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삶 (안토니우스)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4.05.22 17:58
마땅한 삶


불의와 불법 
몸과 가슴이 짓밟힌 이들의 신음소리가 
5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겠노라고
옛 집을 떠나 온 사람들

소낙비로 전신을 노크하는  
하늘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막 수도승이었던
안토니우스,
예수의 삶을 옹골차게 살아내었구나. 

/ 오래된 오늘 (임택동)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사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안토니우스의 생애》, ch 87



'영성 생활 > 시 한 송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_ 김준태  (0) 2015.05.20
주현절  (0) 2015.01.17
마땅한 삶 (안토니우스)  (0) 2014.05.22
꽃, 비, 그리고 사순절  (0) 2014.03.31
부활, 봄  (0) 2013.04.06
집으로 가는 길: 성 안나의 집  (3) 2012.12.23
posted by 오래된 오늘

생각 보고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한 줄 묵상 2013.10.24 23:52

우리는 마치 보고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행동들과 영혼의 움직임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짓는 것이 발각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지킨다면 간음하지 못하듯이, 서로에게 보고하는 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한다면 더러운 생각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55.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간 사막의 수도승들, 

특히 홀로 있는 독수도승들은 외부의 유혹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문제는 자신의 내부, 즉 속사람이었다.  


남이 알아채지도, 또 알아주지도 않는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기부여를 받는 일 역시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까지 속사람을 돌아보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지금 살아간다라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내 눈 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더욱 높이는 후안무치한 세상에 살고 있다.

법은 책에만 쓰여 있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목청 높여 기도하는 우리들.

성경의 글자가 가슴에 쓰여지지 않는 한, 참된 죄의식이 생겨 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바로 통회함 없는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이다. 


법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순결해 진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나의 '생각 보고서'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지금의 자리를 떠남

한 줄 묵상 2013.09.24 07:36

안토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되었고 자신이 의도했고 원했던 바대로의 은둔생활이 가능하지 않게되자, 주님이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심사숙고 끝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챌 수 없는 위쪽지역 테베로 떠났다.          


- 아타나시우스(At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49.


얼마 전 추석을 맞이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느라 차들이 모든 도로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의 소원과 희망을 좇아, 있던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하고 또 삶의 기반이 잡힌 "지금의 자리"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하고도 더 나은 그 무엇인가가 있을 때 신발끈을 묶어매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각광을 받는 자리를 떠나기란…….

바로 그런 자리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요 부르심의 표징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이지 않던가?

이 현상을 간증도 하고 책을 내서 알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토니가 지금의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는 바깥으로 드러난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보며 가꾸어 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영적 스팟라이트를 받기에 혈안이 된 듯한 세상이다.

그것을 위해 박사학위도 취득하고, 책도 쓰고, 심지어 영성 훈련도 참여한다.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용기와 결단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미국까지 공부하러 떠나 온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나라 유명한 교회 목사가 6개월의 근신의 자리를 떠나 조명빛 환한 설교단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토니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왠지 씁쓸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과거의 자리를 떠나 지금의 여기에 있는걸까? 

지금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하는 자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발을 디뎌서는 안될 곳을 향하여 떠나와 가고 있지나 않은지?


그저께 비가 온 이후 

가을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아브람처럼, 예수님처럼, 안토니처럼, 바람처럼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가슴을 휘젖는다. 


