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도 넘어졌습니다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4.04.26 07:56

아담이 넘어졌을 때, 하나님의 아들도 넘어졌습니다.

'When Adam fell, God's Son fell'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1.

 

줄리안이 그토록 어려워 하던 계시였던 '주인과 종에 관한 비유'의 한 구절이다. 줄리안은 자그만치 20여년을 자기 눈에 보여진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당시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100년 전쟁, 농민 혁명, 아비뇽의 유수 등으로 극심한 혼란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하며 절망했다. 

 

우리는 무엇인가 비극적인 일이 우리 가운데 생길 때에 누군가의 죄, 혹은 우리 자신의 죄를 보며 절망한다.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몰고 온 선장과 선원들의 몰염치와 국가 기관이 무기력함,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며 절규하는 부모들의 모습과 수많은 장비들을 손에 든 채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절망하고 한탄하며, 그리고 운다. 


그런데 주님은 결코 절망하지 않으신다. 아담이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주님은 더 깊은 인간의 자궁 속으로 떨어져 사람이 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 가운데 거하신다. 절망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어두운 절망 속으로 들어와 희망의 불을 밝히신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는 것이 침몰하는 우리 나라와 혹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양 너무 힘들기만 하다. 이 수렁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엔 현실의 모습은 깜깜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린 우리의 절망 속으로 넘어지신 그분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바라보시며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 할 때가 많다.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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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7.15 11:45

그리고 나서 나는 (마음의 눈으로) 한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비전에서 나는 그분께서 만물 안에 계신 것을 보았다......만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죄는 없다......(따라서) 죄란 그저 없는 일이다(sin is no deed).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11.


'계시' 중에 줄리안은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I saw God in a point"). 

줄리안이 보니, 모든 것에 하나님이 계셨고("He is in all things"),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there is no doer but He"). 


'궁극적 실재'를 일견하게 된 줄리안은, 그 순간,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마디 한다: "죄/악은 없다." Sin is no deed. 


말이 되는가?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이 죄와 악이건만. 

말(logic)이 되지 않는 말이다. 

'말씀'을 만나 놀라 자빠진 말(theo-logic)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신비를 만난 영성가들의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꼬리를 잡는 식으로는 캐치할 수 없다. 

죄/악은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 것(no-thing)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every-thing)은 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악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고 말했던 어거스틴처럼, 줄리안도, 죄라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헛' 일(no deed)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는 '일'이 못된다. 죄는 '짓'일 뿐이다. 헛짓. 


죄악 천지인 세상을 살았으면서, 죄와 악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던 그들 영성가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세상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다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으며, 믿음이란 바로 그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보는 눈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에게도 그 눈이 있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이 죄악 세상에 찌든 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벌써부터 그 안에 들어가 뛰노는 어린아이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짓들!--에 기가 죽고 의가 꺾이고 풀이 죽기 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살리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하고 계신 일--"새창조"의 일!--을 찬양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영광과 기쁨에, 세상 사람들 눈에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그 눈이 있는가? 그 믿음이 있는가?  /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posted by 산처럼

영혼의 일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6.06 08:41
  • 우리 삶에서 '무엇을 찾았는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찾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찾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사는 것'인 것 같다.

    BlogIcon 바람연필 2013.06.06 10:52 신고

하나님께서는 쉼없이 당신을 찾는 영혼을 기뻐하신다. 

우리 영혼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저 찾고(seek) 아파하고(suffer), 신뢰(trust)하는 그 일 뿐. 

이는 우리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러다 특별한 은총을 받는 영혼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그러다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는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산고를 허락하고 계시는 이 때, 

그분을 찾는 일은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는 일 못지 않게 좋은 일이다.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분의 얼굴을 구할 때, 우리는 '영혼'이 되며, 그분을 만날 때, 우리 영혼은 '구원'얻는다. 


그런데 줄리안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일 못지 않게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일 만으로도 벌써부터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이란 바로, 그렇게 '찾는' 그 추구, 그렇게 '아파하는' 그 아픔, 그렇게 '신뢰하는' 그 신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추구, 그 아픔, 그 신뢰가 바로 우리 '영혼'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 형상이 살아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 

아니, 하나님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계시기에,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요 1:38)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영혼'을 가졌는가?


 / 산처럼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posted by 산처럼

좋음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5.06 12:30

좋은 것을 좋은 것이게 하는 그 '좋음'(goodness)은 곧 하나님이다. 어떤 것이 좋은 건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이다. 


노리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2 – ca.1420),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8.


줄리안에게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아니, '좋음'(goodness) 자체다. 무엇이 좋은 건 그것에게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진 것이기에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무언가 좋은 것을 접했다면, 그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좋은' 분이라 고백하긴 하지만, 줄리안처럼, 또 칼빈처럼, 하나님을 "모든 '좋음'의 원천"(fountain of goodness)이신 분으로 경험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경지에 이른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와질까 생각해본다. 좋은 나무 향기를 맡을 때, "아, 하나님의 향기이구나!"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아,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좋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하나님 이야기로구나!" 


