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삶 (안토니우스)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4.05.22 17:58
마땅한 삶


불의와 불법 
몸과 가슴이 짓밟힌 이들의 신음소리가 
5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겠노라고
옛 집을 떠나 온 사람들

소낙비로 전신을 노크하는  
하늘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막 수도승이었던
안토니우스,
예수의 삶을 옹골차게 살아내었구나. 

/ 오래된 오늘 (임택동)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사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안토니우스의 생애》, ch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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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오신 예수 (안토니의 생애)

한 줄 묵상 2013.12.24 22:49

안토니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답장을 썼고 아울러 구원에 관한 일을 조언했다. 즉 현실 세계의 일들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장차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 한 분만이 참되고 영원한 통치자이심을 깨닫도록. 그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며 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를 간청했다. 그들은 안토니의 답장을 받고 기뻐했다. 그래서 안토니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모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81.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아들들이 사막 수도승인 안토니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을 소개해 주고 있다.


제국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임을 일깨워 주는 진정성이 담긴 조언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안토니에게는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는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이 마땅한 일이었나 싶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며 되새기는 12월25일!


우리의 기쁨 만큼 정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또한 솟구치는 성탄이 되었으면!


 임택동

(오래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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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보고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한 줄 묵상 2013.10.24 23:52

우리는 마치 보고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행동들과 영혼의 움직임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짓는 것이 발각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지킨다면 간음하지 못하듯이, 서로에게 보고하는 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한다면 더러운 생각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55.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간 사막의 수도승들, 

특히 홀로 있는 독수도승들은 외부의 유혹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문제는 자신의 내부, 즉 속사람이었다.  


남이 알아채지도, 또 알아주지도 않는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기부여를 받는 일 역시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까지 속사람을 돌아보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지금 살아간다라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내 눈 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더욱 높이는 후안무치한 세상에 살고 있다.

법은 책에만 쓰여 있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목청 높여 기도하는 우리들.

성경의 글자가 가슴에 쓰여지지 않는 한, 참된 죄의식이 생겨 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바로 통회함 없는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이다. 


법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순결해 진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나의 '생각 보고서'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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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리를 떠남

한 줄 묵상 2013.09.24 07:36

안토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되었고 자신이 의도했고 원했던 바대로의 은둔생활이 가능하지 않게되자, 주님이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심사숙고 끝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챌 수 없는 위쪽지역 테베로 떠났다.          


- 아타나시우스(At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49.


얼마 전 추석을 맞이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느라 차들이 모든 도로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의 소원과 희망을 좇아, 있던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하고 또 삶의 기반이 잡힌 "지금의 자리"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하고도 더 나은 그 무엇인가가 있을 때 신발끈을 묶어매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각광을 받는 자리를 떠나기란…….

바로 그런 자리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요 부르심의 표징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이지 않던가?

이 현상을 간증도 하고 책을 내서 알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토니가 지금의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는 바깥으로 드러난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보며 가꾸어 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영적 스팟라이트를 받기에 혈안이 된 듯한 세상이다.

그것을 위해 박사학위도 취득하고, 책도 쓰고, 심지어 영성 훈련도 참여한다.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용기와 결단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미국까지 공부하러 떠나 온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나라 유명한 교회 목사가 6개월의 근신의 자리를 떠나 조명빛 환한 설교단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토니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왠지 씁쓸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과거의 자리를 떠나 지금의 여기에 있는걸까? 

지금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하는 자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발을 디뎌서는 안될 곳을 향하여 떠나와 가고 있지나 않은지?


그저께 비가 온 이후 

가을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아브람처럼, 예수님처럼, 안토니처럼, 바람처럼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가슴을 휘젖는다. 


/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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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그리고 참여 (안토니의 생애)

2013년 6월의 추천고전


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ony)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영성 고전을 소개하고 싶다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ony)》는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또는 Ant(h)ony the Great)를 소개한 책이다. 비록 이 책은 약 1700여년 전에 쓰여졌지만, 순전한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애독되어 왔고, 지금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쯤 곱씹고 고민해볼 만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안토니우스의 가르침과 설교의 주요 주제들은 무엇인가? 저자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통해 당시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토니우스의 부르심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안토니우스의 교회론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오늘날 개신교는 안토니우스의 수도 생활, 은둔 생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이다. 

 


·         시대적 배경


      이 책의 저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는 기독교 초기, 변증과 이단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가 확정되어 가던 격동기를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던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 313)과 니케아 회의(The Nicaea Council, 325)를 직접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설전은 그를 평생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투사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는 아리우스를 경계하며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권면한다.

 

안토니가 자신들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잘못된 주장을 아리우스파가 펼쳤을 때, 그는 흥분하며 그들에게 분노했다. “그러므로 그분(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말씀이신 분을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만드신 것을 더 경배하며 섬기는 ( 1:25) 이방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69).

