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절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양원)

한 줄 묵상 2015.06.16 13:21

밤마다 꿈속에 당신의 마음의 근심과 몸이 불안한 것을 보았는데, 아마 근심 걱정에 눌려 병이 된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은 절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이랑 병 중에 병이요, 죄 중에 큰 죄가 되는 것이외다.


-손양원 (1902~1950), "부인 정양순 사모에게 보낸 편지 2," 《손양원》(홍성사, 2009), 131.


손양원 목사님이 1942년 10월 14일 옥중에서 쓴 편지의 일부이다. 매달 정해진 날에 면회를 오던 아내가 찾아오지 않자, 그는 밤마다 꿈속에서 불안과 걱정 가운데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모님의 불안이 목사님께 전해졌다기보다, 목사님 당신의 마음속에 걱정이 자라났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아내에게 절대 걱정하지 말라며 당부하는 말씀은, 곧 당신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기도 할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에 의하면, 걱정은 "병 중에 병"이며, "죄 중에 큰 죄"이다. 왜냐하면 걱정 우리의 자비로운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기도할 때에 걱정(care)을 하나님께 내어 던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를 돌보시기(God do take care of us) 때문이다. 머튼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도 중에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자신이 직접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손양원 목사님도, 뛰어난 영성가 토마스 머튼도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 그들에게도 걱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 걱정에 휘둘리거나 정복 당하지 않았다.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 던졌다. 혹시 오늘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았을 때 근심과 염려가 먼저 떠오른다면, 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거나 안절부절하게 된다면,  그 걱정들을 하나하나 주님께 아뢰자. 그분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 주실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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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 무엇을 기다리나 (우찌무라 간조)

한 줄 묵상 2015.03.21 17:19
오, 주님이시여, 나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을 인정하고, 당신의 생명으로 채움받고자 당신 앞에 나아옵니다. 나는 부정합니다. 나를 정결케 하기를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옵소서. 당신은 선함 그 자체이시며,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둠일 뿐입니다. 나의 불결함을 보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아멘.

-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서울: 홍성사, 2002), 241.


해가 길어지는(Long<Lancten) 봄에 오는 절기라하여 Lent라 불리는 사순절,

나는 이 봄, 무엇을 기다리나.

겨울을 든든히 이기고 어깨 쭉 편 붓꽃인가?
고운 향 가득 품고도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라일락인가?
지난 겨울 잘 이겨냈다고 봄 눈꽃 흩날리며 위로해주는 머리 하얀 벚꽃인가?

이 사순절,
봄 꽃보다 봄 은혜를 기다린다.
봄 향기보다 예수 향기 사모한다.
더 드러내기보다 더 죽고 더 약해지길 갈망한다.
나는 예수 생명 없으면 어둠이요 부정이기 때문이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이경희


posted by 바람연필

도덕적 개인, 비도덕적 사회 (마틴 루터 킹, Jr,)

한 줄 묵상 2014.05.30 08:51

각 개인들은 윤리적으로 판단하려 하고 불의한 태도를 벗어 버리려 한다. 라인홀드 니부어가 잘 지적했듯이 집단은 개인들이 더 비도덕적이다.

- 마틴 루터 킹 Jr., “Letter from Birmingham Jail” (1963).


그러므로, “하늘 뜻이 이땅에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매일 올리는 그리스도인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고 매일 간구하는 우리들은, 개인적 차원의 죄와 악, 내면적 차원의 선악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넘머, 사회 구조와 집단 간의 역학 관계에 파고 들려는 죄와 악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악을 몰아낼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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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결새김

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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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해'맑은우리

믿음의 눈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7.15 11:45

그리고 나서 나는 (마음의 눈으로) 한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비전에서 나는 그분께서 만물 안에 계신 것을 보았다......만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죄는 없다......(따라서) 죄란 그저 없는 일이다(sin is no deed).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11.


'계시' 중에 줄리안은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I saw God in a point"). 

줄리안이 보니, 모든 것에 하나님이 계셨고("He is in all things"),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there is no doer but He"). 


'궁극적 실재'를 일견하게 된 줄리안은, 그 순간,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마디 한다: "죄/악은 없다." Sin is no deed. 


말이 되는가?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이 죄와 악이건만. 

말(logic)이 되지 않는 말이다. 

'말씀'을 만나 놀라 자빠진 말(theo-logic)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신비를 만난 영성가들의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꼬리를 잡는 식으로는 캐치할 수 없다. 

죄/악은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 것(no-thing)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every-thing)은 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악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고 말했던 어거스틴처럼, 줄리안도, 죄라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헛' 일(no deed)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는 '일'이 못된다. 죄는 '짓'일 뿐이다. 헛짓. 


죄악 천지인 세상을 살았으면서, 죄와 악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던 그들 영성가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세상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다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으며, 믿음이란 바로 그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보는 눈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에게도 그 눈이 있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이 죄악 세상에 찌든 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벌써부터 그 안에 들어가 뛰노는 어린아이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짓들!--에 기가 죽고 의가 꺾이고 풀이 죽기 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살리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하고 계신 일--"새창조"의 일!--을 찬양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영광과 기쁨에, 세상 사람들 눈에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그 눈이 있는가? 그 믿음이 있는가?  /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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