/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들 :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이나 제가 언급한 것 외의 다른 한국어 번역본들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아래의 링크에 게시된 이강학 교수님의 글을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강학 목사님은 두란노와 분도출판사의 번역본을 추천하시네요.^^

    http://cafe.daum.net/spiritus/cDyN/70?docid=1KV3mcDyN7020120402093840

    BlogIcon 바람연필 2014.02.04 04:39 신고

2013년 8월의 추천 고전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들 :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교회 북까페의 책장을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제목을 발견했다. 이전에 어디선가 광고를 보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인데, 이곳 태평양 바다 건너편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은 평소 좋아하는 작가이고, 지리산도 스무 살 때 무거운 배낭 위에 텐트까지 얹어서 기다시피 올랐던 '지리산 등반대'의 초록빛 추억이 깃든 산이다. 게다가 평소 제법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교'에 관한 글이라 책 제목을 보는데 군침이 막 돌았다. 그러나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이 책이 나의 예상과 달리 '교육'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발견은 나에게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인터넷에서 찾아본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이 책은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으로 묶여지기 전에 <경향신문>에 약 9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글이며, 책으로 출간된 이후에도 <MBC 스페셜>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고 한다(2011년 3월 4일).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이야기 속에 나온 사람들의 집이나,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지리산학교'를 찾는 방문객이 많다고 하니 가히 세간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제서야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고 앉아 있으니, "쯧쯧!" 수 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무지'와 지금의 '뒷북'에 대한 핑계가 될까? 


      어쨌든, 이 책은 다 '먹어 치우는' 데에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 책이 참 '맛있는' 이유는 먼저 이 책의 등장인물이 영위하고 있는 지리산 산골마을과 섬진강변에서의 삶이 세속적인 도시 생활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시를 떠나 지리산으로 온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부를 욕망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사람, 생명, 평화를 사랑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삶을 사는 데에 많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적게 벌고, 적게 쓴다. '최 도사'라는 인물은 일 년에 몇 달 시내의 마트에서 주차 관리 요원으로 일해서 번 '연봉 200만원'으로 일 년을 충분히 산다. '낙장불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원규 시인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자신이 사는 집을 통째로 비워주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손을 거쳐 맛깔나게 쓰여진 이들의 이야기는 행복을 찾기 위해 유형, 무형의 것들을 자꾸만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는 도시인들에게 참된 행복은 오히려 소유가 아니라 욕심을 비우고 생명과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삶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인물들이 취한 의미있는 '방향 전환'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처음부터 지리산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들이 아니라, 다른 도시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어떤 계기로 인해 지리산 산자락과 섬진강변으로 옮겨간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해서, 어떤 이는 결혼 생활에 실패해서, 어떤 이는 보다 의미있는 삶을 찾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각각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 중대한 '방향 전환'을 해야할 때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서 살 것인지와 같은 '장소'의 문제는 나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내 나이 올해 마흔. 평균 팔 십 년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산술적으로는 인생의 반환점 언저리에 서 있다.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조만간 있을) 커다란 인생의 방향 전환을 앞두고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게 신선하고도 가치있는 질문들을 던져 준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이 책에 나오는 지리산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떠나 보내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집 대문을 넘나들고 있고, 특히 신문 연재와 책을 통해서 유명세를 탄 이후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많은 이들의 입과 인터넷 사이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에 이 '지리산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책의 영향력은 앞으로 당분간은 지속되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삶은 이 책 속의 함태식 옹에 대한 글로 요약될 수 있다. 함태식 옹은 1972년 나이 마흔에 지리산에 입산하여 노고단 산장을 열고 거의 40년 동안 피아골 대피소를 지키며 많은 조난객들을 구한 인물이다. 


"노고단 산장에 처음 가서 내가 호롱불을 만들어 현관에 달아놨어요. 근데 작은 호롱불빛이 말이야. 멀리 화엄사 입구에서도 보여. 등불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찾아오는 거야. 길게 밝혀 준다고 그걸 장명등이라고 하지."


그의 말대로 빛이라는 게 그렇구나 갑자기 우리는 숙연해졌다. 작은 일도 지극해지면 생명을 살리는 등불이 되는구나. 장명등,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 공지영,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서울: 오픈하우스, 2010), 57-58.


