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믿는다는 것 (비트겐슈타인)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Culture and Value: A Selection from the Posthumous Remains, trans. Peter Wintch (Malden, MA: Blackwell, 1998),  39.


"부활은 현 세계 안에서 일어난 매우 독특한 사건이 아니다. (비록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부활은 원칙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탄생하게 되는 새로운 창조 세계의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을 잠깐 보기만 하려해도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앎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앎, 객관적 자세로 연구하는 유사 과학 연구의 냉정한 평가만이 아니라 전(全)인격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론을 가장 잘 요약해서 표현한 말이 ‘사랑’이다. …… [이러한 새로운 앎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대상의 부드럽고도 신비로운 공생을 통해서 얻어진다. ……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공공 세계, 부활절에 시작된 세계, 예수님이 주이시고 카이사르가 주가 아닌 세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의 방식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인식론이다."(톰 라이트(N.T. Wright),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 by Hope)》 (IVP,2007), 136-37). 

/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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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의 고백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4.09 22:05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못 믿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더 큰 법입니다. 받는 은혜가 크고 보면 자기 자신의 가엾은 모습이 돋보이고, 자기의 지은 죄가 더욱 커 보이는 것, 그러기에 저 세리와 같이(누가복음 18장 13절) 감히 눈을 쳐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3장. 14절.


부활절의 노래는 너무나 부르기 쉽고 그날의 축제는 이내 '나'의 것이 되고 말때가 많다. 사순절의 기나긴 어둔 밤은 지루했고 참기 힘들었으며, 남의 것 아니면 저 예수의 것으로 생각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매해마다 되풀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그 길에서 멀어질수록 부활의 기쁨은 밋밋해지고 부활절도 그저 연례행사로 그쳐버리기 쉽다. 참된 부활은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이며, 받은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죄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세리는 주님을 만나고야 만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이제 부활하셔서 "평화"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 이제 의인으로 거듭난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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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2014년 2월의 추천 고전을 2월을 넘겨서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꼭 2월에 읽어야 한다는 의미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성 고전을 한 달에 한 번씩 소개한다는 의도로 게시하는 것이니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의 추천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이 생기신다면, 시간을 내어 고전을 직접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  편집자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이후정 역, 은성(1993)


 

마카리우스는 누구인가

     필자가 이 달의 영성 고전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마카리우스(Pseudo-Macarius, c.300-391)의 《신령한 설교》이다. 여기엔 50 편의 <신령한 설교><대서한>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들의 저자는 성서와 초대 교회 사막 영성에 영적 뿌리를 둔 위대한 영성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 세기 후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도자들로부터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수련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상징과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값진 조언과 통찰들을 전해 주었다.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곧 문헌화 되었고, 당대의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후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인 감화를 주는 영성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음과 성령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영적 조언의 큰 줄기는 영성 생활에서의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 마음은 지성적 활동의 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 그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일, 뭔가를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 등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다. 즉, 마음은 지성과 감성과 욕망과 의지 등의 모든 내적 활동의 중심이며, 또한 우리 신체 기관들을 총괄하는 제어탑(control tower)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은 우리 전 인격의 중심이다. 그리고 여기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이곳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다. 하지만, 사탄과 악마들 또한 이곳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음 그 자체는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 속에 용들이 있고, 사자들도 그곳에 있다. 그 속에 독을 가진 짐승들이 살고 있으며, 모든 악마의 비장품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곳에는 가파른 절벽과 거친 길들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그분의 나라도 있다. 그곳엔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또한 그곳에 사도들이 있고 천상의 도성들이 있고 은혜의 보화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다

-신령한 설교, 43:7.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가는 일을 수련의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는 일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고,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일 등이 모두 우리가 그릇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과 연합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바로 알아 보고 올바로 경험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임을 소상히 밝혀준다.

 

     그러므로 영적 수련의 길은 성령과의 협력을 통한 오랜 동안의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 것에 대한 집착(마카리우스는, 이를 세상적인 것들이라고 칭한다)과 천상적인 것(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잘 살펴 분별하고, 세상적인 것을 떠나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 속에 채우려는 지향을 가지고 언제나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의 정점은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즉 세상적 욕망과 감정은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과 천상의 성격으로만 순전히 채워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임재를 참되게 경험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성령과 협력하는 영적 수련에 있어서 겸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자기 비움의 겸손, 자기 판단의 교만을 벗어날수록 우리 마음 속(이는 영적 전쟁의 전쟁터이다)에서 성령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가며, 이와 함께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 나아가 몸의 태도와 습관까지, 한마디로 우리 전 인격체로서의 몸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이러한 변화의 궁극에서 우리는 부활하시어 영화로워지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부활과 영생의 삶이 종말에만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카리우스는, 주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화로워지신 빛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던 것을 거듭 거듭 상기시키면서, 부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을 알아보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비전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마카리우스의 영성 생활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신자의 삶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임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를 감지하며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만남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그러한 일에 참여할 가능성이 지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거듭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에 신자들이 어떻게 신자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러한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은 이후 헤시카즘(Hesychasm)으로 대표되는 동방 교회의 영성 전통 형성에 큰 토대가 되었다. 오리게누스(Origenus)와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서 비롯된 지성적 영성과 마카리우스의 마음의 영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동방 교회 영성을 형성해 간 것이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도 마카리우스의 설교들과 조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방 교회에서 신학과 교리가 삶과 실천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영성이 사변적이고 현학적이지만 무미건조한 것으로 변해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경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의 위험성을 알리는 시금석의 역할을 거듭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 영성 전통에 마카리우스의 글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한 예로 경건주의(pietism) 운동의 지도자들은 마카리우스의 글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종교 개혁 이후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법정적 용어처럼 이해하면서 믿음은 이런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만 설명하려는 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적 성향이 나타났을 때, 경건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는 거듭남이라는 생명과 삶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이런 경건주의 영성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이 초대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갖춘 것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었다. 그래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는 이신칭의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에서 옳게 드러난다고 하는 주장을 견지하였다(G.A. Maloney, Pseudo-Macarius, 24). 또한 18세기 부흥 운동 당시에는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험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권위있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갖는 의의 

