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사랑처럼 : 대림절 그리고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대림절(Advent). 기다림의 계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기다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전화나 편지를 기다리고, 용돈날이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교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그 외에 모든 이들은 어떤 좋은 소식을, 또는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특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탄절이 있다.


저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성탄절을 과거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로 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늘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탄 절기 속에 새겨진 기억과 기다림은 마치 급행열차 같아서 ‘과거’에서 출발해서 ‘미래’를 향해 달릴 뿐, ‘현재’라는 역은 요란한 소리와 먼지만 남긴 채 무정차로 통과해 버리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과거에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미래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 사이에서 매년 반복되는 대림절과 성탄절은 올해도 바쁜 연말의 일상 속에서 연말 풍경의 하나로만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교회와 백화점에는 성탄 장식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데, 대강절은 별다른 감동 없이 내 삶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Photo by Gustavo Ampelio di Borgogna



기차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작품 중에 〈사랑스런 추억〉이라는 시가 있는데, 1연이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1연의 시간적 배경은 초봄이고,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다. 이 부분만 보면 시인이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아니다. 5연에 이르면 시인은 동경에 있고, 계절 또한 봄이 끝나는 때임이 나타난다.


봄은 다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동경의 릿쿄(입교)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이 시 〈사랑스런 추억〉을 썼고, 시의 제일 마지막 줄에 “5월 13일”이라고 시를 쓴 날을 분명히 적어 두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현재 일본 동경의 조그만 하숙방에 있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이른 봄 아침에 서울의 한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자신을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낯선 남의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시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이 배어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의 추억 속에 “옛 거리에 남은 나”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6, 7, 8연은 아래와 같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시인의 몸은 이미 서울을 떠나 동경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옛 거리에 남은 나”가 있어, 그가 오늘도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비논리적인 진술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시인이 지금 과거의 나를 추억하고 있고, 과거의 기다림이 오늘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연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리던 ‘초봄의 나’를 5연에서 ‘늦봄의 나’가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곧, “희망과 사랑”이 ‘과거의 나의 기다림’과 ‘현재의 나의 그리움’을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기다림은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리움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기억과 기다림은 현재를 무정차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현재라는 역에 분명히 정차하고 있다. 그래서 “옛 거리에 남은 나”는 빛바랜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추억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 청년 윤동주가 기다리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기차를 기다렸지만, 기차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올 “누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가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는 그 “누구를”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다. 그 희망과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시인은 자신을 희망과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에는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바란다. 그리고 사랑이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던 “누구”는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누구”는 어떤 특정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재 함께 있지 않은 가족과 친구도 될 수 있고, 암울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근원적인 그리움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난다고 해서 완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고백록》의 첫 부분에 쓴 것처럼, 우리의 모든 그리움의 종착역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각주:1]





벌써 대림절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 천여 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천사는 들의 목자들에게 오늘 구세주께서 너희에게 탄생하셨다[각주:2].”(눅 2:11)라고 전했다. 물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시고 육체적으로는 이 땅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마치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를 쓸 때, 일본에서 공부하던 윤동주의 몸이 서울이나 북간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번 성탄절에도 우리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실 수가 있지 않을까? 오신 주님, 그리고 오실 주님을 향한 깊은 그리움 속에서 마굿간과 같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 아기 예수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의 아기 예수, 미래의 재림주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태어나시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그리스도를 출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모습 속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과 사랑처럼” 그분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고백록》, Book I, i (1). [본문으로]
  2. born to you / ἐτέχθη ὑμῖ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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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



