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처럼, 동주처럼 :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예수처럼, 동주처럼”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한 책이 있나요?"


      며칠 전 우연히 만난 분으로부터 들은 질문이다. 필자가 신학교 졸업논문으로 윤동주 시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기신 모양이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이름은 알아도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필자가 윤동주의 영성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윤동주를 기독교 영성, 또는 신학의 관점에서 연구할 만한 내용이 있느냐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질문을 하신 분께 지난 2월 16일이날은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 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다에 발간된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렸다.


[「돌아와 보는 밤」은] 윤동주의 작품 중 유일한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장 6절)는 말씀처럼 윤동주는 좁은 방에 들어가 '숨은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좁은 방은 곧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외면적인 실천의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는 종교시라면 「돌아와 보는 밤」은 내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기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숨은 신과 대화하며 사상이 익어가는 기다림은 은밀하고, 숨은 신과 인간의 일대일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헌신을 다짐하는 키에르케고르와 윤동주의 공통된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 김응교,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파주: 문학동네, 2016), 354쪽.


 

     보다 정확히 말해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만 쓴 책이 아니다.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관점에서만 윤동주를 이해하고 소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거나, 그를 '기독교 교리' 또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될 위험이 있다. 대신 이 책의 저자 김응교 교수는 가능한 다양한 관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소개하려 하고 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환경은 물론이고 그가 교유했던 벗들과 읽었던 책들을 통해서 윤동주라는 한 인물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저자는 위의 인용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윤동주의 삶과 작품에 나타난 기독교적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대부분의 장들은 저자가 기독교 월간지『기독교사상』에서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윤동주와 함께 걷는 새로운 길"이라는 꼭지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고쳐 쓴 것이다. (또한 저자가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들을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쉽게 풀어 쓴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처럼』은 "기독교인 윤동주"에 대해서 가장 잘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처럼"이라는 독특한 제목이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제목은 윤동주의 유명한 시 「십자가」에서 가져온 것으로 저자는 책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처럼'이란 조사만 한 행으로 써 있는 시를 본적이 있나요. ……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동주는 알고 있었어요. 그 귀찮은 길을 '행복'한 길이라고 그는 씁니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도 '행복'한 주체가 되는 그 길을, 윤동주는 택합니다. (5쪽)


그는 '처럼'의 시인이었습니다. 국익이라는 헛것으로 보편성을 강요하는 파시즘 시대에 윤동주의 문학은 만들어진 보편성에 흠집을 내고 그 한계를 깨뜨리는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친일 문학 같은 굴레에 갇힐 수 없었습니다. 문학은 한계와 제약으로 구속해서는 안 되고, 구속할 수도 없다는 자유에 그는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릴 희생을 각오했고, 그 결단의 순간을 위해 그는 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서시」)며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509쪽)


기독교 영성사에서 '제자도'(discipleship),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기독교적 삶의 본질적인 이상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각주:1]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급진적인 삶을 살았고, 어떤 이들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삶과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한 오랜 흐름에 맞닿아 있다. 『처럼』은 이러한 제자도를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시대에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윤동주의 영성은 '제자도'라는 주제가 그러한 것처럼 오늘날 전쟁과 자본의 폭력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동만이 아니라 유효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존의 윤동주에 대한 평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존에 출판된 윤동주 연구서들 중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책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일 것이다. 김응교 교수는 『처럼』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윤동주가 곁에 있다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송우혜 선생님의 저서가 역사적 실증주의에서 시인 윤동주의 삶을 구성한 평전이라면, 제 글은 시의 원전을 분석하여 시를 통해 윤동주를 재구성하는 '시로 만나는 윤동주'라는 입장입니다. (515쪽)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시인과 관련된 현존하는 문서들과 증언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역사적(historical) 윤동주'를 제시하고 있다면, 김응교의 『처럼』은 작품 속에 표현된 시인을 추적하는 독특한 형식의 평전이다. 물론 송우혜의 평전 또한 시인의 여러 작품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이 새로운 평전은 그동안 윤동주에 대한 연구서들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던 동시를 포함해서 시인이 남긴 대부분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다.


