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자리에 돌아와 보니, 사과 하나가 성경책 위에 얹혀있다. 친구가 먹으라고 놓아두고 간 모양이다. 곱기도 한 마음 씀씀이. 사과만한 즐거움에 마음은 벌써 단맛을 느낀다. 맛깔스런 빛깔, 탐스런 맵시……. 사과가 원래 이렇게 예뻤나!


향기가 이제사 닿는다. 색보다 늦게 와서는 먼저 온 색을 무색케 하려는 듯 내 눈을 감긴다. 아, 전에도 몇 번인가 내게 닿은 적이 있는 이 냄새, 이 느낌, 이 젖은 냄새……. 


자연의 냄새는 젖어있다.


물기는 자연의 냄새를 자연의 냄새이게 한다. 사과의 향을 사과 향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물기. 향수(香水)의 태생적 한계는 아마 그 ‘물기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향수(香水)에도 물(水)이 들어있겠음은 물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예사로운 H2O일 뿐. 영혼을 적셔오는 자연의 물기를 아는 이, 그 누가 그저 자연을 두고 예사롭게 젖어있다고 말하랴. 자연을 적시고 있는 물은 H2O 가 아니다. 그 물은 그도 젖어있는 물, 영원이라는, 생명이라는 별명을 가진 물에 젖어있는 물이다. 생명은 물을 적시어 예사롭지 않은 물이게 하고, 그 물은 자연을 적시어 자연을 자연스럽게 한다.


이 물은 자연의 피다.


H2O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이 물이 될 수 없고, 향수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장미향을 내지 못하며, 내 옆에 앉은 화장 진한 여자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사과 향을 낼 수 없다. 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문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주먹만 한 크기의 이 자연은 나를 좀처럼 내 문명 세계의 작업-독서-으로 다시 돌려 보내주지 않을 심산인 듯하다. 내 문명화된 책상 위를 도발해 들어온 요 주먹만 한 자연. 왜 사과는 내게 ‘도발’인가? 경건치 못하게 내 가죽 성경 위에 떡 앉아있었던 사과.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 색깔과 냄새로 가득 찬 어느 시골 교회당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느 한 싱그러운 아가씨가 불쑥 들어온 느낌. 나는 당황했다.


왜 당황하는가? 나는 당황하고, 또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당황한다.


나는 사과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싱그럽다. 너무나 싱그러워 나를 위협한다. 그것은 너무나 위협적으로 싱그럽고, 너무나 싱그럽게 위협적이다. 그것은 너무나 ‘생명’과 가까이 있다. 내가 아직 알고 있지 못하는 세계에서 왔다. 그 세계의 물기를 흠뻑 담고 왔다. 그것은 내게 낯설다. 나와 너무 다르다. 나는 그것을 모른다. 내 책상 위의 문명--몇 권의 책들, 잡지, 신문 그리고 영어사전--이것들은 나에게 익숙하다. 나는 그것들을 알고 있고 나는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과를 다룰 수 없다. 이 사과는 내 손아귀 밖에 있다. 내가 결코 나의 것으로 먹어버릴 수 없는 무엇이 이 사과 속에는 있다. 나는 이 사과를 모른다. 이 사과는 내게 너무도 낯설다.


심지어 나는 이 성경책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그것은 대한성서공회가 찍어내었다. 나는 이 사전이, 이 책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그러나 이 사과는,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익숙하지 못한 세계에서 왔다. 그것은 미지의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농부와 과수원은 이 사과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이 사과를 내게로 실어왔을 뿐. 사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이 사과가 내 책상 위의 다른 모든 것들과 그렇게도 다른 것이다. 그렇게도 다른 색깔, 풍취, 향기, 분위기를 내뿜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놀란다. 두려워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하며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사랑한다. 경외를 닮은 기쁨이 나를 침묵시킨다.