숲, 힐링, 그리고 생명

    몇 해 전부터 한국 사회는 웰빙(well being)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힐링’(heal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책, 먹거리, 여행, 방송 프로그램 등 ‘힐링’ 아닌 것들이 없을 정도다. 웰빙 시대가 유기농 식품이나 슬로프드(Slow food) 등 먹거리가 이끈 시대라면, 힐링 시대는 숲이 이끄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이름도 몰랐을 동네 뒷산에 올레길, 둘레길, 비렁길 등의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숲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7월22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는 숲 속을 걷는 것이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도시생활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그레고리 브랫맨(Gregory Bratman)은 서른여덟 명을 대상으로 사람이 걷는 환경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90분 동안, 한 그룹은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를 걷게 했고, 다른 한 그룹은 복잡한 팔로알토 시내를 걷게 했다. ‘걷기’가 끝난 직후에 정신 건강 설문지와 뇌 정밀검사를 해보니 한적한 숲길을 걸었던 그룹에서만 모든 검사에서 걷기 전보다 향상된 결과를 보여주었고, 혈압도 더 안정되었다. 숲과 힐링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하나의 예인데, 숲의 치유능력은 숲이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초에 교회의 청장년 그룹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킹스 캐니언 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을 다녀왔다. 겨우 삼 일이지만 ‘휴대폰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숲의 멋에 흠뻑 빠져갔다. 숲은 생명 아닌 것들로 상처 받은 우리의 눈과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숲에는 생명 아닌 풍경도, 생명 아닌 소리도 없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잠들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알람을 대신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옅은 구름들과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은 침침해진 눈을 씻어주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며 시원한 물소리는 막힌 귀를 뚫어준다. 숲의 멋은 곧 ‘생명의 멋’이다. 그래서 숲에서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수다와 끊임없는 질문들도 온통 생명에 대한 것뿐이다. 그 멋을 즐기며 인간은 한 생명으로서의 신비롭고 멋진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숲은 창조주를 닮은 생명의 멋으로 충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이후로 사람들은 피조 세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간은 오랫동안 여타의 피조 생명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창2:7). 여기서 생령(개역개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 네페쉬 하야’는 인간 외에 ‘생물’로 번역된 다른 동물계를 가리킬 때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창1:20, 21, 24, 2:7, 19).[각주:1] 사람이나 생물이나 모두 똑같은 네페쉬 하야(생명)다. 또한 인간의 창조 과정이 좀 더 하나님과 친밀했다고는 하나, 재료는 사람이나 생물이나 같다. 사람이 흙에서 왔듯이, 하나님은 땅에게 온갖 종류의 생물과 짐승들을 내어라고 명령하셨다(창1:24-25). 

    창조 신앙은 자연숭배라는 이교 사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얻어낸 신학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덴은 하나님-인간-자연이 화목한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곳이었고, 종국에 주님이 통치하실 나라는 인간과 자연이 숭배, 정복, 혹은 갑을의 관계를 이루는 곳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사11:6-8) 온 생명이 더불어 형제자매가 되는 가정 공동체이다.  


형제 해와 자매 달의 찬양

"Francis and the Wolf" by John August Swanson. Image from www.johnaugustswanson.com

     낮의 해와 밤의 달을 숭배 혹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와 자매로 칭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했던 분이 있었다. 가난의 성자로 많이 알려진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다. 그의 저작은 주로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수도회를 위한 짧은 교훈들로서 남겨진 글이 많지는 않다. 그 중에서 그의 문학적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다. 태양의 노래〉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지면상 주제와 관련된 첫째 부분만을 소개한다.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여

  찬양과 영광과 존경과 모든 은총이 당신의 것입니다.

2. 지존이시여,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께 속한 것이오니

   사람은 누구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친애하는 형제 해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는 낮이며, 그를 통해 당신은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4. 그는 아름다우며, 위대한 광채로 빛을 내며

   지극히 높으신 당신을 닮았습니다. 

5. 내 주여, 자매 달과 별들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저들을 맑고 귀하고 아름답게 하늘에 조성하셨나이다. 

6. 내 주여, 형제 바람의 찬양을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화창한 날씨, 그리고 모든 날씨의 찬양을 받으소서

   저들을 통하여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기르시나이다.

7. 내 주여, 자매 물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면서도 고상합니다.

8. 내 주여, 형제 불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로 인해 당신이 밤을 밝혀 주십니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며, 굳세고 강합니다. 

