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식별

영성학 논문 2017.07.31 12:29

소명과 식별



    필자가 영성지도를 하다가 만난 신학생 가운데에는, 목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학생은 소명이 없이 신학교를 다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또 어떤 신학생은 번듯한 직장 생활을 갑자기 그만 두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에 차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신학생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어 사역을 활발하게 잘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사회생활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소명은 개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기에, 소명을 잘 식별하는 일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식별을 잘 안내해주는 커리큘럼을 한국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든 실정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소명 식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1.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자 윌리엄 플래처(William C. Placher)에 따르면,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각주:1]은 성경과 교회사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각주:2] 먼저 성경은 소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부르심”(call) 또는 “소명”(vocation)이라는 낱말은 신앙으로의 부르심, 또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과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각주:3]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일깨우는 말씀이고, 더불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소명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에서 부르심(klesis)은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인임을 세상에서 드러내며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것 자체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교회사를 통틀어 소명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플래처는 교회사를 네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첫 번째 시기인 초기 교회는,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을 소명으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소수(minority)였다. 기독교인이 되면 수시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게 된다. 체포되어 고문당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시기인 중세 교회는,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을 위주로 소명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 전까지 기독교인을 위협했던 박해가 사라졌다. 누구나 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일상생활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사제나 수도자가 될 것인가가 소명을 식별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시기인 종교개혁 이후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사는 것만을 기독교인의 중요하고 특별한 소명으로 여기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직업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 부르심(klesis)을 직업(Beruf)으로 번역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루터에 따르면, 결혼과 자녀양육을 포함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현대다. 우리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직업과 삶의 모양이 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하기 힘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은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비기독교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초기 교회 시대에 기독교인이 했던 질문이 다시 현대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진행된 분업화로 인해 우리는 직업을 전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공장에서 부품을 만드는 일부 과정에만 참여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아울러, 직업만을 소명으로 생각하면, 실업자나 은퇴자는 소명 담론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성경과 교회사를 살펴볼 때, 현대 기독교인을 위해서, 소명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소명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둘째, 소명은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셋째, 소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또는 사역자가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명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소명들은 경우에 따라 한꺼번에 적용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셋째 소명과 넷째 소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2. 소명 식별 방법: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명을 식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은 대체로 기도, 말씀 묵상, 자신이 지닌 능력과 욕구를 성찰하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보기 등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기독교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고,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소명 식별 방법을 알고 적용하기 위한 첫걸음은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성고전에는 식별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소명을 식별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의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각주:4]이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개혁을 이끈 영성가 중 한 명이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자신의 영성훈련과 식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영성훈련 안내 책자 즉 매뉴얼이다. 이 책을 쓴 의도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소명을 잘 식별하여 선택(election)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냐시오는 당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영성훈련 방법을 통합하여 네 주에 걸친 영성훈련을 제시하였는데, 이 영성훈련은 말씀묵상과 양심성찰, 기도, 식별,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명 식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소명을 식별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묵상이다. 영신수련에서 영성훈련 참가자가 네 주에 걸쳐 참여하는 말씀 묵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 주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둘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난의 자리까지 따르며 함께 머무는 인내와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고,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투신할 결심과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성훈련 참가자는 먼저 죄가 정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맑은 마음과 질서 잡힌 마음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욕구 즉 영적 갈망이 생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또는 왕으로 여기며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므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가장 먼저 말씀 묵상을 깊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영적 갈망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자신의 내면의 경험을 살펴보고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부록에서 식별을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으면 소명을 식별하기 위한 영성훈련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구분할 때 도움이 된다. 이 규칙에서 이냐시오는 내면의 경험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 한다. 영적 위로(spiritual consolation)와 영적 실망(spiritual desolation). 영적 위로의 경험은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을 때 성령으로부터 오는 경험으로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영원한 것, 즉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는 경험이다. 영적 실망의 경험은 반대로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을 때 하는 경험으로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감소되는 경험이다. 영적 위로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며, 영적 실망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 위로의 경험과 영적 실망의 경험은 영성훈련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교대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식별하는 사람의 내면이 정화될수록 그리고 성령 충만할수록 영적 실망의 경험은 줄어들고 영적 위로의 경험이 늘어난다. 이것을 경험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소명을 식별할 때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해당할수록 영적 위로의 경험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식별 과정을 도와주는 영성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영성지도자가 피지도자(directee), 즉 영성훈련 참가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소명 식별을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성경과 교리에 맞게 객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를 신뢰하며 자신의 경험을 함께 식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이 소명 식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개입하기보다는 성령님만을 의지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성지도자가 수도원장이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영성훈련 참가자가 수도자가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또 영성지도자가 담임목사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청년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피지도자의 식별 과정에 영성지도자가 자신의 바람을 바탕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3.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 방법


