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영성과 영적 분별

영성학 논문 2017.08.23 23:44


사회적 영성과 영적 분별


2017년 3월 현재, 한국 사회는 촛불시위라는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시민혁명을 주도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해 내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이라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평화적 시위는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성숙한 시민주권시대를 열어가는 데에 또 하나의 역사적 모멘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 사회의 다수 여론의 견해와는 다른, 소수의 신앙심 깊다고 자부하는 기독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서 이른 바 '애국시위'에 참여하여 국가안보를 외치고, 탄핵된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충성을 다짐하는 장면도 교차하고 있다. '애국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들을 주고받으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바탕으로 왜곡된 뉴스들을 양산하는 사람들이 개신교의 대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에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넘어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과 결정이 결여된 듯한 행위가, 자칫 한국 교회 전체가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집단으로 비춰지게 만들까,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상존한다. 

     한편, 한국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인도 뉴델리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란 기사가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세계 최대의 석탄 화력발전소가 위치한 당진 주변에는 환경 단체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일선 개신교회에서는 공기 오염을 비롯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다루거나,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기독인의 역사 의식의 결여와 시대 정신에 대한 종합적 이해의 부족은 분별과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고려애야 할 점들이다. 오늘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상황은 한국 교회 구성원들에게 영성적 삶과 사회 문제 사이에 어떤 연관성 있는지, 있다면 신앙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독 공동체 안에서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주장하고, 그로 인해 갈등과 폭력이 발생하는 사례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공동체 내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차이점을 피력하는 것이 낯선 풍경이 아니라면, 하나의 신앙 고백 안에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축한 대상과는 어떤 방식으로 공존과 평화를 꾀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복잡한 사회 문제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이 사회 가운데 구현해 낼 수 있을까? 영성적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복잡한 사회 현상과 문제들에 대해 어떤 분별의 과정을 거쳐 영적 변화와 성장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 이 소고는 한국 사회에 거대담론을 던질 만한 배포와 포부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깨어있는 지성과 기독교적 양심을 겸비한 소수의 봉사자들과 섬김이들이 이 사회와 공동체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작은 소망에 기대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불편한 주제를 기독교 영적 분별이란 프레임 안에서 대화와 소통의 테이블에 올려 놓고자 한다.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분별은 매우 중요한 영적 수련의 주제이며, 열매이며, 목표로 인식되어져 왔다. 영 식별(discernment of spirits)의 은사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의 영성 분별(spiritual discernment)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기도와 영적 수련을 동반하는 과정이기에 영적이며 초월적인 은사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적 상황 속에서 신앙의 순수한 본질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적 환경과 세대적 언어 속에 복음을 새롭게 소개하려 노력하는 영적 구도자들과 젊은 기독인들에게 영적 분별은 필수적인 영적 은사로 간주되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현대 기독인들에게 여러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개념을 개인의 영역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영적 인식을 일깨워준다(Elizabeth Liebert, The Soul of Discernment: A Spiritual Practice for Communities and Institution, 2015). 그렇다면, 현대 기독인들이 직면한  사회 문제들과 산재한 갈등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신앙의 영역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정치, 사회 및 환경 이슈들을 영적 생활에서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통합과 전인적 성숙을 경험하는 영적 변화와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영적 분별은 가능할까? 사회적 존재요, 한국 사회 구성원이며 시민으로서 기독인의 영적 분별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영적 스승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영적 분별의 토대를 구축하는 대상을 탐구하면서, 영적 분별의 실천적 방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영성가들의 지혜

여러 사회문제들을 자신의 기도와 결부시켜 통합하고 승화하려 노력하던 기독교 영성가들의 발자취는 지금도 우리의 영적 구도의 길에 큰 발자취를 제공한다. 존 울만(John Woolman, 1720-1772)은 서양 기독교 근대사에서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기도와 영성수련의 대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근대의 영성가 중에 한 분이다. 미국의 독립운동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노예제도, 전쟁, 경제적 착취, 원주민을 향한 폭력 등)을 자신의 영적 삶 안에서 끌어 안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실행하기 위해 끊임없는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로 유명하다. 존 울만이 평생을 기록한 일기를 자세히 읽어보게 되면, 그가 자신에게 항상 되뇌이던 질문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의 믿음과 행위 속에서, 앎과 삶속에서, 감정과 반응 속에서 진정으로 일치와 통합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는가?“ 

     울만이 회사의 서기로 일했을 때의 일화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제공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회사 사장이 자신이 부리던 노예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으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울만은 마음과 양심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사장과 교회 공동체에게 이렇게 표현한다. “이 일을 행함에 있어 제 마음이 무척이나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노예제도를 지키는 것은 기독 신앙과 불일치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Douglas V. Steere, ed. Quaker Spirituality: Selected Writings, “John Woolman Diary, Chapter Ⅲ,” 175), 그 이후 그는 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기독인 지주들과 교제를 통해, 노예제도 유지와 기독교 진리는 서로 상응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평생을 걸쳐 투쟁한다. 그의 이런 영적 여정은 그가 작성한 문서 (“Some Considerations on the Keeping of Negroes, 1753; Some Considerations on Keeping Negroes, Part Second, 1762)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 문서는 미국 기독교 안에서 일어난 노예제 페지를 위한 사회적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역사적 소명과 사역 속에 담겨 있던 존 울만의 노예제도에 대한 영적 분별은 다음과 같은 영적인 과정과 신앙체계가 내재되어 있었다(Michael L. Birkel, Silence & Witness: The Quaker Tradition, 2004, 59-67). 첫째, 영혼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 둘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참여하면, 영혼과 교제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망을 만나고, 그 파장이 영혼 안에서도 울리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니 정의에 대한 심도 깊은 인식이 생겼으며, 노예제도에 대한 영적 고뇌로 이어졌다. 넷째, 사회 문제로 인한 불의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느껴지는 평안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일 가능성이 높다. 불의를 향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특별히 기존 제도와 체계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이끄신다. 다섯째, 영적 분별은 지속적인 신중함과 조심성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 여섯 번째, 개인의 영적 분별은 공동체 안에서 점검되며 공동체 분별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노예제도를 비롯한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해 대항했던 존 울만의 삶은 단지 일시적이며 감성적인 반응이 아니라, 영적 삶의 총체적인 경험과 전인적인 변화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근본적이며 필수적인 영적 열매였다. 

     사회적 영성과 영적 분별에 있어 현대 기독교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 중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 ~ 1968) 목사님을 빼놓을 수 없다. 비폭력저항운동을 통해 미국의 시민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흑인의 인권을 향상시키며, 인종차별 철폐를 제도적으로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지금까지도 추앙받는 인물이시다. 킹 목사가 젊은 시절 초창기부터 흑인 인권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장인어른이 섬기던 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지역 교회를 섬기던 전도유망한 젊은 목사였다. 그러한 그가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된 역사적 계기는 인종차별을 조장 하는 사회제도 아래에서 사회구조적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불의한 일들을 몸소 체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버스 좌석 및 화장실 등, 사회 공공시설에 인종차별적인 제도와 정책이 수행이 되면서 흑인들이 차별을 당하는 현실을 목도하였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변화에 기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사회 구조와 체계(인종차별적 정책)속에서 핍박과 억압을 당하는 사회 구성원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영적 분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비폭력적 저항 운동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종이란 사회적 체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분별의 핵심적 요소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준 사회적 영성의 유산은 억압구조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영적 여정에 동참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점, 사회 구조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에 기독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찾은 점, 영적 전쟁이 사탄적 구조와 방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 저항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실천한 점 등이 그의 영적 분별의 진정성과 영향력의 증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이슈들을 위한 영적 분별의 영적 토대들

영적 거인들의 발자취와 통찰을 통해 사회 이슈와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는 사역은 몇 가지 공고한 영적 토대들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만물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셔서 오늘도 창조적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며 신학적 이해이다 (골 1:16-18). 영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다. 영적 분별은, 삼위일체의 흘러넘치시는 사랑의 역동이 하나님의 현재적 창조사역으로 성육신되어 인간의 현실, 피조세계와 우리의 일상 가운데 구현된다는 믿음의 토대위에 세워진다.  