9. 내 주여, 우리의 자매이자 어머니인 땅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우리를 기르고, 다스리며

   알록달록한 꽃과 식물들, 그리고 온갖 과일을 내어줍니다.[각주: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각적 경험에 의지해 자연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한다. 반면에 이 노래는 프란체스코가 죽기 1년 전, 병약하고 거의 장님이 된 상태에서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던 때에 작성됐다. 즉, 그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젖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싹튼 그의 형제사랑이 다른 피조세계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찬가’로 오해할 수 없는 것은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기준이 이 작품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문의 1-2절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님만이 찬양의 대상이며,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는 주님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됨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어지는 3-9절의 노래는 모든 피조세계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 절대적 종속의 표현으로 드리는 찬양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프란체스코의 자연관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그는 고난당하시는 예수(Crucified Christ)를 온 삶을 다해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주께서 그의 양 손에 예수님의 못 자국(聖痕, stigmata)을 주실 정도였다고 후대 사람들은 전한다. 프란체스코가 그토록 십자가의 예수를 사랑했던 것은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된 피조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친히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셨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주는 맏형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따라서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자연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 관계라고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토록 강조했던 형제 사랑, 특히 가난한 형제들의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가난한 형제’의 범주를 자연세계까지 확장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했던 프란체스코에게는 숲을 거닐며 만나는 모든 생명들도 사랑하고 친교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통해 그는 모든 생명을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기존의 세계관을 탈피할 수 있었다. 


숲과 목회

    지난 6월 18일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체스코 교종이 역대 교종으로는 처음으로 생태 문제를 다룬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회칙의 제목이 태양의 노래〉의 반복하는 구절 찬미(양)를 받으소서(Praised be You)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자연관과 영성은 전체 가톨릭교회 사역의 지침이 될 것이고, 작은 지역 교구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어떤가? 매 년 급격한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가 늘어나면서 이미 ‘자연과 환경’은 신학의 주된 토론 주제가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회사역의 끄트머리에도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는 우리에게 꽤 친숙한 작품이고, 심지어 자주 즐겨 부르기까지 한다. 어쩌면 가톨릭 신자들 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노래일지 모른다. 새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찬송은 야외예배의 애창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송을 프란체스코의 것으로 쉽게 연결 짓지 못하는 이유는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제목부터 가사까지 원작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새 찬송가에 실린 이 곡은 1927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출판한 《장로교 찬송가》(The Church Hymnary)에서 번역된 것으로, 윌리엄 드레퍼(William Draper)가 어린이 성령강림절 찬송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이 아쉬운 것은 자연에 대한 프란체스코의 태도와 관점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해서인데, 그는 형제(Brother)자매(Sister)를 모두 그대(Thou)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존중할 생명들이나,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그의 자연관이 번역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한국 교회는 100년 가까이 〈태양의 노래〉를 불러왔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자연관은 한 세기 전과 비교하여 그리 진일보(進一步)하지 못했다. 물론 교회들도 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회중이 많이 모이는 집회형 기도원보다 조용한 숲 속의 영성센터를 선호하는 이들이 꽤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로는 교회가 숲(자연과 환경)을 목회와 연결시켰다고 말 할 수 없다.  

    앞으로 자연을 통한 영성 훈련과 생태 문제에 참여하는 목회사역들이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숲에 대한 ‘목회 감각’을 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목회자의 자연관은 설교와 사역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 영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목회 감각’은 숲을 이루는 온 생명을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숲에 관심을 갖고 좋아한다는 것과, 그것을 같은 생명의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얼마든지 숲의 생명들을 쉼, 치유, 혹은 묵상의 도구로서 좋아할 수 있다. 혹은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내려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숲의 충만한 생명력을 지나치게 우러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숲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숲 속에서 온전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고, 숲의 생명들도 인간 형제의 따사로운 손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태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의지하는 모든 생명들이 한 교회의 성도가 되어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갖출 때 숲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최고의 영성 훈련 장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하고 치유하고 선교해야 하는 목회지로 서서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 김종수,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담임목사, D.Min Candidate(Pacific School of Religion, 기독교 영성)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0월 호에 실린 열 번째 글입니다.


