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상처

     사순절,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는 때입니다. 

 

     성흔(stigmata)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말하지요. 예로부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성흔을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고, 예수를 닮기를 추구했던 성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베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봅니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으심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물었지요.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요(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고난 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이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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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것은 결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시청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송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 곧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성으로 변질시키는 세태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직장에 적합한 '인재',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품'임을 오디션과 같은 입사 시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 받고 있다. 비단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라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도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혀지기를(picked up)"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유행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나를 뽑아줘"라는 간절한 외침이 배어 있는 듯해서 노래가 매우 서글프게 들린다. 더구나 이러한 정글과 같은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행을 '이용'해서 '과대 광고(공약)' 또는 '허위 광고(공약)'로 자신들을 포장해서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소명'(vocation)과 '사명(mission)'은 원래적으로 수동적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동성은 그 부름과 사명에 대한 응답에 있다. 곧 수동성이 우선이고 그 뒤에 능동성이 따른다. 앞서 말한 "pick me up"이라 외치는 노래도 자신이 수동적으로 선택되기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소명'과 '사명'이 갖고 있는 수동성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pick me up"이라는 문구에는 자신이 선택받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부름과 응답에는 자신이 부름을 받기에 매우 부적절한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청년 윤동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동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것은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허락"되어져야만 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했다. 최근에 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찬송가에 담긴 주님의 질문에 응답하던 때에는 분명 나같은 죄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그 결심 밑에 깔려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십자가는 내가 "져 주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당연히" 맡기셔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슬쩍 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시며 모든 제자들은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이 말씀 이전에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이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시인'으로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 들였다(〈쉽게 씨여진 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좋은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원하지만, 윤동주는 다른 이들이 피하는 괴로운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랬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세상은 상향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향성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캐스팅' 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 이틀 후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성금요일이다. 일 년 중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커지는 때이다. 그런데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 내가 결단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고마워하시며 얼른 십자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적 십자가는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부담스러워하며 억지로 받거나, 생색내며 받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한 줌의 재에 불과한 나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십자가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겸손히 두 손으로 받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귀히 여기는 이들은 사실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주기철)[각주:1]


/ 바람연필 권혁일


  1. 주기철, "오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서울: 홍성사, 2008), 15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황혼 속의 〈재의 수요일〉 그리고 〈흰 그림자〉

하늘이 유난히도 맑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자, 기독교 전통 절기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회하는 40일 간의 기간이며,  그 첫 날인 수요일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되새기는 의식을 행한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과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유명한 시는 T. S. 엘리어트(Eliot: 1888-1965)의 장편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가 애독하던 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각주:1] 윤동주가 어떤 점에서 이 시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오늘이 재의 수요일이고, 다가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므로 T. S. 엘리어트의 시의 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읽어 본다.


재의 수요일


VI.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희망하지 않지만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며

꿈들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꿈이 교차하는 황혼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이것들을 바라기를 바라지 않지만

넓은 창으로부터 화강암 해변을 향해

하얀 돛들이 여전히 바다를 향해 날아 오른다,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again

Although I do not hope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Wavering between the profit and the loss

In this brief transit where the dreams cross

The dreamcrossed twilight between birth and dying

(Bless me father) though I do not wish to wish these things

From the wide window towards the granite shore

The white sails still fly seaward, seaward flying

Unbroken wings


모두 6부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가 영적 절망과 고갈을 통과하여 개인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내적 여정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위에 인용한 두 연은 이 시의 마지막인 6부의 시작 부분이다. 이 시는 T. S. 엘리어트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옮겨간 지 약 3년 후인 193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시는 때로 그의 '회심시'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의 엇나간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짧은 황혼 속에서 꿈들이 교차하고,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화강암이 빛나는 해변을 향해 믿음으로 비상한다. 이 순간 1부에서는 날기를 바라지 않고 허공만 칠 뿐이던 날개가 회복되어 희망찬 날갯짓을 한다. T. S. 엘리어트에게 황혼은 이렇게 전이와 비상의 시공간이었다.


황혼, 낮이 밤으로 바뀌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시적인 순간, 그래서 인생의 덧없음을 맛보고 동시에 영원을 소망하는 종말의 때…….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로 된 십자가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음성을 듣는 이 날이 바로 이 황혼의 때가 아닐까? 자신이 흙인 것과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부질없이 희망하며 서성거리고 말 것이다. 육지를 떠나 바다 위 하늘로 비상하지 못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T. S. 엘리어트의 시를 애독할 무렵에 쓴, 〈흰 그림자〉라는 시에도 '황혼'이 등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황혼은 깨달음의 시간과 공간이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 14.