     오늘날, 우리에게 마카리우스의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신앙 생활에서 교리와 실천이 분리되고, 신앙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위험으로 남아 있다. 마카리우스의 조언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게 하고 그런 것들을 피하게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마카리우스의 글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 특히 감정주의적 신앙 체험에 천착하는 이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카리우스는 기독교인의 내적 경험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과 지식과 의식까지도 모두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사를 경험하는 일에 영적 규칙을 따르는 수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고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따라서, G. A. 말로니(Maloney)가 말하고 있듯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는 마카리우스는 은사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권력의 근거인양 사물화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처럼 여기다가 결국 그들의 영적 여정을 허망한 것을 만드는 것을 피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Pseudo-Macarius, p.26).

 

     다시 말하면, 회개의 중요성, 성령의 역할, 마음의 정화, 점진적 변화와 성장, 부활 그리스도와의 만남 등을 강조하면서 마카리우스의 글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지고, 지식과 실천이 어우러지게 하여서, 신앙이 지식이나 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고, 그 삶에서 하늘의 기쁨 맛보도록 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마카리우스의 글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  더 순결한 것으로 정화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 풍성해지고, 우리의 태도는 좀 더 덕스러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남기정.



Pseudo-Macarius (Paperback)

저자
#{for:author::2}, Pseudo-Macarius (Paperback)#{/for:author} 지음
출판사
Paulist Pr | 1992-08-01 출간
카테고리
인문/사회
책소개
The writings of Pseudo-Macarius,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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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존 던)

한 줄 묵상 2013.10.09 05:20

죽음아, 뽐내지 마라, 어떤 이들은 너를 일러

힘세고 무섭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불쌍한 죽음아, 또한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단지 너의 영상에 불과한 휴식이나 잠으로부터, 

많은 쾌락이 흐르니, 그러니 네게서 더 많은 쾌락이 흘러야 하리,

...

... 그런데 너는 왜 으시대는가?

짧은 한 잠이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리,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으리. 죽음아, 너는 죽으리라. 


- 존 던, '거룩한 소넷 X', (<존 던의 거룩한 시편>, 김선향 편역, 청동거울)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 1582-1631)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교회 조종(弔鐘) 소리를 듣거든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종 소리인가?" 굳이 알아보려 하지 말라고 설교했다. 


인간은 외딴 섬들 같이 서로 떨어져있는 존재들이 아니요("No man is an island"), 다 하나로 연결된 대륙과 같아서, '그'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 최인호 선생님의 소천 소식은 내게 특별한 소식으로 다가왔다. 그 소식은 마치 내게, 

<샘터>에 실리는 그의 재미난 '가족' 이야기를 착한 웃음을 웃으며 읽던 어린 시절의 나도 

이미 죽었음을, 

죽어 여.기.없.음.을. 말해주는 조종(弔鐘) 소리 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죽어가고 있다--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맞으며 작가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은 

조종 소리를 듣고 교회당에 모인 우리 '죽을 인생들(mortals)'을 향해 

사제가 선포하는 우렁찬 복음의 말씀 같았다. 


"주님이 오셨다."


그렇다. 그렇다! 

주님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다! 

신앙인 최인호 작가는 죽음을 맞지 않았다--다만 주님을 맞이했을 뿐! 


어떤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신 말씀, 그대로이지 않은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외침, 그대로이지 않은가?


"주님이 오셨다."


주님이 오시면

죽음은 없다. 

물러간다. 


죽음에 빼앗겼던 모든 것이 다 회복되리라. 


착한 웃음 짓던 나도 다시 살아나리라. 


'그'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영광의 옷 (마카리우스)

한 줄 묵상 2013.05.28 15:41

겨울이 지나면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능력에 힘입어 자기 내부로부터 밖으로 잎을 내고, 꽃을 내고, 열매 맺어 그것들로 옷입는다. …… 마찬가지로 부활의 날에 신자들이 덧입는 옷은 의의 태양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성령의 영광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영광은 신자들이 전부터 자기들 속에, 즉 그들의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들이다. 신자들이 현재의 삶에서 자기 영혼 속에 가지고 있는 그것이 부활의 날에 영혼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그들의 가려주는 옷이 된다.

 John Wesley, ed. An Extract from the Homilies of Macarius, no. 4.8, (first printed in 1750),

 

그러므로 부활의 날, 우리가 새로이 입을 때, 우리를 영광스럽게 할 영광의 옷은 바로, 지금 현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모든 덕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일이다 (4.9).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가짐과 언행과 실천이 곧 부활의 날 우리들이 입을 옷이다 (4.1). / 새결새김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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