  1. 1.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예수의 환경 친화적 가르침” 소기천(대한기독교서회, 2002) p.129. [본문으로]
  2. 2. Regis J. Armstrong and Ignatius C. Brady 가 공동 영역한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Paulist Press, 1982)에서 필자가 번역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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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긍휼을 품은 사람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5.04.15 16:06

하지만 형제애에서 우러나는 긍휼을 품은 이는 그 슬픔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고백록》, Book III, ii (3)


카르타고(Carthage)에서 유학하던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극장에서 비극을 즐겨 보았다. 그것은 그가 비극 관람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catharsis)' 그 자체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들이 자신은 슬픈 일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불행을 보는 것을 즐기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좋아하는 것은 참된 긍휼(misericordia)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참된 긍휼은 불쌍한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슬픔의 원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슬퍼하는 이들의 진정한 형제와 자매는 그 슬픔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이 제거되도록 행동하는 이들이다. 세월호 희생 1주기를 맞아 그저 슬퍼하고 눈시울을 적시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참된 긍휼도 연민도 자비도 아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이 돌아오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규명되어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찾아 실천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참된 긍휼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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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깊어진다 (히포의 어거스틴)

한 줄 묵상 2014.12.06 07:19

(하나님을) 그리워하면 마음이 깊어진다 (Longing makes the heart deep).


Augustine, Tract. in Joh. 40, 10. 

quoted in Peter Brown, Augustine of Hippo: A Biograph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150. 



마음이 깊지 못하다. 


그래서 

깊은 슬픔을 모르고

깊은 위로를 모른다. 


인생이란 깊은 슬픔이 아니고 무엇일까.

믿음이란 깊은 위로가 아니고 무엇일까. 


하느님을 그리워하면 마음이 깊어진다. ("desiderium sinus cordis")


하느님은 마음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디 '마음 둘 곳'이기 때문이다. 


본향을 떠나왔다.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래서 그린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움.

때문이다. 


하.느.님.

때문이다. 


하늘의 님

내 님

내 마음의 임자 때문이다. 


그가 날 찾으시기 때문이다.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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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 기도와 항해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0 07:19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기도와 항해


, 항해

    우리 삶은 한 척의 배가 이쪽 항구에서 떠나 저쪽 항구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배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도착해서 닻을 내려야할 항구가 있고, 그 항구를 향해 방향을 조정하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니다. 우리 인생, 삶이라는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목적지,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장 1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배가 도착해야 할 궁극적 항구는 하나님그분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이 배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있습니다. ,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 가지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기도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일치는 내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 하고 싶은 것이 같아졌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 안에 불타오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상,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 체계, 사고-생각 체계, 감각 체계, 삶의 방식과 하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마음에 담으면서,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 어떤 것이 마음에 담기는 지요?


항해의 분위기

    그러면 이 배의 이름과 그 규모는 어떠할까요? 이것은 이 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세례 체험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자기-정체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항구히 흔들림 없이 완전히 고착되어 있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한 기쁨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지입니다.

    비록 이 배가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흔들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흔들어 대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니까요.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부분입니다. 항해의 더 큰 국면은 이 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항로를 따라 의연하게 운항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배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따라서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 이 배의 궁극적 정체성을 거듭하여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 청하면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이 바로 하늘이고, 그 하늘사이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소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각성시킵니다.


항해, 선택인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쪽 항구에서 닻이 올라간 것 자체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알건 모르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의 배는 이미 이쪽 항구를 떠나 저쪽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항로에 자연스럽게 몸을, 마음을,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을 자발적으로 걷어 올려 운항준비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면서, 본인의 갈망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단순한 기도로 하나님께 간절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합니다. 5분, 10분 정도, 그렇게 조용히 마음의 방향을 잡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원한다.”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 다음 번에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posted by 해'맑은우리

달콤한 기도 (어거스틴)

한 줄 묵상 2014.08.12 20:49

내 영혼이

주님의 징계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기에 피곤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나를 그릇된 길에서 구해주셨으니

주님께서 내가 이때까지 따르던 모든 달콤한 유혹보다

더 달콤한 나의 기쁨이 되어주소서

-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기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60.

 

가을학기에 <기도의 역사>라는 수업을 계획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부터 시작해서 영성사에서 중요한 기도문과 기도 방법들을 학생들과 함께 훑어볼 계획이다. 자료를 찾던 중 선한용 교수님이 엮어서 번역한 《성 어거스틴의 기도》를 읽게 되었다. 신대원 시절에 선한용 교수님의 강의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들으며 감동 받은 기억이 났다. 선 교수님은 평생 어거스틴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애쓰셨다고 들었다. 수업 시간마다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하나씩 읽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기도문들 가운데 위에 인용한 부분이 유난히 마음에 다가온다. 주님께서 내가 이때까지 따르던 모든 달콤한 유혹보다 더 달콤한 나의 기쁨이 되어주소서!” 주님이 달콤하게 유혹해주지 않으시면 우리 마음은 세상의 달콤함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달콤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던가? 주님, 그것보다 더 달콤한 기쁨을 저에게 주소서! / 이강학