      저자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에 윤동주의 작품에 대한 그의 이해와 표현이 '분석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적'이며, 그 깊이가 남다르다. 곧, 작품의 구조를 해체하고 의미를 분석하기보다는 시적 표현들 속에 녹아 있는 시정신 또는 시혼(詩魂)을  밝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에 대한 여러 책들과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작품(text)과 환경(context)을 균형있게 고려하고 있는 이 책에 담긴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에서 수년 간 디아스포라(diaspora)로 생활한 저자의 경험이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배경을 이루고 있어서 그의 해석은 더욱 공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해석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책도 없고, 시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근 4쇄를 낼 때에 몇 가지 잘못된 정보와 오자를 바로 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평생 이 책을 살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여름, 한 교회 청년부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만주 땅으로 역사탐방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이면 많은 교회들이 주로 단기선교를 떠나지만, 한 번씩 국내외 기독교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 의식과 통찰력을 갖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의 선배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김응교의 『처럼』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과 더불어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마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자는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예사말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높임말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더 쉽고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윤동주를 소개하려는 저자의 노력인 듯하다. 그리고 각 장도 분량이 길지 않아 한 자리에 앉아서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결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한 번에 여러 장을 읽기보다 한 번에 한 장씩 읽으며, 더불어 그 장에서 언급된 윤동주의 시를 생활 속에서 묵상한다면, '저자의 윤동주 이해'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윤동주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동주는 침묵으로 최초의 악수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슬픔 곁으로 가라고, 웃음 곁에서 웃으라고, 그게 축복이라고, 윤동주도 곁에 있다고. (519쪽) 


이 마지막 구절을 읽는데 눈앞에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그 손을 잡는다면, 또한 다른 손으로는 동주의 손을 만지고 잡게 될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Philip Sheldrake, A Brief History of Spirituality (Malden, MA: Blackwell, 2007), 14-15.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것은 결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시청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송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 곧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성으로 변질시키는 세태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직장에 적합한 '인재',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품'임을 오디션과 같은 입사 시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 받고 있다. 비단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라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도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혀지기를(picked up)"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유행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나를 뽑아줘"라는 간절한 외침이 배어 있는 듯해서 노래가 매우 서글프게 들린다. 더구나 이러한 정글과 같은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행을 '이용'해서 '과대 광고(공약)' 또는 '허위 광고(공약)'로 자신들을 포장해서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소명'(vocation)과 '사명(mission)'은 원래적으로 수동적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동성은 그 부름과 사명에 대한 응답에 있다. 곧 수동성이 우선이고 그 뒤에 능동성이 따른다. 앞서 말한 "pick me up"이라 외치는 노래도 자신이 수동적으로 선택되기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소명'과 '사명'이 갖고 있는 수동성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pick me up"이라는 문구에는 자신이 선택받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부름과 응답에는 자신이 부름을 받기에 매우 부적절한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청년 윤동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동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것은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허락"되어져야만 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했다. 최근에 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찬송가에 담긴 주님의 질문에 응답하던 때에는 분명 나같은 죄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그 결심 밑에 깔려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십자가는 내가 "져 주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당연히" 맡기셔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슬쩍 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시며 모든 제자들은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이 말씀 이전에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이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시인'으로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 들였다(〈쉽게 씨여진 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좋은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원하지만, 윤동주는 다른 이들이 피하는 괴로운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랬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세상은 상향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향성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캐스팅' 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 이틀 후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성금요일이다. 일 년 중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커지는 때이다. 그런데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 내가 결단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고마워하시며 얼른 십자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적 십자가는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부담스러워하며 억지로 받거나, 생색내며 받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한 줌의 재에 불과한 나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십자가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겸손히 두 손으로 받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귀히 여기는 이들은 사실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주기철)[각주:1]


/ 바람연필 권혁일


  1. 주기철, "오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서울: 홍성사, 2008), 15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황혼 속의 〈재의 수요일〉 그리고 〈흰 그림자〉

하늘이 유난히도 맑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자, 기독교 전통 절기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회하는 40일 간의 기간이며,  그 첫 날인 수요일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되새기는 의식을 행한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과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유명한 시는 T. S. 엘리어트(Eliot: 1888-1965)의 장편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가 애독하던 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각주:1] 윤동주가 어떤 점에서 이 시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오늘이 재의 수요일이고, 다가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므로 T. S. 엘리어트의 시의 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읽어 본다.