    둘째, 기독교 영성이 전인성과 통합성을 필수적으로 추구하듯, 영적 분별도 전인성과 통합성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만물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역과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전인적이며 통합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지 영적인 삶의 영역을 육체와 물질적 세계에 대척점에 두는 것이 아닌, 삶의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영역이 영성 안에서 구현되며 실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하기에 영적 분별은 삶의 총체적 참여를 요청한다. 영적인 삶이란 기도가 단지 교회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자리에 가서 그 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여되는데, 사회적 책임까지 포함된다는 고백이 영적 분별의 세 번째 토대이다. 성령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픔과 상처, 일그러진 형상을 회복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시는데, 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소명의식을 깨달은 영혼은,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이 필수적인 사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소명은 다름 아닌, 내가 왜 여기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의식이며, 영적 긍정과 받아들임이다. 이제 이 소명의식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소망의 사역자 (the agency of hope)가 된다. 

    영적 분별의 네 번째 토대는 사회구조와 체계속에 담겨 있는 영적 실체로서 권세(Power)에 대한 영적 이해와 청지기적 실천이다. 신약학자 발터 윙크(Walter Wink, The Power that be: Theology for a new Millennium)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회구조와 체계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현재적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신념이 기독교회의 소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교회를 넘어서, 가정, 학교, 직장, 병원, 구청, 시청, 정부, 공공기관 등,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조와 체계는, 그것이 인간에 의해 조직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사역을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고백에 뿌리를 두고 있다. Wink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와 체계도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에 부응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추구하거나 인간의 이기적이며 파괴적인 욕망이 투영되면 사회구조와 체계도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소명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Wink는 에베소서 3:10, 6:12과 골로새서 1:15-20을 근거로 사회구조와 체계를 이끄는 주체인 권세(Power)의 영적 영향력을 언급하며, 이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조력하며, 활용하고, 때론 타락하거나 억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현대 사회 기독인들의 사회적 책무와 소명이라 설득한다. 권력과 기득권이 사탄의 영향에 놓이게 되면, 사회구조와 체계는 사탄적 파괴와 폭력, 지배 및 업압구조를 강화하는데 이용당하게 된다. 사탄적인 탐욕과 폭력이 권력을 이용해 파괴적 행사를 행할 수 없도록, 권력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며 소명인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권력과 기득권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사역에 동참하도록 인도하고, 타락하여 죄짓는 권세와 기득권을 견제하고 감시하여 다시금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토대 위에 2017년을 살아가는 한국 기독인들은 어떤 영적 분별의 은사를 추구하며, 영적 체계로서 구축해 나갈 수 있을까? 이제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적 영성형성을 위한 영적 분별과 기도의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적 영성형성을 위한 영적 분별의 방법과 절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적 분별은 엄연히 기도이며 영적 수련의 중요한 과목이다. 그러하기에, 분별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성적 차원의 방법뿐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참여가 전제된 중보기도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영적 스승들의 통찰과 영적 분별의 토대로, 우리는 적어도 네 단계 (feel-see-judge-act)를 거쳐서 사회구조와 체계, 권세를 향한 영적 분별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 (Liebert, The Soul of discernment, 5-7)

     첫째, 직접적 경험을 통한 정서적 경험(feeling)으로부터 영적 분별은 출발한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발생한 문제,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과 갈등들은 구조적인 악을 생성해내기도 하지만, 개인의 영역에서는 상처와 아픔, 고통과 슬픔의 감정들을 생산한다. 영적분별을 통해 사회적 영성형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문제를 개인의 정서와 감성적 영역에서 접촉을 통해 내적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성령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 위한 기도이기도 하며, 사회구조적으로 생성된 아픔과 고통을 내재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례로, 세월호를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월호 사건으로 직접적인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경험한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돌보고 보살펴 주는 사역에 참여할 때, 영적 분별의 진정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기도의 대상으로서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seeing)을 통해 문제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사탄의 책략과 폭력적 탐욕이 사회구조적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면, 그 전략을 정확하게 탐구하고 기술하여,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Wink에 의하면, 사회 구조와 체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권세와 기득권이 선한 창조의 숭고한 가치를 어떻게 파괴하고 억압해왔는지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사회학, 심리학, 윤리학 등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도움 받아, 사회구조적 문제의 여러 지층들을 기술하고, 본질을 파악하는 노력이 영적 분별의 과정에 수반되어야 한다. 

     셋째는, 정서적 접촉과 철저한 분석을 통해 획득한 정보들을 이젠 성경과 신학적 관점에서 성찰하고 해석하는 과정(judging)을 필요로 한다. 사회구조적 문제와 권력이 탐욕과 이기심에 기반해 불의를 정당화하고 억압과 폭력구조를 고착시킨다면, 이에 대해 성경과 신학적 관점은 어떤 통찰과 가르침으로 인도하는지를 살펴본다.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신학적 견지와 교단적 배경속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주권, 구원과 해방의 신학적 성찰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지 살피며 기도하고 분별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지금까지 진행해온 과정을 기도로 삼아, 정의를 위한 목회적 반응을 구체적으로 실행한다. 정의실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불의의 피해자가 된 영혼을 회복시키고, 돌보는 사역이기도 하다. 사회적 영적 분별을 기도로 시작한 영혼은, 영혼을 돌보는 차원에서 목회적 자세를 견지하며 구체적인 행동을 실행할 것이다. 실행방법으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적 저항 운동을 근거해서, “상대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거절하는 것 뿐 아니라, 증오까지 거절할 수 있는” 생산적이며 합리적인 방식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용서, 화합, 평화와 번영을 전제로 한 대화와 소통 혹은 변화를 유도하는 방법이기에 기존의 소통체계와 사회적 구조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대응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존 울만이 문서를 작성하여 정부와 지역사회에 변화를 요구하였던 방식처럼, 기존 체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때, 영적 분별은 정의를 위한 목회적 반응으로 인정받으면 그 진정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영적 분별의 필수요소

영적 분별의 과정 전체를 통해 영혼이 고백되어야 할 영적 가치들이 있다. 이 고백들은 영적 분별이 총체적인 기도의 과정임을 인식하도록 인도하기에 분별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분별의 과정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다. 신비이신 하나님의 뜻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완벽하게 계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 사회를 향한 영적 분별은 이 시대와 사회의 아픔과 상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현하려는 거룩한 열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함으로 요약될 것이다. 대상이 때론 악의 근원이며 악마적 행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견지할 때, 우리의 영적 분별은 파괴적이지 않고,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셋째는,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며 그 안에서 영적 초연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영적 분별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다. 설령, 분명한 악이 분별된다 할지라도 궁극적 심판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뤄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적 분별의 주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는데 있어 중요한 고백다. 마지막으로, 이 고백위에 영적 분별의 궁극적 목표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문제 해결이나 악의 제거가 아니라, 우리 영혼과 이 공동체가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구름위 햇살 이주형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44-52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구름위 햇살

