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세 불균형은 사회를 파멸시킨다 (이현필)

한 줄 묵상 2015.02.15 16:51

능주(綾州)서 K 장로님이 오셨습니다. 죄송했습니다. 과세에 대한 불균형이 장차 사회를 파멸하고 말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신앙에 입각하여 생활하고,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뢰었습니다.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수양할 것을 의논했습니다.


- 이현필(1913-1964), 《이현필: 풍요의 시대에 다시 찾는 영적 스승》(서울: KIATS, 2014), 272. 



한국의 수도원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현필 선생은 1952년 4월 19일과 21일의 일기에서 불공정한 세금 매김에 대해서 쓰고 있다. 그는 세금을 부과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면 불공평한 부과를 하지 않을 것"이며, 세금을 납부하는 자들도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섬긴다면 세금으로 전 재산을 빼앗겨도 잘 살 줄 압니다."라고 적는다. 결국 세금 문제는 위정자와 납세자가 하나님만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위정자가 가난한 자의 신음을 들으시는 정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불공정한 조세 정책을 "경제살리기"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속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납세자들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자비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한다면 탈세를 통해서 스스로 살길을 찾거나 탐욕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현필의 시대 이후 반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 한국사회에서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빈부 격차의 심화는 소득 분배뿐만 아니라 세금 매김이 더욱 불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현필의 통찰력이 정확하다면 그 종착역은 사회의 파멸이다. 그러한 결과가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최근 이슈가 된 세금 문제에 대해 불평을 하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보다 진지하게 논의하고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감옥을 채운 성도들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4.02.28 19:20

 

"찰스 통치 말년에 감옥을 퀘이커 교도로 가득 채우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다. 언제 어디서건 비국교도의 비밀 집회 강령이 실시 되기만 하면 친우회 교우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고통이 뒤따랐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The Journal, chapter 20.  (1679-91)년의 글 중에서



웨슬리의 전기에 익숙한 나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감옥이 텅텅비는 이른바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웨슬리가 태어나기 10여년 전에 삶을 마감했던 조지폭스의 시대는 이와는 반대였다. 조지폭스는 인생의 말년을 쇠약한 육신을 이끌고 감옥을 채우고 있는 자기 공동체의 일원들을 방문하고 본인도 끊임없이 재판을 받으며 위험과 낙망에 빠져있는 믿음의 동료들을 권고하고 격려하면서 보냈다.  

  

감옥에 온통 내 믿음의 동료들로 넘쳐난다면! 

낯설기만 한 이 문구가 갑자기 눈앞에 그려지면서 아찔한 충격이 전해져 온다. 예수의 십자가도 이렇게 이뤄졌겠구나. 바울도 이렇게 말년을 보냈구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도 그렇게 믿음을 지켰구나! 어쩌면 그들이 머문 감옥은 감옥이 되어버린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주님의 보호 아래 두는 하늘의 특별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바울의 서신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그리고 폭스의 전기가 결국은 이 감옥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쓴 일기요, 편지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지금의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세상에서 너무 박해를 받지 않기에 이루어지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감옥을 감옥인지 모르고 살기에 천국을 천국인지도 모르고 소망하지도 않는지도 모른다. 


/정승구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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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알라 (칼빈)

한 줄 묵상 2013.10.24 01:3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모르면서 다른 한쪽을 알 수는 없다." 


존 칼빈 (John Calvin, 1509-1563)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제1권, 제1장. 

 

종교개혁의 한 축에 서서 부패한 종교적인 제도와 맞서 싸운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처음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 정신(Spirituality of Protestant)은  잘못된 인간 역사의 자각(knowing)에서부터 시작해서 믿음 안에서의 저항(Protest), 그리고 변혁(Transformation)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국 개신교 영성의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 개신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사회 정의(Justice)에의 헌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국의 개신교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인가부터인가 불의에 눈감고, 사회적인 부조리를 슬며시 인정하며, 이른바 신앙을 개인을 위한 안식처와 도피처로만 삼는데에 익숙해져 오지 않았는가? 신앙인은 불의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의 가르침처럼 먼저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불의를 자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예민하게 인지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해야 자신의 변화, 사회의 변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한 개개인의 신앙과 용기가 모여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다. 나와 나의 사회 가운데 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소리벼리(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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