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소망의 딸 (요한 클리마쿠스)

한 줄 묵상 2015.02.22 05:40

회개는 소망이 낳는 딸이며 절망에 대한 거부다. 

(Repentance is the daughter of hope and the refusal to despair.)


- John Climacus (7C), The Ladder of Divine Ascent (New York: Paulist Press, 1982), 121 

(Step 5 "On Penitence")


그래, 이 사순절의 회개는 부활절의 기쁨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회개는 부활의 소망이 낳는 파장이다. 


회개는 항복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용서가, 사랑이 쳐들어왔다.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참된 영적 경험을 위하여: 수덕과 관상의 생활 (고백자 막시무스)

한 줄 묵상 2014.06.29 06:00

분내고 성질부리는 마음은 사랑으로 고삐를 삼아 제어하고, 욕심부리는 마음은 자제력으로 누그러뜨리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지성, 그 생각하는 힘에는 기도의 날개를 달아 주어 날아 오르게 하시오. 그러면 그대 마음의 빛은 언제나 꺼지지 않고 빛날 것입니다.


-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Capita de caritate, IV, 80.


 

자기의 경험을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본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우리의 감각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온전한 존재가 아니듯 우리들의 감각은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오류에 빠뜨린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자명하다. 즉, 우리는 착각하고 혼동하고 오해한다. 이점은 영적 경험 혹은 신비 체험을 다룰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초대 교부들을 포함한 고대의 현자들은 이미 우리 감각의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실재에 대한 바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가 우리의 의식을 비추어 주는 조명(the luminosity of consciousnes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러한 조명을 흔히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또한 막시무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빛’을 받기 위해서는 금욕적 덕과 관상적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욕망에 붙들려 있다면, 그리고 어떤 감정의 격동에 흔들리고 있다면, 우리의 감각은 왜곡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인식 능력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덕의 수련과 관상의 생활이 깊어지고, 그 위에 ‘빛’의 조명이 임하면, 여기서 우리의 참 인식은 시작되며, 이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진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교부들은 이런 수덕과 관상의 생활이 바로 진정한 회개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런 삶은 다름 아니라, 자기 비움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해 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경험으로 이끄시는 길이요, 빛이요, 등불이다. 그런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향해 가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우리들이다! “영혼의 햇빛 예수여 가까이 비춰 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찬송이 울려 퍼진다. /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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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은총의 징표 (귀고 2세)

한 줄 묵상 2014.04.04 12:41
  • 산책길에 집필진이 되심을 축하드리며 사순절에 꼭 필요한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BlogIcon 정승구 2014.04.04 14:48 신고

내면의 흠집들을 씻어주고 죄의 불을 꺼주는 저 눈물은 참으로 복됩니다. 내 영혼아, 이 눈물 안에서 네 신랑이신 분을 알아 모셔라 …… 한숨과 눈물, 바로 이것이 네 신랑께서 네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며 위로이다. 이러한 눈물은 그분이 네게 마시라고 주시는 은혜로운 음료이다. 이 눈물이야말로 너의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여라. 이 양식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하며, 꿀과 벌집보다도 더 달콤하다

-귀고 2(Guigo II, ?-1188) 《관상생활에 관한 편지(The Letter on the Contemplative Life)》 VIII


12세기 카르투지오회 수사인 귀고 2세는 《관상생활에 관한 편지》에서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이라는 4가지 영성훈련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에 온전히 잠겨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관상의 단계를 설명한 후에, “그러나 주님, 주께서 이런 일을 이루실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무엇이 당신이 오고 계시다는 징표입니까?”라고 묻는다. 귀고 2세가 얻은 답은 “한숨과 눈물”이었다. 눈물 그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온전한 은총으로 인간의 영이 주의 영과 하나가 되는 관상의 증거는 깊은 탄식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쏟아지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다.


회개하고 싶어도 자복할 죄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선함의 증거가 아니라 은총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울고 싶은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평안의 복을 누리고 있는 징표가 아니라, 은총이 떠나가는 심판의 징표입니다.

주님이 다가오시면 내면의 더러움이 밝히 드러나겠지요.

그러면 어찌 한숨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주님이 다가오시면 그 부끄러움이 은총의 옷으로 덮어지겠지요.