장명등(燈), 어두운 밤 멀리까지 빛을 비추는 등불처럼, 기이하면서도 소박하고 진실된 지리산 사람들의 삶은 한 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도시 생활이 커다란 기계가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굉음을 울리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 속의 삶 같은 한, 또 도시가 그 물질들을 소비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하려는 소비자들로 가득 찬 백화점 같은 한, 이들의 이야기는 길게 한 줄기 빛을 비춰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후 세속화되고 타락해진 기독교 신앙을 벗어나 마음의 순전함(purity of heart)을 얻기 위해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의 사막으로 들어간 4~5세기의 '사막의 수도자들'(Desert Fathers and Mothers)이다. 공지영 작가도 그녀의 책에서 지리산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사막 교부들이 떠오른다고 쓰고 있다. 그만큼 지리산 사람들과 사막의 수도자들은 여러 가지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들은 모두가 순수성을 잃고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번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나, 지리산/사막에서 단순하고 진실한 삶을 살며 그 속에서 참된 자아의 발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더불어 이들이 물질을 소유하는 것보다 비움과 가치 추구를 통해서 행복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 이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도시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배우기 위해 몰려 온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삶이 하나의 '장명등'이라는 점들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천오백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보다도 더 큰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둘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못하다. 하지만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옛날 사막 수도자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만 짚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막 수도자들의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한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주로 4~5세기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사막에 살던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를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훈련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주로 평신도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글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혼자 동굴이나 무덤 등지에서 기거하는 은둔자(hermit/anchorite)로 살기도 하였고, 삼삼오오 모여 살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생활(cenobite)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장 활발했을 때는 '사막을 도시로 만들었다'고 묘사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수도 생활에 자신을 내던졌다.


      당시 사막에서는 많은 경우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거주하며 수도 생활을 배워 나갔는데, 그들의 배움과 훈련 방법은 스승의 강론을 듣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스승의 삶을 관찰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씩 외부에서 찾아온 방문자들이나 제자들이 스승에게 질문하거나 "아버지여(abba, 여성의 경우는 amma),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가르침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 책에 수집된 이야기들은 이와 같은 경우 영적 스승들이 남긴 짧은 가르침들 또는 이들과 관련된 짧은 일화들이다. 이 가르침들과 일화들은 구전과 기억을 통해서 전해져 오다 첫 세대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을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의 수도자들을 위해 그 일부가 기록으로 남겨졌다. 


      이 사막의 수도자들의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며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는, 이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하면 금욕생활 또는 수도생활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하여 금식과 철야, 그리고 여러가지 고행을 하기도 하였지만 고행 그 자체가 그들의 관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스승들은 지나친 고행은 수도자를 교만하게 하여 수도생활의 본질을 흐릴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어떤 형제가 한 은둔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금식을 해야 합니까, 육체노동을 해야 합니까? 철야를 해야 합니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까?"


은둔자가 대답했다. "분별력을 가지면 이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소.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오. 오랜 금식으로 입에서 가시가 돋고, 말씀을 다 배워서 알고, 시편을 암송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겸손과 사랑이오." 


- 사막 교부들 지음, 배응준 옮김, 《깨달음》(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서울: 규장, 2006), 199. 


      그렇다고 해서 사막의 수도자들이 늘 소위 '영적인' 이야기, 또는 실제 생활과는 관련이 없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한 은둔자가 포에멘(Poemen)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러 왔다. 포에멘은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움막으로 맞아 들였고, 두 사람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 은둔자가 "성경과 영적인 것들과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포에멘은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은둔자가 밖으로 나와서 포에멘의 제자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 제자가 포에멘에게 들어가 그 이유를 물었다. 포에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아래에 속한 사람이라 땅의 것을 말하는데, 그 분은 위에 속한 사람이라 하늘의 것들만 이야기하지 않소? 만일 그 사람이 영혼의 격정에 대해 말했다면 나도 기꺼이 대답했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영적인 것들만 말했소. 나는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오.

-《깨달음》, 173.

