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분별이란 무엇인가 : 개념과 유형들

영성학 논문 2017.06.28 08:36

우리의 삶은 분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별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서 자신들의 잘못된 욕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수천 년 후 예수는 사탄의 유혹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했지만, 정확한 분별과 자기희생적 선택을 통해, 첫 남자와 여자의 실패로 죽음의 어둠 속에 빠진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그래서 분별과 선택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영적 분별 또는 식별(spiritual discernment)은 폭넓게 정의하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영적 경험이나 현상, 또는 내면의 생각과 정서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에 대한 실천과 가르침들을 하나의 정의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 매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분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실천되는 만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은 다양한 모습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영적 분별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과 실천들을 각각 짝을 이루는 몇 가지 유형들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각각의 대극들은 상반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곧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형태의 영적 분별들에는 각각의 특징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1. 분별의 대상에 따라 : 영들을 분별함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시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또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경험이나 현상에 초점을 두는 유형과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이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자가 후자를 위한 과정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첫 번째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의 어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분별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동사 ‘discern’은 ‘다른 것으로부터 어떤 하나를 구별하다, 가려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discernere’[디스케르네레]에서 왔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분별이란 섞여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섞여 있는 것들, 곧 분별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으로 영적 분별을 지칭하기 위해 ‘영분별’(discernment of spirits)[각주:1]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때의 분별의 대상은 영들(spirits)이다. 곧, 어떤 영적 경험, 현상, 생각 등을 일으키도록 영향을 주는 영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언적 전통이 발전하면서 어떤 특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진리의 영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거짓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으키실 선지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반드시 들어야 하지만,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가르친다(신 18:18-22). 이렇게 단순하게 말의 성취 여부로 그 메시지의 영적 출처를 분별하는 원칙은 신약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다 세밀하게 발전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면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원리를 분별 기준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열매”라는 결과를 보고, 그 열매를 맺은 이가 “좋은 나무”(참 선지자)인지 “못된 나무”(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한다는 원리는 모세가 제시한 원칙과 비슷하다. 그러나 열매의 유무가 아니라 질을 보고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분별한다는 점에서 분별의 기준이 보다 세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심화된 분별의 원리가 필요한 이유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설명한다(마 7:15-23).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탄의 일꾼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고 경고하는데 이 구절은 이후에 분별에 관한 문헌들에서 자주 인용된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요일 4:1-6). 그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이미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와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라”(δοκιμάζετε)[도키마제테]고 권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제시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의 여부라는 점이다. 곧,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와의 논쟁 속에 있던 요한 공동체를 위해, 진리로 간주되는 교리를 예언자의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분별의 기준이 공인된 텍스트(성경)와 교회의 가르침(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최소한 그것들에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전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영분별에 대한 논의들의 바탕에는 인간 외부의 영적 존재들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3세기 초의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c.184-c.254)는 『제일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에서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들) 또는 사탄(의 천사들)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게 하거나 유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 생각들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서 외부에서 주입되는 생각들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일 원리』, 3.2.4).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는 『담화집』(Conferences)에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그 기원과 원인과 저자를 추적함으로써” 현명하게 분별하고, 누가 그 생각을 제안했는지에 따라서 그 생각을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불로 정화된 것인지, 미신의 일부인지, 세속 철학의 교만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세히 조사하고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다(『담화집』, 1.20.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적 분별의 대상이 한 사람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실체들(선한 영 또는 악한 영)로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에 대해 체계적인 분별 원칙을 제공한 이는 16세기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다. 그는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말미에 두 가지 묶음의 식별 원칙들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첫 번째 묶음(313-327)은 수련의 첫째 주(단계)에 있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묶음(328-336)은 둘째 주(단계)에 있는 보다 진보한 수련자에게 적합한 규칙이다. 이냐시오는 내면의 움직임들을 크게 영적 위로(consolación)와 영적 실망(desolación)으로 분류하는데,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정서적 움직임을 말하고, 실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정서적 움직임 지칭한다. 그는 첫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에는 이미 내린 선택을 변경하지 말고, 인내 중에 위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반대로 영적 위로 중에 있을 때에는 교만하지 말고 실망이 올 때를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 위로 같으나 그 안에는 마귀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바탕은 물론 생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안내한다. 