시인은 황혼 속에서 땅검(땅거미)이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황혼과 동의어인 '땅검'은 해질녘의 어스름한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원래 시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황혼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일 때 놀랍게도 그는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곧, 황혼이 청각적으로 경험된다. 시인은 자신이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이 지적인 총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발견되는 깨달음, 또는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은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시든 귀"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은 그날 하루 많은 말들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비단 말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땅에서 살아가던 식민지 청년의 하루는 그의 영혼을 시들게 할 만큼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시든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황혼을 향해 그의 전 존재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그에게 새로운 영적 경험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시인은 황혼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는 이 시에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결과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T. S. 엘리어트는 꿈들이 교차하는 황혼 속에서,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향해 비상하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윤동주가 돌려 보낸 것은 '괴로워하던 나'이므로, 비록 '돌려보내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T. S. 엘리어트와 마찬가지로 미래 지향적인 결정, 또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돌려 보낸 나들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흰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원래 검은 색이지만, 시인의 그림자는 흰 색이다. 흰색의 그림자란 태양 아래서 볼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니 허상이다. 그러므로 결국 시인이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오래 괴로워하던 나들은 참된 나와 통합을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고장에 돌려 보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흰 그림자들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흰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흰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어둠은 자신의 허상인 흰 그림자를 발견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가 어둠을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시인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발자취 소리가 들리는 땅검과 대조를 시킴으로써 그것들의 비현실성을 다시 부각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모양도 소리도 없는 비현실적인 나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 연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돌려 보낸 후 허전히 방으로 돌아와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양은 먹이 사슬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매우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양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것은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풀포기나 뜯는 평화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또한, 풀포기를 뜯을 수 있는 양은 선한 목자를 가진 양, 그리고 그 목자를 신뢰하는 양이다(시편 23편 참조). 결국 이 시는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 그리고 목자에 대한 신뢰로 끝을 맺는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황혼 속의 깨달음 뒤에도 여전히 침략자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식민지 청년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괴로워 하는 나가 아니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으로 살고자 한다. 내적 변혁이 일어났다.


다시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을 생각한다. 주일을 제외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마흔 번의 황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황혼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절망, 슬픔, 피로…… 이 모든 것들의 귀를 열어 황혼을, 석양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T. S. 엘리어트처럼 부러지지 않은 날개로 바다를 향해 비상하거나, 윤동주처럼 흰 그림자들을 돌려보내고 시름없이 풀포기를 뜯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2016. 2. 10. 수.


바람연필 권혁일



  1. 왕신영, 《윤동주와 일본의 지적 풍토》, 박사학위 논문, 고려대학교, 2006년, 5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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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의 고백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4.09 22:05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못 믿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더 큰 법입니다. 받는 은혜가 크고 보면 자기 자신의 가엾은 모습이 돋보이고, 자기의 지은 죄가 더욱 커 보이는 것, 그러기에 저 세리와 같이(누가복음 18장 13절) 감히 눈을 쳐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3장. 14절.


부활절의 노래는 너무나 부르기 쉽고 그날의 축제는 이내 '나'의 것이 되고 말때가 많다. 사순절의 기나긴 어둔 밤은 지루했고 참기 힘들었으며, 남의 것 아니면 저 예수의 것으로 생각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매해마다 되풀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그 길에서 멀어질수록 부활의 기쁨은 밋밋해지고 부활절도 그저 연례행사로 그쳐버리기 쉽다. 참된 부활은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이며, 받은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죄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세리는 주님을 만나고야 만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이제 부활하셔서 "평화"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 이제 의인으로 거듭난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이 봄, 무엇을 기다리나 (우찌무라 간조)

한 줄 묵상 2015.03.21 17:19
오, 주님이시여, 나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을 인정하고, 당신의 생명으로 채움받고자 당신 앞에 나아옵니다. 나는 부정합니다. 나를 정결케 하기를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옵소서. 당신은 선함 그 자체이시며,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둠일 뿐입니다. 나의 불결함을 보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아멘.

-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서울: 홍성사, 2002), 241.


해가 길어지는(Long<Lancten) 봄에 오는 절기라하여 Lent라 불리는 사순절,

나는 이 봄, 무엇을 기다리나.

겨울을 든든히 이기고 어깨 쭉 편 붓꽃인가?
고운 향 가득 품고도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라일락인가?
지난 겨울 잘 이겨냈다고 봄 눈꽃 흩날리며 위로해주는 머리 하얀 벚꽃인가?

이 사순절,
봄 꽃보다 봄 은혜를 기다린다.
봄 향기보다 예수 향기 사모한다.
더 드러내기보다 더 죽고 더 약해지길 갈망한다.
나는 예수 생명 없으면 어둠이요 부정이기 때문이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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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소망의 딸 (요한 클리마쿠스)

한 줄 묵상 2015.02.22 05:40

회개는 소망이 낳는 딸이며 절망에 대한 거부다. 

(Repentance is the daughter of hope and the refusal to despair.)


- John Climacus (7C), The Ladder of Divine Ascent (New York: Paulist Press, 1982), 121 

(Step 5 "On Penitence")


그래, 이 사순절의 회개는 부활절의 기쁨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회개는 부활의 소망이 낳는 파장이다. 