 

믿음의 자녀들이여, 낙심하지 마시오. …… 여러분 자신을 아리우스파와 상대함을 더럽히지 마시오.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들과 그들의 아버지인 사탄에게서 온 것이오. 정말로 사탄은 생명이 없고 지각이 없으며 무분별한 노새들처럼 올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한다오.” (82).

 


·         안토니우스의 삶


      그렇다면 안토니우스는 누구인가? 그는 251년 이집트의 작은 마을 코마(Coma)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쯤에 부모를 여의고 모든 재산을 상속 받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따르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 중에 네가 완전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라라는 말씀을 듣고 문자적으로 순종하여 그의 재산을 처분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살던 마을 근처에서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금욕주의자들을 만나보고 그런 삶을 공부했으며 서로의 가치를 배웠다. 그 후, 그는 그의 거처를 마을 근처의 무덤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수많은 야수의 모양을 한 악령들과의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5년후, 그는 완전한 고독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그를 단절시켰다. 나일강 동쪽 피스피르(Pispir)라는 곳에 자리를 잡은 안토니우스는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나일강과 홍해 사이의 한 곳을 정하여 자신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완전한 은둔이 아닌 필요에 따라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며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거나 도시로 나가는 현실 참여적인 수도의 삶을 45년간 살다가 105세에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         은둔인가, 참여인가?


《안토니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은둔인가 참여인가라는 화두는 참으로 아이들 말로- 생뚱맞다. 왜냐하면 그는 은둔과 금욕의 대명사이지, 현실 참여의 영성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 거꾸로만 향하는 정치인들의 작태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철저한 참여의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번은 수도자들이 그에게 간청하기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생활을 감독해 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수도자들과 함께 길을 떠났으며, 낙타 한 마리가 그들의 빵과 물을 운반하였다. 그 사막은 온통 건조해서 그의 암자가 있는 산속을 제외하고는 물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거기에서 물을 걸어왔다. 바야흐로 숨 막힐 듯 한 열기가 온 땅에 가득 차고 물마저 도중에 떨어졌으므로, 그들 모두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곳으로 물을 찾아 헤매었지만 허사였고, 더 이상 길을 걸을 수 없어서 땅 위에 드러누었으며 삶을 포기한 채 낙타를 풀어주었다. 늙은 안토니는 모두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몹시 괴로워하고 깊이 탄식하면서 그들을 떠나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며 기도를 드렸다. 즉시 주님은 그가 기도하는 곳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게 하셨다. (54)

 

며칠 후 그는 다시 산 속으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 중에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에게 담대히 다가갔다. 찾아온 모든 수도자들을 위해서 그는 어김없이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55)

 

귀족 한 사람도 마귀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그에게 왔다. 그 마귀는 너무 흉악해서 그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안토니에게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해서 자신의 배설물까지 삼킬 정도였다.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안토니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애원했다. 안토니는 그 젊은이를 측은하게 여기고 기도를 드렸으며, 온 밤을 그와 함께 새웠다. (64)

 

             그는 죽어가는 자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고 (54), 방문하는 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고 (55), 또한 귀신들린 자를 긍휼히 여겨 그와 온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64). 그의 삶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처럼 은둔의 삶 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은둔이 무엇을 위함인지 철저하게 알았기에 그의 삶은 아픈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 현실 참여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사회운동가들처럼 참여만을 외치는 영성가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참여는 반드시 고독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경험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또 이런 간청을 받게 되었다. 군대의 지휘관 한사람이 많은 전령사를 보내 그에게 와줄 것을 청했다. 그는 가서 구원에 대한 몇 마디 말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충고를 전한 후,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공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에게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해명하며, 그 공작을 설득했다.

물고기가 마른 땅 위에 잠시 나와 있으면 죽게 되듯이 수도자들도 여러분과 함께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낼 때 수도를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바다로 가듯 우리는 산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사이에 남아 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85)

 


·         은둔이다 그리고 참여다


      요즘은 정의가 땅에 뭍히고법을 준수하는 자가 냉소와 조소를 받는 시대이다. 이러한 때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거대한 기득권들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다 지쳐버려아니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을 운명처럼 여겨 버리고 급기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끼는 듯하다. 국가기관의 권력을 남용하여 선거에 개입하였던 전 국정원장과 국정원 직원들의 잘못은 모른 체하고, 그것에 물을 타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발언 등을 문제 삼는 모습은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지를 더욱 꺾어버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게만 만들어 간다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안토니의 생애》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그의 영성은 은둔의 영성인가 참여의 영성인가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부조리 가운데서, 그리고 약한자들이 처절하게 밟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안토니의 생애》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참여다! 무엇인 진리인지 고민하지 않는 영성,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은둔이다! 그 참여의 영적 밑동’(영적 뿌리)은 한 발 물러나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안토니의 생애》는 다시 한 번 이 갑갑하고 떠나가고 싶은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가 105세의 삶을 살면서 타인의 삶에 참여했지만 뒤로 물러나 하나님을 만났기에 가능했던 은둔에 뿌리를 둔 참여의 영성이다 / 나무 잎사귀 이경희