     “참된 믿음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affection) 안에 있다.”고 믿은 개신교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또한 인간 내면의 정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을 경험한 그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각주:2] 그래서 그는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인간 내면의 정서들이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믿을 만한 표지(reliable signs) 열두 가지와 믿을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 철학자였던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들보다는 정서 자체에 초점을 두고 상당히 이성적인 분별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적 분별에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영적 분별의 두 번째 유형, 곧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확인하기 위해 양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시며,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하기 위해서 양털을 가지고 두 번이나 “시험”(האנ)[안세]했다(사 6:38). 이때 기드온이 사용한 히브리 단어 “נס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실 때(창 22:1), 그리고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할 때(왕상 10:1)와 같은 다양한 상황들에서 사용되는데,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드온의 이와 같은 실험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이나 움직임보다는 외적인 표징이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시도하는 사례의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하라.”(롬 12:2).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δοκιμάζω”[도키마조]도 히브리어 “נסה”와 기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데, 위에서 사도 요한이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분별의 대상은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당시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 세대”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몸, 곧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드릴 것이 요구되었다. 비슷하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를 기도한다(빌 1:10).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려는 바람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급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구체적인 길을 찾는 이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3세기 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c.1181-1226)가 회심 후 성 다미아노(San Damiano) 교회에서 드린 “십자가상 앞에서의 기도”(The Prayer before the Crucifix)는 그가 십자가 위의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 곧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분별력(discerning heart)을 구하는 청원이다. 

     앞서 언급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제시한 식별 규칙 또한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영신 수련』의 첫째 주를 시작하는 「원리와 기초」(23)에서 ‘질병과 건강’, ‘가난과 부’, ‘불명예와 명예’, ‘단명과 장수’ 중 어느 한 쪽을 더 원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indifference)을 가지는 것을 선택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셋째 주간의 말미에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169-188)를 구체적으로 제공하는데, 우리가 창조된 목적,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해야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 분별의 주체에 따라 :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

다음으로 영적 분별을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개인 분별은 말 그대로 한 개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영적인 경험이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특별히 4세기 이후 사막의 수도자들을 시작으로 흘러온 수도 전통은 개인적 차원의 분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교만이나 독선, 또는 뒤틀린 욕망이나 무지로 인해 분별에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담화집』, 2.5.1). 이런 점에서 영적 분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 아래에서 즉시 사라지는 것처럼, 악한 생각이 원로 앞에 드러나게 되면 그 즉시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자는 경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겸손히 고백하고 그의 조언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압바 모세(Moses)는 “참된 분별은 참된 겸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담화집』, 2.10.1). 분별의 전제로 겸손과 순종을 강조한 것은 7세기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c.579-649)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Ladders of Divine Ascent)에서 ‘겸손’에서 ‘분별’이 나오고, ‘분별’에서 ‘통찰’이 나오며, ‘통찰’에서 ‘예지’가 나오는데, “이렇게 자신 앞에 예비된 복들을 보고서도 이 온당한 순종의 길을 따르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느냐?”라고 묻는다(『사다리』, 4.105). 

     영적 분별이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영적 분별은 고립된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대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대다의 관계로 확장되면 개인적 분별이 확실히 공동체의 영역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친우회(Quakers) 전통의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가 그렇다. 이 위원회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 공동체 내의 신뢰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꾸려진다. (또는 피정 중에는 제3자에 의해서 모임이 꾸려지기도 한다.)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는 이는 초점 인물(focus person)이 되고 그를 돕는 이들은 위원들이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위원들은 초점 인물이 분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명료화위원회는 분별 과정에서 공동체가 관여하기는 하지만, 분별의 주체가 개인이며, 분별의 대상도 개인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 분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공동체 분별은 공동체가 공동의 사안을 놓고 함께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성서의 여러 사례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행해진 또는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로마의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할 때, 그는 확실히 공동체를 분별의 환경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쥬엣(Robert Jewett)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분별의 주체가 “너희”라는 복수인 점과, “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이라는 동사가 보통 공적 영역에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초점은 공동으로 결정 내리는 것에 놓여 있다고 주석한다. 그에 의하면, “로마서의 경우, 분별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천하기 원하시는 특정한 행동을 말한다.”[각주:3] 

     기독교 역사에서의 공동체 분별의 예를 들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와 여섯 명의 그의 동료들은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정말 하나의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낮에는 일상적인 사역을 행하고, 밤에는 모여 함께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은 공동체 분별의 좋은 모델을 제공해 준다. 더불어 친우회에서 공동체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월회(monthly meeting) 중에 대화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공동체 분별의 좋은 사례다. 이들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면 침묵 가운데 내면의 신성한 빛을 관조하고, 만장일치를 이룰 때까지 수년이 걸리더라도 결정을 보류한다.