재의 수요일


VI.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희망하지 않지만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며

꿈들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꿈이 교차하는 황혼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이것들을 바라기를 바라지 않지만

넓은 창으로부터 화강암 해변을 향해

하얀 돛들이 여전히 바다를 향해 날아 오른다,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again

Although I do not hope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Wavering between the profit and the loss

In this brief transit where the dreams cross

The dreamcrossed twilight between birth and dying

(Bless me father) though I do not wish to wish these things

From the wide window towards the granite shore

The white sails still fly seaward, seaward flying

Unbroken wings


모두 6부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가 영적 절망과 고갈을 통과하여 개인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내적 여정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위에 인용한 두 연은 이 시의 마지막인 6부의 시작 부분이다. 이 시는 T. S. 엘리어트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옮겨간 지 약 3년 후인 193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시는 때로 그의 '회심시'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의 엇나간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짧은 황혼 속에서 꿈들이 교차하고,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화강암이 빛나는 해변을 향해 믿음으로 비상한다. 이 순간 1부에서는 날기를 바라지 않고 허공만 칠 뿐이던 날개가 회복되어 희망찬 날갯짓을 한다. T. S. 엘리어트에게 황혼은 이렇게 전이와 비상의 시공간이었다.


황혼, 낮이 밤으로 바뀌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시적인 순간, 그래서 인생의 덧없음을 맛보고 동시에 영원을 소망하는 종말의 때…….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로 된 십자가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음성을 듣는 이 날이 바로 이 황혼의 때가 아닐까? 자신이 흙인 것과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부질없이 희망하며 서성거리고 말 것이다. 육지를 떠나 바다 위 하늘로 비상하지 못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T. S. 엘리어트의 시를 애독할 무렵에 쓴, 〈흰 그림자〉라는 시에도 '황혼'이 등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황혼은 깨달음의 시간과 공간이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 14.


시인은 황혼 속에서 땅검(땅거미)이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황혼과 동의어인 '땅검'은 해질녘의 어스름한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원래 시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황혼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일 때 놀랍게도 그는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곧, 황혼이 청각적으로 경험된다. 시인은 자신이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이 지적인 총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발견되는 깨달음, 또는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은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시든 귀"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은 그날 하루 많은 말들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비단 말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땅에서 살아가던 식민지 청년의 하루는 그의 영혼을 시들게 할 만큼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시든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황혼을 향해 그의 전 존재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그에게 새로운 영적 경험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시인은 황혼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는 이 시에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결과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T. S. 엘리어트는 꿈들이 교차하는 황혼 속에서,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향해 비상하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윤동주가 돌려 보낸 것은 '괴로워하던 나'이므로, 비록 '돌려보내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T. S. 엘리어트와 마찬가지로 미래 지향적인 결정, 또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돌려 보낸 나들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흰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원래 검은 색이지만, 시인의 그림자는 흰 색이다. 흰색의 그림자란 태양 아래서 볼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니 허상이다. 그러므로 결국 시인이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오래 괴로워하던 나들은 참된 나와 통합을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고장에 돌려 보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흰 그림자들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흰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흰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어둠은 자신의 허상인 흰 그림자를 발견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가 어둠을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시인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발자취 소리가 들리는 땅검과 대조를 시킴으로써 그것들의 비현실성을 다시 부각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모양도 소리도 없는 비현실적인 나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 연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돌려 보낸 후 허전히 방으로 돌아와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양은 먹이 사슬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매우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양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것은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풀포기나 뜯는 평화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또한, 풀포기를 뜯을 수 있는 양은 선한 목자를 가진 양, 그리고 그 목자를 신뢰하는 양이다(시편 23편 참조). 결국 이 시는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 그리고 목자에 대한 신뢰로 끝을 맺는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황혼 속의 깨달음 뒤에도 여전히 침략자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식민지 청년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괴로워 하는 나가 아니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으로 살고자 한다. 내적 변혁이 일어났다.