     소명 식별을 주제로 하는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는 아마도 프레드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가 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곳은 당신의 깊은 즐거움과 세상의 깊은 굶주림이 만나는 곳이다.”[각주:5] 다시 말해서,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깊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가장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뷔크너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의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 또는 교집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182-1226)는 회심한 후에 가장 큰 기쁨을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사는 삶에서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이웃에 사는 한센병 환우들이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우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현대 개신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 가운데 하나가 지티유(Graduate Theological Union) 및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영성학자인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의 《영적 분별의 길》[각주:6]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트는 이 책에서 식별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될 영성훈련을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내릴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은 소명을 인식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리버트가 제시하는 영성훈련을 소명 식별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 절차는 다섯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 더 분명해진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선택하기가 더 쉬워진다. 


  2)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명료한 질문 형태로 만들어본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영성지도자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시는가? 또는 하나님은 나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부르시는가? 등이 있다. 


  3)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네 종류의 정보를 모아보도록 제안 한다. (1) 개인 내적(intra-personal) 정보, (2) 상호 관계(inter-personal) 정보, (3) 구조(structural) 정보, 그리고 (4)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al) 정보. 개인 내적 정보란 내가 지닌 지적, 정서적, 신체적, 영적 고유한 특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상호 관계 정보란 내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구조 정보란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과 권력과 관련된 경험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자연 환경 정보란 내가 자연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보들을 모은 후에, 나의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이 정보들에 대입해 보고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기도한다.  


  4) 다양한 영성훈련을 시행하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일곱 가지의 영성훈련을 제안 한다. (1) 떠오르는 기억 경험하기, (2) 상상력을 사용하기, (3) 직관을 사용하기, (4)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기, (5) 이성을 사용하기, (6) 감정을 식별하기, 그리고 (7) 자연 묵상에서 일어나는 경험 사용하기 등. 이 모든 영성훈련은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시작한다. 또 이 영성훈련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제로 실시한다. 영성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명 식별 주제에 대해 가부간의 임시 결정을 내린다. 


  5)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영성훈련의 결과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확증(confirmation)을 받는다. 확증을 위해 사용하는 식별 기준들을 리버트는 시금석이라 부른다. 식별 시금석들은 성령께서 일으키신 경험들의 예로서, 대체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의 경험들과 영성고전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경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앞에 언급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의 경험이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의 경험을 들 수 있다. 


     영성고전에서 제시된 시금석 경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냐시오의 식별 규칙에 나오는 영적 위로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18세기 미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각주:7]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정서의 신뢰할만한 열두 가지 표지들 역시 식별의 시금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열두 가지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원천에서 옴, (2)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들에 그 자체의 탁월성 때문에 이끌림, (3) 거룩한 일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험에서 옴, (4)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수반함, (5) 깊게 자리한 확신을 수반함, (6) 겸손을 수반함, (7) 본성의 참된 변화를 수반함, (8)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을 수반함, (9) 부드러운 마음과 영의 온유함을 수반함, (10) 균형과 조화를 수반함, (11)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짐, (12) 기독교적 실천들이 증가함. 


