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 (조지 허버트)

영성 목회 2014.11.18 13:28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과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1593-1633), 《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 제24장.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지만 보통 지역 교회(교구)를 섬기는 목회자는 참 바쁘다. 특히 조지 허버트가 살던 17세기 영국의 지역 목회자들은 종종 자신의 교구에서 의사 또는 법률 대리인의 역할도 담당해야 했기에, 그들이 '해야할 일 목록'에는 참 많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다. 허버트에 의하면 이런 바쁜 일상 중에도 목회자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분주한 매일의 생활 공간을 벗어나 "언덕 위에" 서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 사이에 있는 은밀한 악을 성찰해야 했다. 


허버트는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과 '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불필요하게 넓고 사치스러운 집을 산 교인의 집에 이사 예배를 드리러 가서, 그 교인에게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 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무엇보다 목회자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엄밀하게 성찰하고 정결한 상태를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은밀한 악덕에 지배당하는 목회자가 '양떼'를 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심한 경우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경고한 것처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양떼를 잡아 먹는 거짓 목자가 되고 말 것이다(에스겔 22:23-31).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된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하고,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들도 발견하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연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에 오르면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도 얻을 수 있어,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조지 허버트의 책 The Country Parson에서 말하는 목회자는 주로 지역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고,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허버트의 조언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또는 동료 목회자들과 몰려 다니며 자신의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 위에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교인들과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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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예수 권세, 내 권세 (아파미아의 요한)

한 줄 묵상 2014.10.25 07:44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네 내면에 거하시는 주님에게 늘 점검 받도록 하라. 네 행위가 다른 사람 앞에서 하는 꾸며낸 행위가 아닌, 네 주님 앞에서 하는 진실함이 되도록 하라.


- 아파미아의 요한(John of Apamea), The Syriac Fathers on Prayer and the Spiritual Life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s Inc.), 86. 


당시 공기마저 더럽히는 종교인들에 눌려있던 마가복음의 민초들은 예수님의 등장이 그들이 알던 거짓 지도자들 같지 않고, 권세있는 자와 같다고 환호한다(막 1:22). "예수 권세, 내 권세!" 그 권세를 '코스프레'(costume play)하려고 수많은 종교인들이 아말감을 금이빨로 바꾸고, 목사직을 CEO로 여기는 것일까? 

그럼 이 '권세'라는 뜻은 무엇인가? ‘권세’는 헬라어 ‘엑수시아’로 ‘엑스(~로 부터)’와 ‘우시아(존재)’의 합성어이다. 즉, 권세는 외부에 ‘드러난, 부풀려진, 꾸며진' 행위가 아닌 존재 또는 내면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오늘날의 많은 종교인들이 외부로 보여지는 쇼맨쉽에 빠져있다. 반짝이게 하고, 부풀리고, 심지어 사람들을 현혹시켜 마음을 훔치려고 아우성이다. 그 권세, 예수 권세 아니거늘…….

5세기의 시리아 교부인 아파미아의 요한은 내면의 성찰을 요구한다. 외적 행위가 사람 앞에서 꾸며낸 것, 또는 편집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진실함에서 나오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내면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행동의 동기를 점검 받아야 한다. 이 권세, 내 권세 되길!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사순절, 이 거룩한 기간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4.03.17 10:27

수도자의 삶은 사순절의 연속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이 거룩한 기간 동안 평소 가지고 있던 태만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49장. 1-3. (서울: KIATS, 2011), 94.


사순절은 “거룩한 기간”이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예수의 삶과 고난,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간은 우리가 “지극히 순결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게으름을 벗어 버리면, 거룩하신 주님을 좀 더 닮아 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규칙서》8세기 사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사순절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훈련 방법으로 (1)악한 습관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 (2) 참회의 기도, (3) 독서, (4) 마음의 성찰, (5) 자기 부인, (6) 음식물과 수면의 절제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베네딕트의 수도원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는 사순절에는 정해진 의무에 좀 더 추가하여 실천하고 이에 전념할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이러한 훈련들을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기보다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과도한 ‘고행’을 통해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허영심을 경계하기 위해, 이 훈련들은 수도원장의 영적 지도 아래 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베네딕트의 ‘규칙’은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사순절 기간 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성 훈련을 평소보다 한두 가지 더 추가하여 성실하게 실천한다면, 다가올 부활절이 감격이 없는 ‘연례 행사’가 아니라 기쁨과 소망이 생생한 잔칫날이 되지 않을까? 올해의 사순절이 이미 사분의 일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다. 이미 사순절을 특별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할 때이고, 아직 사순절을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지금이라도 분별력 있는 영적 지도자(또는 형제, 자매)와 상의하여 적절한 훈련을 시작할 때이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생각 보고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한 줄 묵상 2013.10.24 23:52

우리는 마치 보고서를 제출하듯 자신의 행동들과 영혼의 움직임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짓는 것이 발각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은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지킨다면 간음하지 못하듯이, 서로에게 보고하는 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한다면 더러운 생각들이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ch. 55.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간 사막의 수도승들, 

특히 홀로 있는 독수도승들은 외부의 유혹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문제는 자신의 내부, 즉 속사람이었다.  