 

이 대답을 전해 들은 은둔자가 다시 포에멘에게로 들어가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정욕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그는 포에멘의 대답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고 돌아갔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에는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인간적인 욕망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은 사막 수도자들의 옛날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 읽다가 얼굴이 자주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약 1600여 년 전의 이야기들이 최근의 나의 어리석고 악한 마음과 행동들을 환하게 들추어 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책이야 말로 기독교 영성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속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서 적용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가르침들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던지는 나쁜 생각들에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따르면서 그것이 악마들이 공격이라고 핑계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쭉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중간 중간에 쉬어가며 충분히 묵상하고, 가능하면 주위의 벗들과 깨달은 내용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할 때 책 속의 내용들을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 옛날 사막의 수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으로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의 이야기들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 것은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압바(암마)들의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모은 편집본(Alphabetical Series)과 주제별로 모은 편집본(Systematic Series) 이 두 가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편집본들에서 이야기들을 추출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은 라틴어 선집 Verba Seniorum도 존재한다. 이 책의 영향력을 증언하듯이 한국어로도 여러 가지 번역이 나와 있다. 그러나 현재 필자가 해외에 거주하면서 이 모든 번역들을 두루 검토하고 좋은 번역을 추천할 수 없는 점을 독자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다. 다만 현재 우리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한국어 번역본은 규장에서 《깨달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인데, 이 책은 펭귄 클래식스(Penguin Classics) 시리즈의 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이라는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영어본은 베네딕타 워드(Benedicta Ward)가 Verba Seniorum을 대본으로 옮긴 것으로 매우 공신력 있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규장의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영어본에 있는 워드의 뛰어난 서문은 물론, 본문도 중간 중간 적지 않게 생략되어 있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chapter) 순서도 뒤바뀌었는데 매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원한 활자와 삽화가 이정선의 영감 있는 그림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 잡고 읽고 싶게 만들며, 중간중간 묵상할 수 있는 휴지(止)도 다는 점에서 위로를 삼는다. 


       한국은 아직 무더위가 한창이지만, 이곳 버클리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지리산 단풍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산책길에 본 나무에 벌써 옅은 빨간 물이 흠뻑 들었다. 공지영의 책에 나오는 지리산 사람들도 그렇고 사막의 수도자들도 모두가 같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소박하면서도 참된 삶을 추구하고, 창조주가 디자인한 대로 각각 다양한 색깔의 잎사귀를 내는 사람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번 가을, 영성 고전 독서를 통해서 아름다운 삶, 순전한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기도하고, 실천하자. 그리하여 자신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빛깔로 삶이라는 잎들을 물들여 가자. 우리 모두가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어두운 세상에서 각각 단풍빛의 장명등을 밝히는 사람이 되자.


지리산은 그 모든 골짜기 구석구석마다 다른 빛깔로 각기 다른 사람들을 품고 있으니까 말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26.

/ 권혁일



지리산 행복학교

저자
공지영 지음
출판사
오픈하우스 | 2013-11-0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망이 두려움을 넘어설 때 우리는 지리산 행복학교로 간다.어느 ...
가격비교



깨달음

저자
사막교부들 지음
출판사
규장 | 2006-10-3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진정한 깨우침을 주는 참스승, 사막의 은자들! 사막 은자들의 ...
가격비교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저자
두란노아카데미 편집부 지음
출판사
두란노아카데미 | 2011-02-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사막 교부들의 단편적인 가르침을 모아 놓은 모음집으로, 4세기에...
가격비교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저자
뻬라지오와 요한 지음
출판사
분도출판사 | 1999-08-1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가톨릭 신앙생활 교양서.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
가격비교



The Desert Fathers: Sayings of the Early Christian Monks (Paperback)

저자
Ward, Benedicta (EDT) 지음
출판사
Penguin USA | 2003-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desert fathers provided the ins...
가격비교




Wisdom of the Desert

저자
Merton, Thomas (Author) 지음
출판사
New Directions | 1970-06-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isdom of the Desert was one of...
가격비교



posted by 바람연필

은둔 그리고 참여 (안토니의 생애)

2013년 6월의 추천고전


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ony)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영성 고전을 소개하고 싶다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ony)》는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또는 Ant(h)ony the Great)를 소개한 책이다. 비록 이 책은 약 170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순전한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애독되어 왔고, 지금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쯤 곱씹고 고민해볼 만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안토니우스의 가르침과 설교의 주요 주제들은 무엇인가? 저자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통해 당시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토니우스의 부르심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안토니우스의 교회론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오늘날 개신교는 안토니우스의 수도 생활, 은둔 생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이다. 

