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분별을 위한 규칙 1: 쾌락은 위안인가 유혹인가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04 14:00

규칙 1: 대죄(mortal sin)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서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 더욱 키워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 방법을 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 수련》, no. 314.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수많은 영적 경험들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우리 영성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분별(discernment of spirits)의 원칙을 정립했다. 영적 분별이란 우리의 “심정의 여러 변화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느끼고 알아차려서 선한 것들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들을 배척하는” 일을 말한다.(《영신수련》, no. 313). 

먼저 이 첫 번째 규칙은 신앙 생활의 많은 국면에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규칙은 우리 삶에서 쾌락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은 분명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큰 영적 어두움과 위험으로 빠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규칙은 이런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 신앙 생활에서도 —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으로서 쾌락을 추구하는 일은 그 즐거움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삶의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향성 여부에 따라 쾌락은 우리의 삶에서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참으로 복된 길을 가고 있는 중에 그 길을 더 열심히 가게하려고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위안(treat)일 수 있다. 하지만 혹여 내가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쾌락은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미혹(迷惑, illusion)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이 현재의 나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점검하게 하고, 내 삶의 방향성이 그분께 점점 더 가까워 지는 쪽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점검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필자는 요한 복음서의 첫 장,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첫 만남에 관한 보도를 떠올리게 된다. 거기서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묻는다. ”주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1:38). 이 질문은 영적인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 사람으로서 궁극적이고 올바른 길을 가려는 이들이 던지게 되는 첫 질문일 것이다./ 새결새김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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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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