3. 기타 :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그리고 오늘날의 경향

마이클 벅클리(Michael J. Buckley)는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 유형을 구별한다. (1) 성령에 의해 부여된 은사, (2)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감각, (3)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 (4) 이 세 가지의 혼합.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첫 번째 출처, 곧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현대로 올수록 세 번째 출처, 곧 학습과 훈련을 강조한다.[각주:4] 

     (1)과 (2)의 경우에는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들, 또는 분별 감각을 타고난 이들에게로 제한되지만, (3)에서는 예언자와 같은 신적 매개자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영적 지도자 또는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소명의 발견과 같은 인생의 굵직굵직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도록(갈 5:16-24) 장려한다. 『영적 분별의 길』(The Way of Discernment)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는 “분별은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 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정의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강조한다.[각주:5] 이 책에서 그녀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기억, 통찰, 몸, 상상력, 감성, 자연 등을 활용한 다양한 분별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오늘날 증대되는 사회적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시대적 차원에서 분별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이천여 년 전,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눅 12: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으로 다시 강조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사회적 차원의 분별(social discernment)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취해야할 행동과 실천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나 문화 속에 내재된 불의나 부정 등을 분별함으로써 변혁을 추구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에서의 다양한 영적 분별의 개념과 유형들의 윤곽을 개략적으로 그려보았다.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영적 훈련 또는 실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들, 곧 그들이 분별에서 실패하거나 성공한 이야기들과 값진 조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소중한 과정으로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뒤덮인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안내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우리가 그 온당한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바람연필 권혁일


참고문헌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2-185.

리버트, 엘리자베스.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26-35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 용어는 헬라어 ‘διακρίσεις πνευμάτων’[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라틴어 ‘discretio spirituum’[디스크레시오 스피리툼]을 번역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2.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3. [본문으로]
  3.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733-734. [본문으로]
  4.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본문으로]
  5.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서울: 좋은씨앗, 2011), 46.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른 날보다 오늘, 벗들이 많이 모인 것은. 새벽 기차를 타고, 또 아이들을 맡기고,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늦은 오후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수선을 피웠을 지 생각하니 맘이 짠하다. 벗들은 십자가를 향해 앉아 기도 삼매에 잠겨있다. 벗들 사이로 흐르는 적막하고 고즈넉한 기운이 참 좋다. 대나무 숲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침묵 사이로 벗들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들을 뭐라고 부를까? 그래, 위로가 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들고 한걸음에 달려온 천사들이다.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이와 비슷한 체험을 영적 위로라고 불렀다. “위로란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나며 영혼이 창조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 자체로서만 사랑할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을 창조주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또한 자기 죄나 우리 그리스도의 수난의 아픔이나 직접 하느님을 위한 봉사와 찬미에 관련된 다른 일들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과 창조주 주님 안에서 영혼을 침잠시키고 평온하게 하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부르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인 기쁨을 위로라고 한다.”(『영신수련』 316번).

 

     그저 그렇게 기쁘고 즐겁거나 감동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 후에 흔히들 말하는 은혜 받았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영적 위로란 자기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전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하게 되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영혼 안에 스며들어 그 중심에서 안정감과 평온함으로 우리 전체를 물들여 간다. 바짝 날이 선 긴장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어렵게 보이던 이 세계에 대한 좌절로 앞이 캄캄하던 우리의 영혼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작은 촛불들 앞에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은 무수하게 반짝이는 그 작은 빛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함께 하고 있는 누군가가 밀어주는 힘에 의해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남을 느끼게 해 주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반드시 방향성을 지닌다. 나와 너, 우리를 포괄하며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향해 인간 영혼을 고무시킨다. 체험의 강도 차이는 있어도 영적 위로는 분명한 방향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인다는 것을 흐른다고 해도 좋겠다. 깊은 산속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은 시냇물을 지나 개천으로 강물로 끊임없이 흐른다. 개울물일 때는 작은 바위도 돌아 넘기 어려워 여울물이 되어 빙빙 돌기만 하는 것 같고 때로는 흘러가는 힘이 너무 약해 고인물이 되어 버려 물의 인생을 아쉽게 마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물은 흘러가면서 자기를 점점 더 넓혀가고 주위의 땅을 옥토로 만들며 온갖 생명들이 살아갈 기운을 부여한다.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자기를 흘려 보내면서 끊임없이 자기 주위를 살려낸다. 이처럼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적 위로 체험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영적 위로가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한 축을 분명히 담당한다는 점은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걷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처에 넘기 어려운 큰 바위가 출현하고 길이 막히거나 끊기기도 한다. 장애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가장 큰 장애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아로 움츠러들면서 고립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다. 고립된 자아는 고집스러운 자아가 된다. 어느덧 하나님 없이 위기 탈출을 모색하는 인본주의자가 되거나,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특별한 은총에 집착하는 마술주의자가 된다. 영적 위로는 고립된 자아에서 나를 이끌어 낸다. 그래서 세계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요즘 나는 영적 위로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경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방식으로서. 즉, 내 삶의 경험과 기도 체험이 영적 위로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 반대에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분별하기보다 나는 영적으로 위로가 되는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이냐시오는 영적 위로는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영적 위로를 주는 근원을 하나님과 그 천사들로 보았다(영신수련』 329번). 만일 어떤 사람이 생의 한 순간에 신비한 영적 존재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이제 다 그만 둘까 하며 축 쳐진 어깨를 끌고 늦은 밤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데, 집 앞에서 자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듯 한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가 자신에게 사뿐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고 고생했다고,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힘든 일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고 말해준다면, 과연 그 사람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만일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감동을 주는 한 존재로 선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영적 위로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천사 한걸음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오늘 유쾌한 상상을 한다. 우리 모두가 바로 지금 천사가 되기로, 신적 존재가 되기로 선택해 보면 어떨까? 각박하고 어수선한 이 세상이 온통 천사들로 가득하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하나님과 그 천사들은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 그리고 원수는 본래 그럴싸한 이유들과 교묘하고 한결같은 속임수로써 이런 즐거움과 영적 위로를 없애려고 애쓴다(영신수련』 329번). / 해'맑은우리 주선영