다시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을 생각한다. 주일을 제외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마흔 번의 황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황혼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절망, 슬픔, 피로…… 이 모든 것들의 귀를 열어 황혼을, 석양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T. S. 엘리어트처럼 부러지지 않은 날개로 바다를 향해 비상하거나, 윤동주처럼 흰 그림자들을 돌려보내고 시름없이 풀포기를 뜯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2016. 2. 10. 수.


바람연필 권혁일



  1. 왕신영, 《윤동주와 일본의 지적 풍토》, 박사학위 논문, 고려대학교, 2006년, 5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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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그 여자〉와 '위안부' 소녀들을 위한 탄원

오늘은 윤동주 시인(1917-1945)의 〈그 여자〉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를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인의 육필원고에 있는 그대로, 곧 당시의 맞춤법을 고치지 않고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젓슴니다.


오날도 가을바람은 그냥붐니다.


길가에 떨어진 불근 능금은

지나든 손님이 집어갓슴니다.


1937. 7. 26.



겉으로만 보면 가을 풍경의 한 장면을 그린 짧고 평범한 회화적인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읽어야 할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윤동주평전》을 쓴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송우혜 님은 이 시가 고대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Sappho)의 〈한 처녀〉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시라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사포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시지요. 



한 처녀


저 높은 가지 끝에서

불그스레 익는

아름다운 사과와도 같으니

따지 않음은 잊은 것이 아니요

높아서 손이 닿지 못함이다.


- 사포





송우혜 님은 이 두 작품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습니다. "사포의 한 처녀와 윤동주의 그여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양자는 제목에서부터 기본구도까지 아주 흡사하게 닮은꼴이다. 그러나 '여자'를 노래한 시각은 정반대이다. 사포는 뭇 남성들로서는 감히 '손이 닿지 못하는,' 마치 높은 가지 끝의 붉은 사과와도 같이 고고하고 드높은 기품의 아름다운 처녀의 존재를 노래했다. 그러나 윤동주의 비평정신은 이 시에 불만을 느꼈다. …… 그는 아무리 '손에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 해도 결국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처녀들의 운명임을, 제 또래보다 먼저 피어난 뛰어난 처녀가 '지나는 손님'으로 묘사될 만큼 엉뚱한 인간에게 허망하게 걸려드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실체임을, 날카롭게 피력한 것이다."[각주:1]