보면, "하나님만 좋고 다른 건 다 나쁘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신앙이 좋은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있다. 줄리안에 따르면, 또 교회사의 많은 영성가들, 신학자들에 따르면, 그건 그렇지 않다. "하나님만 좋고 다른 건 다 나쁘다"고 생각해야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그건 영지주의다!--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좋은 것들로 알아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맛볼 수 있어야 신앙이 좋은 것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좋은 것들을 좋아라 할 줄 아는 사람, 그가 참 신앙인일 것이다.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영성 깊은 사람이다.  / 산처럼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posted by 산처럼

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3.26 09:37

기쁜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난 옆구리 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 선하신 주님께서 더 없이 기쁨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Lo, how I loved thee.)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24.


고난주간은 봄에 있다. 


이 땅에 봄이 온 건 '고난'이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거룩한 고난. 


이를 알아본 한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다. 


"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 할 수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온 사람아  (이성부, '봄' 중에서 )


이 봄, 

먼데서 이기고 온 그 분을, 

그 분의 몸을 

두 팔 벌려 안아보자. 


창에 허리 찔리고

손에 못이 박힌

그 상처난 몸을. 


그러면 알게 되리라, 

이 봄은 

'자연히' 오지 않고, 

'은혜로' 왔다는 것을.  


눈물이 솟으리라. 


왜 기쁘면, 

참된 기쁨을 만나면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 


그 순간 우리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Lo, how I loved thee


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posted by 산처럼

당신을 주소서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2.11 01:20

좋으신 하나님, 제게 당신을 주소서. 

저는 당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당신만 못한 것을 구하는 것은 

당신께 합당한 기도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당신만 못한 것을 구하는 이는 

빈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모든 것이시기 때문입니다.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


좋은게 좋은게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따로 있다. 


가장 좋은 것(Summum bonum)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가질 때 

우리는 전부를 가진다. 


주님, 주를 원하게desire 하소서.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가져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posted by 산처럼

거룩한 갈망 _ 개암 비전 IV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1.27 16:43

하나님보다 작은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 

all that is less than He is not enough for us.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


온 세상 만물을 다 가져도 인간의 마음은 차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온 우주보다 크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을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던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다: 

님 향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은 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하지 못합니다.


줄리안 역시 같은 고백을 한다:

하나님과 하나되기one-ed 전까지는 우리는 온전한 안식과 참된 기쁨을 갖지 못한다. 


아, 어쩌면 우리는 욕망desire이 너무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 너무 작은 것이 문제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인데, 

세상 것들 따위로 채우려 하고 있으니. 


다 합쳐도 '개암크기만한' 세상인데

그 작은 것으로 인간 영혼의 심연이 어찌 채워질까.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posted by 산처럼

기쁨의 원천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1.15 15:35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은 곧, 

모든 것들에 깃들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The fullness of joy is to contemplate God in everything."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35.


기쁨이란 말을 쉽사리 동원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가 당면한 오늘은 녹록지 않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힐링"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만 보아도 이같은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의롭고 착한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악하고 저울을 속이는 자들이 오히려 흥하는 오늘 이 엄동(嚴冬)의 땅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오래된 오늘


posted by 오래된 오늘

창조와 사랑 _ 개암 비전 III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1.12 14:06

나는 그것 [창조된 만물 전체]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찌나 작고 미약(微弱)한 것인지 금방이라도 없어져 버리고(sink into nothingness) 말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



'계시' 가운데 창조된 만물 전체를 일별하게 된 줄리안은 놀랐다. 그 광대한 존재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미소(微小)한 것이 여태도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nothingness)로 돌아가버릴 것만 같은 그 자그마한 것이 지금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사랑의 능력 덕분이었다. 


"만물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애초에(in the beginning) 존재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무(無)로부터' (out of nothing)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당신 '사랑의 능력'으로 창조해내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無)로 돌아가버릴 것 같은 내 존재, 허무(虛無) 속으로 떨어져버릴 것 같은 내 실존을, 나를, 너를, 우리를,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사랑이신 주님께서 당신 사랑의 전능으로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인가 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fragile 것으로 느끼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 


그런 '순간'은 영원과 시간이 교차하는 순간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도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사랑'의 일을 하고 계시는--하나님을 흘낏 보게 되는 순간인가 보다.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posted by 산처럼

무한사랑 _ 개암 비전 II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2.12.30 03:48

이 계시에서 주님께서 내게 어떤 자그마한 것을 하나 보여주셨는데, 

보니, 개암 크기만하고 동그란 무언가가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유심히 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뭘까?"

대답이 들려왔다, "창조된 만물 전체이니라."(It is all that is made)

나는 그 조그마한 것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찌나 미미한지 금방이라도 없어져 버리고(sink into nothingness) 말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깨닫게 해주시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속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물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5.


"개암(hazelnut) 크기만하다"는 말은 중세 유럽에서 주부들의 요리 용어였다고 한다("버터를 개암 크기만하게 썰어넣고...").  우리 식으로 말해보면 "콩알만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이 어마어마한 우주 전체가 "콩알"만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또 하나님을 만난 주부[각주:1] 줄리안에게는 말이다. 


그렇다. 우주는 콩알만하다. 


흔히 우리는 우주를 무한하다고 상상한다. 잘못된 상상이다. 


우주는 무한하지 않다. 

무한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한하다. 

그리고 무한한 그 사랑이 온 세상 만물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진, 우주의 미아(迷兒)가 아니다. 

우리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그분의 자녀다.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1. 은수자가 되기 전까지의 줄리안의 개인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그녀를 자녀를 낳고 양육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었을 것이라 말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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