posted by 해'맑은우리

8.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과 공동 분별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과 공동 분별 



1. 교회 공동체와 분별

    교회는 형제자매들의 신앙 공동체다. 그러나 분리된 개인으로 한 공간에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의 뒷모습을 마주하노라면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인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ohann Heinrich Arnold)는 《공동체 제자도》에서 개별화된 개인과 가족이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 이상, 존재를 비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참된 공동체는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신을 떼어놓는 모든 것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이뤄지며,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굴복하여 자만, 자기 연민, 자기 주장 그리고 거짓 경건에서 돌아설 때 경험될 수 있다.[각주:1]  

     하나님과 나,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나 사이를 떼어놓는 방해물들, 곧 배금주의, 외모지상주의, 과도한 경쟁, 잘못된 관행, 권위주의, 개인주의, 왜곡된 신앙관, 나태, 탐욕, 교만, 두려움 등은 이기적 자아의 모습이나 거짓 경건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속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가 《영적분별의 길》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가는’ 분별이 중요하다.[각주:2] 저자는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하나님의 부름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를 통해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 보겠다. 


 



2. 이냐시오 로욜라와 공동 분별

1) 분별의 영성가 이냐시오 로욜라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은 《영신수련》이라는 작은 책자에 집약되어 있다. 영신수련은 이론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를 묵상하며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교본이라 할 수 있다. 영신수련의 중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예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는 원리를 제공하는 ‘특별 묵상’과 ‘분별 규칙’이 첨가되어 있다. 분별규칙은 《영신수련》[313~336][각주:3]에 나타나는데, 성령의 내적인 움직임들을 다른 근원으로부터 오는 움직임들과 구분하는 방법과 항상 성령에 대하여 개방성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이냐시오는 분별 원리와 규칙을 집을 가지거나, 결혼을 하거나, 가족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적용하라고 가르칠 정도로(영신수련》[189]) 현실의 선택에 대해 씨름한 분별의 영성가였다.


2) 공동 분별의 배경

      《영신수련의 분별 원리와 규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분별을 돕는 데 쓰이지만 공동체적 배경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공동 분별의 예를 《첫 사부들의 식별》(Delibratio primorum Patrum)[각주:4]이라는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간략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만레사(Manresa)에서 여러 가지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을 맛본 후 자신의 경험과 신학의 지식 등을 영신수련》에 녹여 내고, 그것을 활용하여 많은 이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영적 생활을 도왔다. 그들 중 이냐시오를 포함한 몇 명이 청빈과 정결,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설교하는 일 등을 공동으로 체험하면서 깊은 형제애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동반자’로 스스로를 칭하면서 자신들이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할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토론과 분별을 통해 같은 생활양식으로 결속하기로 결정했으며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사부들[각주:5]의 식별》 은 그들이 영신수련의 정신에 기반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간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첫 사부들의 식별》에 나타난 공동 분별의 원리를 중심으로 영신수련에 배어있는 개인 분별의 원리들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분별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e First Vows at Montmartre, 1534년.