소명과 식별

영성학 논문 2017.07.31 12:29

소명과 식별



    필자가 영성지도를 하다가 만난 신학생 가운데에는, 목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학생은 소명이 없이 신학교를 다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또 어떤 신학생은 번듯한 직장 생활을 갑자기 그만 두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에 차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신학생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어 사역을 활발하게 잘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사회생활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소명은 개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기에, 소명을 잘 식별하는 일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식별을 잘 안내해주는 커리큘럼을 한국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든 실정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소명 식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1.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자 윌리엄 플래처(William C. Placher)에 따르면,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각주:1]은 성경과 교회사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각주:2] 먼저 성경은 소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부르심”(call) 또는 “소명”(vocation)이라는 낱말은 신앙으로의 부르심, 또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과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각주:3]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일깨우는 말씀이고, 더불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소명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에서 부르심(klesis)은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인임을 세상에서 드러내며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것 자체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교회사를 통틀어 소명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플래처는 교회사를 네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첫 번째 시기인 초기 교회는,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을 소명으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소수(minority)였다. 기독교인이 되면 수시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게 된다. 체포되어 고문당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시기인 중세 교회는,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을 위주로 소명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 전까지 기독교인을 위협했던 박해가 사라졌다. 누구나 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일상생활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사제나 수도자가 될 것인가가 소명을 식별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시기인 종교개혁 이후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사는 것만을 기독교인의 중요하고 특별한 소명으로 여기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직업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 부르심(klesis)을 직업(Beruf)으로 번역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루터에 따르면, 결혼과 자녀양육을 포함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현대다. 우리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직업과 삶의 모양이 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하기 힘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은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비기독교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초기 교회 시대에 기독교인이 했던 질문이 다시 현대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진행된 분업화로 인해 우리는 직업을 전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공장에서 부품을 만드는 일부 과정에만 참여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아울러, 직업만을 소명으로 생각하면, 실업자나 은퇴자는 소명 담론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성경과 교회사를 살펴볼 때, 현대 기독교인을 위해서, 소명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소명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둘째, 소명은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셋째, 소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또는 사역자가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명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소명들은 경우에 따라 한꺼번에 적용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셋째 소명과 넷째 소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2. 소명 식별 방법: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명을 식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은 대체로 기도, 말씀 묵상, 자신이 지닌 능력과 욕구를 성찰하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보기 등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기독교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고,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소명 식별 방법을 알고 적용하기 위한 첫걸음은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성고전에는 식별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소명을 식별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의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각주:4]이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개혁을 이끈 영성가 중 한 명이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자신의 영성훈련과 식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영성훈련 안내 책자 즉 매뉴얼이다. 이 책을 쓴 의도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소명을 잘 식별하여 선택(election)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냐시오는 당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영성훈련 방법을 통합하여 네 주에 걸친 영성훈련을 제시하였는데, 이 영성훈련은 말씀묵상과 양심성찰, 기도, 식별,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명 식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소명을 식별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묵상이다. 영신수련에서 영성훈련 참가자가 네 주에 걸쳐 참여하는 말씀 묵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 주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둘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난의 자리까지 따르며 함께 머무는 인내와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고,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투신할 결심과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성훈련 참가자는 먼저 죄가 정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맑은 마음과 질서 잡힌 마음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욕구 즉 영적 갈망이 생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또는 왕으로 여기며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므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가장 먼저 말씀 묵상을 깊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영적 갈망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자신의 내면의 경험을 살펴보고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부록에서 식별을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으면 소명을 식별하기 위한 영성훈련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구분할 때 도움이 된다. 이 규칙에서 이냐시오는 내면의 경험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 한다. 영적 위로(spiritual consolation)와 영적 실망(spiritual desolation). 영적 위로의 경험은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을 때 성령으로부터 오는 경험으로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영원한 것, 즉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는 경험이다. 영적 실망의 경험은 반대로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을 때 하는 경험으로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감소되는 경험이다. 영적 위로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며, 영적 실망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 위로의 경험과 영적 실망의 경험은 영성훈련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교대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식별하는 사람의 내면이 정화될수록 그리고 성령 충만할수록 영적 실망의 경험은 줄어들고 영적 위로의 경험이 늘어난다. 이것을 경험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소명을 식별할 때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해당할수록 영적 위로의 경험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식별 과정을 도와주는 영성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영성지도자가 피지도자(directee), 즉 영성훈련 참가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소명 식별을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성경과 교리에 맞게 객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를 신뢰하며 자신의 경험을 함께 식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이 소명 식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개입하기보다는 성령님만을 의지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성지도자가 수도원장이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영성훈련 참가자가 수도자가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또 영성지도자가 담임목사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청년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피지도자의 식별 과정에 영성지도자가 자신의 바람을 바탕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3.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 방법


     소명 식별을 주제로 하는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는 아마도 프레드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가 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곳은 당신의 깊은 즐거움과 세상의 깊은 굶주림이 만나는 곳이다.”[각주:5] 다시 말해서,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깊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가장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뷔크너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의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 또는 교집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182-1226)는 회심한 후에 가장 큰 기쁨을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사는 삶에서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이웃에 사는 한센병 환우들이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우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현대 개신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 가운데 하나가 지티유(Graduate Theological Union) 및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영성학자인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의 《영적 분별의 길》[각주:6]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트는 이 책에서 식별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될 영성훈련을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내릴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은 소명을 인식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리버트가 제시하는 영성훈련을 소명 식별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 절차는 다섯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 더 분명해진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선택하기가 더 쉬워진다. 


  2)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명료한 질문 형태로 만들어본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영성지도자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시는가? 또는 하나님은 나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부르시는가? 등이 있다. 


  3)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네 종류의 정보를 모아보도록 제안 한다. (1) 개인 내적(intra-personal) 정보, (2) 상호 관계(inter-personal) 정보, (3) 구조(structural) 정보, 그리고 (4)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al) 정보. 개인 내적 정보란 내가 지닌 지적, 정서적, 신체적, 영적 고유한 특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상호 관계 정보란 내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구조 정보란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과 권력과 관련된 경험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자연 환경 정보란 내가 자연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보들을 모은 후에, 나의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이 정보들에 대입해 보고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기도한다.  


  4) 다양한 영성훈련을 시행하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일곱 가지의 영성훈련을 제안 한다. (1) 떠오르는 기억 경험하기, (2) 상상력을 사용하기, (3) 직관을 사용하기, (4)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기, (5) 이성을 사용하기, (6) 감정을 식별하기, 그리고 (7) 자연 묵상에서 일어나는 경험 사용하기 등. 이 모든 영성훈련은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시작한다. 또 이 영성훈련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제로 실시한다. 영성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명 식별 주제에 대해 가부간의 임시 결정을 내린다. 


  5)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영성훈련의 결과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확증(confirmation)을 받는다. 확증을 위해 사용하는 식별 기준들을 리버트는 시금석이라 부른다. 식별 시금석들은 성령께서 일으키신 경험들의 예로서, 대체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의 경험들과 영성고전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경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앞에 언급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의 경험이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의 경험을 들 수 있다. 