     필자는 이상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리고 소명을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소명을 식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자유롭게 와서 보고 선택하게 하신다. 소명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없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앞서거나 너무 뒤떨어지거나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 기독교인의 소명 식별을 도와줄 목회자와 영성지도자가 많이 준비되기를 기도한다. / 아우의 마음 이강학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36-43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1. 이 글에서 '소명'과 '부르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2. William C. Placher, ed.,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본문으로]
  3. 3. 한글 성경은 모두 '개역개정판'을 인용한다. [본문으로]
  4. 4. 이냐시오 로욜라, <영신수련>, 정제천 역 (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본문으로]
  5. 5. Frederick Buechner, Wishful Thinking: A Theological ABC (New York: Harper and Row, 1973), 95. [본문으로]
  6.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본문으로]
  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서울: 지평서원, 200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성경 필사를 통한 영성 훈련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며 교회 성도들과 함께 영성 훈련으로서 전교인 성경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필사를 하기 전 몇 주에 걸쳐서 설교를 통해 성경 필사의 역사, 필사 할 때의 규율, 그 필사를 통해 전해 내려져 온 하나님의 말씀들을 먼저 나누면서 이것이 단지 '쓰고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사명'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필사를 통해 전해 내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손을 통해 전해 내려왔지만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거의 오류가 없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나를 함께 생각해 보았답니다. 한 글자라도 정확히 지키고자 했던 그런 엄격함과 정직함이 결국 필사자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백되어졌습니다.


"말씀을 필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전달한다는 사명감과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금 멈추어 목욕하고 기도하며 다시 말씀을 시작하고……. 그러다가 한 글자 실수하면 멈추어 그날을 반성하며 또 내일을 준비하며……".

 

먼저 사순절 기간 동안 성도들끼리 나누어 신약성경을 필사하고자 신약 27권을 각각 종이 파일에 담아 자원자를 모집했습니다. 다행히 성도님들께서 27권 모두를 자원해 주셨습니다. 파일를 나누어 주면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찢으셔야 합니다. 다시 쓰셔야 합니다."하면서 필사자의 마음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 부터 90세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적은 인원이지만 전 성도가 성경 필사에 참여했습니다. 필사를 시작한 다음 날부터 한 두 통씩 전화가 걸려옵니다.


"목사님, 이거 저 도저히 못하겠어요. 쓰는 종이보다 버리는 종이가 더 많아서 이건 정말 낭비입니다"

"목사님, 뒷면까지 잘 쓰다가 막판에 틀렸어요. 마음에 시험이 들 것 같습니다."

"필사하면서 은혜가 되기보다는 낙심되고 시험이 됩니다. 한 글자 틀려서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또 찢고 성질이 더 못되지는거 같아요……."

 

정말로 저 자신부터 한 장을 넘기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맥락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조사나 어미를 잘못 적는 실수를 할 때마다 '그냥 넘어갈까'하는 내면의 갈등이 오기도 했습니다. 잘 아는 구절일수록 아는 대로 쓰다가 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확하지 않게 기억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원망과 불평을 들으며 첫 주가 흘렀습니다.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주쨰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교회일에 적극적이지 않던 한 노년의 집사님은 신약성서 네 권을 마치고 구약의 창세기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틀리고 종이를 찢을 때마다 처음엔 목사님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내 신앙이 이렇게 실수에 둔감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결국은 내가 틀린 것인데 남을 원망하기나 하고……."

"내가 틀릴 때마다 참아 주시고 또 다시 시작했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답니다. 실수 투성이인 나를 그 분은 불평하지 않고 또 다시 시작했겠지요."