3. 공동 분별의 실제

1) 분별의 시작 : 올바른 목적과 정체성 공유

      《첫 사부들의 식별》[1][각주:6]은 공동 분별이 시작된 배경을 먼저 언급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동일한 소명을 공유했지만 다양한 배경과 문화로 인해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도 의사결정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통일된 질서가 없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모두가 나름의 방식대로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공동분별을 시작해야 할까?’ 

“우리가 서로 다른 판단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각주:7]께만 찬양, 존경과 영광을 드리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양으로 봉헌하기 위하여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고자 했다.” (《첫 사부들의 식별』》[1])

     공동 분별을 시작할 때 중요한 점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올바른 분별의 목적을 공유하지 못하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교세(성도수나 재정)확장’, ‘성도들의 편의 증진’, ‘특정인이나 그룹의 영향력 강화’ 등이 목적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면 공동 분별은 자기 욕망의 경연장이 되고 수단이 목적을 흔들고 이기적이고 세속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공동 분별에 참여하는 모두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분별에 참여하는 자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소명받은 자’라는 관점을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


2) 분별의 준비 : 불편심(영적 자유)

      목적과 정체성이 공유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분별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분별의 준비는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 즉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마18:3) 

 마침내 한 결정에 이르러 만장일치로 합의한 것은 우리가 여느 때보다 좀 더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고 좀 더 열심히 묵상하면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고 희망하며 우리의 모든 관심을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시고 관대하신 분이시기에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구하는 이에게 결코 당신의 선하신 성령을 거절하지 않으신다.”(《첫 사부들의 식별》 [1] )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이 영신수련》[23]에서 말하는 '초연'이다. 이 때 초연(Indifference)은 애착으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쳐짐이 없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불편심’(不偏心)의 상태이다. 이 때 내적자유를 누린다고 해서 ‘영적 자유’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불편심(영적 자유)은 영신수련을 관통하는 아주 본질적인 태도이다(영신수련》 [15, 179, 189]). 영신수련을 통해 수련자가 예수의 길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특별 묵상(영신수련 [23, 136~147, 149~155])과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영신수련 [169])에서도 불편심(영적자유)을 선택을 위한 준비 조건으로 분명하게 강조한다.  

      분별을 위한 두 번째 준비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첫 사부들은 일상적인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더 기도하고 더 묵상하는 최선을 드리려고 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역과 일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기도원이나 수도원과 같은 별도의 공간일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사역과 병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 분의 뜻을 구하려는 열정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분별은 맞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해가는 과정이다. 


3) 분별 방법 결정 : 이성적 분별

      준비를 갖춘 후 어떤 방법으로 분별했을까? 이냐시오와 그의 벗들이 사용한 실제적인 분별의 방법은 《첫 사부들의 식별》 [2]에 잘 나타난다. 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제들을 살피고, 일을 마친 밤시간에 함께 모여서 선택안을 시험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 수정해가면서 합일점에 도달해갔으며, 이런 과정을 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방식을 이성적 분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신수련』의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에 근거한다. 

제시된 직책이나 교회의 특전을 취함으로써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내 영혼을 구원하는 데 내게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될 것인지를 따지고 고찰한다.(영신수련》[181])

제시된 것에 대해 이처럼 다방면으로 따지며 궁리한 다음에는 이성이 어느 편으로 더 기우는지를 살핀다.(영신수련 [182])

    이냐시오의 분별 규칙은 기본적으로 위로와 실망이라는 내면의 감정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유혹이 있을 수 있기에 이성적 성찰로 보완도록 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공동체로 결속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섬기고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를 서로에게 설명함으로써 서로 시험하고, 더 나은 안을 찾고, 다수의 생각을 모아가는 이성적 분별을 사용한다. 


4) 선택안 구체화 : 질문하기

      분별의 방법을 정한 후에 질문을 제기한다. 첫 질문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내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가?였다. 이것은 근원을 흔드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삶을 나누며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우정, 이미 이루어오던 방식까지도 폐기할 수 있는 개방성이 담긴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한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셨고 일치시키셨으니 하나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 된다.”(《첫 사부들의 식별》[3])라고 마음을 모아간다. 그들에게 공통의 신앙 경험을 주시고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본질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에게 순명할 수 있는가?이었다(《첫 사부들의 식별》[4]). 만약 그들이 한 공동체로 연결되기 원한다면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순명의 삶을 살아야했다. 이것은 첫 질문을 구체화하는 실제적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의 질문하기를 통해 구체적인 선택안을 갖게 되었다.