     영성고전에서 제시된 시금석 경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냐시오의 식별 규칙에 나오는 영적 위로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18세기 미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각주:7]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정서의 신뢰할만한 열두 가지 표지들 역시 식별의 시금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열두 가지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원천에서 옴, (2)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들에 그 자체의 탁월성 때문에 이끌림, (3) 거룩한 일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험에서 옴, (4)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수반함, (5) 깊게 자리한 확신을 수반함, (6) 겸손을 수반함, (7) 본성의 참된 변화를 수반함, (8)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을 수반함, (9) 부드러운 마음과 영의 온유함을 수반함, (10) 균형과 조화를 수반함, (11)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짐, (12) 기독교적 실천들이 증가함. 


     필자는 이상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리고 소명을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소명을 식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자유롭게 와서 보고 선택하게 하신다. 소명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없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앞서거나 너무 뒤떨어지거나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 기독교인의 소명 식별을 도와줄 목회자와 영성지도자가 많이 준비되기를 기도한다. / 아우의 마음 이강학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36-43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1. 이 글에서 '소명'과 '부르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2. William C. Placher, ed.,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본문으로]
  3. 3. 한글 성경은 모두 '개역개정판'을 인용한다. [본문으로]
  4. 4. 이냐시오 로욜라, <영신수련>, 정제천 역 (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본문으로]
  5. 5. Frederick Buechner, Wishful Thinking: A Theological ABC (New York: Harper and Row, 1973), 95. [본문으로]
  6.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본문으로]
  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서울: 지평서원, 200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영적 분별이란 무엇인가 : 개념과 유형들

영성학 논문 2017.06.28 08:36

우리의 삶은 분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별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서 자신들의 잘못된 욕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수천 년 후 예수는 사탄의 유혹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했지만, 정확한 분별과 자기희생적 선택을 통해, 첫 남자와 여자의 실패로 죽음의 어둠 속에 빠진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그래서 분별과 선택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영적 분별 또는 식별(spiritual discernment)은 폭넓게 정의하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영적 경험이나 현상, 또는 내면의 생각과 정서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에 대한 실천과 가르침들을 하나의 정의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 매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분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실천되는 만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은 다양한 모습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영적 분별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과 실천들을 각각 짝을 이루는 몇 가지 유형들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각각의 대극들은 상반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곧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형태의 영적 분별들에는 각각의 특징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1. 분별의 대상에 따라 : 영들을 분별함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시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또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경험이나 현상에 초점을 두는 유형과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이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자가 후자를 위한 과정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첫 번째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의 어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분별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동사 ‘discern’은 ‘다른 것으로부터 어떤 하나를 구별하다, 가려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discernere’[디스케르네레]에서 왔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분별이란 섞여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섞여 있는 것들, 곧 분별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으로 영적 분별을 지칭하기 위해 ‘영분별’(discernment of spirits)[각주:1]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때의 분별의 대상은 영들(spirits)이다. 곧, 어떤 영적 경험, 현상, 생각 등을 일으키도록 영향을 주는 영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언적 전통이 발전하면서 어떤 특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진리의 영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거짓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으키실 선지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반드시 들어야 하지만,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가르친다(신 18:18-22). 이렇게 단순하게 말의 성취 여부로 그 메시지의 영적 출처를 분별하는 원칙은 신약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다 세밀하게 발전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면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원리를 분별 기준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열매”라는 결과를 보고, 그 열매를 맺은 이가 “좋은 나무”(참 선지자)인지 “못된 나무”(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한다는 원리는 모세가 제시한 원칙과 비슷하다. 그러나 열매의 유무가 아니라 질을 보고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분별한다는 점에서 분별의 기준이 보다 세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심화된 분별의 원리가 필요한 이유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설명한다(마 7:15-23).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탄의 일꾼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고 경고하는데 이 구절은 이후에 분별에 관한 문헌들에서 자주 인용된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요일 4:1-6). 그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이미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와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라”(δοκιμάζετε)[도키마제테]고 권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제시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의 여부라는 점이다. 곧,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와의 논쟁 속에 있던 요한 공동체를 위해, 진리로 간주되는 교리를 예언자의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분별의 기준이 공인된 텍스트(성경)와 교회의 가르침(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최소한 그것들에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전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영분별에 대한 논의들의 바탕에는 인간 외부의 영적 존재들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3세기 초의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c.184-c.254)는 『제일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에서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들) 또는 사탄(의 천사들)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게 하거나 유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 생각들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서 외부에서 주입되는 생각들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일 원리』, 3.2.4).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는 『담화집』(Conferences)에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그 기원과 원인과 저자를 추적함으로써” 현명하게 분별하고, 누가 그 생각을 제안했는지에 따라서 그 생각을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불로 정화된 것인지, 미신의 일부인지, 세속 철학의 교만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세히 조사하고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다(『담화집』, 1.20.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적 분별의 대상이 한 사람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실체들(선한 영 또는 악한 영)로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에 대해 체계적인 분별 원칙을 제공한 이는 16세기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다. 그는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말미에 두 가지 묶음의 식별 원칙들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첫 번째 묶음(313-327)은 수련의 첫째 주(단계)에 있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묶음(328-336)은 둘째 주(단계)에 있는 보다 진보한 수련자에게 적합한 규칙이다. 이냐시오는 내면의 움직임들을 크게 영적 위로(consolación)와 영적 실망(desolación)으로 분류하는데,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정서적 움직임을 말하고, 실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정서적 움직임 지칭한다. 그는 첫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에는 이미 내린 선택을 변경하지 말고, 인내 중에 위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반대로 영적 위로 중에 있을 때에는 교만하지 말고 실망이 올 때를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 위로 같으나 그 안에는 마귀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바탕은 물론 생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안내한다. 

     “참된 믿음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affection) 안에 있다.”고 믿은 개신교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또한 인간 내면의 정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을 경험한 그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각주:2] 그래서 그는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인간 내면의 정서들이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믿을 만한 표지(reliable signs) 열두 가지와 믿을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 철학자였던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들보다는 정서 자체에 초점을 두고 상당히 이성적인 분별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적 분별에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영적 분별의 두 번째 유형, 곧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확인하기 위해 양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시며,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하기 위해서 양털을 가지고 두 번이나 “시험”(האנ)[안세]했다(사 6:38). 이때 기드온이 사용한 히브리 단어 “נס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실 때(창 22:1), 그리고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할 때(왕상 10:1)와 같은 다양한 상황들에서 사용되는데,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드온의 이와 같은 실험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이나 움직임보다는 외적인 표징이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시도하는 사례의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하라.”(롬 12:2).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δοκιμάζω”[도키마조]도 히브리어 “נסה”와 기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데, 위에서 사도 요한이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분별의 대상은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당시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 세대”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몸, 곧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드릴 것이 요구되었다. 비슷하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를 기도한다(빌 1:10).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려는 바람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급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구체적인 길을 찾는 이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3세기 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c.1181-1226)가 회심 후 성 다미아노(San Damiano) 교회에서 드린 “십자가상 앞에서의 기도”(The Prayer before the Crucifix)는 그가 십자가 위의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 곧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분별력(discerning heart)을 구하는 청원이다. 

