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식별

영성학 논문 2017.07.31 12:29

소명과 식별



    필자가 영성지도를 하다가 만난 신학생 가운데에는, 목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학생은 소명이 없이 신학교를 다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또 어떤 신학생은 번듯한 직장 생활을 갑자기 그만 두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에 차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신학생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어 사역을 활발하게 잘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사회생활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소명은 개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기에, 소명을 잘 식별하는 일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식별을 잘 안내해주는 커리큘럼을 한국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든 실정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소명 식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1.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자 윌리엄 플래처(William C. Placher)에 따르면,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각주:1]은 성경과 교회사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각주:2] 먼저 성경은 소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부르심”(call) 또는 “소명”(vocation)이라는 낱말은 신앙으로의 부르심, 또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과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각주:3]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일깨우는 말씀이고, 더불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소명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에서 부르심(klesis)은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인임을 세상에서 드러내며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것 자체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교회사를 통틀어 소명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플래처는 교회사를 네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첫 번째 시기인 초기 교회는,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을 소명으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소수(minority)였다. 기독교인이 되면 수시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게 된다. 체포되어 고문당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시기인 중세 교회는,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을 위주로 소명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 전까지 기독교인을 위협했던 박해가 사라졌다. 누구나 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일상생활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사제나 수도자가 될 것인가가 소명을 식별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시기인 종교개혁 이후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사는 것만을 기독교인의 중요하고 특별한 소명으로 여기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직업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 부르심(klesis)을 직업(Beruf)으로 번역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루터에 따르면, 결혼과 자녀양육을 포함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현대다. 우리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직업과 삶의 모양이 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하기 힘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은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비기독교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초기 교회 시대에 기독교인이 했던 질문이 다시 현대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진행된 분업화로 인해 우리는 직업을 전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공장에서 부품을 만드는 일부 과정에만 참여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아울러, 직업만을 소명으로 생각하면, 실업자나 은퇴자는 소명 담론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성경과 교회사를 살펴볼 때, 현대 기독교인을 위해서, 소명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소명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둘째, 소명은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셋째, 소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또는 사역자가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명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소명들은 경우에 따라 한꺼번에 적용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셋째 소명과 넷째 소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2. 소명 식별 방법: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명을 식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은 대체로 기도, 말씀 묵상, 자신이 지닌 능력과 욕구를 성찰하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보기 등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기독교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고,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소명 식별 방법을 알고 적용하기 위한 첫걸음은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성고전에는 식별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소명을 식별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의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각주:4]이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개혁을 이끈 영성가 중 한 명이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자신의 영성훈련과 식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영성훈련 안내 책자 즉 매뉴얼이다. 이 책을 쓴 의도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소명을 잘 식별하여 선택(election)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냐시오는 당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영성훈련 방법을 통합하여 네 주에 걸친 영성훈련을 제시하였는데, 이 영성훈련은 말씀묵상과 양심성찰, 기도, 식별,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명 식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소명을 식별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묵상이다. 영신수련에서 영성훈련 참가자가 네 주에 걸쳐 참여하는 말씀 묵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 주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둘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난의 자리까지 따르며 함께 머무는 인내와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고,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투신할 결심과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성훈련 참가자는 먼저 죄가 정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맑은 마음과 질서 잡힌 마음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욕구 즉 영적 갈망이 생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또는 왕으로 여기며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므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가장 먼저 말씀 묵상을 깊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영적 갈망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자신의 내면의 경험을 살펴보고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부록에서 식별을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으면 소명을 식별하기 위한 영성훈련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구분할 때 도움이 된다. 이 규칙에서 이냐시오는 내면의 경험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 한다. 영적 위로(spiritual consolation)와 영적 실망(spiritual desolation). 영적 위로의 경험은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을 때 성령으로부터 오는 경험으로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영원한 것, 즉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는 경험이다. 영적 실망의 경험은 반대로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을 때 하는 경험으로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감소되는 경험이다. 영적 위로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며, 영적 실망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 위로의 경험과 영적 실망의 경험은 영성훈련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교대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식별하는 사람의 내면이 정화될수록 그리고 성령 충만할수록 영적 실망의 경험은 줄어들고 영적 위로의 경험이 늘어난다. 이것을 경험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소명을 식별할 때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해당할수록 영적 위로의 경험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식별 과정을 도와주는 영성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영성지도자가 피지도자(directee), 즉 영성훈련 참가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소명 식별을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성경과 교리에 맞게 객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를 신뢰하며 자신의 경험을 함께 식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이 소명 식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개입하기보다는 성령님만을 의지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성지도자가 수도원장이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영성훈련 참가자가 수도자가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또 영성지도자가 담임목사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청년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피지도자의 식별 과정에 영성지도자가 자신의 바람을 바탕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3.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 방법