이 사과는 나의 위장을 드러내버린다. 이 사과는 내게 말하는 듯하다. 아니 누군가가 이 사과를 통해 내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너는 지금껏 많은 교육과 교양을 통해 이 책상, 이 책들에 어울리는 존재로 너를 만들어왔다. 이 책들, 이 책상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 너는 무던히도 애써왔다. 그러나 보아라. 너는 이 사과에 어울리지 않는다. 너에게는 책 향기, 대학 향기, 종교인 향기, 남자의 향기, 교양의 향기가 나지만, 결코 사과의 향기가 나진 않는다. 너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결실이지만, 너는 다만 결과일 뿐이다. 사과는 생명의 결실이지만, 너는 인위적인 결과일 뿐이다. 사과는 영글어온 것이지만, 너는 그저 모양을 갖추게 됐을 뿐이다. 사과는 기쁨이지만 너는 긴장이다. 사과를 보면 사람들은 좋아하고 향기를 맡으려 하지만, 너를 보면 사람들은 다른 얼굴을 써야한다. 사람들은 사과를 만지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은 너를 만지고 싶어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사과의 향기를 가까이 맡으려 하지만, 너의 향기를 맡으려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뿐이다. 너는 사과 맛을 내지 못한다. 사과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런데 너는 과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일까? 너는 타자에게 사과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너는 과연 살아있는가?


마지막 질문이 나를 침묵케 했다. “나는 과연 살아있는가?”


사과는 생명이다.


하지만 나는 사망이었다.


나는 사과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살아날 수 있는가?

......


(대학생 시절 적은 미완의 글)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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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그리움이 말을 걸어올 때

친구야!


여름을 알리는 빗소리가 반가운 이른 아침, 오늘따라 네가 참 보고 싶다. 지난 번 너를 보려고 어려운 길을 찾아간 날, 짧게 얼굴만 마주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과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빗소리에 취해 글을 불러내는구나


, 이번 달에 세 번에 걸쳐서 비슷한 꿈을 꾸었다. 아빠에 관한 것이야. ‘아빠가 내 삶에 던지는 화두가 무엇인지는 너도 익히 알고 있지? 그 꿈에 내가 어릴 적 참 많이 좋아하던 동화 속 인물 키다리 아저씨같은 사람이 등장했어. 나는 어둠 속에서 밝은 쪽을 향해 계단을 통통통 올라가고 있었는데, ‘키다리 아저씨가 내 목덜미를 휙 낙아 채더니, 나를 꽉 안아주었어. 다리가 들려 동동 안겨있는 그 품이 얼마나 크고 깊던지……. 꿈인데도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무척 좋아지더라. 그때, 어둠 속에서 이 아저씨가 조용히 묻더라. “아빠를 보면,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니?” 이 질문이 내 마음의 바다, 그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던 한 소리를 끌어 올리더라


그리웠어요!” 


마음과 마음이 깊게 부딪혀 있는 느낌에서 솟아난 말. 꿈에서라야, 아니 꿈이기 때문에 비로소 뱉어낸 말. 이 한마디를 뱉어내곤, 그 품에서 엉엉 울었다. 내 삶에 지는 꽃잎처럼 흩뿌려진, 아쉬움, 회한, 원망, 미움, …… 그 모든 것 뒤에 숨은 말은, 사실 “그리움이었어. ()으로 응어리진 그리움. 기회가 주어져도 이젠, 다시 그때처럼얻을 수 없는 내 유년기의 상실에 관한 것, 그 블랙홀에서 올라오는 그리움. 그 기운이 때때로 불시에 말을 걸 때가 있는데, 이번처럼 노골적인 것은 첨인 듯싶다. 자랑할 훈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닌 척 할 필요도 없는, 나의 자화상. 그래서 친구야. 그 뻥 뚫린 가슴을 지닌 채 하나님 앞에 좀 오래 앉아 있었다. 좀 오래도록……. 예전과 달리, 요즘엔 라는 질문도 없어졌어. 그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는데, 그냥 알 수 없이 따뜻해진다. 앉은 자리에서 사람 냄새 폴폴 나는 것이, ‘앉은자리 꽃자리라는 시 한 구절도 생각나고. 참 많이 편해졌다. 늙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어.


영신수련에 담긴 기도 하나가 생각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아직도 내게서 생명을 거두지 아니하셨음을 깊이 생각하는 자비하심의 담화기도(《영신수련》, 61). 삶은 늘 깨우쳐지기를 기다리는 신비라는 것. 그리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그 신비’ 속으로 우리가 매일매일 초대받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 그래서 다음엔, 삶이 내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설레움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왜, 네 생각이 나는지…….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보여줄 네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가 있어 고마운, 너의 친밀한 벗으로부터.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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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드라마를 이젠 끝내자

뭉크 <절규(The Scream)>


     왜 후회할 짓을 자꾸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과연 이 짓을 그만 둘수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언제나 자비롭게 용서하고. 또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량없이 용서하는 이 드라마를 우리는 언제까지 찍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쁜 죄인 역할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우리를 '단지' 용서하시기만 하는 그런 역할을 보기가 이제 좀 슬슬 지겨워지지 않는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겠는가?  "무슨 신이 자기 사람을 맨날 나쁜 역할에 앉혀 두냐?" 고.