     앞서 언급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제시한 식별 규칙 또한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영신 수련』의 첫째 주를 시작하는 「원리와 기초」(23)에서 ‘질병과 건강’, ‘가난과 부’, ‘불명예와 명예’, ‘단명과 장수’ 중 어느 한 쪽을 더 원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indifference)을 가지는 것을 선택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셋째 주간의 말미에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169-188)를 구체적으로 제공하는데, 우리가 창조된 목적,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해야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 분별의 주체에 따라 :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

다음으로 영적 분별을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개인 분별은 말 그대로 한 개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영적인 경험이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특별히 4세기 이후 사막의 수도자들을 시작으로 흘러온 수도 전통은 개인적 차원의 분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교만이나 독선, 또는 뒤틀린 욕망이나 무지로 인해 분별에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담화집』, 2.5.1). 이런 점에서 영적 분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 아래에서 즉시 사라지는 것처럼, 악한 생각이 원로 앞에 드러나게 되면 그 즉시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자는 경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겸손히 고백하고 그의 조언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압바 모세(Moses)는 “참된 분별은 참된 겸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담화집』, 2.10.1). 분별의 전제로 겸손과 순종을 강조한 것은 7세기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c.579-649)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Ladders of Divine Ascent)에서 ‘겸손’에서 ‘분별’이 나오고, ‘분별’에서 ‘통찰’이 나오며, ‘통찰’에서 ‘예지’가 나오는데, “이렇게 자신 앞에 예비된 복들을 보고서도 이 온당한 순종의 길을 따르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느냐?”라고 묻는다(『사다리』, 4.105). 

     영적 분별이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영적 분별은 고립된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대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대다의 관계로 확장되면 개인적 분별이 확실히 공동체의 영역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친우회(Quakers) 전통의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가 그렇다. 이 위원회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 공동체 내의 신뢰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꾸려진다. (또는 피정 중에는 제3자에 의해서 모임이 꾸려지기도 한다.)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는 이는 초점 인물(focus person)이 되고 그를 돕는 이들은 위원들이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위원들은 초점 인물이 분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명료화위원회는 분별 과정에서 공동체가 관여하기는 하지만, 분별의 주체가 개인이며, 분별의 대상도 개인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 분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공동체 분별은 공동체가 공동의 사안을 놓고 함께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성서의 여러 사례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행해진 또는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로마의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할 때, 그는 확실히 공동체를 분별의 환경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쥬엣(Robert Jewett)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분별의 주체가 “너희”라는 복수인 점과, “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이라는 동사가 보통 공적 영역에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초점은 공동으로 결정 내리는 것에 놓여 있다고 주석한다. 그에 의하면, “로마서의 경우, 분별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천하기 원하시는 특정한 행동을 말한다.”[각주:3] 

     기독교 역사에서의 공동체 분별의 예를 들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와 여섯 명의 그의 동료들은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정말 하나의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낮에는 일상적인 사역을 행하고, 밤에는 모여 함께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은 공동체 분별의 좋은 모델을 제공해 준다. 더불어 친우회에서 공동체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월회(monthly meeting) 중에 대화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공동체 분별의 좋은 사례다. 이들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면 침묵 가운데 내면의 신성한 빛을 관조하고, 만장일치를 이룰 때까지 수년이 걸리더라도 결정을 보류한다.


3. 기타 :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그리고 오늘날의 경향

마이클 벅클리(Michael J. Buckley)는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 유형을 구별한다. (1) 성령에 의해 부여된 은사, (2)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감각, (3)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 (4) 이 세 가지의 혼합.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첫 번째 출처, 곧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현대로 올수록 세 번째 출처, 곧 학습과 훈련을 강조한다.[각주:4] 

     (1)과 (2)의 경우에는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들, 또는 분별 감각을 타고난 이들에게로 제한되지만, (3)에서는 예언자와 같은 신적 매개자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영적 지도자 또는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소명의 발견과 같은 인생의 굵직굵직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도록(갈 5:16-24) 장려한다. 『영적 분별의 길』(The Way of Discernment)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는 “분별은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 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정의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강조한다.[각주:5] 이 책에서 그녀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기억, 통찰, 몸, 상상력, 감성, 자연 등을 활용한 다양한 분별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오늘날 증대되는 사회적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시대적 차원에서 분별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이천여 년 전,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눅 12: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으로 다시 강조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사회적 차원의 분별(social discernment)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취해야할 행동과 실천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나 문화 속에 내재된 불의나 부정 등을 분별함으로써 변혁을 추구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에서의 다양한 영적 분별의 개념과 유형들의 윤곽을 개략적으로 그려보았다.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영적 훈련 또는 실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들, 곧 그들이 분별에서 실패하거나 성공한 이야기들과 값진 조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소중한 과정으로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뒤덮인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안내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우리가 그 온당한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바람연필 권혁일


참고문헌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2-185.

리버트, 엘리자베스.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26-35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 용어는 헬라어 ‘διακρίσεις πνευμάτων’[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라틴어 ‘discretio spirituum’[디스크레시오 스피리툼]을 번역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2.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3. [본문으로]
  3.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733-734. [본문으로]
  4.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본문으로]
  5.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서울: 좋은씨앗, 2011), 46.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9.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을 말하다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각주: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각주:2]과 15장 15절[각주:3]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각주:4] 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2. 명료화위원회[각주:5]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각주:6]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1.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2.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3.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4.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5.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6.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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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과 공동 분별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과 공동 분별 



1. 교회 공동체와 분별

    교회는 형제자매들의 신앙 공동체다. 그러나 분리된 개인으로 한 공간에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의 뒷모습을 마주하노라면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인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ohann Heinrich Arnold)는 《공동체 제자도》에서 개별화된 개인과 가족이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 이상, 존재를 비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참된 공동체는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신을 떼어놓는 모든 것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이뤄지며,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굴복하여 자만, 자기 연민, 자기 주장 그리고 거짓 경건에서 돌아설 때 경험될 수 있다.[각주:1]  

     하나님과 나,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나 사이를 떼어놓는 방해물들, 곧 배금주의, 외모지상주의, 과도한 경쟁, 잘못된 관행, 권위주의, 개인주의, 왜곡된 신앙관, 나태, 탐욕, 교만, 두려움 등은 이기적 자아의 모습이나 거짓 경건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속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가 《영적분별의 길》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가는’ 분별이 중요하다.[각주:2] 저자는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하나님의 부름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를 통해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 보겠다. 


 



2. 이냐시오 로욜라와 공동 분별

1) 분별의 영성가 이냐시오 로욜라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은 《영신수련》이라는 작은 책자에 집약되어 있다. 영신수련은 이론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를 묵상하며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교본이라 할 수 있다. 영신수련의 중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예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는 원리를 제공하는 ‘특별 묵상’과 ‘분별 규칙’이 첨가되어 있다. 분별규칙은 《영신수련》[313~336][각주:3]에 나타나는데, 성령의 내적인 움직임들을 다른 근원으로부터 오는 움직임들과 구분하는 방법과 항상 성령에 대하여 개방성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이냐시오는 분별 원리와 규칙을 집을 가지거나, 결혼을 하거나, 가족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적용하라고 가르칠 정도로(영신수련》[189]) 현실의 선택에 대해 씨름한 분별의 영성가였다.


