를 넘어 존재하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추구입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은 대답으로 만족될 수 없고 하나님 그 분의 현존으로만 만족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되 즐겁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즐거이 질문하는 자가 되기를 구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서 하나님을 찾기를 멈추지 않고 이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 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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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없는 기도생활은 환상이다 (토마스 머튼)

한 줄 묵상 2014.06.23 11:36

명상 생활(관상적 삶)은 욕구를 이겨내는 자기훈련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빠져있는 습관적 쾌락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중략) 극기없는 기도 생활은 순수한 환상입니다. 

- 토마스 머튼 《새명상의 씨》, 102쪽


일에 바빠 충분히 기도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당연한 레퍼토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게임, TV프로그램, 스포츠, 특정한 만족을 느끼기 위한 행동들에 시간을 쏟고 있음을 안다. 과하지 않고 적절하다고 합리화해 보지만, "뭐 어때서?"라고 자문하는 내면의 요동 속에서 내가 묶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습관적 쾌락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두고서도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요를 얻는다면 나는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충동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기는 삶에 노예가 되어가면서도 기도를 통해 면죄부만 받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기도하는 것, 기도자라는 이름은 환상에 다름없다. 기도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허용하는 환상의 연속이 아니라, 자신을 이겨나가는 투쟁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윤리적 의무감에 따른 의지적 교정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충동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기만을 구하는 단순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변혁이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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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2014년 2월의 추천 고전을 2월을 넘겨서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꼭 2월에 읽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성 고전을 한 달에 한 번씩 소개한다는 의도로 게시하는 것이니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의 추천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이 생기신다면, 시간을 내어 고전을 직접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  편집자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이후정 역, 은성(1993)


 

마카리우스는 누구인가

     필자가 이 달의 영성 고전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마카리우스(Pseudo-Macarius, c.300-391)의 《신령한 설교》이다. 여기엔 50 편의 <신령한 설교><대서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들의 저자는 성서와 초대 교회 사막 영성에 영적 뿌리를 둔 위대한 영성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 세기 후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자들로부터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수련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징과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값진 조언과 통찰들을 전해 주었다.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곧 문헌화 되었고, 당대의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후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인 감화를 주는 영성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음과 성령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영적 조언의 큰 줄기는 영성 생활에서의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 마음은 지성적 활동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 그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일, 뭔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 등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다. 즉, 마음은 지성과 감성과 욕망과 의지 등의 모든 내적 활동의 중심이며, 또한 우리 신체 기관들을 총괄하는 제어탑(control tower)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은 우리 전 인격의 중심이다. 그리고 여기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이곳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다. 하지만, 사탄과 악마들 또한 이곳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음 그 자체는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 속에 용들이 있고, 사자들도 그곳에 있다. 그 속에 독을 가진 짐승들이 살고 있으며, 모든 악마의 비장품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곳에는 가파른 절벽과 거친 길들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그분의 나라도 있다. 그곳엔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또한 그곳에 사도들이 있고 천상의 도성들이 있고 은혜의 보화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다

-신령한 설교, 43:7.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가는 일을 수련의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는 일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고,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일 등이 모두 우리가 그릇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과 연합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바로 알아 보고 올바로 경험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임을 소상히 밝혀준다.

 

