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알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알라 (칼빈)

한 줄 묵상 2013.10.24 01:3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모르면서 다른 한쪽을 알 수는 없다." 


존 칼빈 (John Calvin, 1509-1563)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제1권, 제1장. 

 

종교개혁의 한 축에 서서 부패한 종교적인 제도와 맞서 싸운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처음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 정신(Spirituality of Protestant)은  잘못된 인간 역사의 자각(knowing)에서부터 시작해서 믿음 안에서의 저항(Protest), 그리고 변혁(Transformation)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국 개신교 영성의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 개신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사회 정의(Justice)에의 헌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국의 개신교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인가부터인가 불의에 눈감고, 사회적인 부조리를 슬며시 인정하며, 이른바 신앙을 개인을 위한 안식처와 도피처로만 삼는데에 익숙해져 오지 않았는가? 신앙인은 불의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의 가르침처럼 먼저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불의를 자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예민하게 인지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해야 자신의 변화, 사회의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한 개개인의 신앙과 용기가 모여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다. 나와 나의 사회 가운데 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소리벼리(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어느 학생의 기도 (존 칼빈)

한 줄 묵상 2013.02.01 16:30
  • "제가 배우는 것들이 세상을 위한 당신의 거룩한 계획에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늘 정확히 감지할 수 있게 하소서"

    이것을 늘 인지하고 있다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오늘의 공부에 힘과 생명을 쏟을 수 있는 내적 동기가 되겠네요.

    BlogIcon 바람연필 2013.02.02 02:24 신고

오 주님,

주님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원천이십니다.


주님께선 제가 정직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학식과 기술을 터득하고 익히도록 여러 해 세월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의 지적 능력을 일깨워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제 기억력을 지켜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배운 것들을 오래도록 잘 간직하게 하소서.


제 심정을 다스리소서. 그리하여 내가 모든 배움에 성실히 임하게 하시고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하소서.


그리고 진리와 판단과 분별의 영이신 당신의 성령으로 하여금 저의 이해력을 인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배우는 것들이 세상을 위한 당신의 거룩한 계획에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늘 정확히 감지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존 칼빈 (John Calvin, 1509-1564), This Day: A Wesleyan Way of Prayer

 

나는 왜, 무엇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공부하려는 그 동기와 의도는 얼마나 순수한 것일까? 또 학문을 향한 나의 열망은 얼마나 순전한 것일까? 헛된 영광을 향한 지향은 없는가? 턱없는 욕심이 섞여 있지는 않은가?


또 한 번의 새로운 학기를 앞둔 아침, 나의 현재를 채근하며 칼빈이 일러주는 이 기도의 말을 나의 기도로 삼아 되뇌여 본다.


나의 모든 동기가 순수해지고, 나의 열망과 정감이 순전해지기를 

그리고 나의 모든 말과 묵상, 노력이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 되기를 소망하며…….

/새결새김

posted by 새결새김

경건: 퇴계와 깔뱅의 만남

한 줄 묵상 2012.11.29 15:25
  • 네, 경건의 핵심은 '경(敬)의 영성'이며,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는 것,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는 생각 하게 됩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30 03:00 신고
  • 참 좋은 글 같습니다. 예전에 영어성경을 읽다가 '경외하라'의 표현이 'fear'임을 알고 읽기를 멈춘 적이 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을 그저 우러러 보는 것이지 두려워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면서 반복되는 합리화, 좌절을 겪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경'의 의미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12.02 06:01 신고

경건이란곧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데서 생겨나는 바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love for Him)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뜻한다. (기독교강요 I. 2. 1). 


경건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많지만항상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그 일들을 행해야 한다경건을 우리의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삼자. (기독교강요 III. 7. 5). 


쟝 깔뱅 (John Calvin, 1509-1564) 《기독교강요》 



유교가 공자의 전유물인 양 인식되지만 사실 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유교는 주자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그것은 주자의 것도 아니다. 정도전이 애써 그 명맥을 유지하려 했지만 조선 중기부터 현대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우리 나라의 유학은 퇴계 이황의 것이다퇴계 유교의 영향 아래에 있던 19세기의 어느 날, 서양의 깔뱅 복음이 서해 앞 바다를 밟는다. 그리고 깔뱅의 복음이 퇴계의 유교를 만난 지가 어느덧 150여 년이 지났다퇴계의 유학(성리학)의 토양에 뿌려진 깔뱅의 복음.


깔뱅의 복음은 150여년 전부터 교회마다 울려 퍼졌지만, 500년이상 우리의 살과 피가 된 퇴계의 유교는 그 복음을 계속 밀쳐 낸다. 한 지붕 안에 다른 둘이 살고 있는 것처럼 머리로는 깔뱅에, 몸으로는 퇴계에 익숙하다. 그리고 몹시 불편해 한다150년 간 대화 없이 지낸 이 둘을 한 테이블에 앉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들에겐 공통분모가 있다. 퇴계의 세상에 대한 깊은 마음은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나타나 있다. ‘/Piety이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계발()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그는 <성학십도聖學十圖> 4대학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이라는 것은 또한 형이상 ˙ 형이하에 다 통하는 것이니, 착공하고 수효함에 있어서 다 마땅히 종사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도 저와 같았고, 이제 이 십도(十圖)도 다 경(敬)으로써 주를 삼았습니다.”

 

퇴계는 경(敬)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으로 사랑한 것이다그렇다면 깔뱅에게도 경이 있는가? 그에게 경은 경건(Piety)이며, 이것은 그의 사상 중에 가장 비중이 있는 가치이다. 깔뱅은 이 경건(Piety)으로 하나님을 두려워(Piety)하고 자신을 훈련(Piety)시키고 타인을 사랑(Piety)하자고 권면하고 있.

 

퇴계와 깔뱅이 만나는 자리는 (/Piety)’이다. 하늘을 두려운 줄 알고 사람을 사랑하는 인 것이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 교회도 있고 유교적 가부장적 권위도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신을 훈련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우리의 교회에서 퇴계의 경(敬)에 바탕을 둔 깔뱅의 경(Piety)의 복음이 구현되어야 하지만, 실제적으로 경(敬)은 잘 보이지 않고 경(輕)이 넘쳐 난다. 그 값싼 가벼움(輕)을 벗어 던지고 진중하고 깊이 있는 '경(敬)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경건'의 회복일 것이다. 그곳이 바로 퇴계와 깔뱅이 만나는 자리일 것이다. / 나무잎사귀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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