2) 공동 분별의 배경

      《영신수련의 분별 원리와 규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분별을 돕는 데 쓰이지만 공동체적 배경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공동 분별의 예를 《첫 사부들의 식별》(Delibratio primorum Patrum)[각주:4]이라는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간략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만레사(Manresa)에서 여러 가지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을 맛본 후 자신의 경험과 신학의 지식 등을 영신수련》에 녹여 내고, 그것을 활용하여 많은 이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영적 생활을 도왔다. 그들 중 이냐시오를 포함한 몇 명이 청빈과 정결,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설교하는 일 등을 공동으로 체험하면서 깊은 형제애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동반자’로 스스로를 칭하면서 자신들이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할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토론과 분별을 통해 같은 생활양식으로 결속하기로 결정했으며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사부들[각주:5]의 식별》 은 그들이 영신수련의 정신에 기반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간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첫 사부들의 식별》에 나타난 공동 분별의 원리를 중심으로 영신수련에 배어있는 개인 분별의 원리들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분별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e First Vows at Montmartre, 1534년.


3. 공동 분별의 실제

1) 분별의 시작 : 올바른 목적과 정체성 공유

      《첫 사부들의 식별》[1][각주:6]은 공동 분별이 시작된 배경을 먼저 언급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동일한 소명을 공유했지만 다양한 배경과 문화로 인해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도 의사결정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통일된 질서가 없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모두가 나름의 방식대로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공동분별을 시작해야 할까?’ 

“우리가 서로 다른 판단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각주:7]께만 찬양, 존경과 영광을 드리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양으로 봉헌하기 위하여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고자 했다.” (《첫 사부들의 식별』》[1])

     공동 분별을 시작할 때 중요한 점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올바른 분별의 목적을 공유하지 못하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교세(성도수나 재정)확장’, ‘성도들의 편의 증진’, ‘특정인이나 그룹의 영향력 강화’ 등이 목적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면 공동 분별은 자기 욕망의 경연장이 되고 수단이 목적을 흔들고 이기적이고 세속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공동 분별에 참여하는 모두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분별에 참여하는 자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소명받은 자’라는 관점을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


2) 분별의 준비 : 불편심(영적 자유)

      목적과 정체성이 공유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분별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분별의 준비는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 즉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마18:3) 

 마침내 한 결정에 이르러 만장일치로 합의한 것은 우리가 여느 때보다 좀 더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고 좀 더 열심히 묵상하면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고 희망하며 우리의 모든 관심을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시고 관대하신 분이시기에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구하는 이에게 결코 당신의 선하신 성령을 거절하지 않으신다.”(《첫 사부들의 식별》 [1] )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이 영신수련》[23]에서 말하는 '초연'이다. 이 때 초연(Indifference)은 애착으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쳐짐이 없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불편심’(不偏心)의 상태이다. 이 때 내적자유를 누린다고 해서 ‘영적 자유’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불편심(영적 자유)은 영신수련을 관통하는 아주 본질적인 태도이다(영신수련》 [15, 179, 189]). 영신수련을 통해 수련자가 예수의 길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특별 묵상(영신수련 [23, 136~147, 149~155])과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영신수련 [169])에서도 불편심(영적자유)을 선택을 위한 준비 조건으로 분명하게 강조한다.  

      분별을 위한 두 번째 준비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첫 사부들은 일상적인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더 기도하고 더 묵상하는 최선을 드리려고 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역과 일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기도원이나 수도원과 같은 별도의 공간일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사역과 병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 분의 뜻을 구하려는 열정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분별은 맞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해가는 과정이다. 


3) 분별 방법 결정 : 이성적 분별

      준비를 갖춘 후 어떤 방법으로 분별했을까? 이냐시오와 그의 벗들이 사용한 실제적인 분별의 방법은 《첫 사부들의 식별》 [2]에 잘 나타난다. 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제들을 살피고, 일을 마친 밤시간에 함께 모여서 선택안을 시험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 수정해가면서 합일점에 도달해갔으며, 이런 과정을 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방식을 이성적 분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신수련』의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에 근거한다. 

제시된 직책이나 교회의 특전을 취함으로써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내 영혼을 구원하는 데 내게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될 것인지를 따지고 고찰한다.(영신수련》[181])

제시된 것에 대해 이처럼 다방면으로 따지며 궁리한 다음에는 이성이 어느 편으로 더 기우는지를 살핀다.(영신수련 [182])

    이냐시오의 분별 규칙은 기본적으로 위로와 실망이라는 내면의 감정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유혹이 있을 수 있기에 이성적 성찰로 보완도록 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공동체로 결속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섬기고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를 서로에게 설명함으로써 서로 시험하고, 더 나은 안을 찾고, 다수의 생각을 모아가는 이성적 분별을 사용한다. 


4) 선택안 구체화 : 질문하기

      분별의 방법을 정한 후에 질문을 제기한다. 첫 질문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내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가?였다. 이것은 근원을 흔드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삶을 나누며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우정, 이미 이루어오던 방식까지도 폐기할 수 있는 개방성이 담긴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한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셨고 일치시키셨으니 하나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 된다.”(《첫 사부들의 식별》[3])라고 마음을 모아간다. 그들에게 공통의 신앙 경험을 주시고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본질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에게 순명할 수 있는가?이었다(《첫 사부들의 식별》[4]). 만약 그들이 한 공동체로 연결되기 원한다면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순명의 삶을 살아야했다. 이것은 첫 질문을 구체화하는 실제적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의 질문하기를 통해 구체적인 선택안을 갖게 되었다.


5) 교착 해결하기 : 믿음을 통한 개인과 공동체의 양립

      그들이 영성수련을 함께 하고 공동 사역을 체험하고 결속되었다고 해서 공동 분별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날 기도하고 숙고했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첫 사부들의 식별》[5]). 이냐시오와 동반들은 이 때 더 나은 방법으로 ‘분별의 환경을 바꾸는 것’과 ‘누군가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을 고민한다(첫 사부들의 식별[5]). 그러나 세 가지 영적 준비를 제안함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더 많은 기도와 묵상 등의 최선을 다하는 노력’, ‘상대방의 생각을 염탐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말 것’, ‘제3자적 태도를 가질 것’(첫 사부들의 식별[6]).  교착상태에 빠지면, 소수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위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 때 영적 준비를 위한 해결책을 제안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집중적으로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 기도하면서 제3자적 관점, 즉 불편심(영적 자유)을 가지면서 자신이 경험한 움직임을 공동체와 나누었다. 개인에게 경험된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하여 각 개인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동일하고 때로는 상반되지만 전체적으로 온전히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고 있다. 믿음으로서 교착을 해결한다. 


6) 선택안 결정  : 선택안에 대한 불이익과 이익을 통한 마음의 기울기 측정

      교착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 준비를 마친 후, 다음 날 모여서 개별적으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얻게 된 순명에 대한 부정적 측면(불이익들)을 전체에게 돌아가면서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질문의 반대측면, 즉 순명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익들)에 대하여 기도 중에 성찰한 것을 다시 돌아가면서 나누었다. 이 때 전 날 나눈 것들 중 불가능하고 엉뚱한 것들은 감소시켜갔다(첫 사부들의 식별[7]). 이런 정보들을 다시 숙고해가면서 마음의 기울기를 측정해 나갔다(《영신수련》[182]). 공동체 전체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지를 살피면서 다수의 마음이 어디로 모아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수결이지만 아무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첫 사부들의 식별[8])


