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연말이라 바쁘다. 내년에도 다시 볼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다시 못 만날 사람들처럼 송년모임을 한다. 일 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것은 좋은데 너무 많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지만, 너무 많다 싶어 마음이 쓰인다. 분주한 연말인데 멀리 계신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마음은 복잡하고 생각은 많아진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일사천리가 아니라 꼬여만 간다. 함께 동역하는 분들이 정말 귀하게 섬겨주고 있는 데도 간혹 일어나는 사소한 부딪힘에 얼굴빛이 달라진다.


     ‘자기 일만 문제없이 해 주어도 신경이 덜 쓰일 텐데. 나 좀 도와주지. 진짜…….’  마음에 요철이 생긴 듯 덜그덕 소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난다. 말 끝에 까칠함도 스물스물 올라오려고 하니 내가 일년 동안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것이 맞을까? 자괴감이 든다. 한 해를 잘 못 지낸 것 같은 자책에, 바쁜 일정으로 인한 피곤함,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공허까지……. ‘연말증후군’일까? 곰곰이 살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난 가을에도 비슷한 내적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주변 상황이 불만스럽고 내가 충분히 도움을 받고 살아가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삐죽거렸던 순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분주함을 넘어서는 근원적 움직임 때문이었다.


     지난 가을 묵상기도로 영적 여정을 함께 걸으며 수련원을 섬기는 봉사자들과 유럽에 있는 개신교 공동체들을 순례했다. 열흘 동안 네 개의 공동체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먹을 곳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긴 이동 중에는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침에 누룽지와 따뜻한 물을 함께 준비해서 텀블러에 넣어두면 점심 먹을 때쯤 따뜻한 밥이 되어 있었고 가져간 밑반찬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나에겐 그런 점심 시간이 좋지만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텀블러를 준비했는데 나만 빈손으로 가서 다른 집사님과 밥을 나누어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숟가락 하나만 들고 와서 친구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 먹던 더부살이 꼴이 되어버렸다. 


     휴게소에서 피크닉 매트를 펴고 낭만적으로 식사를 했지만 나는 그 집사님께 은근히 미안해져서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마음을 알고 있던 걸까?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한 분이 빈손으로 왔다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각자 자기 것을 꼭 가져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빈 그릇에 누룽지를 담고 텀블러의 따뜻한 물을 조금씩 나누어 숭늉처럼 먹는다고 생각했지, 각자의 텀블러에 누룽지를 넣고 물을 부어서 밥이 되도록 준비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준비물을 설명하는 자리에도 못 가고 자세히 챙겨보지도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퉁명스런 대답에 이어 짧은 어색함이 흐를 때, 나는 마리아자매회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자매가 예수님의 수난기도처 앞에서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 내가 불만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했지만 내 책임은 아주 소소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다. 억울하다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비모임에 가지 않고 자세하게 묻지 않은 내 잘못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인정하지 못했다. 대신 ‘그 때는 출간하려던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던 시점이라 힘든 때였어.’ ‘세세하게 잘 설명해주었다면 나도 준비를 했을 텐데.’라며 항변하고 있었다. 나는 폐를 끼치는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나에게 유익하게 구성함으로써 나를 변호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수용해야 하고, 내게 동의해야 한다는 지극한 자기중심성을 드러낸 셈이다. 조금 껄끄러운 수용이라도 그게 얼마나 큰 은총인가? 그런데도 나는 오만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제공이 부족했으니 수용은 은총이 아니라 당연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해지며 은총은 사라지고 당연함이 지배한다. 당연한 일들도 잘 진행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아 간다. 우리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다. 내가 얼마나 잘났고,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내가 얼마나 자격 있는 지를 입증하려고 싸우고 애쓰고 우겨댈 필요가 없다.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살아가면 충분하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해 허덕이는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이 성탄의 은총이다. 성탄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실 만큼 당신은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낮고 비천한 자리에 있는 죄인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인 하나님의 존재가 성탄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탄의 은총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도 입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연말증후군'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성탄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영성 생활 > 수필 한 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구멍, 겨울의 숨구멍  (0) 2017.01.25
"속히 내려오라!"  (0) 2017.01.08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0) 2016.12.23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0) 2016.09.21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0) 2016.04.21
Pick Me Up?  (2) 2016.03.23
posted by 진정한 열망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른 날보다 오늘, 벗들이 많이 모인 것은. 새벽 기차를 타고, 또 아이들을 맡기고,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늦은 오후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수선을 피웠을 지 생각하니 맘이 짠하다. 벗들은 십자가를 향해 앉아 기도 삼매에 잠겨있다. 벗들 사이로 흐르는 적막하고 고즈넉한 기운이 참 좋다. 대나무 숲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침묵 사이로 벗들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들을 뭐라고 부를까? 그래, 위로가 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들고 한걸음에 달려온 천사들이다.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이와 비슷한 체험을 영적 위로라고 불렀다. “위로란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나며 영혼이 창조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 자체로서만 사랑할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을 창조주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또한 자기 죄나 우리 그리스도의 수난의 아픔이나 직접 하느님을 위한 봉사와 찬미에 관련된 다른 일들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과 창조주 주님 안에서 영혼을 침잠시키고 평온하게 하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부르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인 기쁨을 위로라고 한다.”(『영신수련』 316번).