"똑같은 부분에서 자꾸 틀리면 그 부분은 나에게 특별히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구나 생각하니 더 말씀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고 구약을 다 마치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연말에 성도들과 함께 필사한 것을 성경으로 만들면서 하나님께 성경 봉헌 예배를 드릴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고 설랩니다.  왠지 한 권의 성경으로 만들어질 저희 성도들의 노력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벼리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하고 싶다'

    추석 연휴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다. 약간 멍하고, 졸음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이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흐트러진 감각을 옷매무새 정리하듯 가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일상의 삶에서 침묵기도를 뿌리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한다. 잠을 근간으로 하는 몸 상태, 결혼과 육아의 살림살이, 교회의 일반사역과 영적지도 사역, 개인 공부, 기타 사회활동 등의 요소 속에 하루 1시간 이상의 침묵기도와 성찰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반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9-10개월짜리 일상에서의 영신수련이라고 일컫는 ‘19번 피정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을 만큼, 매일매일 침묵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교회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역자들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중에만 잠깐하고 일상에서 흐려지고 멈춰지는 것. 이 좋은 것을 왜 지속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좌충우돌이지만 더 흔들렸던 어제의 날들을 돌이켜보면, 명백해지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란 명언에 잘 나타난다. 침묵기도는 해야 한다는 당위의식과는 상극인 것 같다. ‘해야 한다는 가치관에 이끌린 노예의식은 침묵기도가 펼쳐주는 세상과는 충돌한다. 침묵기도는 철저히 자발적 사랑과 관련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곳은 하고 싶다는 내적인 갈망에 충실한 자발적인 선택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이다. 그만치 긴장과는 거리가 멀다. 유연하고 자유롭다. 오직 사랑의 논리에 관해서만 철저하다.  

    따라서 침묵기도를 일상의 삶에 잘 녹여내려면, 하나님을 향해 해야만 하는행위를 넘어서 하고 싶은마음에 아주 깊은 진솔함으로 주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매일의 기도 실천과 관련하여, 저녁과 아침을 이렇게 보내면 어떨까 싶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잠자리에 든 후 자고자할 때 바로 성모송 한 번 할 사이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그 수련을 요약한다.”(73번)고 조언한다. 이 말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잠자기 전에 내일 기도할 성경, 기도할 주제,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 등을 미리 읽고, 혹은 생각해 놓고 잔다. 두세 번 읽고 줄거리나 구절, 영적인 갈망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는 그 사이에,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기억한다. 머리 속에 불어 넣는 매일의 첫 생각이 이것이면 참 좋겠다. 아마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살고 싶은 그 비슷한 갈망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 갈망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 갈망이 구현되는 첫 자리이기도 한 침묵기도의 자리로 구체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좋겠다. ‘하고 싶은마음에 주목하면서, 가장 최적의 시간과 공간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꽉 들어차 있고 매일의 기도 시간도 자기 주도적으로 배정되어 있어서, 주님께 뭔가를 떼어 드려야 하는 느낌이 드는 삶을 벗어나보자. 우리 중에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너무 바쁘다. 이렇게 삶이 바빠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에 어떻게 기도 시간을 따로 내겠는가? 이기심 많은 인간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예, 시·공간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확 바꿔보는 것이다. 우리보다 우리와의 사귐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께 주도권을 아예 내 드리는 것이다. 전부를 다 드리고 우리는 단지, ‘하고 싶은마음을 더욱 깊게 확인하고, 그 마음 앞에 정직해 지는 것이다하여, ‘하고 싶다는 끌림 그 자체도, 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못 견디는 양치질처럼 완전한 일상이 되는 그런 날이 될 때까지, 언제나 다시 시작하면 될 터이다. 아직까진하고 싶음이 분명하니까. 자,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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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참된 영적 경험을 위하여: 수덕과 관상의 생활 (고백자 막시무스)

한 줄 묵상 2014.06.29 06:00

분내고 성질부리는 마음은 사랑으로 고삐를 삼아 제어하고, 욕심부리는 마음은 자제력으로 누그러뜨리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지성, 그 생각하는 힘에는 기도의 날개를 달아 주어 날아 오르게 하시오. 그러면 그대 마음의 빛은 언제나 꺼지지 않고 빛날 것입니다.