5) 교착 해결하기 : 믿음을 통한 개인과 공동체의 양립

      그들이 영성수련을 함께 하고 공동 사역을 체험하고 결속되었다고 해서 공동 분별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날 기도하고 숙고했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첫 사부들의 식별》[5]). 이냐시오와 동반들은 이 때 더 나은 방법으로 ‘분별의 환경을 바꾸는 것’과 ‘누군가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을 고민한다(첫 사부들의 식별[5]). 그러나 세 가지 영적 준비를 제안함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더 많은 기도와 묵상 등의 최선을 다하는 노력’, ‘상대방의 생각을 염탐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말 것’, ‘제3자적 태도를 가질 것’(첫 사부들의 식별[6]).  교착상태에 빠지면, 소수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위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 때 영적 준비를 위한 해결책을 제안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집중적으로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 기도하면서 제3자적 관점, 즉 불편심(영적 자유)을 가지면서 자신이 경험한 움직임을 공동체와 나누었다. 개인에게 경험된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하여 각 개인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동일하고 때로는 상반되지만 전체적으로 온전히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고 있다. 믿음으로서 교착을 해결한다. 


6) 선택안 결정  : 선택안에 대한 불이익과 이익을 통한 마음의 기울기 측정

      교착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 준비를 마친 후, 다음 날 모여서 개별적으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얻게 된 순명에 대한 부정적 측면(불이익들)을 전체에게 돌아가면서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질문의 반대측면, 즉 순명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익들)에 대하여 기도 중에 성찰한 것을 다시 돌아가면서 나누었다. 이 때 전 날 나눈 것들 중 불가능하고 엉뚱한 것들은 감소시켜갔다(첫 사부들의 식별[7]). 이런 정보들을 다시 숙고해가면서 마음의 기울기를 측정해 나갔다(《영신수련》[182]). 공동체 전체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지를 살피면서 다수의 마음이 어디로 모아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수결이지만 아무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첫 사부들의 식별[8])


4. 제언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은 개인의 분별과 공동체의 분별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이 한마음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과정이다. 포스트 모던의 교회 현실에서 첫 사부들의 식별》의 식별에서 제공하는 모델을 통해 개별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공동 분별은 특히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공동 분별의 모든 과정이 《영신수련》이라는 지속적인 회심 체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선택하려는 《영신 수련》의 정신과 태도가 배어 있지 않은 채 방법만으로 올바른 공동 분별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훈련해 가면 이냐시오를 도우신 주님이 분명 우리도 도우실 것이다.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의 원리와 정신을 당회와 제직회 등의 의사결정에 적용해 감으로서 한국교회가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글쓴이 : 유재경.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Th.M(영성신학), 영락수련원(영락교회 영성센터)지도목사.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8월 호에 실린 여덟 번째 글입니다. 잡지에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요약본이 실렸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1. 1.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공동체 제자도》, 110~115쪽 요약. [본문으로]
  2. 2.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은사적 분별(고전 12:10)을 ‘분별’로,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믿는 자가 내면 안에 일어나는 영의 움직임을 구별하는 훈련적 분별(요일1:9, 4:1)은 ‘식별’로 용어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친숙한 ‘분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3. 3. Ignatius of Loyola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313~336번(쪽 번호 아닌 문단 번호이며 이후부터 《영신수련》 [313]으로 표기함) [본문으로]
  4. 4. 다양한 영어 번역본 중 Jules J. Toner, S.J. “The Deliberation that Started the Jesuits: A Commentario on the Deliberatio Primorum Patrum,” newly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introduction, Studies in the Spirituality of Jesuits Ⅵ no. 4 (June 1974)를 기반으로 쓴 심종혁, "사도적 공동체로서의 예수회의 기원", 종교신학연구 6 (서강대 신학연구소, 1993.12): 389-419쪽의 한글 번역문을 사용하였음. [본문으로]
  5.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의 창립에 참여한 설립 주역들 [본문으로]
  6. 5. 아투로 코디나(Arturo Codina)가 라틴어 원문을 아홉 개의 문단으로 분류한 표준 번호를 따름. [본문으로]
  7. 6. 번역본은 “하느님”이지만 이 글의 독자가 대부분 개신교 배경을 가진 점을 감안하여 앞으로 “하나님”으로 바꾸어 쓰겠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가난과의 동행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18 02:50