     소명 식별을 주제로 하는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는 아마도 프레드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가 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곳은 당신의 깊은 즐거움과 세상의 깊은 굶주림이 만나는 곳이다.”[각주:5] 다시 말해서,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깊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가장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뷔크너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의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 또는 교집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182-1226)는 회심한 후에 가장 큰 기쁨을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사는 삶에서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이웃에 사는 한센병 환우들이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우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현대 개신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 가운데 하나가 지티유(Graduate Theological Union) 및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영성학자인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의 《영적 분별의 길》[각주:6]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트는 이 책에서 식별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될 영성훈련을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내릴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은 소명을 인식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리버트가 제시하는 영성훈련을 소명 식별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 절차는 다섯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 더 분명해진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선택하기가 더 쉬워진다. 


  2)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명료한 질문 형태로 만들어본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영성지도자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시는가? 또는 하나님은 나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부르시는가? 등이 있다. 


  3)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네 종류의 정보를 모아보도록 제안 한다. (1) 개인 내적(intra-personal) 정보, (2) 상호 관계(inter-personal) 정보, (3) 구조(structural) 정보, 그리고 (4)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al) 정보. 개인 내적 정보란 내가 지닌 지적, 정서적, 신체적, 영적 고유한 특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상호 관계 정보란 내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구조 정보란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과 권력과 관련된 경험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자연 환경 정보란 내가 자연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보들을 모은 후에, 나의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이 정보들에 대입해 보고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기도한다.  


  4) 다양한 영성훈련을 시행하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일곱 가지의 영성훈련을 제안 한다. (1) 떠오르는 기억 경험하기, (2) 상상력을 사용하기, (3) 직관을 사용하기, (4)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기, (5) 이성을 사용하기, (6) 감정을 식별하기, 그리고 (7) 자연 묵상에서 일어나는 경험 사용하기 등. 이 모든 영성훈련은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시작한다. 또 이 영성훈련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제로 실시한다. 영성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명 식별 주제에 대해 가부간의 임시 결정을 내린다. 


  5)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영성훈련의 결과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확증(confirmation)을 받는다. 확증을 위해 사용하는 식별 기준들을 리버트는 시금석이라 부른다. 식별 시금석들은 성령께서 일으키신 경험들의 예로서, 대체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의 경험들과 영성고전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경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앞에 언급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의 경험이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의 경험을 들 수 있다. 


     영성고전에서 제시된 시금석 경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냐시오의 식별 규칙에 나오는 영적 위로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18세기 미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각주:7]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정서의 신뢰할만한 열두 가지 표지들 역시 식별의 시금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열두 가지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원천에서 옴, (2)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들에 그 자체의 탁월성 때문에 이끌림, (3) 거룩한 일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험에서 옴, (4)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수반함, (5) 깊게 자리한 확신을 수반함, (6) 겸손을 수반함, (7) 본성의 참된 변화를 수반함, (8)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을 수반함, (9) 부드러운 마음과 영의 온유함을 수반함, (10) 균형과 조화를 수반함, (11)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짐, (12) 기독교적 실천들이 증가함. 


