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윤동주의〈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과 관련된 시 두 편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입니다.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오던 그가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입니다.[각주:1] 그리고 그 중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시인은 '슬픈 사람 = 불행한 사람'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있는데, 이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봅시다. 먼저 영어 원문으로, 그 다음에는 서투르지만 저의 한국어 번역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 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모든 오랜 상흔과 한 조각의 비탄을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유를 위해 놓아 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화석이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 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으십니까? 저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 앞에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지요.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납니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합니다. 



    그는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빛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됩니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가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상처가 양분이 되어 우리가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지워져 있습니다. 이 시는 윤동주의 〈팔복〉입니다.


팔복 (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매우 충격적입니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곧,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을 새로 써넣었습니다. "오래"와 "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 자필 원고.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 12월 경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입니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입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는 한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벗어나려고 파닥거리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쉽니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나[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위로〉 3연.


재미 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의 행동이 없습니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구절을 뒤집은 〈팔복〉은 시인이 거미줄을 뒤헝큰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슬픈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과 같은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와 〈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입니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에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참고로 2부 "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 "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1.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일부.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을 하여 교인들의 종교적 열광을 만족시키는 뜨거운목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학생회 소년들과 텃밭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기도 하고, 읍내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는 목사 같지 않은사람이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설교는 집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마통에 교인이 반으로 줄고, 그의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죽자, 실망한 교인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도, 신유의 능력도 없는 그를 내쫒았다.


    이 시는 약 2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라는 전통적인 상식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목사들이 추구하거나 교회의 지도층들이 바라는 목회자상은 교인수와 헌금액수를 높이는 데에 유능한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궁극적인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너무나 뼈아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신제품을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의 쇼맨십을 흉내 내어 설교단에서 복음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재로 변질시켜 온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탁월한 목회 지침서로 사랑받아 온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I: 540-604)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목회자들에게 도움 될 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목회를 하는 이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며칠을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도 그의 목회 규칙을 시작하며, 리더가 지고 있는 부담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어려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목회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거룩한 직함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 죄인이 그 성직에 주어지는 존경을 받는다면, 그의 불법이 예가 되어 멀리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I.2). 오늘날 목사또는 장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각종 불법으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그저 좋은 옛날 말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가 이처럼 부담이 큰 자리이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말로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겔 3418-19절을 인용하며, 자신은 맑은 물을 마시면서 양들에게는 자신의 발로 더럽힌 흙탕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양떼는 그들이 귀로 들은 가르침이 아닌, 그들이 목격한 목자의 오염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I.2). 그러면 말과 행동또는 앎과 삶사이의 간극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 책 111장에서는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의 유형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자신이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결한 삶의 습관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종종 악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규칙은 습관과 리듬을 만들고, 습관과 리듬은 규칙을 실천하는 사람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과 허버트의 시골 목사는 목회자가 바람직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습관은 단순히 행위의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는 내면의 생각과 바람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는 습관을 형성하는 내면의 생각과 동기에 주목한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육체의 음탕함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 또는 탐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정욕과 탐욕이 생각의 영역에서 진압되지 않으면, 외적인 행동에서 주도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다른 악들과 쉽게 결합해 그 사람 전체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뿌리 뽑혀야 한다. 또한 무거운 땅의 염려는 아예 사람의 등을 굽게 만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I.11).


    그런데 이 유형들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I.11). 이것은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옳고 그름의 구별이 뚜렷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은 그 본질이 미묘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I.1). 비슷하게 조지 허버트는 시골 목사에서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24).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집을 구입한 교인의 집에 가서, 집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ho Nazianzos: 329-390)의 견해를 받아들여, 영혼을 돌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함을 필요로 하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목회자는 마음과 생각의 의사라고 높이 평가한다(I.1).


    목회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만에 빠질 위험도 매우 높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겸손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지혜나 진리에 대한 오만한 추측으로 눈먼 자또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보편적 진리로 절대시 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이런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신성한 관조(contemplation)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여, 곧 우리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빛을 비춰주는 하나님 경험이 매우 얕거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이다(I.11).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유형들 중에 자신이 속해 있고, 그러한 약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면,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악한 모델로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것보다는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형벌이 덜할 것이라고 권면한다(I.2).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좀 더 영성적인 목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살펴보자.

 


조화로운 삶, 전인적인 돌봄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수도자이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 시의 집행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도 생활의 이상을 좇아 정치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들에 의해 그는 오십 세에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수도자가 된 그에게 교황의 직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적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만해지고, 자기 성찰을 빠뜨려서 죄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목회 사역의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하는 것과 외적인 활동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지도자들은 외적 문제들에 몰두하여 내적 생활에 태만해지거나, 내적 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외적 문제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적으로 피폐해지고, 반대로 내적 자아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이웃들에게 필요한 외적 돌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II.7).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종종 일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외적인 일들이 끝나면 내적 공허와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들의 삶도 점점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 중에 영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들의 설교에는 청중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들이 결여 되어 있는 것과, 그들의 말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II.7).


    조지 허버트 역시 시골 목사에서 목회자의 외적 활동에 대한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은 특히 영적 교만과 마음의 불결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9). 여기서 마음의 불결함(impurity of hear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5세기에 세속 도시를 떠나 마음의 청결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세속화되어 가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모의 땅 사막으로 나아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허버트는, 목사는 이와 같은 초기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종종 읽어서 그들이 평안할 때에 어떻게 매일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며, 유혹을 이겨내고, 겸손을 훈련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비록 허버트의 시골 목사나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역간되었으니, 오늘날 영성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라면 반드시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청결함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나 허버트가 이렇게 내적 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악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허버트에 의하면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탐욕과 식탐][그 악들에 사로잡힌]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해야 한다.”(24).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 위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되고 익숙한 것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다. 조지 허버트의 시골 목사에서 말하는 시골 목사17세기 영국 각 지방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위에 올라야 한다. 특히 한 주간의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을 성찰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허버트는 교구민들의 내적 생활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 또는 일상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골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필요하면 법률가와 의사의 역할도 도맡아야 하며, 교구민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날 법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하고 대비해야 한다(23).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의사와 법률가가 드물었던 ‘17세기 영국 지방 교구라는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오늘날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체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사역은 시간적으로는 주일’, 공간적으로는 교회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영적인 일들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들은 평신도들이 담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양떼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설교의 효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에게 있어서 목회또는 목양은 양떼들에 대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물질적인 삶,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은 오늘날, 목회자가 모든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그 일을 감당할 전문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목회 규칙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일흔두 가지 종류의 다양한 청중들에게 각각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허버트는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들의 질병뿐만 아니라 시대의 질병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목회 활동의 영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교구(교회)의 범위를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32).

 




나의 목회 규칙


목회자의 소명은 종교적 기업가들의 전략에 의해 사업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조건들은 예수의 방식 그대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매우 유해한 문화적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회고록 목회자(The Pastor)에서 오늘날 급변하는 미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목회자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의미를 잃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목회자의 소명 자체도 물질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면에서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시리즈의 첫 번째를 목회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글로 시작한 이유는 영성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삶으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일상 속에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영성 생활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각자 자신 만의 목회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목회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결심문들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의 삶에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규칙이 완결된 것이 아니며, 독자들의 첨삭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목회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회 규칙이 필요한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나의 목회 규칙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소개 : 권혁일은 장로교 목사이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팀블로그(spirituality.or.kr) 편집자이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잡지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원고가 축약되어 인쇄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첫 번째 글입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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