 


·         시대적 배경


      이 책의 저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는 기독교 초기, 변증과 이단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가 확정되어 가던 격동기를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던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 313)과 니케아 회의(The Nicaea Council, 325)를 직접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설전은 그를 평생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투사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는 아리우스를 경계하며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권면한다.

 

안토니가 자신들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잘못된 주장을 아리우스파가 펼쳤을 때, 그는 흥분하며 그들에게 분노했다. “그러므로 그분(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말씀이신 분을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만드신 것을 더 경배하며 섬기는 ( 1:25) 이방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69).

 

믿음의 자녀들이여, 낙심하지 마시오. …… 여러분 자신을 아리우스파와 상대함을 더럽히지 마시오.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들과 그들의 아버지인 사탄에게서 온 것이오. 정말로 사탄은 생명이 없고 지각이 없으며 무분별한 노새들처럼 올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한다오.” (82).

 


·         안토니우스의 삶


      그렇다면 안토니우스는 누구인가? 그는 251년 이집트의 작은 마을 코마(Coma)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쯤에 부모를 여의고 모든 재산을 상속 받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따르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 중에 네가 완전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라라는 말씀을 듣고 문자적으로 순종하여 그의 재산을 처분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살던 마을 근처에서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금욕주의자들을 만나보고 그런 삶을 공부했으며 서로의 가치를 배웠다. 그 후, 그는 그의 거처를 마을 근처의 무덤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수많은 야수의 모양을 한 악령들과의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5년후, 그는 완전한 고독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그를 단절시켰다. 나일강 동쪽 피스피르(Pispir)라는 곳에 자리를 잡은 안토니우스는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나일강과 홍해 사이의 한 곳을 정하여 자신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완전한 은둔이 아닌 필요에 따라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며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거나 도시로 나가는 현실 참여적인 수도의 삶을 45년간 살다가 105세에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         은둔인가, 참여인가?


《안토니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은둔인가 참여인가라는 화두는 참으로 아이들 말로- 생뚱맞다. 왜냐하면 그는 은둔과 금욕의 대명사이지, 현실 참여의 영성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 거꾸로만 향하는 정치인들의 작태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철저한 참여의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수도자들이 그에게 간청하기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생활을 감독해 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수도자들과 함께 길을 떠났으며, 낙타 한 마리가 그들의 빵과 물을 운반하였다. 그 사막은 온통 건조해서 그의 암자가 있는 산속을 제외하고는 물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거기에서 물을 걸어왔다. 바야흐로 숨 막힐 듯 한 열기가 온 땅에 가득 차고 물마저 도중에 떨어졌으므로, 그들 모두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곳으로 물을 찾아 헤매었지만 허사였고, 더 이상 길을 걸을 수 없어서 땅 위에 드러누었으며 삶을 포기한 채 낙타를 풀어주었다. 늙은 안토니는 모두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몹시 괴로워하고 깊이 탄식하면서 그들을 떠나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며 기도를 드렸다. 즉시 주님은 그가 기도하는 곳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게 하셨다. (54)

 

며칠 후 그는 다시 산 속으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 중에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에게 담대히 다가갔다. 찾아온 모든 수도자들을 위해서 그는 어김없이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55)

 

귀족 한 사람도 마귀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그에게 왔다. 그 마귀는 너무 흉악해서 그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안토니에게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해서 자신의 배설물까지 삼킬 정도였다.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안토니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애원했다. 안토니는 그 젊은이를 측은하게 여기고 기도를 드렸으며, 온 밤을 그와 함께 새웠다. (64)