     필자는 이상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리고 소명을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소명을 식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자유롭게 와서 보고 선택하게 하신다. 소명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없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앞서거나 너무 뒤떨어지거나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 기독교인의 소명 식별을 도와줄 목회자와 영성지도자가 많이 준비되기를 기도한다. / 아우의 마음 이강학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36-43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1. 이 글에서 '소명'과 '부르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2. William C. Placher, ed.,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본문으로]
  3. 3. 한글 성경은 모두 '개역개정판'을 인용한다. [본문으로]
  4. 4. 이냐시오 로욜라, <영신수련>, 정제천 역 (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본문으로]
  5. 5. Frederick Buechner, Wishful Thinking: A Theological ABC (New York: Harper and Row, 1973), 95. [본문으로]
  6.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본문으로]
  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서울: 지평서원, 200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당신이 원하시니 (하나님 임재 연습)

한 줄 묵상 2013.09.28 15:37

오직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를 연습하고 경험하는 이들만 이 교제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기쁨을 얻기 위해 하나님 임재를 연습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연습을 통해 자기 위안을 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이 끊임없는 대화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원해야 할 것입니다.

- 로렌스 형제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 1614-1691), 《하나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Second Letter)



기도의 맛과 경험은 소중하다. 많은 이들에겐 '그때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시점과 경험이 있다.
 과거의 그 경험은 때론 영적 열망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때론 현재의 영적 나태를 발견하게 만드는 하나의 기준적 경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그 '경험'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자체에 매여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만나게 된다. 


로렌스 형제는 그 맛을 위해 기도하지는 말라고 권면한다. 기도 안에서 초점은 대화의 자리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기도 행위를 '대화'가 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행위 안에 하나님을 분명 모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대화를 그리고 그 모든 '나머지'를 인도하실 것이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사막의 열매 2 : 맑은 눈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20 10:28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생명까지 위협 받는 불모의 땅 사막, 이곳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 맺히는 두 번째 열매는 '맑은 눈'이다. 사막에 들어 오기 전, 안목의 정욕(요한일서2:16)을 따라 살던 이들도, 또는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을 좇다가 시력을 잃어 버린 이들도, 그리교 교만, 의심, 미움, 세상 염려로 눈이 흐려진 이들도 사막에서는 금욕과 훈련을 통해 맑은 눈을 얻게 된다. 마치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수도자의 눈을 가리는 것들이 벗겨지고, 씻겨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황폐한 땅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이 간절히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 그가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컬른의 브루노는 여기에서 분명히 아가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아가서는 '신랑'으로 상징되는 주님과  '술람미 여인'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로 해석되어 왔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아가서1:15, 4:9 새번역)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남자이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여인 전체를 상징한다. 일종의 제유법이다. 여인이 이 아름다운 눈동자로 임을 바라보자, 남자는 그 눈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브루노는 이와같은 아가서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영혼이 그 눈으로 신랑이신 주님을 명료하게 바라볼 때에 신랑은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의 상처는 '실연의 아픔'과 같이 상대방의 배반이나 폭력에 의해 받게 되는 상처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의 사랑이 매우 깊어서 얻게 되는 역설적인 상처이다. 아가서에서 신랑과 여인은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브루노는 신랑이 이러한 '상처'를 입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주님을 향한 영혼의 바라봄은 매우 명료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도자가 이러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만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사람이 영성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맑고 아름다워지면, 주님이 그제서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눈이 맑아지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로 인해 사랑의 상처를 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열매 1 : 자신과의 만남 (컬른의 브루노)

한 줄 묵상 2013.06.12 18:00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카르투시오회(Ordo Cartusiensis)를 창설한 컬른(또는 쾰른)의 브루노는 사막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과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막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고독한 장소이다. 그곳은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entertainment)이 미치지 않는 메마른 땅이다. 그래서 사막을 탈출하지 않고 그곳에서 버티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외부의 즐거움(안목의 정욕)을 쫓던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다. 자신의 외적 자아(가면)가 벗겨지고, 대신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는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친다(고린도전서 3:16). 그래서 자신의 내적 자아와의 만남은 곧 그 내적 자아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는 삶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 곧 관상 생활(contemplative life)이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거창하거나, 복잡하거나, 일반 사람들이 엄두내기 힘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매우 단순한 삶이다. 또한 이것은 내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선한 씨앗들이 자라서 외적으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삶이다. 