4. 제언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은 개인의 분별과 공동체의 분별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이 한마음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과정이다. 포스트 모던의 교회 현실에서 첫 사부들의 식별》의 식별에서 제공하는 모델을 통해 개별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공동 분별은 특히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공동 분별의 모든 과정이 《영신수련》이라는 지속적인 회심 체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선택하려는 《영신 수련》의 정신과 태도가 배어 있지 않은 채 방법만으로 올바른 공동 분별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훈련해 가면 이냐시오를 도우신 주님이 분명 우리도 도우실 것이다.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의 원리와 정신을 당회와 제직회 등의 의사결정에 적용해 감으로서 한국교회가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글쓴이 : 유재경.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Th.M(영성신학), 영락수련원(영락교회 영성센터)지도목사.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8월 호에 실린 여덟 번째 글입니다. 잡지에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요약본이 실렸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1. 1.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공동체 제자도》, 110~115쪽 요약. [본문으로]
  2. 2.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은사적 분별(고전 12:10)을 ‘분별’로,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믿는 자가 내면 안에 일어나는 영의 움직임을 구별하는 훈련적 분별(요일1:9, 4:1)은 ‘식별’로 용어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친숙한 ‘분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3. 3. Ignatius of Loyola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313~336번(쪽 번호 아닌 문단 번호이며 이후부터 《영신수련》 [313]으로 표기함) [본문으로]
  4. 4. 다양한 영어 번역본 중 Jules J. Toner, S.J. “The Deliberation that Started the Jesuits: A Commentario on the Deliberatio Primorum Patrum,” newly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introduction, Studies in the Spirituality of Jesuits Ⅵ no. 4 (June 1974)를 기반으로 쓴 심종혁, "사도적 공동체로서의 예수회의 기원", 종교신학연구 6 (서강대 신학연구소, 1993.12): 389-419쪽의 한글 번역문을 사용하였음. [본문으로]
  5.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의 창립에 참여한 설립 주역들 [본문으로]
  6. 5. 아투로 코디나(Arturo Codina)가 라틴어 원문을 아홉 개의 문단으로 분류한 표준 번호를 따름. [본문으로]
  7. 6. 번역본은 “하느님”이지만 이 글의 독자가 대부분 개신교 배경을 가진 점을 감안하여 앞으로 “하나님”으로 바꾸어 쓰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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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조를 통한 분별 (요한 카시아누스)

한 줄 묵상 2015.06.30 13:33

그때 모세가 말했다. "참 분별은 오직 겸손할 때 얻어진다. 겸손의 그 첫 번째 증거는, 되어진 모든 일들이나 생각들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의 조사에 맞춰질 때이다. …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 선조들의 모델에 의해서 사는 사람(수도자)은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360-435), John Cassian: Conferences(New York: Paulist Press, 1985), Conference 2 no.10, p.67.

매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따르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존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분별과, 영적 자유를 향한 여정의 순수성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믿음의 선조들이 걸어온 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숙연해지고, 영적 분별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내려놓게 된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나의 분별이 얼만큼 초라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실존의 한계에 묶여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들을 죽인 청년을 아들로 삼으면서까지 복음을 철저히 삶속에서 살아내고자 했던 그 실행만큼 확실하고 강력한 영적 분별의 열매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시금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구하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올 때, 참 분별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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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제와 분별(요한 카시아누스)

한 줄 묵상 2014.12.30 13:00

사탄적 환영에 빠져 영적 숭고함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그 노인을 기억하라. 그는 지난 50여년 동안 사막에 기거하면서, 그 절제와 혹독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독거의 삶이 주는 은밀함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 분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영적 동료들과 대화와 조언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영성 생활을) 인도하길 선호했기 때문이다.

- 요한 카시아누스 (Johannes Cassianus, 360-435)  《담화집》 Conferences II.5.


카시아누스는 동방 교회의 수도 영성을 서방 교회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훌륭한 영적 전통은 받아들이되, 한계와 약점은 보완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 건설적 비판의 중심엔 영적 공동체를 통한 영적 소통과 교제가 위치해 있다. 

50여년 동안 독거하며 절제의 수도 생활을 살았던 영적 거인이 한 순간에 사탄적 환영에 빠져 시험엔 든 이야기를 카시안은 그의 《담화집》에서 여러차례 거론한다. 그러면서 이 은둔과 극한 절제의 삶으로 생긴 폐단을 영적 독단과 교만으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영적 분별력'의 부재로 들었다. 은둔의 삶이 영성 생활에서 중요하지만, 극단적 은둔으로 인해 그 수도자의 영적 독단이 강화되어 그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카시아누스는 한탄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수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동체 내에서 영적인 교제와 소통을 통해 자신의 영적 경험을 돌아보고, 영적 지도자로부터 인도를 받아 건강하고 바른 영성 생활을 점검받는 것이야 말로, 영적 오류와 독단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방법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영성 생활에 있어서 수도 공동체의 필요성과 영적 분별력을 훈련하고 기르는 방법으로서 영적 소통과 영적 지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영적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비한 경험은 교회 공동체의 성경 해석과 신학적 고백 아래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한 개인의 영적 경험이 교우 사이에서 나누어질 때,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공동의 경험 또는 공동의 영적 자산이 된다.

하나님은 삼위 가운데 친밀한 교제와 소통을 통해 일체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우리의 영성 생활도 공동체 내의 영적인 교제와 친밀한 소통을 통해 영적 독단과 오류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고, 나아가 영적 분별력을 기를 수 있게 된다.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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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 리더의 분별과 실존의 갈등



     영화 <노아>가 상영되었을 당시 한국의 기독인들 사이에 대략 두 가지 반응이 공존하는 듯했다. 우선은 성경의 '노아 이야기'로부터 너무 멀리 온 듯한 낯설음으로 출발하여, 성경 이야기를 곡해 혹은 왜곡하고 있다는 불편함으로 표출된 반응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종교적 경직성 속에 갇혀 있던 노아 이야기를 상상력과 기술력을 통해 현대인들의 오늘의 이야기로 표현해 준 좋은 작품이라는 견해이다. 영화 <노아>를 성경의 '노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로서의 <노아>가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서, 그 자체로 본문이 될 수 있으며, 해석을 통해 대화와 소통의 도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기독인들이 영화 <노아>를 감상하고, 해석하는데 있어 염두에 둬야 할 사실은, 감독 Aronofsky가 유대인이며,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왔고, 영화화하려는 계획을 오래도록 세워왔다는 사실이다.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노아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는 감독의 접근 방식이 탈무드적 해석이라는 힌트를 얻게 된다. 유대인 회당이나 교회에서 랍비나 사제, 목회자를 통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노아 이야기가 재해석되듯이 감독 Aronofsky는 영화라는 예술 장치를 통해 현대인들의 시각과 언어 속에서 성경의 노아 이야기를 재해석(appropriation)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대하는 기독인들이 염두에 둘 만한 대목이다. 탈무드적 해석으로서의 영화 <노아>는 성경의 '노아'가 말하지 않고 있는 영역들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메꾸고 다듬어서, 그 자체가 본문으로 취급되길 지향한다. 영화 <노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재창조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한 리더의 영적 여정이야기라는 접근으로 감상하게 될 때,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프레임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영적 분별>

     영화는 노아의 관점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창조 계획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세 단계로 그리고 있다. 각 과정은 노아의 영적 분별의 세 단계이기도 하다. (1)외적 표식(external signs), (2)내적 표식(internal signs), (3)확인(confirmation). 첫째,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 외적 표식으로 드러난다. 가인의 후예로 묘사되는 도시 인간들의 육식에 대한 탐욕과 그를 위한 살육이 첫 번째이며, 두 번째 외적 표식은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식물이 되어 꽃을 피우는 사건이다. 이 두 외적 표식은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확인해주는 영적 분별의 근거가 된다. 외적 표식은 노아의 내적 영역에서 일관성 있게 확인되며, 노아의 내면과 영혼의 영적 분별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인도한다. 