     그러므로 영적 수련의 길은 성령과의 협력을 통한 오랜 동안의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 것에 대한 집착(마카리우스는, 이를 세상적인 것들이라고 칭한다)과 천상적인 것(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잘 살펴 분별하고, 세상적인 것을 떠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 속에 채우려는 지향을 가지고 언제나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정점은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즉 세상적 욕망과 감정은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과 천상의 성격으로만 순전히 채워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임재를 참되게 경험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과 협력하는 영적 수련에 있어서 겸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자기 비움의 겸손, 자기 판단의 교만을 벗어날수록 우리 마음 속(이는 영적 전쟁의 전쟁터이다)에서 성령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가며, 이와 함께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 나아가 몸의 태도와 습관까지, 한마디로 우리 전 인격체로서의 몸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이러한 변화의 궁극에서 우리는 부활하시어 영화로워지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부활과 영생의 삶이 종말에만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카리우스는, 주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화로워지신 빛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던 것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면서, 부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을 알아보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비전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마카리우스의 영성 생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신자의 삶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임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를 감지하며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만남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그러한 일에 참여할 가능성이 지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거듭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에 신자들이 어떻게 신자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이후 헤시카즘(Hesychasm)으로 대표되는 동방 교회의 영성 전통 형성에 큰 토대가 되었다. 오리게누스(Origenus)와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서 비롯된 지성적 영성과 마카리우스의 마음의 영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동방 교회 영성을 형성해 간 것이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도 마카리우스의 설교들과 조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신학과 교리가 삶과 실천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영성이 사변적이고 현학적이지만 무미건조한 것으로 변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경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시금석의 역할을 거듭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영성 전통에 마카리우스의 글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 예로 경건주의(pietism) 운동의 지도자들은 마카리우스의 글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종교 개혁 이후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법정적 용어처럼 이해하면서 믿음은 이런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만 설명하려는 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적 성향이 나타났을 때, 경건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는 거듭남이라는 생명과 삶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이런 경건주의 영성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초대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갖춘 것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었다. 그래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는 이신칭의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에서 옳게 드러난다고 하는 주장을 견지하였다(G.A. Maloney, Pseudo-Macarius, 24). 또한 18세기 부흥 운동 당시에는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험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권위있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갖는 의의 

     오늘날, 우리에게 마카리우스의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신앙 생활에서 교리와 실천이 분리되고, 신앙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위험으로 남아 있다.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게 하고 그런 것들을 피하게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마카리우스의 글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 특히 감정주의적 신앙 체험에 천착하는 이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기독교인의 내적 경험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과 지식과 의식까지도 모두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경험하는 일에 영적 규칙을 따르는 수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고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따라서, G. A. 말로니(Maloney)가 말하고 있듯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는 마카리우스는 은사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권력의 근거인양 사물화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처럼 여기다가 결국 그들의 영적 여정을 허망한 것을 만드는 것을 피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Pseudo-Macarius, p.26).

 

     다시 말하면, 회개의 중요성, 성령의 역할, 마음의 정화, 점진적 변화와 성장, 부활 그리스도와의 만남 등을 강조하면서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고, 지식과 실천이 어우러지게 하여서, 신앙이 지식이나 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고, 그 삶에서 하늘의 기쁨 맛보도록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마카리우스의 글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더 순결한 것으로 정화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태도는 좀 더 덕스러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남기정.



Pseudo-Macarius (Paperback)

저자
#{for:author::2}, Pseudo-Macarius (Paperback)#{/for:author} 지음
출판사
Paulist Pr | 1992-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ritings of Pseudo-Macarius,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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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니 (하나님 임재 연습)

한 줄 묵상 2013.09.28 15:37

오직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를 연습하고 경험하는 이들만 이 교제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 하나님 임재를 연습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연습을 통해 자기 위안을 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이 끊임없는 대화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원해야 할 것입니다.

- 로렌스 형제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 1614-1691), 《하나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Second Letter)



기도의 맛과 경험은 소중하다. 많은 이들에겐 '그때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시점과 경험이 있다.
 과거의 그 경험은 때론 영적 열망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때론 현재의 영적 나태를 발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준적 경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그 '경험'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자체에 매여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만나게 된다. 


로렌스 형제는 그 맛을 위해 기도하지는 말라고 권면한다. 기도 안에서 초점은 대화의 자리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기도 행위를 '대화'가 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행위 안에 하나님을 분명 모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대화를 그리고 그 모든 '나머지'를 인도하실 것이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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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 고독의 진통제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3.08.10 17:13
이 경우 무엇보다 해로운 것은 고독입니다. ……… 그렇다고 그 당사자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어떻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과 압박감이기 때문에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제일 좋은 방법이 있다면 - 고통을 없앨 방도는 모르므로, 그걸 없애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는 일, 그것도 드러나는 일에 힘쓰는 것과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희망을 거는 사람을 저버리실 리가 만무합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6궁방, 1장. 13절.