브루노는 이러한 풍성한 삶이 황량한 사막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오늘날 사막은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막의 고독은 오늘날 분주한 도시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도 가능하다. 문제는 내 안에 이러한 메마른 고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고자 하는 갈망과 강한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주님을 알게하소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3.02.15 13:05

언제나 한결같으신 주님, 제가 저 자신을 알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각주: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of Hippo: 354-430, Soliloquia. II.I.I)


초대 교부/영성가들은 물질세계에 대한 지식(scientia)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sapientia, wisdom)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변화하고 쇠락하는 물질계에서는 하나님, 곧 언제나 변함 없으신 그분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길은 인간 자아(the self)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the image of God)을 향하는 내면적 여정(via interior)이어야 한다.

 

나를 깊이 아는 길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그런데 나는 늘 바깥세상에 정신을 팔고 있다. 화려하지만 사라지는 것들, 변화하고 퇴색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따라 나의 생각도 감정도 변한다. 때로는 하나님조차 그런 것들 속에서 찾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 이번 사순절기 동안만이라도 언제나 한결같으신 당신 곁에 제 마음이 잠잠히 머무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를 더 깊이 알고 당신을 더 가까이 알게 하소서.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의 내면을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 어두움과 편견, 상한 감정들, 끝없는 욕망, 과도한 열망, 허망한 정열……. 이런 것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님 이미지를 변형시키고 있다! 실로 다양하게. 나의 과도한 열정에 하나님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무지와 편견은 하나님의 본 모습을 가린다. 격한 집착은 환영(幻影)을 만들기도 하고, 허망한 열심은 하나님 아는 것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한다. 하나님은 늘 한결같으신 분이신데도, 내게 그분은 때를 따라 다른 분으로 보이고, 내가 아는 하나님은 다른 이들의 하나님과 다를 때도 있다.

 

상한 심령을 제물로 받으시는 주님, 이 사순절기 동안 제 감정과 마음과 생각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려 합니다. 정하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당신이 부어주시는 당신의 형상만이 내 속에 가득하게 하소서.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새결새김



구글+ '산책길'

Via the Living Books




  1. (English) God, You that are always the same, here I am, I would like to know myself and, alike, to know Thee. This is my prayer. (Latin) Deus semper idem, noverim me, noverim te. Oratum est. [본문으로]
posted by 새결새김

그리스도인의 품격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2.21 04:58
  •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가슴 아파하고 있는데, 오히려 저의 불완전함을 직면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그리고 웨슬리가 말한 '마음의 순결'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전 삶을 걸고 추구한 '마음의 순수함(purity of heart)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8).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볼 것이니!

    BlogIcon 바람연필 2012.12.20 15:08 신고

[감리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한다. 그는 자기 원수들, 참으로 하나님의 원수들까지 사랑한다.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힘 밖에 있을지라도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쉬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그의 사랑을 멸시하고 오히려 그를 모욕하고 핍박할지라도말이다.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6.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한 발현이라고 웨슬리가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의 완전이 신자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 웨슬리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의 마음이 순결하게 될 때 이러한 완전에 이를 수 있다. 즉, 신자의 감정과 의지(욕망)가 자기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신자의 삶 속에서 구현된다


이런 마음의 순결을 위해서 신자는 그의 모든 소원이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만을 기억하도록 늘 힘써야 한다. 그러면 그의 영혼의 눈이 순일(純一)해진다. 그리고 그의 눈이 성하므로 온 몸은 빛으로 충만해진다이 때 그에게 떠오르는 생각마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한다. 또한 그의 사랑이 질투와 악의와 분노와 모든 불친절한 기질로부터 그의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 (위의 책 17쪽).