     첫 번째 내적 표식은 그의 꿈을 통해 드러난다. 물 속에서 죽음의 고통 가운데 헤매는 피조물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영적 경험들이 얼만큼 타당한지에 대해 질문을 가지게 될 때,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를 찾아간다. 이 만남을 통해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확인되며, 노아에게 주어진 사명과 계획이 뚜렷해지는 환상과 함께 보다 더 선명해진다. 여기서 므두셀라는 노아의 영적지도자(spiritual directdor)의 역할을 맡으며, 두 가지 영적 분별의 지침들(guidelines)을 제시해준다. 첫째는, "네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믿어야 한다!" 둘째는, "기억해라, 하나님이 너, 노아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따라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영적 자산으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다른 이가 아닌, '노아'라는 특정인을 선택하신 이유를 분별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노아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노아 이야기는 므두셀라로부터 전해진 두 가지 분별의 지침들 사이의 긴장감과 갈등을 통해 드라마적 갈등 요소를 증대시킬 뿐 아니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실존으로부터의 도전>

     실존이란 한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는 현재적 위치이다. 영화, <노아>에서 노아가 지닌 실존적 특징은 무엇일까? 그의 인생은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형상을 선한 양심과 거룩한 삶을 바탕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로 뭉쳐져 있다. 그의 역사적 인식에서 인간은 악의 근원이며,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노아가 생각하는 새로운 에덴에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느다. 이런 인식적 극단성은 그의 무결하고 선한 영적인 삶속에서, 실존적 일관성을 보인다. 그러나 인류심판에 대한 노아의 확신 그의 가족들로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한다. 첫 번째 장애물은 외부가 아닌 노아 가족의 자녀세대에서 움트고 있었다. 셈의 아내인 일라의 걱정이 첫 번째요, 둘째 아들 함의 실존적 고민이 두 번째이다. 일라는 자신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자녀 생산을 통해 가족을 일구고자하는 셈의 본능을 채울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둘째 아들 함은 '여인과 하나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을 표출하며,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무모한 계획에 반발한다.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의 노아의 실존은 도전을 받으며, 고뇌와 내적 갈등속에서 노아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간다. 

     때가 이르러 일라는 쌍둥이 여자 아이들을 출산하였으나, 이는 곧 축복이 아닌 저주로 받아들여져 그녀는 절망감에 쌓이게 된다. 노아가, "여자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며 잔혹한 모습을 보일 때, 노아의 아내 나아메의 모성 본능은 그 가부장적 리더쉽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명장면이 연출되는데, 나아메는 노아의 말 중에, 부사 "just"를 반복적으로 되받아치며 맞서고, 절규와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어느새인가 명사 "just"로 전이시킨다. 노아가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진정 무엇인지를 따져묻는 나아메의 절규는 이 영화의 갈등과 긴장 구조를 극대화하는 명장면으로 탄생된다. 또한 자신에겐 여인과 가족을 허락하지 않은 아버지 노아를 이해하지 못한 함은 결국 인간의 세계로 뛰쳐나가 두발가인의 수하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두발가인이 방주에 승선하여 다친 몸을 치료할 때, 두발가인이 노아를 죽이려는 순간에 함은 노아의 대척점에 서서 아버지 혹은 리더의 부당함에 맞선다. 아버지를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한 함의 반인륜적 모습과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고자 했던 아들의 본능을 무시한 노아의 강박성이 극대화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영화 관객은 노아의 폭력성에 수긍하면서도 동시에 함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노아의 의지만큼이나 함의 본능은 실존적이고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소명을 이루려는 리더의 노력과 주어진 삶의 실존 사이의 간극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며 갈등을 증폭시킨다. 


<가족, 인류의 재탄생>

     노아의 하나님 뜻 분별과 인간적 실존 사이의 내적 갈등은 며느리인 일라가 쌍둥이 여자 아이를 출산하고, 함이 노아를 죽음의 자리로 초대하면서 고조된다. 일라는 태어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시아버지 노아를 기다린다. 노아는 자신의 사명과 현실 인식에 충실하고자 여자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쌍둥이 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로서의 일라의 모습을 보며 노아의 내적 갈등은 극에 달하지만, 창조주 계획의 신실한 실천자로서의 사명감과 아버지의 실존 사이의 갈등은 노아가 칼을 거두면서 수그러진다. 홍수가 멈추고 방주가 마른 땅에 안착하였을 때에도 노아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자책감 속에 피폐한 삶을 살아간다. 감독은 이 괴로움과 갈등의 외연적 사건을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 벗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둘째 아들 함은 노아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순간에 두발가인으로부터 아버지를 구해내고, 장자권으로 상징되는 뱀의 허물을 손에 쥔다. 하지만 뱀의 허물이 여인과 가족에 대한 자신의 원초적 본능과 소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아버지의 세계관으로 상징되는 노아의 가족을 떠남으로서 그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포스트 가인의 모습으로 두 번째 에덴에서 떠난다. 

     방황하던 노아가 일라를 만나 나누는 대화는 드라마적 갈등요소들이 어떻게 변증적으로 해소되며, 노아의 가족이 어떻게 인류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지를 묘사하는 결정적 장면이 된다. 일라는 노아의 내적 갈등이 쌍둥이 손녀들을 살려냄으로써 이미 해소되었음을 일깨워준다. "당신은 (아이들을 죽이지 않음으로) 자비를 선택했어요. 자신과 가족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줌으로써 아버지로서 이 가족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죠!” 노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서로 모순관계라고 여겨졌던 소명 완수와 아버지라는 실존은 사실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노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데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아의 사명 실패(인류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한)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를 노아의 가족과 자손 안에서 이미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금, 노아에게 므두셀라가 제시한 영적 지도의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창조주의 말씀을 믿어라!", "노아, 너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노아의 선한 양심, 아이들을 죽일 수 없는 선한 본성과 양심을 하나님이 사용하셨기에, (노아의 입장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노아 본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과 실존이 갈등과 대치의 대상이었지만, 하나님의 초월적 뜻 안에서는 인류의 재탄생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노아는 쌍둥이 여자아이들을 축복하고, 장자권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이어간다. 


<영화, 노아의 영적 통찰 >

     영화로서 <노아>를 그 이야기 안에서 충실하게 감상하고 해석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적인 삶에 풍성한 의미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을 분별하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소명 의식은 때에 따라 인간의 인식적, 경험적 한계 안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그 충돌과 갈등을 영적 리더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적 분별을 실천하는 리더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우리 인간에겐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도록 선택받은 리더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가장으로서의 실존 안에 자신도 인식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 한계 또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용되었다. 노아의 내면 안에서 갈등요소였던, 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적 한계와 아버지로서의 실존적 한계 모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뤄내셨다. 나아가 영화 <노아>는 갈등 해소의 열쇠를 '자비를 통한 용서와 화해'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가족'이라는 인류 공동체 안에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명과 사명을 이뤄내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리더의 영적 분별의 기준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라는 질문에 영화 <노아>는 넌지시 대답하는 듯 하다. "하나님의 영역,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영역을 인정할 때,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내 삶에 주어진 고유한 독특성을 발견해 갈 때, 사랑과 용서라는 영적 여정을 가족 안에서 세워갈 때,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사명은 이미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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