성 안토니의 생애

저자
아타나시우스 지음
출판사
은성 | 2009-02-28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
가격비교



Athanasius : The Life of Antony and the Letter to Marcellinus

저자
Gregg, Robert C. 지음
출판사
Paulist | 2010-06-25 출간
카테고리
문학/만화
책소개
Athanasius (c. 295-373) Bishop of A...
가격비교


posted by 바람연필

"한 해를 시작하며" (성 아타나시우스)

한 줄 묵상 2013.01.02 22:21
  • 언제나 오늘을 사는 일은 영원히 사는 일과 연결되고,
    언제나 오늘을 사는 일은 마음을 순일하게 하고,
    나의 열망과 의도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치열함에서 시작된다...

    새결새김 2013.01.03 07:05 신고
  • 주님께 Available 한 존재가 되어가는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BlogIcon 작은소리찾기 2013.01.09 15:34 신고

그는 이미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언제나 새로운 시작점을 설정해 놓는 것처럼, 그는 마치 매일매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일에 준비하는 사람과 같이 자신을 드리는 일에 정진하였습니다. 


곧, 존재의 중심이 순수해 지는 것(pure of heart)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에 준비되어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ca. 296∼298  –  373),

《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ony》, 7.


2013년,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어떤 마음과 다짐을 가지고 새해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한 불교 선승의, 

"우리의 삶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곱씹어 볼 만하다. 


사막 교부들의 대부격인 안토니는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음을 본다. 


그의 일상의 삶을 바라보며

새해를, 아니 오늘을 이런 질문들과 더불어 시작해 보면 어떨까?


▶ 어떻게 하면 존재의 중심이 순수해 질까? 

▶ 그런데 중심이 순수해 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에 준비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 그런데 과연 나 자신은 진심으로 이런 것들을 원하고 있는걸까? 


365번의 "오늘"이 빛이 난다면, 

2013년이, 더 나아가 인생 전체가 보석처럼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사막에서 수덕생활에 정진했던 안토니는 

옷이라고는 양털 옷 한 벌과 양가죽 옷 한 벌이 전부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사랑과 기쁨의 빛이 해처럼 빛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오래된 오늘


Anthony the Great (ca. 251–356)


posted by 오래된 오늘

차라리…… (안토니의 생애)

한 줄 묵상 2012.11.15 17:12
  • "왜 갑작스럽게 '차라리......'이라고 말하는 것일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궁금해져서 영어본을 참조해 보니, 인용하신 기존 번역에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의 '갈망'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물질들'로 번역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차라리'라는 단어보다 '오히려'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는 비교대상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토니가 추구하고 가르친 것은 '이 땅의 물질을 소유하려는 잘못된 욕망을 바로잡는 것이지, 마음 안의 모든 열망(desire)을 제거하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안토니는 17장에서 집이나 재물과 같은 '물질'로 향하는 열망을 바로 잡아, 정의나 사랑과 같은 '덕(virtue)'을 열망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사막에서의 훈련은 우리 안의 열망을 뿌리 뽑는다기보다는 그 열망이 잘못된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바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것도 열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른 것을 열망하는 것이 훨씬 쉬울 듯 합니다.

    목사님 좋은 본문을 선택해서 소개해주시고, 좋은 질문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존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바로 잡는 것도 지금 영성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17 04:04 신고
  • 유익한 첨언 감사합니다. 하나 둘 수정해나가면서 바른 의미들이 잘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부사'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다른 의미를 낳는군요^^

    나무 잎사귀 2012.11.18 05:51 신고

우리는 왜 덕을 위해서 갈망들을 포기하지 못합니까? 천국을 물려받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소유하려는 갈망을 품지 맙시다. 우리가 가져가지 못하는 이런 것들을 소유할 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들, 이를 테면, 사려깊음, 정의, 절제, 용기, 이해, 사랑,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성내지 않음, 친절 등을 소유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성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ony), 

안미란 옮김 (서울: 은성출판사, 1993), 17장. 