이런 사랑의 완전을 내 살아 생전에 이룰 수 있을까? 웨슬리는 그의 동생 촬스 웨슬리의 찬양시를 인용하여 그렇다, 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을 갈망하라고 말한다.


         거짓말 못하시는 당신이 당신의 법을 내가 지켜 행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이까

           주여, 사람들이 부인해도 나는 믿나이다 …… 당신은 참되심을.


 (촬스 웨슬리, 성화의 약속, p.141)



이런 완전을 바라는 것이 감리교인의 품격이라고 말한다. 이런 성품이 나에게서 나타나기를……. 그리스도님, 성령님 저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인의 완전

저자
존 웨슬리 지음
출판사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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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결새김

세 가지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2.12.01 13:55
  • 요즘 세상에서는 '트라우마'라는 말이 유행이지요. 상처는 트라우마를 주어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는....
    신앙 안에서는 상처가 곧 우리를 낫게하는 치유라는 것.
    신앙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 것 같아 기쁨니다. 나도 상처를 약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12.02 06:37 신고

나는 사는 동안 세 가지 상처를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참된 통회라는 상처, 깊은 동정이라는 상처, 그리고 하나님 향한 갈망이라는 상처.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가지 계시'를 체험하고서 평생을 잉글랜드 노리치의 한 교회 부속건물에서 은수자(anchoress)로 살았던 여인 줄리안. 그녀가 1373년 '계시'(showings)를 보기 전에 늘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세 가지 상처"를 지니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통회'(contrition)라는 상처, '동정'(compassion)이라는 상처, (하나님을 향한) '갈망'(yearning)이라는 상처. 


왜 통회와 동정과 갈망이 '상처'일까? 

아마 그것들은 모두 '아픈'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마음 아픔'과 관계된 것들이다. '통회'란 자기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동정'(com-passion)이란 다른 이의 고통(passion)에 대해 같이(com)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영적) '갈망'이란 하나님을 마음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것이다. 


후에 줄리안은 그 세 가지―통회, 동정, 갈망―를 "약"이라고 부른다. "통회는 우리를 정결한(clean) 사람으로, 동정은 우리를 준비된(ready) 사람으로, 갈망은 우리를 존귀한(worthy)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 세 가지는 죄인인 우리를 치료해주는 약들이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 '상처'들이 바로 '약'이다. 

통회하며, 동정하며, 갈망하며 우리 마음이 아파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는다. 내 죄 때문에, 타인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우리 마음이 아플 때, 우리 마음이 찢어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낫기 시작한다. 병들었던 우리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아픈가? 

하나님이 주시는 아픔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아픔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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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갈망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2.11.08 07:00
  • 하나님 체험을 위한 수단(사람, 방법)의 무용성이 아니라 수단을 목적으로 삼거나 의존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글로 읽습니다. 이전에 게시된 조지 폭스에 관한 글들을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덧붙이면, 조지 폭스의 경우는 수단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었지요. 또한 아무리 좋은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이 아닌 그 수단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좇는다'면 하나님으로 가까이 갈 수 없는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공부를 통해서 '제 안에서 공부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답니다. 아마 목사님이 말씀하신 '삶'에 좁은 의미에서의 지식의 습득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공부(공부하는 삶)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09 10:05 신고

나는 내게 두 가지 갈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도움과 힘을 얻기 위해 피조물을 좇는 것이며, 또 하나는 창조주이신 주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내가 왕의 음식을 먹고 궁정에서 신하들을 거느린다 하더라도 모두가 소용없다는 사실을 았게 되었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The Journal, 1648년의 글 


그리스도인으로서 피조물의 것을 쫓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쫓기 위해 피조물을 쫓는 모든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피조물을 쫓기 위해 그리스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진 않는 것일까? 신앙 생활에 있어서, 특히 한국교회의 현실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위해 피조물에 대한, 물질에 대한 갈망, 그리고 세상의 지식, 힘, 능력에 대한 갈망의 허무함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힘든 현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통과하고 넘어서야 할 문이다.