 1544년 2월 6일. 수요일

미사 시작 전부터, 헌신과 눈물을 드릴 때, 고정된 수입 없는 공동체에 대한 (나의) 마음이 더 공고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보다 뚜렷해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과 다르게, (예수회 공동체를 위해) 고정된 수입을 추구하는 선택은, 혼선을 일으키고,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불명예일 수 있으며, 우리 주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가난을 경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the Procedure of Election" in Selection from the Spiritual Diary (New York: Paulist Press, 1991), 239.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을 고용환경과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내몰리고 있다. 신자본주의(Neo Capitalism) 혹은 세계화(Globalization)란 거창한 시대적 요구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세대는 가진자의 풍요와 그 독점을 정당화하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더욱 가난을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길 강요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고정된 수입이 가져다주는 오늘의 안정감을 박탈당하고, 언제 올지 모를 빈곤의 삶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오늘의 생존을 삶의 목표로 삼고 분투하고 있다. 내게도 그렇게 가난이 찾아왔다. 내일 당장 필요한 자식들의 먹을 거리를 걱정하고, 다음달 월세를 어떻게 내야할지, 막막한 고민을 안고, 들지도 않는 잠자리를 청한다. 전혀 원치 않는 삶의 조건이기에, 가난은 불청객이며,  피해야할 시련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적 성숙을 위한 최선의 삶의 조건으로 가난을 선택해왔다.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 규율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삶의 형태로 가난을 사모하고, 삶의 일부분으로 선택해왔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도 가난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의 필수적 조건으로 여겼고, 예수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가장 주요한 계율과 가치로 세워나가려고 노력했다. 영성 분별의 전문가 답게 이냐시오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랜 기간 분별의 기도를 드렸고, 그의 일기 한 부분엔 그 영적 과정 중에 깊은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난한 삶의 형태를, 최소한의 고정된 수입으로 공동체를 운영하고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마저도 포기하고, 매일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공동체의 삶을 꾸리는 규율을 세울 것인가?"

예수회 최초 구성원들은 그의 분별과 그로 인한 공동의 결정에 따라 고정된 수입을 포기하고, 매일 채워주시는 은혜로 살기로 선택한다. 가난은 그렇게 삶의 필수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두려움과 절망의 대상에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삶, 하나님만을 향한 갈망의 불길을 더욱 태우기 위한 영성적 삶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물질적 곤핍을 통해 나의 원초적 필요를 내려 놓고, 그 부족함이란 경험 속에서 오직 주님만으로 빈곤함의 공간을 채워겠다는 오늘의 영적 결단이 가난이다. 

내 삶의 조건이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적 문제, 혹은 형평성의 문제이든, 나는 오늘 내게 이미 주어진, 가난 가운데 주님의 풍성함을 누릴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영적 은사로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통해, 돈과 재물에 더 갈증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더 갈망하게 되었는가?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

'하고 싶다'

    추석 연휴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다. 약간 멍하고, 졸음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이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흐트러진 감각을 옷매무새 정리하듯 가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일상의 삶에서 침묵기도를 뿌리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한다. 잠을 근간으로 하는 몸 상태, 결혼과 육아의 살림살이, 교회의 일반사역과 영적지도 사역, 개인 공부, 기타 사회활동 등의 요소 속에 하루 1시간 이상의 침묵기도와 성찰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반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9-10개월짜리 일상에서의 영신수련이라고 일컫는 ‘19번 피정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을 만큼, 매일매일 침묵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교회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역자들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중에만 잠깐하고 일상에서 흐려지고 멈춰지는 것. 이 좋은 것을 왜 지속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좌충우돌이지만 더 흔들렸던 어제의 날들을 돌이켜보면, 명백해지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란 명언에 잘 나타난다. 침묵기도는 해야 한다는 당위의식과는 상극인 것 같다. ‘해야 한다는 가치관에 이끌린 노예의식은 침묵기도가 펼쳐주는 세상과는 충돌한다. 침묵기도는 철저히 자발적 사랑과 관련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곳은 하고 싶다는 내적인 갈망에 충실한 자발적인 선택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이다. 그만치 긴장과는 거리가 멀다. 유연하고 자유롭다. 오직 사랑의 논리에 관해서만 철저하다.  