 

             그는 죽어가는 자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고 (54), 방문하는 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고 (55), 또한 귀신들린 자를 긍휼히 여겨 그와 온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64). 그의 삶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처럼 은둔의 삶 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은둔이 무엇을 위함인지 철저하게 알았기에 그의 삶은 아픈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 현실 참여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사회운동가들처럼 참여만을 외치는 영성가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참여는 반드시 고독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경험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또 이런 간청을 받게 되었다. 군대의 지휘관 한사람이 많은 전령사를 보내 그에게 와줄 것을 청했다. 그는 가서 구원에 대한 몇 마디 말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충고를 전한 후,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공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에게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해명하며, 그 공작을 설득했다.

물고기가 마른 땅 위에 잠시 나와 있으면 죽게 되듯이 수도자들도 여러분과 함께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낼 때 수도를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바다로 가듯 우리는 산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사이에 남아 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85)

 


·         은둔이다 그리고 참여다


      요즘은 정의가 땅에 뭍히고법을 준수하는 자가 냉소와 조소를 받는 시대이다. 이러한 때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거대한 기득권들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다 지쳐버려아니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을 운명처럼 여겨 버리고 급기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는 듯하다. 국가기관의 권력을 남용하여 선거에 개입하였던 전 국정원장과 국정원 직원들의 잘못은 모른 체하고, 그것에 물을 타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발언 등을 문제 삼는 모습은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지를 더욱 꺾어버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게만 만들어 간다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안토니의 생애》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그의 영성은 은둔의 영성인가 참여의 영성인가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부조리 가운데서, 그리고 약한자들이 처절하게 밟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안토니의 생애》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참여다! 무엇인 진리인지 고민하지 않는 영성,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은둔이다! 그 참여의 영적 밑동’(영적 뿌리)은 한 발 물러나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안토니의 생애》는 다시 한 번 이 갑갑하고 떠나가고 싶은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가 105세의 삶을 살면서 타인의 삶에 참여했지만 뒤로 물러나 하나님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은둔에 뿌리를 둔 참여의 영성이다 / 나무 잎사귀 이경희




성 안토니의 생애

저자
아타나시우스 지음
출판사
은성 | 2009-02-28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
가격비교



Athanasius : The Life of Antony and the Letter to Marcellinus

저자
Gregg, Robert C. 지음
출판사
Paulist | 2010-06-25 출간
카테고리
문학/만화
책소개
Athanasius (c. 295-373) Bishop of A...
가격비교


posted by 바람연필

차라리…… (안토니의 생애)

한 줄 묵상 2012.11.15 17:12
  • "왜 갑작스럽게 '차라리......'이라고 말하는 것일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궁금해져서 영어본을 참조해 보니, 인용하신 기존 번역에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의 '갈망'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물질들'로 번역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차라리'라는 단어보다 '오히려'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는 비교대상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토니가 추구하고 가르친 것은 '이 땅의 물질을 소유하려는 잘못된 욕망을 바로잡는 것이지, 마음 안의 모든 열망(desire)을 제거하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안토니는 17장에서 집이나 재물과 같은 '물질'로 향하는 열망을 바로 잡아, 정의나 사랑과 같은 '덕(virtue)'을 열망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사막에서의 훈련은 우리 안의 열망을 뿌리 뽑는다기보다는 그 열망이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바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것도 열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른 것을 열망하는 것이 훨씬 쉬울 듯 합니다.