그러면 어찌 눈물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은총으로 부으시는 한숨과 눈물을 갈망합니다.

그 한숨과 눈물에서 참 위로와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 김종수




posted by 바다 달팽이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2014년 2월의 추천 고전을 2월을 넘겨서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꼭 2월에 읽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성 고전을 한 달에 한 번씩 소개한다는 의도로 게시하는 것이니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의 추천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이 생기신다면, 시간을 내어 고전을 직접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  편집자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이후정 역, 은성(1993)


 

마카리우스는 누구인가

     필자가 이 달의 영성 고전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마카리우스(Pseudo-Macarius, c.300-391)의 《신령한 설교》이다. 여기엔 50 편의 <신령한 설교><대서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들의 저자는 성서와 초대 교회 사막 영성에 영적 뿌리를 둔 위대한 영성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 세기 후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자들로부터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수련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징과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값진 조언과 통찰들을 전해 주었다.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곧 문헌화 되었고, 당대의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후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인 감화를 주는 영성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음과 성령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영적 조언의 큰 줄기는 영성 생활에서의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 마음은 지성적 활동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 그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일, 뭔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 등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다. 즉, 마음은 지성과 감성과 욕망과 의지 등의 모든 내적 활동의 중심이며, 또한 우리 신체 기관들을 총괄하는 제어탑(control tower)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은 우리 전 인격의 중심이다. 그리고 여기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이곳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다. 하지만, 사탄과 악마들 또한 이곳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음 그 자체는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 속에 용들이 있고, 사자들도 그곳에 있다. 그 속에 독을 가진 짐승들이 살고 있으며, 모든 악마의 비장품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곳에는 가파른 절벽과 거친 길들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그분의 나라도 있다. 그곳엔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또한 그곳에 사도들이 있고 천상의 도성들이 있고 은혜의 보화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다

-신령한 설교, 43:7.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가는 일을 수련의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는 일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고,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일 등이 모두 우리가 그릇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과 연합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바로 알아 보고 올바로 경험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임을 소상히 밝혀준다.

 

     그러므로 영적 수련의 길은 성령과의 협력을 통한 오랜 동안의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 것에 대한 집착(마카리우스는, 이를 세상적인 것들이라고 칭한다)과 천상적인 것(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잘 살펴 분별하고, 세상적인 것을 떠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 속에 채우려는 지향을 가지고 언제나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정점은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즉 세상적 욕망과 감정은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과 천상의 성격으로만 순전히 채워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임재를 참되게 경험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과 협력하는 영적 수련에 있어서 겸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자기 비움의 겸손, 자기 판단의 교만을 벗어날수록 우리 마음 속(이는 영적 전쟁의 전쟁터이다)에서 성령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가며, 이와 함께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 나아가 몸의 태도와 습관까지, 한마디로 우리 전 인격체로서의 몸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이러한 변화의 궁극에서 우리는 부활하시어 영화로워지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부활과 영생의 삶이 종말에만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카리우스는, 주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화로워지신 빛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던 것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면서, 부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을 알아보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비전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마카리우스의 영성 생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신자의 삶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임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를 감지하며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만남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그러한 일에 참여할 가능성이 지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거듭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에 신자들이 어떻게 신자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이후 헤시카즘(Hesychasm)으로 대표되는 동방 교회의 영성 전통 형성에 큰 토대가 되었다. 오리게누스(Origenus)와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서 비롯된 지성적 영성과 마카리우스의 마음의 영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동방 교회 영성을 형성해 간 것이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도 마카리우스의 설교들과 조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신학과 교리가 삶과 실천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영성이 사변적이고 현학적이지만 무미건조한 것으로 변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경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시금석의 역할을 거듭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영성 전통에 마카리우스의 글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 예로 경건주의(pietism) 운동의 지도자들은 마카리우스의 글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종교 개혁 이후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법정적 용어처럼 이해하면서 믿음은 이런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만 설명하려는 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적 성향이 나타났을 때, 경건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는 거듭남이라는 생명과 삶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이런 경건주의 영성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초대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갖춘 것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었다. 그래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는 이신칭의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에서 옳게 드러난다고 하는 주장을 견지하였다(G.A. Maloney, Pseudo-Macarius, 24). 또한 18세기 부흥 운동 당시에는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험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권위있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갖는 의의 