그러면 윤동주 시인은 왜 사포의 낭만시를 풍자적인 시로 바꾼 것일까요?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날짜는 1937년 7월 26일입니다. 그가 북간도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재학할 때로 노구교(루거우 다리) 사건(1937년 7월 7일)으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직후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습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자신들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전선을 상해까지 확장시켜 제1차 상해사변(1932)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때 상해의 일본육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위안소는 점차 중소도시로 확장되어 갔다고 합니다.[각주:2] 또한, 여러 사람들(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가 살았던 북간도 곳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참조: 지린성의 일본군 위안소) 그렇다면 1937년 당시 북간도 조선인들의 중심지인 용정에 있었던 윤동주도 '위안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윤동주의 시 〈그 여자〉에 나오는 길가에 떨어져 버린 "붉은 능금"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소녀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금을 집어간 "지나던 손님"은 남의 땅을 점령하러 들어온 일본군인들이 아닐까요? 시인이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이런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그 여자〉를 읽어보면, 담담한 문체로 쓰여진 진술이 오히려 매우 슬프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붉은 능금을 집어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인은 스무살의 젊은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슬픈 일을 시로 기록해 두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윤동주의 〈그 여자〉를 사포의 〈한 처녀〉와 다시 한 번 대조해보면, 2연이 다음과 같은 단 한 줄로 되어 있어 시선을 끕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을바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람은 인간의 힘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영역, 나아가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윤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시에서 바람에 전깃줄이 잉잉 우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을바람이 오늘도 그냥 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능금이 떨어지고 지나던 사람이 그것을 집어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별다른 관여 없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것으로 시인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능금이 무게로 인해 저절로 떨어졌는지, 바람에 떨어졌는지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데, 만약 바람에 떨어진 것이라면 비극적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비극에 하나님도 결과적으로 거든 것이 되니까요. 어쨌든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의 침묵 또는 방관은 현실에 비극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제시됩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 시는 굉장히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고백으로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일종의 탄원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시편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리고 외사촌 동생인 김정우 시인에게 시편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각주:3] 시편에 나오는 많은 탄원시들에는 시인(또는 공동체)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시편 137편 7절에서는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당시 히브리인들이 당한 원통한 일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그 여자〉도 그냥 부는 가을바람처럼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해 외친 시인의 탄원이 아닐까요? 당시의 험악한 상황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격정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시인은 당시 소녀, 또는 처녀들이 일본군들에게 끌려가 당하는 비극을 "기억해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무언의 외침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분들이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한일 외교부 장관이 공동기자회견문의 형식을 통해 '위안부' 관련 합의를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합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유를 들어 보면, 그들 중에는 '위안부' 관련 사안을 '문제'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위안부 문제"라고 자주 표현해서 그런지 어떤 이들은 '위안부' 이슈가 한일 사이의 외교와 경제 협력을 가로막는 골치 아픈 '문제 거리'이고, 그래서 적당한 수준에서 빨리 풀어 해치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위안부' 관련 사안은 결코 그런 '문제 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며,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한일 간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번 합의로 더욱 상처받은 '위안부' 피해자들, 이젠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탄원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일로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한일 사이에 분열의 골이 더 깊어지는 이 안타까운 상황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더욱 간절하게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송우혜. 『윤동주평전』, 제3판. (서울: 서정시학, 2015), 253-54. [본문으로]
  2. 양현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사적 성찰과 반성." 기독교사상 666 (June 2014): 18-29. [본문으로]
  3. 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 『나라사랑』 23 (1976년): 1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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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사랑처럼 : 대림절 그리고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대림절(Advent). 기다림의 계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기다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전화나 편지를 기다리고, 용돈날이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교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그 외에 모든 이들은 어떤 좋은 소식을, 또는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특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탄절이 있다.


저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성탄절을 과거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로 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늘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탄 절기 속에 새겨진 기억과 기다림은 마치 급행열차 같아서 ‘과거’에서 출발해서 ‘미래’를 향해 달릴 뿐, ‘현재’라는 역은 요란한 소리와 먼지만 남긴 채 무정차로 통과해 버리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과거에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미래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 사이에서 매년 반복되는 대림절과 성탄절은 올해도 바쁜 연말의 일상 속에서 연말 풍경의 하나로만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교회와 백화점에는 성탄 장식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데, 대강절은 별다른 감동 없이 내 삶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Photo by Gustavo Ampelio di Borgogna



기차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작품 중에 〈사랑스런 추억〉이라는 시가 있는데, 1연이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1연의 시간적 배경은 초봄이고,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다. 이 부분만 보면 시인이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아니다. 5연에 이르면 시인은 동경에 있고, 계절 또한 봄이 끝나는 때임이 나타난다.


봄은 다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동경의 릿쿄(입교)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이 시 〈사랑스런 추억〉을 썼고, 시의 제일 마지막 줄에 “5월 13일”이라고 시를 쓴 날을 분명히 적어 두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현재 일본 동경의 조그만 하숙방에 있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이른 봄 아침에 서울의 한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자신을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낯선 남의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시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이 배어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의 추억 속에 “옛 거리에 남은 나”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6, 7, 8연은 아래와 같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시인의 몸은 이미 서울을 떠나 동경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옛 거리에 남은 나”가 있어, 그가 오늘도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비논리적인 진술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시인이 지금 과거의 나를 추억하고 있고, 과거의 기다림이 오늘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연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리던 ‘초봄의 나’를 5연에서 ‘늦봄의 나’가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곧, “희망과 사랑”이 ‘과거의 나의 기다림’과 ‘현재의 나의 그리움’을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기다림은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리움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기억과 기다림은 현재를 무정차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현재라는 역에 분명히 정차하고 있다. 그래서 “옛 거리에 남은 나”는 빛바랜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추억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 청년 윤동주가 기다리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기차를 기다렸지만, 기차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올 “누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가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는 그 “누구를”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다. 그 희망과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시인은 자신을 희망과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에는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바란다. 그리고 사랑이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던 “누구”는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누구”는 어떤 특정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재 함께 있지 않은 가족과 친구도 될 수 있고, 암울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근원적인 그리움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난다고 해서 완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고백록》의 첫 부분에 쓴 것처럼, 우리의 모든 그리움의 종착역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각주:1]





