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을 말하다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각주: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각주:2]과 15장 15절[각주:3]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각주:4] 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2. 명료화위원회[각주:5]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각주:6]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1.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2.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3.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4.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5.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6.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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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투명합니다 (토마스 머튼)

한 줄 묵상 2015.05.12 12:08


저는 모든 것들이 투명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불투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삶은 이것처럼 단순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히 투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계십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Solitude: Breaking the Heart (Kansas City, MO: Credence Cassettes, 1988).


영성이 깊어 진다는 것은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상처, 이기심과 교만, 재난과 사고 등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을 숨기는 것들을 넘어서 이 세상 가운데 항상 밝게 빛나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뵙고 그 가운데 사는 사람이 깊은 영성의 사람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세상이 지금 우리의 세상과 달리 평온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투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은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세계 곳곳에 화약냄새와 비탄이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외치기도 하였지요


또는 그가 '세상과 분리된' 수도원 안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한'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젊은 시절 머튼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는 수도원의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세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세상의 비극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머튼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아마도 '고독'과 '침묵'일 것입니다. 고독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비늘'(행9:18)이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벗기시는 주님의 은총의 빛에 우리를 노출 시킵니다. 침묵은 우리의 틀에 갇힌 생각과 말들을 잠잠하게 하고, 직관의 눈을 뜨게 하여 사람의 언어에 제한되지 않는 주님의 현존을 보게 합니다. 고독과 침묵은 깜깜한 밤에도 사방을 덮고 있는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빛을 발견하고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면 점차 어둠이 투명해지고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항상 충만하게 빛나고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 매일의 기도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2 13:36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매일 기도



앞선 글에서는 우리의 삶은 배가 항구를 떠나 하나님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항해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5-10분 정도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시기를 권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언제 : 삶의 리듬과 갈망

    매일 아침,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서 기도를 언제어디서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인도함을 받습니다자기 나름의 시간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강압하고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나 자기혐오에 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차라리 자기 스스로 얼마나 원하는지를 더욱 기억하십시오원하는 것에 솔직하십시오그리고 몸하루 일정마음 상태 등을 봐가면서오늘 하루의 삶에서 언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최선인가를성령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우리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에자기에게 적합한 시간은 일상에서 곧 정해집니다기도 자리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원하는 힘을 덜 믿기 때문입니다기억하십시오우리가 원하는 것보다성령께서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원한다는 것을 강하게 믿어보세요믿음이 없으면하나님께 청해보세요.


2. 어떻게 : 침묵과 고독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환경이 침묵과 고독입니다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인간이 그 멀리 계신 하나님께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이것은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이 나를 추구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과 일치는 분리된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이미 너무나 하나여서 분리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이것은 깊은 고요내적인 침묵이 형성되면 그저 저절로 발견됩니다세상의 온갖 자극에 너무 시달린 감각으로 이런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침묵기도가 일상 속에 잘 녹아내리지 않는 이유는 개별적 차원의 기도 숙달에 있지 않습니다그것은 보다 더 큰 환경인 침묵과 물러남의 가치에 얼마나 눈을 뜨느냐에 있습니다침묵하는 까닭은 하나님께만 말하기 위함이고물러나는 까닭은 하나님하고만 머물고 싶다는 갈망의 형식적 표현입니다그러니 혼자 있는 시·공간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침묵 속에서 혼자 조용히 머물러 보십시오사방이 하나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곧 느껴지실 것입니다아주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3. 무엇을?

    하나님을 추구하고하나님과 사랑 속에 머물고 싶어지려면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일단 하나님 그분 자체가 함께 머물기에 참 좋아야 합니다만일 하나님 앞에 고요히 머무는데우리가 그 하나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두렵다면 어떨까요하나님과의 관계가 권위적 관계로 경색되어 있어서자발적으로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분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혹은 하나님께 속마음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거나아무리 기도해도 꿈적도 않는 경험이 반복되어 있으면 어떨까요혹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응답하셔야만 하는, 곧 우리 비위를 맞춰주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a. 성경

    이 모든 예는 온전하신 하나님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신비이시고 전부이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입니다이런 경우는 자기-경험의 세계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있는 것이고하나님을 오해한즉 자기-결핍을 투사한 하나님의 왜곡된 이미지를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 방식대로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이해해야 합니다그래서 침묵기도의 기본 자료는 언제나 성육하신 말씀이신 성경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복음서로 기도하는 것이 중심입니다말씀을 통해 자기-세계자기-이해를 벗어날 때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각성될수록항해에 대해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b. 그 자체

    자, 그런데 오늘의 항해일지에는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요한 사건이슈선택 문제 등을 놓고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그러면삶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머물면서 기도합니다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사건에서 마음이 불편한 경우죄책감이 느껴지거나 하는 경우도 좋습니다구체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사안들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① 첫째, 묵상기도나 복음관상 때처럼 기도 준비를 합니다.