     오늘날, 우리에게 마카리우스의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신앙 생활에서 교리와 실천이 분리되고, 신앙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위험으로 남아 있다.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게 하고 그런 것들을 피하게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마카리우스의 글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 특히 감정주의적 신앙 체험에 천착하는 이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기독교인의 내적 경험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과 지식과 의식까지도 모두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경험하는 일에 영적 규칙을 따르는 수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고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따라서, G. A. 말로니(Maloney)가 말하고 있듯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는 마카리우스는 은사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권력의 근거인양 사물화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처럼 여기다가 결국 그들의 영적 여정을 허망한 것을 만드는 것을 피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Pseudo-Macarius, p.26).

 

     다시 말하면, 회개의 중요성, 성령의 역할, 마음의 정화, 점진적 변화와 성장, 부활 그리스도와의 만남 등을 강조하면서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고, 지식과 실천이 어우러지게 하여서, 신앙이 지식이나 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고, 그 삶에서 하늘의 기쁨 맛보도록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마카리우스의 글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더 순결한 것으로 정화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태도는 좀 더 덕스러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남기정.



Pseudo-Macarius (Paperback)

저자
#{for:author::2}, Pseudo-Macarius (Paperback)#{/for:author} 지음
출판사
Paulist Pr | 1992-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ritings of Pseudo-Macarius,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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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생각 보고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한 줄 묵상 2013.10.24 23:52

우리는 마치 보고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행동들과 영혼의 움직임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짓는 것이 발각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지킨다면 간음하지 못하듯이, 서로에게 보고하는 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한다면 더러운 생각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55.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간 사막의 수도승들, 

특히 홀로 있는 독수도승들은 외부의 유혹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문제는 자신의 내부, 즉 속사람이었다.  


남이 알아채지도, 또 알아주지도 않는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기부여를 받는 일 역시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까지 속사람을 돌아보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지금 살아간다라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내 눈 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더욱 높이는 후안무치한 세상에 살고 있다.

법은 책에만 쓰여 있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목청 높여 기도하는 우리들.

성경의 글자가 가슴에 쓰여지지 않는 한, 참된 죄의식이 생겨 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바로 통회함 없는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이다. 


법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순결해 진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나의 '생각 보고서'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세 가지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2.12.01 13:55
  • 요즘 세상에서는 '트라우마'라는 말이 유행이지요. 상처는 트라우마를 주어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는....
    신앙 안에서는 상처가 곧 우리를 낫게하는 치유라는 것.
    신앙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 것 같아 기쁨니다. 나도 상처를 약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12.02 06:37 신고

나는 사는 동안 세 가지 상처를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참된 통회라는 상처, 깊은 동정이라는 상처, 그리고 하나님 향한 갈망이라는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가지 계시'를 체험하고서 평생을 잉글랜드 노리치의 한 교회 부속건물에서 은수자(anchoress)로 살았던 여인 줄리안. 그녀가 1373년 '계시'(showings)를 보기 전에 늘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세 가지 상처"를 지니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통회'(contrition)라는 상처, '동정'(compassion)이라는 상처, (하나님을 향한) '갈망'(yearning)이라는 상처. 


왜 통회와 동정과 갈망이 '상처'일까? 

아마 그것들은 모두 '아픈'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마음 아픔'과 관계된 것들이다. '통회'란 자기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동정'(com-passion)이란 다른 이의 고통(passion)에 대해 같이(com)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영적) '갈망'이란 하나님을 마음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것이다. 


후에 줄리안은 그 세 가지―통회, 동정, 갈망―를 "약"이라고 부른다. "통회는 우리를 정결한(clean) 사람으로, 동정은 우리를 준비된(ready) 사람으로, 갈망은 우리를 존귀한(worthy)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 세 가지는 죄인인 우리를 치료해주는 약들이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 '상처'들이 바로 '약'이다. 

통회하며, 동정하며, 갈망하며 우리 마음이 아파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는다. 내 죄 때문에, 타인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우리 마음이 아플 때, 우리 마음이 찢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기 시작한다. 병들었던 우리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아픈가? 

하나님이 주시는 아픔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아픔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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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개의 정의를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08.26 08:51

❝ 나는 회개의 정확한 정의를 아는 사람이기보다는

   절절한 회개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k.1, c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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