벌써 대림절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 천여 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천사는 들의 목자들에게 오늘 구세주께서 너희에게 탄생하셨다[각주:2].”(눅 2:11)라고 전했다. 물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시고 육체적으로는 이 땅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마치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를 쓸 때, 일본에서 공부하던 윤동주의 몸이 서울이나 북간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번 성탄절에도 우리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실 수가 있지 않을까? 오신 주님, 그리고 오실 주님을 향한 깊은 그리움 속에서 마굿간과 같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 아기 예수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의 아기 예수, 미래의 재림주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태어나시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그리스도를 출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모습 속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과 사랑처럼” 그분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고백록》, Book I, i (1). [본문으로]
  2. born to you / ἐτέχθη ὑμῖ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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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윤동주의〈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과 관련된 시 두 편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입니다.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오던 그가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입니다.[각주:1] 그리고 그 중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시인은 '슬픈 사람 = 불행한 사람'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있는데, 이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봅시다. 먼저 영어 원문으로, 그 다음에는 서투르지만 저의 한국어 번역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 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모든 오랜 상흔과 한 조각의 비탄을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유를 위해 놓아 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화석이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 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으십니까? 저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 앞에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지요.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납니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합니다. 



    그는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빛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됩니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가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상처가 양분이 되어 우리가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지워져 있습니다. 이 시는 윤동주의 〈팔복〉입니다.


팔복 (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매우 충격적입니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곧,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을 새로 써넣었습니다. "오래"와 "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 자필 원고.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 12월 경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입니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입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는 한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벗어나려고 파닥거리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쉽니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나[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위로〉 3연.


재미 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의 행동이 없습니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구절을 뒤집은 〈팔복〉은 시인이 거미줄을 뒤헝큰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슬픈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과 같은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와 〈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입니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에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참고로 2부 "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 "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천명을 따라 가는 길 (윤동주)

한 줄 묵상 2014.02.17 09:53
  • 참된 나를 만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최초의 악수'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처음 악수가 이루어진 순간과도 같이 다시금 마주 잡고, 앞으로도 마주 잡을 그 일은 '최후의 나'에게까지 나아갑니다.

    lumierehee 2014.02.22 04:35 신고
  •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윤동주에게 시쓰기는 그와 같이 자신과 손을 마주 잡는 행위(또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2.25 06:37 신고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중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1917-1945), <쉽게 씌어진 시> 부분, 《정본 윤동주 전집》(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128-129.



2월 16일, 오늘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에서 옥사한 날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얻기 약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새벽,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시는 오직 다섯 편만이 전해 질 뿐인데, 이 시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약 10제곱미터(3평)의 좁은 다다미 방에 앉아 있고,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린다(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밤비는 그의 귀에 무엇이라고 속살거렸을까? 나라를 잃어버리고 침략자의 땅에 유학을 온 청년은 좁은 육첩방, 곧 자신만의 공간에서조차 '집에 있는'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있음을 절감한다. 이와 같은 깊은 소외와 고독 그리고 단절감이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 침입한다. 이러한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든다. 곧, 통렬한 비정체성(nonidentity)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추구하게 하였다. 청년은 어둡고 어려운 조국의 현실을 뒤로 하고, 부모님이 보내 주는 학비를 받아 '쉽게 쓰여지는 시'처럼 쉽게 가는 삶을 살고 있음에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에게 "시인"의 길을 걷는 것은 "슬픈 천명"이다. 그러한 부끄러움과 괴로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참된 자아인 "최후의 나"와 대면하게 된다. 그 최후의 나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등불을 밝혀 방 안의 어둠을 조금 몰아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온 세상을 밝게 비출 광명의 아침을 기다린다. 그는 등불을 하나하나 밝히듯, 천명을 따라 시를 한 줄 한 줄 쓰며 어둠을 조금씩 내몰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마지막 연에서는 자신의 참 자아와의 조우, 화해, 연합이 이루어진다. 