     우리가 인간은 응당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 여기고, 죄인의 역할을 당연시하고 안주할 때, 제기되는 가장 큰 도전은 그러한 안주가 하나님을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관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안 받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죽을 맛인지 아닌지를 떠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믿지 않는 세계에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 자신보다 더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면, 아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당위적으로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진지하게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이 불신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고, 그분의 이미지를 좀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우리 하나님께서 이 진부한 드라마를 그만 찍어도 되시게, 이제 뭐라도 좀 해 봐야지.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배를 도둑질하던 이야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다. 도둑질이 재미있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꾸 반복하는 그것에는, 반드시 '쾌락적 요소'가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그래서 하고 나면 후회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맛에 끌려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어떤 쾌락이 있는지를, 어떤 맛에 끌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자기가 끌리는 그 쾌락적 요소를 진실로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유치한지 확 다가온다. 내가 묶여있는 쾌락이 밝혀지면, 혐오감, 무질서함, 지긋지긋해 하는 것, 싫어하고 밀쳐내고픈 경험이 올라오는데, 이 환영하고 싶지 않은 총체적 불쾌감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한다.  《영신수련》에 따르면, 첫째 주간에 자기 변화를 위해 받아야 할 아주 귀한 은총이기에 더욱 깊게 깊게 받아내려야 한다.


"첫째, 내 죄들에 대한 내적 인식과 혐오감. 둘째, 내 행동의 무질서함을 느낌. 이를 지겨워하고 개과천선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로써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을 미워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63번.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죄, 개인적이고 조직적인 죄를 너무나 밝히 보고 있다. 또한 거기서 올라오는 엄청난 혐오감과 무질서함, 그리고 이제 참을 만큼 참은 지긋지긋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며, 미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괴로움과 어른들에게 기대했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 앞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큰 칼 하나가 가슴으로 푹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듯이, 차가운 철 기운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절규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도 흘리지 말고, 더 깊게 깊게 받아내자. 쾌락을 얻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하자. 그래서 더욱 깊이 깊이 혐오감을 느끼고 지겨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자. 그리고 그 힘을 모아, 반드시 개과천선해 내자.

반드시!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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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한숨과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감 때문에 다리가 휘청이고 무릎을 땅에 꿇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게 될까? 특히, 그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어쩔 수 없이 꼭 따라 붙는 그림자와 같다면, 나와 당신을 위해 고통을 포기하고 도망치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함께 가자고, 도와 주겠노라고, 나도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자고, 힘을 보태고 격려하게 될까? 아니면, 고통당하는 그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그를 떠나버리게 될까? 《영신수련》 첫 페이지에 실린 오래된 기도문 "Anima Christi"[그리스도의 영혼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 라고.


그리스도의 영혼은 (Anima Christi)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구하소서.

그리스도의 성혈은 저를 취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물은 저를 씻어 주소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하소서.[각주:1]


Diego Velazquez,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1632)의 부분


      평상시에는 주님과의 관계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서, 제대로 살고 있기나 한 건지 긴가민가 할 때가 많다. 싸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열렬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막상 혼자 쓸쓸히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떠올려 보면, 그리고 제자들이 떠나간 깜깜한 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 마침내 십자가 길을 처참히 걸으시는 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고, 주님 곁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고, 주님께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강한 갈망과 용기가 솟아 오른다. 


     "저는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저라도, 저만이라도 그 곁에 머물러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겁도 많고 두려움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거 상관없어요. 저는 주님을 못 떠나요. 안 떠나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던 한 벗의 고백을 들었을때, "Anima Christi"의 "그리스도의 수난은 저를 강하게 하소서(저에게 힘을 주소서)"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 우리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을 강하게 깨워내는 것이리라.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따뜻한 봄볕이 부드럽게 녹여내고 새순을 틔워내는 것처럼.


다음 주면 고난주일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Anima Christi)"을 벗 삼아, 주님의 수난머물러 봐야겠다. 특히, 수난의 현장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삶이 구체적으로 발견되길 청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소서!"


/ 해'맑은우리 주선영


  1. 작자 미상, "그리스도의 영혼은" 중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지음, 정한채 옮김 ,《영신수련》, 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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