고독은 어떤 약으로도 치유되기 어려운 병과 같다. 외부에 있는 타자가 제시해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기에, 더더욱 고독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빌라의 테레사는 고독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은혜를 주시려 할 때 허락하시는 마음의 시련이라고 밝힌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연합으로 도달하기 이전 깊은 정화의 과정에서 영혼이 경험하는 하나의 시련이다. 그것의 중요한 특징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깐의 외로움이나 기도가 잘 안되는 그런 것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테레사는 이 고독의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참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의 얕은 지식과는 상반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고독의 약이라니! 외부에 있는 사랑이 고독을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 고독의 고통을 경감시켜준다. 오늘도 이 역설적인 진리가 내 안에 좀 더 깊이 스며들길 소망한다. 테레사의 말대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행동이기 때문에…….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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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열매 3 : 바쁜 여가, 조용한 활동(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7.18 16:08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컬른의 브루노는 사막에서의 수도 생활을 '바쁜 여가'와 '조용한 활동'으로 묘사한다. 보통 '여가(leisure)'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즐기는 시간을 말한다. 그런데 '바쁜 여가'라니!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가(otium)에 대한 고대 사람들의 생각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때에 여가란 공적인 활동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거나 완전히 은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공의 선을 중시하던 이들에게 이런 여가는 결코 한가함 속에서 늘어지는 '게으름'이어서는 안 되었다. 고대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명예로운 여가(otium honestum)' 또는 '품격있는 여가(otium liberale)'는 공공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학적, 철학적 탐구를 의미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는 용납 가능한 여가는 역설적으로 활동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공적인 일'과 '여가' 사이의 긴장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도 흘러 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긴장을 기독교적인 바탕에서 풀어내면서 여가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여가는 관상(contemplation)과 성경 연구를 위한 선행조건이었으며, 하나님 나라 추구를 위한 환경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대의 기독교 작가인 놀라의 파울리누스(Paulinus of Nola, c.354~431)와 비슷하게 여가를 수도생활과 관련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생활을 '성스러운 여가(sanctum otium)'로 묘사하였으며, 수도자들이 게으름과 한가한 잡담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여가는 활동적이다. 


컬른의 브루노가 말한 '바쁜 여가(otium negotium)'는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세상에서의 일들을 모두 내려놓고 사막으로 들어가 고독과 관상에 속에 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한가하고 게으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바쁜 여가이며 조용한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브루노가 말하는 조용한 활동은 외적인 수도 생활 뿐만 아니라, 기도 안에서 정점을 이루는 내적 활동을 의미한다. 실제로 브루노는 당대의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며 행정가였지만, 거의 오십 세가 되었을 때에 대학과 교회에서의 모든 직책들을 내려놓고 몇 명의 지인들과 함께 사막으로 은거하였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자신들의 물러남이 세상으로부터의 이기적인 도피나 열매 없는 게으름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한국은 휴가철이다. 굳이 휴가를 운운하지 않아도, 속도가 빠르고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많은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많은 이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균 수명의 연장과 더불어서 우리가 은퇴 후에 보내야할 시간도 더 길어 졌다. 여가 시간 또는 휴가 기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한 것처럼 성경을 연구하며 바쁘게 보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브루노와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여가, 휴가, 은퇴가 게으름 속에서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여가는 좀 더 깊이 있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데에 사용되어져야 한다. 사막이 거룩한 여가를 보내기 위한 적당한 장소인 이유는 다른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추구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이 고립 속에서의 성경 읽기와 기도만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서 열매맺는 공적 활동을 위해서도 사적인 고독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고독은 게으름이 아니라 '바쁜 여가, 조용한 활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여가, 휴가 또는 은퇴 계획 속에 고독 속의 독서와 기도를 넣어 보면 어떨까?  다시 말해 지리적인 사막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사막을 찾아 가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또는 평소에는 일상에 매여 하지 못했던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일을 실천하는 계획을 세워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품격 있는 여가 속에 사막의 열매인 '쉼'이 있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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