-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Capita de caritate, IV, 80.


 

자기의 경험을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본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온전한 존재가 아니듯 우리들의 감각은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오류에 빠뜨린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자명하다. 즉, 우리는 착각하고 혼동하고 오해한다. 이점은 영적 경험 혹은 신비 체험을 다룰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초대 교부들을 포함한 고대의 현자들은 이미 우리 감각의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실재에 대한 바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가 우리의 의식을 비추어 주는 조명(the luminosity of consciousnes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러한 조명을 흔히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또한 막시무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빛’을 받기 위해서는 금욕적 덕과 관상적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욕망에 붙들려 있다면, 그리고 어떤 감정의 격동에 흔들리고 있다면, 우리의 감각은 왜곡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인식 능력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덕의 수련과 관상의 생활이 깊어지고, 그 위에 ‘빛’의 조명이 임하면, 여기서 우리의 참 인식은 시작되며, 이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진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교부들은 이런 수덕과 관상의 생활이 바로 진정한 회개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런 삶은 다름 아니라, 자기 비움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해 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경험으로 이끄시는 길이요, 빛이요, 등불이다. 그런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향해 가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우리들이다! “영혼의 햇빛 예수여 가까이 비춰 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찬송이 울려 퍼진다. /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사순절, 이 거룩한 기간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4.03.17 10:27

수도자의 삶은 사순절의 연속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이 거룩한 기간 동안 평소 가지고 있던 태만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49장. 1-3. (서울: KIATS, 2011), 94.


사순절은 “거룩한 기간”이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예수의 삶과 고난,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간은 우리가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게으름을 벗어 버리면, 거룩하신 주님을 좀 더 닮아 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규칙서》8세기 사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사순절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훈련 방법으로 (1)악한 습관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 (2) 참회의 기도, (3) 독서, (4) 마음의 성찰, (5) 자기 부인, (6) 음식물과 수면의 절제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베네딕트의 수도원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는 사순절에는 정해진 의무에 좀 더 추가하여 실천하고 이에 전념할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이러한 훈련들을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기보다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과도한 ‘고행’을 통해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허영심을 경계하기 위해, 이 훈련들은 수도원장의 영적 지도 아래 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성 훈련을 평소보다 한두 가지 더 추가하여 성실하게 실천한다면, 다가올 부활절이 감격이 없는 ‘연례 행사’가 아니라 기쁨과 소망이 생생한 잔칫날이 되지 않을까? 올해의 사순절이 이미 사분의 일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다. 이미 사순절을 특별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할 때이고, 아직 사순절을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지금이라도 분별력 있는 영적 지도자(또는 형제, 자매)와 상의하여 적절한 훈련을 시작할 때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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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2014년 2월의 추천 고전을 2월을 넘겨서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꼭 2월에 읽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성 고전을 한 달에 한 번씩 소개한다는 의도로 게시하는 것이니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의 추천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이 생기신다면, 시간을 내어 고전을 직접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  편집자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이후정 역, 은성(1993)


 

마카리우스는 누구인가

     필자가 이 달의 영성 고전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마카리우스(Pseudo-Macarius, c.300-391)의 《신령한 설교》이다. 여기엔 50 편의 <신령한 설교><대서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들의 저자는 성서와 초대 교회 사막 영성에 영적 뿌리를 둔 위대한 영성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 세기 후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자들로부터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수련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징과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값진 조언과 통찰들을 전해 주었다.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곧 문헌화 되었고, 당대의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후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인 감화를 주는 영성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음과 성령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영적 조언의 큰 줄기는 영성 생활에서의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 마음은 지성적 활동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 그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일, 뭔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 등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다. 즉, 마음은 지성과 감성과 욕망과 의지 등의 모든 내적 활동의 중심이며, 또한 우리 신체 기관들을 총괄하는 제어탑(control tower)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은 우리 전 인격의 중심이다. 그리고 여기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이곳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다. 하지만, 사탄과 악마들 또한 이곳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음 그 자체는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 속에 용들이 있고, 사자들도 그곳에 있다. 그 속에 독을 가진 짐승들이 살고 있으며, 모든 악마의 비장품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곳에는 가파른 절벽과 거친 길들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그분의 나라도 있다. 그곳엔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또한 그곳에 사도들이 있고 천상의 도성들이 있고 은혜의 보화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다