    따라서 침묵기도를 일상의 삶에 잘 녹여내려면, 하나님을 향해 해야만 하는행위를 넘어서 하고 싶은마음에 아주 깊은 진솔함으로 주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매일의 기도 실천과 관련하여, 저녁과 아침을 이렇게 보내면 어떨까 싶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잠자리에 든 후 자고자할 때 바로 성모송 한 번 할 사이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그 수련을 요약한다.”(73번)고 조언한다. 이 말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잠자기 전에 내일 기도할 성경, 기도할 주제,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 등을 미리 읽고, 혹은 생각해 놓고 잔다. 두세 번 읽고 줄거리나 구절, 영적인 갈망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는 그 사이에,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기억한다. 머리 속에 불어 넣는 매일의 첫 생각이 이것이면 참 좋겠다. 아마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살고 싶은 그 비슷한 갈망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 갈망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 갈망이 구현되는 첫 자리이기도 한 침묵기도의 자리로 구체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좋겠다. ‘하고 싶은마음에 주목하면서, 가장 최적의 시간과 공간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꽉 들어차 있고 매일의 기도 시간도 자기 주도적으로 배정되어 있어서, 주님께 뭔가를 떼어 드려야 하는 느낌이 드는 삶을 벗어나보자. 우리 중에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너무 바쁘다. 이렇게 삶이 바빠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에 어떻게 기도 시간을 따로 내겠는가? 이기심 많은 인간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예, 시·공간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확 바꿔보는 것이다. 우리보다 우리와의 사귐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께 주도권을 아예 내 드리는 것이다. 전부를 다 드리고 우리는 단지, ‘하고 싶은마음을 더욱 깊게 확인하고, 그 마음 앞에 정직해 지는 것이다하여, ‘하고 싶다는 끌림 그 자체도, 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못 견디는 양치질처럼 완전한 일상이 되는 그런 날이 될 때까지, 언제나 다시 시작하면 될 터이다. 아직까진하고 싶음이 분명하니까. 자,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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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영적 분별을 위한 규칙 1: 쾌락은 위안인가 유혹인가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04 14:00

규칙 1: 대죄(mortal sin)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서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 더욱 키워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 방법을 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 수련》, no. 314.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수많은 영적 경험들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우리 영성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분별(discernment of spirits)의 원칙을 정립했다. 영적 분별이란 우리의 “심정의 여러 변화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느끼고 알아차려서 선한 것들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들을 배척하는” 일을 말한다.(《영신수련》, no. 313). 

먼저 이 첫 번째 규칙은 신앙 생활의 많은 국면에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규칙은 우리 삶에서 쾌락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은 분명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큰 영적 어두움과 위험으로 빠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규칙은 이런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 신앙 생활에서도 —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으로서 쾌락을 추구하는 일은 그 즐거움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삶의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향성 여부에 따라 쾌락은 우리의 삶에서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참으로 복된 길을 가고 있는 중에 그 길을 더 열심히 가게하려고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위안(treat)일 수 있다. 하지만 혹여 내가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쾌락은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미혹(迷惑, illusion)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이 현재의 나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점검하게 하고, 내 삶의 방향성이 그분께 점점 더 가까워 지는 쪽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점검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필자는 요한 복음서의 첫 장,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첫 만남에 관한 보도를 떠올리게 된다. 거기서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묻는다. ”주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1:38). 이 질문은 영적인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 사람으로서 궁극적이고 올바른 길을 가려는 이들이 던지게 되는 첫 질문일 것이다./ 새결새김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진짜와 가짜


본래 마음이야 하나님을 닮아 곱고 청명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실, 내 마음이라 불릴만한 것도 따로 없지. 내 마음 내 님과 하나니까, 내 마음 찾으러 들어가면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찾아질 것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던 아들의 참 마음이 찾아 질 것 아닌가. 그것이 진짜니까.

근데, 이것은 뭔가. 종일토록 정신 나간 아낙네 머리 풀어 헤친 것처럼 사방팔방 뛰어 다니면서 발에 닿는 것은 다 뻥뻥 차고 다니는 이것은. 채인 사람은 이유 몰라 섭하다 눈물 찔금 짜고. 눈물 방물 맺혀 서럽게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 들여다보면, 내가 제 정신인가, 내가 사람 맞나 싶은데. 이것이 도체 뭐란 말인가. ! 이거 가짜 아닌가! 가짜 맞구먼. 어째서 가짜가 진짜 노릇하고 있고. 또 어째서 가짜가 태연하게 진짜 노릇하고 다니게 그냥 두는 건가.

그래서 성인도 그렇게 기도하셨는가. 성인에게도 기도가 필요하셨는가. 진짜가 진짜 자리에 있고 가짜가 진짜 노릇 못 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그 절실함을 알고 기도로 청하는 것이 바로 성인이구나. 그럼 이제 마음을 다 잡고, 성인을 따라 기도 한 자락 올려 보자.

 

사랑하옵는 주여,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당신을 섬기되,

마땅히 받으실 만큼 섬기도록

가르쳐 주소서.

 

주되, 그 대가를 셈하지 아니하고,

싸우되, 상처받음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땀흘려 일하되, 휴식을 찾지 않게 하소서.

 

힘써 일하되,

당신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아는 보수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 로욜라 성 이냐시오 기도. 한국예수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이냐시오영성연구소, 35.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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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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