    목사님 좋은 본문을 선택해서 소개해주시고, 좋은 질문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존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바로 잡는 것도 지금 영성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17 04:04 신고
  • 유익한 첨언 감사합니다. 하나 둘 수정해나가면서 바른 의미들이 잘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부사'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다른 의미를 낳는군요^^

    나무 잎사귀 2012.11.18 05:51 신고

우리는 왜 덕을 위해서 갈망들을 포기하지 못합니까? 천국을 물려받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소유하려는 갈망을 품지 맙시다. 우리가 가져가지 못하는 이런 것들을 소유할 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들, 이를 테면, 사려깊음, 정의, 절제, 용기, 이해, 사랑,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성내지 않음, 친절 등을 소유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성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ony), 

안미란 옮김 (서울: 은성출판사, 1993), 17장. 


'소유'와 '비워 냄'은 모든 구도자들의 오래된 숙제이다. 인간을 '불 덩어리'(히/에쉬)로 정의한 히브리 문학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의 '욕망'은 불 이상의 화력을 품어내며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토니(Antony)는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를 거부한다. 물질의 소유를 다 버린 그가 광야를 찾은 이유 역시 마음의 소유까지 다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곧 문장을 바꿔 '차라리' 소유하라 한다. 대신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라 한다.


물론 천국에까지 가져갈 '소유해서 유익한 마땅한 것들'도 안토니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겠지만, 필자는 갑자기 '무소유'에서 '소유'로 화두를 바꾼 안토니(Antony)의 의중이 궁금해진다. 왜 더 강하게 '소유하려는 갈망 자체를 품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갑작스럽게 '차라지 가져갈 것이면…….' 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마치 기다리다 지친 부모처럼, 마치 어루고 달래다 지친 선생님처럼 '차라리'라고 말하며며 '독자들'의 수준으로 말을 맺는 것인가? 왜?


어렵다. 자기비움. 어렵다. 자기부인, 그리고  자기포기.  마치 이천 년 전에 '안토니'가 내 마음을 뚫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차라리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나 주워 담아라' '차라리…….' / 나무잎사귀

 

posted by 비회원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한 줄 묵상 2012.09.10 02:00
  • 일반적으로 '머리가 커질수록' '겸손과 열려있음'이 반비례하는 듯 합니다. 굳이 '일반'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제가 그렇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09.11 13:48 신고
  • 과거는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잊고, 몸--혀와 배--을 다스려 영을 얻으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09.11 14:55 신고
  • 영성 공부는 하면 할 수록 정말 영과 육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 모임의 취지겠지만요....

    BlogIcon 소리벼리 2012.09.12 07:31 신고

"팜보(Pambo) 교부가 안토니 교부에게 물었다. ‘제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연로한 안토니가 말하기를,


그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에 신뢰를 두지 마시오. 지나간 과거를 염려하지 마시오. 그러나 말(tongue)과 육욕(stomach)을 통제하시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주제별)Ch. 1. 2.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실린 이야기의 대부분은 많은 대중들을 앞에 두고서 행해진 대화나 가르침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정황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팜보교부는 안토니 교부(Saint Anthony)에게 자신의 삶에 필요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자 안토니는 제일 먼저, 자기 나름의 의(own righteousness)에 기대지 말라고 그에게 가르침을 준다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잘난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사막까지 와서 그토록 수행에 힘써 온 팜보 교부로서는 기분 상하기 딱 쉬운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그에게 너무나 시의적절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주변에 소위 영적 훈련에  있어서 많은 경험과 수고를 하신 분들 가운데, 가끔씩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하나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더 낮아지려고 동원한 그 행위들이 오히려 '하나님' 없이 '자신'이 높아지는 일에 쓰여지게 된 것이다.