posted by 아우의 마음

끊임없이 즐겁게 질문하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4.07.20 14:23

누가 이것을 이해 못한다고 해도 내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도 그로 하여금 즐거이'이것이 무엇이냐?'고 계속 묻게 하소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할지라도 즐거움으로 당신을 찾아 만나게 하여주소서. 행여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어놓고 당신을 찾지않을까 두렵습니다. 

-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고백록》, Book I, vi (10)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입니다. 모든 일과 사건과 피조물속에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과 틀 안에서 왜곡되어 이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됩니다. 세월호 사고도 이스라엘의 가자공습에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쉽게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질문들이 계속되면 우리는 지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알면 '질문과 대답'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질문은 사실 내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을 뛰어넘으려는 갈망이고 나의 이해를 넘어 존재하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추구입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은 대답으로 만족될 수 없고 하나님 그 분의 현존으로만 만족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되 즐겁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즐거이 질문하는 자가 되기를 구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서 하나님을 찾기를 멈추지 않고 이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 유재



posted by 진정한 열망

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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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지금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4.02.24 17:48
제 가족들은 [정욕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던 저를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구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제가 최대한 효과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서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고백록》, Book II, ii (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 보면, 마치 현대의 이야기로 여겨질 정도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있다.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라는 중소 도시에 살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부모들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교육열이 '뜨거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큰 도시 카르타고(Carthage)에 보내어 공부시키기 위해 일찍부터 저축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수사학을 배워 '성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은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공명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사실 청소년기 자신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교육과 저축이 아니라, 영혼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청소년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적 정욕에 빠져 지냈고, 사랑에 빠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였다.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잘못된 일들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자신의 부모들이 자신을 최소한 결혼이라도 시켜서 육체적 정욕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했어야 했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노력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자신들의 즐거움과 유익도 과감히 희생하기도 한다. 특히 진로 결정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기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은 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과 물질을 쏟는다. 그런데 정작 자녀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자녀들의 내면의 상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하는 것일까? 3월이 되면 한국의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년이 시작된다. 진급하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님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새로운 학용품, 학원, 옷, 선물 등, 지금 부모로서 내가 준비하는 것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 그들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자. 그것은 나의 욕망의 색안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순전한 '맨눈'으로 자녀들을 바라 볼 때 알게 되지 않을까?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아우구스티누스)

한 줄 묵상 2013.10.19 11:10

그래서 저의 영혼은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은 궤양을 앓고 있으면서도 밖을 향해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비참하게도 감각적인 것들과 접촉해서 제 몸을 긁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사랑받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고백록, Book III, i (1).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당시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내면의 양식"이신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외적인 것들로 자신의 내면의 허기를 채우려고 했다. 그는 영혼이 궤양으로 뒤덮였는데, 감각적인 것들에다가 자신의 몸을 긁음으로써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그는 열일곱 살 때에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추구했지만, 결국 쾌락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는 참 비참하고 가련한 신세였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그는 깨달았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즐거움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내면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양식은, 그의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없애줄 수 있는 의사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재미있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이나 영화가 끝나면, 여러 사람과 함께 즐겁게 있다가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바쁜 일들로 정신 없이 보내다가 여유가 생기면, 열심히 준비했던 공연이나 어떤 행사가 끝나면, 또는 힘써 달려 갔던 어떤 목표를 이루면, 사람들은 종종 내면의 허기와 갈증을 느낀다. 위궤양처럼 속을 쿡쿡 찌르는 영혼의 아픔을 느낀다. 당신은 그 허기와 아픔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가까이에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거나 TV를 켜는가? 아니면 그 허기와 고통을 잊기 위해서 운동이나 어떤 다른 일에 자신을 밀어 넣는가?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가?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헛되게 몸을 긁고 있지는 않는가?


기억하자. 감각적인 즐거움으로는 결코 내면의 허기와 영혼의 아픔을 해결할 수 없다.

질문하자. 나는 진정 사랑해야 할 대상과 열애에 빠져 있는가?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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