② 둘째, 기도할 내용을 요점으로 만듭니다

예) ○○와의 관계에서 불안하고 화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새롭게 볼 수 있을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무엇을 교훈하셨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천천히 기도를 시작합니다


④ 넷째, 기도할 요점을 마음에 깊게 품으면서떠올려야 할 것들은 기억으로 떠올리면서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집중합니다감정이나 마음을 인지하면서하나님께서 요점으로 잡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처음에는 분심(산만한 마음)이 많고 어려울 것 같지만묵상기도가 익숙한 사람들은 삶으로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삶 자체로 기도하면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이것은 삶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삶을 묶어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⑥ 여섯째, 정해진 기도시간(40~60)이 다하면 기도를 마칩니다기도를 통해 은총을 받았 다면자연스럽게 찬미와 감사로 이어집니다그렇지 않았다면기도는 좀 더 반복을 해야 합니다.


⑦ 일곱째, 이 기도도 기도반추를 합니다.


c. 마음그 자체.

    몸이 아플 때나지쳤을 때진짜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또 마음이 힘들어묵상이나 생각 자체가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이 필요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이럴 때 진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무시면 됩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시간자세장소 등.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몸마음을 품어 준다." 이때 성경 구절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들어, "몸이 쉼을 얻고 새 힘을 얻게 하소서마음의 상처를 위로하소서."


④ 넷째,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찬 마음으로 몸이나 마음을 품습니다분심은 흘리고다시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타이머가 울리면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⑥ 여섯째, 기도를 반추하여적습니다.


d. 중보 기도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살펴가면서혹은 삶 자체로 기도해 나가기 때문에 점차로 간구하는 것들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특히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우리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탄식과 한숨이 나오는 것들, 막막한 것들이 있습니다이때는 진정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한 시간 동안 기도 속에 머물 내용주제입니다.예를 들어, "에볼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아프리카를 보살펴 주십시오바이러스가 안정화되고치료약이 개발되게 해 주십시오."


③ 셋째, 성령께 도움을 구하면서하나님께 청하는 기도를 시작합니다하나님의 임재의 현존을 자각합니다하나님께 기도요점에 대한 갈망과 안타까움 등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마음에 현존하신 하나님을 향해기도할 주제를 모읍니다간간히 침묵 중에 말로 드리기도 하지만더 중요한 것은 기도할 주제에 대한 마음의식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모아드리는 것입니다.


④ 넷째, 타이머가 울리면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⑤ 다섯째기도를 반추하여적습니다.



여기까지 매일의 기도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기도와 삶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 기도와 항해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0 07:19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기도와 항해


, 항해

    우리 삶은 한 척의 배가 이쪽 항구에서 떠나 저쪽 항구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배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도착해서 닻을 내려야할 항구가 있고, 그 항구를 향해 방향을 조정하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니다. 우리 인생, 삶이라는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목적지,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장 1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배가 도착해야 할 궁극적 항구는 하나님그분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이 배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있습니다. ,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 가지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기도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일치는 내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 하고 싶은 것이 같아졌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 안에 불타오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상,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 체계, 사고-생각 체계, 감각 체계, 삶의 방식과 하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마음에 담으면서,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 어떤 것이 마음에 담기는 지요?


항해의 분위기

    그러면 이 배의 이름과 그 규모는 어떠할까요? 이것은 이 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세례 체험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자기-정체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항구히 흔들림 없이 완전히 고착되어 있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한 기쁨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지입니다.

    비록 이 배가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흔들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흔들어 대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니까요.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부분입니다. 항해의 더 큰 국면은 이 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항로를 따라 의연하게 운항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배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따라서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 이 배의 궁극적 정체성을 거듭하여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 청하면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이 바로 하늘이고, 그 하늘사이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소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각성시킵니다.