남이 알아채지도, 또 알아주지도 않는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생각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동기부여를 받는 일 역시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찾아온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까지 속사람을 돌아보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눈 앞에 두고 지금 살아간다라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누구를 내 눈 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나?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목청을 더욱 높이는 후안무치한 세상에 살고 있다.

법은 책에만 쓰여 있고 마음에는 흔적조차 없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목청 높여 기도하는 우리들.

성경의 글자가 가슴에 쓰여지지 않는 한, 참된 죄의식이 생겨 날 수 없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바로 통회함 없는 기도를 하는 나 자신이다. 


법 어기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순결해 진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오늘 나의 '생각 보고서'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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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리를 떠남

한 줄 묵상 2013.09.24 07:36

안토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되었고 자신이 의도했고 원했던 바대로의 은둔생활이 가능하지 않게되자, 주님이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심사숙고 끝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챌 수 없는 위쪽지역 테베로 떠났다.          


- 아타나시우스(At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49.


얼마 전 추석을 맞이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느라 차들이 모든 도로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의 소원과 희망을 좇아, 있던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하고 또 삶의 기반이 잡힌 "지금의 자리"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하고도 더 나은 그 무엇인가가 있을 때 신발끈을 묶어매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각광을 받는 자리를 떠나기란…….

바로 그런 자리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요 부르심의 표징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이지 않던가?

이 현상을 간증도 하고 책을 내서 알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토니가 지금의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는 바깥으로 드러난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보며 가꾸어 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영적 스팟라이트를 받기에 혈안이 된 듯한 세상이다.

그것을 위해 박사학위도 취득하고, 책도 쓰고, 심지어 영성 훈련도 참여한다.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용기와 결단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미국까지 공부하러 떠나 온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나라 유명한 교회 목사가 6개월의 근신의 자리를 떠나 조명빛 환한 설교단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토니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왠지 씁쓸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과거의 자리를 떠나 지금의 여기에 있는걸까? 

지금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하는 자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발을 디뎌서는 안될 곳을 향하여 떠나와 가고 있지나 않은지?


그저께 비가 온 이후 

가을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아브람처럼, 예수님처럼, 안토니처럼, 바람처럼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가슴을 휘젖는다. 


/ 임택동

posted by 오래된 오늘

참된 삶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10.08 14:58

바깥 소리를 듣지 않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참(truth)의 음성과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귀는 복되다. 

바깥 것들을 보지 않고

내면 세계에 주목하는 눈은 복되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4, ch. 1.




'참'된 삶이란 

속이 가득 '차' 있는 삶이다. 


'거짓'된 삶이란

'거죽'만 번지르르한 삶이다. 


어떻게 하면 참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토마스 수사는 

"네 안을 보라"고 말한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자. 


안을 보자. 


안을 볼 줄 알아야, 

위로 비상ascent할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는

밑(地獄)으로 꺼져버릴 지 모른다. / 산처럼



posted by 산처럼

말 기계와 앵무새 (길선주)

한 줄 묵상 2012.09.16 02:11
  • 행실(行實)이라는 말에도 실행(實行)이라는 말에도 다 '열매'(實)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이 신기합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09.16 03:19 신고
  • 오늘 주일 절기 본문 서신서가 야고보서 3 장이었는데 바로 말과 혀를 제어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되려는 사람은 선생들에게는 더 큰 심판이 있음을 명심하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데, 여기 길선주 목사님의 말씀과 잘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력에 알맞게 적절하게 한줄 목상을 올려 주셨내요. 감사드립니다.

    새결새김 2012.09.17 14:25 신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간절히 원하고 바랍니다. 행실을 말하는 바에 합당하게 하여 능히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기계와 앵무새가 되지 마십시오." 


길선주 (1869-1935), <그리스도신문> 1906. 2. 15.




어느 날 길선주 목사가 한 외국인의 집 앞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떠들고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깜짝놀랐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홀로 "나팔통 같은 기계"를 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축음기'(record player)였다. 이후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신문에 실은 글 또는 강단에서의 한 연설에 감동되어 그들을 만나보았으나, 실제 그들의 행동이 그말과 글에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서는 그가 축음기에 속았던 경험을 생각해내었다. 


"말 기계"는 사람의 목소리를 재생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말을 알아 들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비슷하게 "앵무새"는 사람의 말을 흐르는 물같이 따라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도 스스로 생각해내지도 못한다. 길선주 목사는 이처럼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식과 말재주만 배워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는 "성령의 신령한 은혜"로 변화되어 바른 행실을 갖춘 자에게 교회의 중대한 직분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혀와 머리만 변화받은 "말 기계" 또는 "앵무새"인지, 아니면 아니면 성령으로 마음이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인지 스스로 살펴보자. 우리 교회가 '말 기계'를 틀어 놓은 '앵무새들'의 모임이지는 않은지, 그래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속았다'고 느끼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자. 매일 밤 자신이 오늘 하루 동안 맺은 행실을 돌아보자.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마태복음 7장 15-20절)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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