 

 팜보 교부는 후에 안토니와 더불어 다른 사막 수도자들로부터 본받을 만한 대표적 수도자로 언급되기도 한다(1). 가르침과 교훈은 일방적일 수 없다. 안토니 교부에게 사랑이 없었으면 위와 같이 아프지만 꼭 필요한 조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은 팜보에게 겸손과 열려있음이 없었다면 이같은 교훈을 자신 영혼의 살과 뼈로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이처럼 오늘 만남의 배경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의 성숙된 영적인 토양이 있었다. 아름다운 영성의 꽃이 메마른 사막에서 피었다. / 오래된 오늘 

  

(1) 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The Alphabetical Collection), trans. Benedicta Ward (MI, Kalamazoo: Cistercian Publications, 1987), 97.



posted by 오래된 오늘

<이젠하임 제단화>와 <성 안토니의 생애>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에는 4세기 이집트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우스 (St. Anthony 또는 Antonius of Egypt)가 등장한다. 이처럼 서양미술에서는 기독교 고전 작품 또는 성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활용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그림과 고전 작품에 대한 이해와 묵상을 돕기 위하여 제단화의 일부와 더글라스 버튼-크리스티 교수의 글을 일부 번역해서 싣는다. 






 "Isenheimer Altar" by Matthias Grünewald

These files are from the Wikimedia Common and http://www.aiwaz.net.





 

DOUGLAS BURTON-CHRISTIE 지음, 권혁일 옮김, "Athanasius(c.295-373): The Life of Anthony, " in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Arthur Holder 편집 (New York: Routledge, 2010), 13-14.



인물은 수척하며 죽은 듯하다. 그의 몸무게로 인해 못이 박힌 그의 손과 발이 찢어지고, 그의 육체는 꺾쇠로 보이는 것에 갈가리 찢어졌으며, 그의 머리는 마치 몸에 붙어 있지 않은 늘어져 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 15세기 작품 이젠하임의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서양 미술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그리스도의 이미지들 중의 하나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이미지이다. 이것은 제단화에서 중심이 되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옆판에 보이는 매우 흉측한 인물은 육체가 썩어 들어가는 염증으로 뒤덮였고, 복부는 팽창했으며, 사지는 몸에서 모두 함께 떨어져나갈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안토니의 이라고 알려진 무서우면서도 때론 치명적인 세균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병은 오백 동안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어왔다. 다른 인물은 이집트의 안토니St. Antony이다. 그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확실히 낫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던 성인이다. 그는 다수의 섬뜩하고도 악마적인 존재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할큄을 당하며, 찢겨지면서 자신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뤼네발트의 제단화에서 인물들, 그리스도, 안토니, 안토니의 의한 익명의 희생자의 융화는 너무나도 강력하게 인간의 고통을 형상화 해낸다. 인물들을 응시한다면, 어떤 이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실제로 가능할까라는 불확실성의 느낌을 피할 없을 것이다. 고통은 너무 극심하고,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무언가가 또는 누군가가 고통을 완전히 극복할 있었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제단화는 희망의 상징이다. 심지어 안토니의 희생자와 같이 바로 절망의 가장자리 위에서 사는 이들에게라 할지라도 구속과 치유는 가능하다는 신호이다. 제단화는 처음에 질병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치료를 받던 병원 시설의 일부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희생자들의 병원생활을 특징짓던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그리스도도 안토니도 초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오히려 그들은 고통을 함께 하고 심지어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여질 필요가 있었다. 이제하임 제단화에서 다수의 섬뜩한 생물들에 의해 시달리고, 가리가리 찢기는 것으로 묘사된 안토니는 [공격에] 노출되고 취약하며 무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안토니의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의심과 극심한 고통의 끔찍한 장소를 깊숙이 여행한 것으로 보일 있었다. 안토니는 이와 같이 고통 가운데 있는 외로운 영혼들을 만날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그는 영혼들 또한 자신들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그들 속에 불붙일 있었다.

           안토니에 대한 중세 유럽의 다른 묘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젠하임 제단화에 묘사된 성인의 이미지는 4세기의 명작,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ony》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품이 처음 출현한 때부터, 이집트 사막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악마들과 싸우던 은둔 수사의 이야기는 기독교 상상력 속에 깊이 공명되었다. 이와 같은 공명은 작품이 출현한 이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무수한 적용과 해석을 통해서 시대는 이야기에 신선한 의미를 주려고 노력했다.


posted by 바람연필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