-신령한 설교, 43:7.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가는 일을 수련의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는 일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고,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일 등이 모두 우리가 그릇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과 연합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바로 알아 보고 올바로 경험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임을 소상히 밝혀준다.

 

     그러므로 영적 수련의 길은 성령과의 협력을 통한 오랜 동안의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 것에 대한 집착(마카리우스는, 이를 세상적인 것들이라고 칭한다)과 천상적인 것(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잘 살펴 분별하고, 세상적인 것을 떠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 속에 채우려는 지향을 가지고 언제나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정점은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즉 세상적 욕망과 감정은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과 천상의 성격으로만 순전히 채워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임재를 참되게 경험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과 협력하는 영적 수련에 있어서 겸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자기 비움의 겸손, 자기 판단의 교만을 벗어날수록 우리 마음 속(이는 영적 전쟁의 전쟁터이다)에서 성령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가며, 이와 함께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 나아가 몸의 태도와 습관까지, 한마디로 우리 전 인격체로서의 몸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이러한 변화의 궁극에서 우리는 부활하시어 영화로워지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부활과 영생의 삶이 종말에만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카리우스는, 주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화로워지신 빛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던 것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면서, 부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을 알아보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비전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마카리우스의 영성 생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신자의 삶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임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를 감지하며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만남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그러한 일에 참여할 가능성이 지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거듭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에 신자들이 어떻게 신자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이후 헤시카즘(Hesychasm)으로 대표되는 동방 교회의 영성 전통 형성에 큰 토대가 되었다. 오리게누스(Origenus)와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서 비롯된 지성적 영성과 마카리우스의 마음의 영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동방 교회 영성을 형성해 간 것이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도 마카리우스의 설교들과 조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신학과 교리가 삶과 실천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영성이 사변적이고 현학적이지만 무미건조한 것으로 변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경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시금석의 역할을 거듭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영성 전통에 마카리우스의 글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 예로 경건주의(pietism) 운동의 지도자들은 마카리우스의 글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종교 개혁 이후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법정적 용어처럼 이해하면서 믿음은 이런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만 설명하려는 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적 성향이 나타났을 때, 경건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는 거듭남이라는 생명과 삶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이런 경건주의 영성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초대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갖춘 것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었다. 그래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는 이신칭의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에서 옳게 드러난다고 하는 주장을 견지하였다(G.A. Maloney, Pseudo-Macarius, 24). 또한 18세기 부흥 운동 당시에는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험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권위있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갖는 의의 

     오늘날, 우리에게 마카리우스의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신앙 생활에서 교리와 실천이 분리되고, 신앙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위험으로 남아 있다.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게 하고 그런 것들을 피하게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마카리우스의 글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 특히 감정주의적 신앙 체험에 천착하는 이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기독교인의 내적 경험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과 지식과 의식까지도 모두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경험하는 일에 영적 규칙을 따르는 수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고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따라서, G. A. 말로니(Maloney)가 말하고 있듯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는 마카리우스는 은사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권력의 근거인양 사물화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처럼 여기다가 결국 그들의 영적 여정을 허망한 것을 만드는 것을 피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Pseudo-Macarius, p.26).