'소유'와 '비워 냄'은 모든 구도자들의 오래된 숙제이다. 인간을 '불 덩어리'(히/에쉬)로 정의한 히브리 문학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의 '욕망'은 불 이상의 화력을 품어내며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토니(Antony)는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를 거부한다. 물질의 소유를 다 버린 그가 광야를 찾은 이유 역시 마음의 소유까지 다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곧 문장을 바꿔 '차라리' 소유하라 한다. 대신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라 한다.


물론 천국에까지 가져갈 '소유해서 유익한 마땅한 것들'도 안토니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겠지만, 필자는 갑자기 '무소유'에서 '소유'로 화두를 바꾼 안토니(Antony)의 의중이 궁금해진다. 왜 더 강하게 '소유하려는 갈망 자체를 품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갑작스럽게 '차라지 가져갈 것이면…….' 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마치 기다리다 지친 부모처럼, 마치 어루고 달래다 지친 선생님처럼 '차라리'라고 말하며며 '독자들'의 수준으로 말을 맺는 것인가? 왜?


어렵다. 자기비움. 어렵다. 자기부인, 그리고  자기포기.  마치 이천 년 전에 '안토니'가 내 마음을 뚫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차라리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나 주워 담아라' '차라리…….' / 나무잎사귀

 

posted by 비회원

<이젠하임 제단화>와 <성 안토니의 생애>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에는 4세기 이집트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우스 (St. Anthony 또는 Antonius of Egypt)가 등장한다. 이처럼 서양미술에서는 기독교 고전 작품 또는 성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활용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그림과 고전 작품에 대한 이해와 묵상을 돕기 위하여 제단화의 일부와 더글라스 버튼-크리스티 교수의 글을 일부 번역해서 싣는다. 






 "Isenheimer Altar" by Matthias Grünewald

These files are from the Wikimedia Common and http://www.aiwaz.net.





 

DOUGLAS BURTON-CHRISTIE 지음, 권혁일 옮김, "Athanasius(c.295-373): The Life of Anthony, " in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Arthur Holder 편집 (New York: Routledge, 2010), 13-14.



인물은 수척하며 죽은 듯하다. 그의 몸무게로 인해 못이 박힌 그의 손과 발이 찢어지고, 그의 육체는 꺾쇠로 보이는 것에 갈가리 찢어졌으며, 그의 머리는 마치 몸에 붙어 있지 않은 늘어져 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 15세기 작품 이젠하임의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서양 미술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그리스도의 이미지들 중의 하나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이미지이다. 이것은 제단화에서 중심이 되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옆판에 보이는 매우 흉측한 인물은 육체가 썩어 들어가는 염증으로 뒤덮였고, 복부는 팽창했으며, 사지는 몸에서 모두 함께 떨어져나갈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안토니의 이라고 알려진 무서우면서도 때론 치명적인 세균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병은 오백 동안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어왔다. 다른 인물은 이집트의 안토니St. Antony이다. 그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확실히 낫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던 성인이다. 그는 다수의 섬뜩하고도 악마적인 존재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할큄을 당하며, 찢겨지면서 자신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뤼네발트의 제단화에서 인물들, 그리스도, 안토니, 안토니의 의한 익명의 희생자의 융화는 너무나도 강력하게 인간의 고통을 형상화 해낸다. 인물들을 응시한다면, 어떤 이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실제로 가능할까라는 불확실성의 느낌을 피할 없을 것이다. 고통은 너무 극심하고,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무언가가 또는 누군가가 고통을 완전히 극복할 있었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제단화는 희망의 상징이다. 심지어 안토니의 희생자와 같이 바로 절망의 가장자리 위에서 사는 이들에게라 할지라도 구속과 치유는 가능하다는 신호이다. 제단화는 처음에 질병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치료를 받던 병원 시설의 일부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희생자들의 병원생활을 특징짓던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그리스도도 안토니도 초연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오히려 그들은 고통을 함께 하고 심지어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여질 필요가 있었다. 이제하임 제단화에서 다수의 섬뜩한 생물들에 의해 시달리고, 가리가리 찢기는 것으로 묘사된 안토니는 [공격에] 노출되고 취약하며 무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안토니의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의심과 극심한 고통의 끔찍한 장소를 깊숙이 여행한 것으로 보일 있었다. 안토니는 이와 같이 고통 가운데 있는 외로운 영혼들을 만날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그는 영혼들 또한 자신들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그들 속에 불붙일 있었다.

           안토니에 대한 중세 유럽의 다른 묘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젠하임 제단화에 묘사된 성인의 이미지는 4세기의 명작,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ony》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품이 처음 출현한 때부터, 이집트 사막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악마들과 싸우던 은둔 수사의 이야기는 기독교 상상력 속에 깊이 공명되었다. 이와 같은 공명은 작품이 출현한 이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무수한 적용과 해석을 통해서 시대는 이야기에 신선한 의미를 주려고 노력했다.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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