일제시대 일본 땅에서 유학 중인 식민지 청년을 생각해 보라. 그는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 그가 어둠과 고통 가운데 있는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연약한 청년의 시를 읽고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그 시편들이 어둠을 밝히는 조그만 등불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도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듯해도, 조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 "천명(天命)"에 순종해서 길을 간다면 어둠을 조금 밝힐 수 있는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빛들이 모이면 아침이 시대처럼 도래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태복음 5:14).

 

오늘도 남의 나라,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린다. /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습관을 고치는 부끄러움 (베네딕트의 규칙서)

한 줄 묵상 2013.01.09 06:00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맨 마지막 자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자리에 세우도록 결정한 것은 그들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함으로써 부끄러움을 느껴 [지각하는] 습관을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ch 43, 7. (서울: KIATS, 2011), 88.



베네딕트는 그의 규칙서에서 야간기도(Vigil) 시간에 늦는 수사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져 별도로 지정된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을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부끄러움'을 느껴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마귀가 틈을 탈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인류가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느낀 때는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죄를 짓고 자신들이 벗었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벗은 몸' 때문이 아니라 '벗은 영혼'으로 인해 부끄러워 해야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정작 부끄러워 해야할 것에는 뻔뻔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에는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구형 휴대폰, 낡은 자동차, 값싼 옷이나 가방 등에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낡고 때묻은 '습관'으로 인해 얼굴과 마음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워 해야 하지 않을까? 


올 한 해 내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드러나게 될 것이다. / 바람연필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 윤동주 <참회록> 일부

posted by 바람연필

애기의 새벽 (윤동주)

한 줄 묵상 2012.09.28 17:42
  • 좋네요. 특히 "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이 맘에 크게 와닿습니다.

    새결새김 2012.09.29 00:41 신고
  •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비난하고 나 자신을 보면서는 체념하기는 했지만, 윤동주님처럼 아기처럼 나릉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울지조차 못하는 나의 마음의 단단함을 봅니다. "울게하소서 내 가혹한 운명을 두고....순교자들이여 나가 자비를 입도록 기도해 주소서..." 헨델의 어느 오페라 아리아의 한 대목이 맘 속에 울립니다...

    새결새김 2012.09.29 00:59 신고
  • 한 가정 안에서의 아기의 울음과 고난받던 민족의 삶을 하나로 바라볼 수 있던 마음의 눈을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울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BlogIcon 작은소리찾기 2012.09.30 02:35 신고

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938년 경

윤동주 (1917-1945), 《정본 윤동주 전집》(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96.



  

이 시에 나오는 우리집은 닭 한 마리도 키울 능력이 없는 매우 가난한 집이다시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이처럼 가난하고문명도 뒤처져있지만 우리집에 있는 것이 있다그것은 우는 애기이다우리집에 새벽이 오는 것은 시계가 울리기 때문이 아니라닭이 울기 때문이 아니라애기가 배고프다고 울기 때문이다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새벽이 되면 애기가 젖달라고 운다라고 써야 한다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애기가 젖 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새벽이 된다고 노래한다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울 때 찾아 온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가난하고 낙후된 우리집은 일제 식민지 시대 힘없고 약한 우리 나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새벽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애기는 당시 힘이 없던 한국인이다흥미로운 것은 윤동주 시인은 우리집의 새벽곧 조선의 독립은 한국인들이 울 때 온다고 노래한 것이다시편 137편에 나오는 것처럼 울음은 단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다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이며 호소이다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다울어 보지 못한 사람은 위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4)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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