회개는 항복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용서가, 사랑이 쳐들어왔다.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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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한숨과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감 때문에 다리가 휘청이고 무릎을 땅에 꿇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게 될까? 특히, 그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어쩔 수 없이 꼭 따라 붙는 그림자와 같다면, 나와 당신을 위해 고통을 포기하고 도망치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함께 가자고, 도와 주겠노라고, 나도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자고, 힘을 보태고 격려하게 될까? 아니면, 고통당하는 그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그를 떠나버리게 될까? 《영신수련》 첫 페이지에 실린 오래된 기도문 "Anima Christi"[그리스도의 영혼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 라고.


그리스도의 영혼은 (Anima Christi)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하소서.

그리스도의 성혈은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물은 저를 씻어 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하소서.[각주:1]


Diego Velazquez,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1632)의 부분


      평상시에는 주님과의 관계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서, 제대로 살고 있기나 한 건지 긴가민가 할 때가 많다. 싸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열렬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막상 혼자 쓸쓸히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제자들이 떠나간 깜깜한 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 마침내 십자가 길을 처참히 걸으시는 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고, 주님 곁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고, 주님께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강한 갈망과 용기가 솟아 오른다. 


     "저는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저라도, 저만이라도 그 곁에 머물러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겁도 많고 두려움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거 상관없어요. 저는 주님을 못 떠나요. 안 떠나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던 한 벗의 고백을 들었을때, "Anima Christi"의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저에게 힘을 주소서)"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 우리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을 강하게 깨워내는 것이리라.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따뜻한 봄볕이 부드럽게 녹여내고 새순을 틔워내는 것처럼.


다음 주면 고난주일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을 벗 삼아, 주님의 수난머물러 봐야겠다. 특히, 수난의 현장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삶이 구체적으로 발견되길 청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 해'맑은우리 주선영


  1. 작자 미상, "그리스도의 영혼은" 중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지음, 정한채 옮김 ,《영신수련》, 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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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이 거룩한 기간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4.03.17 10:27

수도자의 삶은 사순절의 연속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이 거룩한 기간 동안 평소 가지고 있던 태만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49장. 1-3. (서울: KIATS, 2011), 94.


사순절은 “거룩한 기간”이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예수의 삶과 고난,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간은 우리가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게으름을 벗어 버리면, 거룩하신 주님을 좀 더 닮아 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규칙서》8세기 사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사순절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훈련 방법으로 (1)악한 습관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 (2) 참회의 기도, (3) 독서, (4) 마음의 성찰, (5) 자기 부인, (6) 음식물과 수면의 절제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베네딕트의 수도원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는 사순절에는 정해진 의무에 좀 더 추가하여 실천하고 이에 전념할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이러한 훈련들을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기보다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과도한 ‘고행’을 통해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허영심을 경계하기 위해, 이 훈련들은 수도원장의 영적 지도 아래 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성 훈련을 평소보다 한두 가지 더 추가하여 성실하게 실천한다면, 다가올 부활절이 감격이 없는 ‘연례 행사’가 아니라 기쁨과 소망이 생생한 잔칫날이 되지 않을까? 올해의 사순절이 이미 사분의 일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다. 이미 사순절을 특별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할 때이고, 아직 사순절을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지금이라도 분별력 있는 영적 지도자(또는 형제, 자매)와 상의하여 적절한 훈련을 시작할 때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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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03.07 03:00


"물론 우리는 고난이 올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배워 알고 있습니다. 미약하나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바치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1956년 4월 26일자)


"늘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처럼 모든 좋지 않은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발적인 가난이나 참회고행 못지 않은 영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지요."(1956년 8월 3일) 


"부인께서도 분명 아시겠지만 (고통이나 재정적 어려움 등에 직면했을 때) 삶을 하루하루 시간시간 살아 내는 것이 비결입니다. 과거나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마치 최전선의 군인들처럼 '폭격도 그친 상태고, 비도 내리지 않고, 식량도 도착했으니 마음껏 즐기자'. 이런 자세 말이죠. 사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그날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고요."(1957년 10월 20일자)


"[스스로를] 땅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이라고 …… 생각해 보세요. 정원사가 정한 때에 꽃으로 피어나기를, 진짜 세상으로 올라가기를, 진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씨앗 말입니다. 저는 현세의 삶은 그 세상에서 돌이켜보면 비몽사몽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꿈나라에서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순간보다 지금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963년 6월 28일자) 


- C. S. 루이스, <루이스가 메리에게>(서울: 홍성사, 2009)


사순절(Lent)이다. 

'고난' '훈련' '참회' 등이 주제인 절기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사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치의 고난이 견딜만하다. 

오늘의 fast 뒤에는 feast가 있을 것이기에. 


그래, 믿음으로 살자. 

하루하루 살자. 


하루하루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하루하루

베풀어주시는 일용할 행복에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허락하시는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며


그렇게 하루하루


이 '40일' 동안

하루하루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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