항해, 선택인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쪽 항구에서 닻이 올라간 것 자체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알건 모르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의 배는 이미 이쪽 항구를 떠나 저쪽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항로에 자연스럽게 몸을, 마음을,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을 자발적으로 걷어 올려 운항준비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면서, 본인의 갈망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단순한 기도로 하나님께 간절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합니다. 5분, 10분 정도, 그렇게 조용히 마음의 방향을 잡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원한다.”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 다음 번에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posted by 해'맑은우리

침묵이신 주님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08.07 02:43

......침묵이신 주님, 저를 엄습하시어, 저를 

제가 가진 사상으로부터, 당신에 대해 가진 사상으로부터도 자유케하소서. 


C.S. Lewis, “The Apologist’s Evening Prayer,” in Poems, ed. Walter Hooper (London: Geoffrey Bles, 1964), p. 129.


하나님은 '뛰어 넘는'(transcend)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뛰어 넘으시고, 우리 상상도 훌쩍 뛰어 넘으신다. 인간이 하는 생각과 상상이란 기껏해야 '말'이다. 말을 잃어야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을 만났다면 말이 많을 수 없다. 대신 '침묵'에 들어간다. '말씀'이라고도 불리는 그 '말을 뛰어넘는' 세계에. / 이종태


'변증가의 저녁기도' 

C. S. 루이스


구원하소서. 제가 당한 쓰라린 패배들로부터, 아니, 

제가 거둔 듯 보이는 모든 승리들로부터 더욱!

당신을 위한답시고 쏘아댔던 저의 영리한 말들, 

청중은 웃었지만, 천사들은 울었지요. 

표징을 보이시지 않는 당신이건만, 당신 신성을 입증해보이겠다며 

제가 해보인 모든 증명들로부터, 저를 구원하소서. 


인간의 사상이란 그저 지어내는 말들일 뿐, 저로,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빈약한 이미지에 불과한 것들을 믿고 의지하지 말게 하소서. 

오, 온당한 침묵이신 주님, 저를 엄습하시어, 저를 

제가 가진 사상으로부터, 당신에 대해 가진 사상으로부터도 자유케하소서. 

좁은 문과 바늘 귀의 주님, 

잡동사니 같은 제 생각들을 모조리 치워주시어, 

저로 그것들과 더불어 멸망 당하지 않게 하소서. 


'The Apologist’s Evening Prayer'


From all my lame defeats and oh! much more

From all the victories that I seemed to score;

From cleverness shot forth on Thy behalf

At which, while angels weep, the audience laugh;

From all my proofs of Thy divinity,

Thou, who wouldst give no sign, deliver me.


Thoughts are but coins. Let me not trust, instead

of Thee, their thin-worn image of Thy head.

From all my thoughts,

even from my thoughts of Thee,

O thou fair Silence, fall, and set me free.

Lord of the narrow gate and the needle’s eye,

Take from me all my trumpery lest I die.



posted by 산처럼

순결을 낳는 침묵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한 줄 묵상 2013.11.24 07:21


압바 이사야가 말했다. "말하기보다 잠자코 있는 것을 좋아하라. 침묵이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면, 말하는 것은 보물을 흩뜨리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주제별》, ch.4, 18.


침묵한다는 것, 반드시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침묵을 통해 거짓과 잘못을 숨길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파괴할 목적으로도 쓰인다. 부모의 자녀들을 향한 침묵은 종종 벌로써 쓰일 때도 있다. 

사막 수도자들이 얘기하는 침묵은 이런 것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단순히 입으로 말을 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침묵은 사막 수도자들에게 자신들의 내적 고요함과 평화를 찾고 유지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었다. 

이런 침묵은 생명력을 가져다 준다. 각종 소음으로 요동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준다. 자신의 소리를 내려놓음으로 비로서 하나님을 듣게 된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긴다. 무엇이 진정한 소리이고 무엇이 소음에 불과한 지를 깨닫게 된다. 언제 말을 해야하고 언제 침묵을 지켜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내적 평화를 얻고자 하는가? 깨어서 침묵 가운데 앉아 있어보라. 하나님의 품이 좀 더 가까이 느껴질 것이다.  그 품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은 상처나고 더렵혀진 나를 스스럼 없이 안아주는 따스함이다. 

원로가 말했다. "염려하지 않는 것과 침묵과 내밀한 명상은 순결을 낳는다." (ch 5 , 29) 

/ 임택동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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