조지 폭스에게 있어서 피조물을 쫓는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가 쫓은 피조물은 세상의 명예, 권력, 물질적 풍부함이 아니였다. 그가 추구하였던 피조물들은 그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쫓았던 수많은 성직자들, 예배들, 구도자들이었다! 그는 '예수를 알기 위해'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쫓았다. 첫째는 학문이었고, 그 다음이 성직자였으며, 또한 체험자와 예배들이었다. 그렇지만 예수에 대해 알고 있고 나누고 있는 모든 수단들은 그에게 더 큰 실망과 절망만을 남겨 주었다.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을 여시어 그 분 자신과 교제하게 하신 후 그는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답이 없음을 발견하다.


난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그 분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공부한다. 공부란 것은, 공부의 대상은 항상 그것에 '대해서' 밖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 자체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교제하는 길은 공부가 아닌 삶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오직 그 분만이 줄 수 있는 은혜이다. /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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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4 : 열정을 구하라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1.03 03:18

"넷째로, 그대가 읽은 것에 상응하는 감흥을 일깨우도록 하십시오. 그저 지식만 더할 뿐 감동도 열정도 없는 독서는 무익합니다. 읽으면서 행간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더하십시오. 그분의 빛 뿐아니라 그분의 열정을 구하십시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Part of the “Preface” to his Abridgment of Thomas à Kempis’ Treatise of The Imitation of Christ (1735)




우리의 읽기가 지식만을 얻기 위한 독서(reading for information)에 머물지 않고, 이를 넘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독서(reading for transformation)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영적 독서의 핵심이다. 이러한 변혁을 위한 독서를 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이성뿐 아니라 감성과 의지까지 함께 모아 읽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은 이성, 감성(열정), 욕망(의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과 열정과 의지을 참여시켜, 온 마음으로 하는 영적 독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1],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행동을 가져온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감정과 욕망과 생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의 변화가 지속되면 새로운 습관(habit)이 된다. 그리고 습관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변혁적 책읽기는 거룩한 말씀이 우리의 몸을 입는 일이다[2]./ 새결새김



[1] 마음의 변화가 성서적 의미의 회개, 메타노이아’이.

[2] 영어에서 habit습관을 의미하기도 하고, 우리가 입는 을 의미하기도 한다


posted by 바람연필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2 : 순수한 의도로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0.13 05:08
  • 영적독서야말로 "준비가 반"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 봅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0.14 02:38 신고

둘째, 순수한 의도로, 그대의 영혼의 양식을 얻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독서에 임하겠다는 다짐으로 이 독서를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읽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대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분의 소원을 알아 보고, 그것의 실행을 결단하고, 나아가 그것을 이루기까지 그대를 이끌어 주시기를 비는 간절한 기도로 이 독서를 준비하십시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Part of the “Preface” to his Abridgment of Thomas à Kempis’ Treatise of The Imitation of Christ (1735)



 

 순수한 의도는 문자적으로는 의도의 순수성(The purity of intention)”이라고 옮길 수 있.  이말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할 때그 의도와 열망이 언제나 하나님만을 향한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웨슬리 영성에서 의도의 순수성은 한 신자의 영적 수행이 완전 성화를 향하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판별 기준이다웨슬리는 우리의 노력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바쳐지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된다면, 이는 결국 사실상 사탄을 위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영적 독서 뿐 아니라 모든 영적 실천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나의 일부만이 아니라 나의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수행하려는 열망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고그것을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소원을 이루겠다는 의도에서만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수행은 아무 유익이 없는 일이되고 말 것이다. / 새결새김

posted by 새결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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