 

     다시 말하면, 회개의 중요성, 성령의 역할, 마음의 정화, 점진적 변화와 성장, 부활 그리스도와의 만남 등을 강조하면서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고, 지식과 실천이 어우러지게 하여서, 신앙이 지식이나 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고, 그 삶에서 하늘의 기쁨 맛보도록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마카리우스의 글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더 순결한 것으로 정화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태도는 좀 더 덕스러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남기정.



Pseudo-Macarius (Paperback)

저자
#{for:author::2}, Pseudo-Macarius (Paperback)#{/for:author} 지음
출판사
Paulist Pr | 1992-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ritings of Pseudo-Macarius,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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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생각 보고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한 줄 묵상 2013.10.24 23:52

우리는 마치 보고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행동들과 영혼의 움직임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짓는 것이 발각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지킨다면 간음하지 못하듯이, 서로에게 보고하는 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한다면 더러운 생각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55.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간 사막의 수도승들, 

특히 홀로 있는 독수도승들은 외부의 유혹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문제는 자신의 내부, 즉 속사람이었다.  


남이 알아채지도, 또 알아주지도 않는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기부여를 받는 일 역시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까지 속사람을 돌아보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지금 살아간다라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내 눈 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더욱 높이는 후안무치한 세상에 살고 있다.

법은 책에만 쓰여 있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목청 높여 기도하는 우리들.

성경의 글자가 가슴에 쓰여지지 않는 한, 참된 죄의식이 생겨 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바로 통회함 없는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이다. 


법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순결해 진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나의 '생각 보고서'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당신이 원하시니 (하나님 임재 연습)

한 줄 묵상 2013.09.28 15:37

오직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를 연습하고 경험하는 이들만 이 교제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 하나님 임재를 연습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연습을 통해 자기 위안을 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이 끊임없는 대화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원해야 할 것입니다.

- 로렌스 형제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 1614-1691), 《하나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Second Letter)



기도의 맛과 경험은 소중하다. 많은 이들에겐 '그때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시점과 경험이 있다.
 과거의 그 경험은 때론 영적 열망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때론 현재의 영적 나태를 발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준적 경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그 '경험'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자체에 매여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만나게 된다. 


로렌스 형제는 그 맛을 위해 기도하지는 말라고 권면한다. 기도 안에서 초점은 대화의 자리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기도 행위를 '대화'가 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행위 안에 하나님을 분명 모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대화를 그리고 그 모든 '나머지'를 인도하실 것이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5 : 화살 기도(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1.07 17:07
  • ejaculation을 '화살 기도'라는 용어로 옮긴 것이 흥미롭습니다. 짧은 문구로 독서 가운데 주신 은혜를 요약하고, 하루 종일 그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영적 독서의 경험을 삶에 녹여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08 17:14 신고
  •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시리즈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독서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다면, 영적 독서가 영적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더더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11 05:20 신고

"마지막으로, 항상 주님께 드리는 화살기도로 영적 독서를 마무리하십시오. 그리하여 …… 그대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씨들이 주님의 복을 받아, 자라고 열매 맺고, 나아가 그 열매가 영원한 삶을 낳게 하십시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Part of the “Preface” to his Abridgment of Thomas à Kempis’ Treatise of The Imitation of Christ (1735)




화살 기도(ejaculation)아버지, 예수님, 하나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영광!, 하나님 찬미받으소서! 와 같은 짧은 경구로 간결하지만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영적 독서를 마무리하면서, 신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유지하는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의 상태에 머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와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해 나간다.

 

이상 다섯 가지로 정리된 '웨슬리의 영적 독서에 관한 조언'은 성서 읽기와 영성 고전 읽기에 적용하면 영성훈련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기독교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에서 영적 독서는 중요한 기도 실천 중의 하나였다. 이 기도[영적 독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뜻과 열망을 깨달아 그것을 받드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일 것이다. 웨슬리의 영적 독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런 기도 실천을 심화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리리 확신한다/ 새결새김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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