 

     그저 그렇게 기쁘고 즐겁거나 감동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 후에 흔히들 말하는 은혜 받았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영적 위로란 자기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전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하게 되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영혼 안에 스며들어 그 중심에서 안정감과 평온함으로 우리 전체를 물들여 간다. 바짝 날이 선 긴장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어렵게 보이던 이 세계에 대한 좌절로 앞이 캄캄하던 우리의 영혼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작은 촛불들 앞에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은 무수하게 반짝이는 그 작은 빛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함께 하고 있는 누군가가 밀어주는 힘에 의해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남을 느끼게 해 주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반드시 방향성을 지닌다. 나와 너, 우리를 포괄하며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향해 인간 영혼을 고무시킨다. 체험의 강도 차이는 있어도 영적 위로는 분명한 방향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인다는 것을 흐른다고 해도 좋겠다. 깊은 산속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은 시냇물을 지나 개천으로 강물로 끊임없이 흐른다. 개울물일 때는 작은 바위도 돌아 넘기 어려워 여울물이 되어 빙빙 돌기만 하는 것 같고 때로는 흘러가는 힘이 너무 약해 고인물이 되어 버려 물의 인생을 아쉽게 마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물은 흘러가면서 자기를 점점 더 넓혀가고 주위의 땅을 옥토로 만들며 온갖 생명들이 살아갈 기운을 부여한다.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자기를 흘려 보내면서 끊임없이 자기 주위를 살려낸다. 이처럼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적 위로 체험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영적 위로가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한 축을 분명히 담당한다는 점은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걷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처에 넘기 어려운 큰 바위가 출현하고 길이 막히거나 끊기기도 한다. 장애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가장 큰 장애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아로 움츠러들면서 고립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다. 고립된 자아는 고집스러운 자아가 된다. 어느덧 하나님 없이 위기 탈출을 모색하는 인본주의자가 되거나,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특별한 은총에 집착하는 마술주의자가 된다. 영적 위로는 고립된 자아에서 나를 이끌어 낸다. 그래서 세계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요즘 나는 영적 위로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경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방식으로서. 즉, 내 삶의 경험과 기도 체험이 영적 위로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 반대에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분별하기보다 나는 영적으로 위로가 되는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이냐시오는 영적 위로는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영적 위로를 주는 근원을 하나님과 그 천사들로 보았다(영신수련』 329번). 만일 어떤 사람이 생의 한 순간에 신비한 영적 존재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이제 다 그만 둘까 하며 축 쳐진 어깨를 끌고 늦은 밤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데, 집 앞에서 자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듯 한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가 자신에게 사뿐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고 고생했다고,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힘든 일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고 말해준다면, 과연 그 사람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만일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감동을 주는 한 존재로 선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영적 위로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천사 한걸음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오늘 유쾌한 상상을 한다. 우리 모두가 바로 지금 천사가 되기로, 신적 존재가 되기로 선택해 보면 어떨까? 각박하고 어수선한 이 세상이 온통 천사들로 가득하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하나님과 그 천사들은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 그리고 원수는 본래 그럴싸한 이유들과 교묘하고 한결같은 속임수로써 이런 즐거움과 영적 위로를 없애려고 애쓴다(영신수련』 329번). / 해'맑은우리 주선영



posted by 해'맑은우리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예배당 십자가 밑에 앉아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를 아룁니다. 얼굴 하나에 고통 한 아름, 이름 하나에 눈물이 고이는 까닭은 지금이 사순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흐려진 눈동자, 거절과 배신, 상실의 잔을 마셔야하는 그 씁쓸한 입맛 다심, 세속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자꾸 격려하며 수줍은 미소로 괜찮은 듯 돌아서는 그 뒷모습은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각기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사람인 이상 따라붙은 그림자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우리는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수녀원 입회 2년 만에 얻은 중병

피터 루벤스가 그린 아빌라의 테레사 (출처 :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1515년 스페인 출신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신비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녀는 여러 편의 저술을 통해 기도, 인간 의식의 변형 단계, 그리고 문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또한 테레사는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는 성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점이 그녀를 친숙하게 느끼게 합니다. 테레사는 1562년에 쓴 글, 그녀 스스로 『천주 자비의 글』이라고 부르기 원했던 자서전에서 자기 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각주:1], 당신도 아시다시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적잖은 고생을 겪었습니다.”(자서전40,21)                                   

   여기서 말하는 ‘고생’이란 그녀가 자서전을 쓰던 시기인 40대 후반에 겪었던 개혁수도회 창설을 둘러싼 종교·사회·정치적 핍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테레사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테레사는 이즈음 자신이 겪고 있는 거센 고통, 곧 참아 견디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때로 나는 산다는 것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도 고통도 없이, 통 모든 것에 대해 일종의 냉담 상태와 어둠 속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자서전 40,21)


  테레사는 평생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후 만 2년 만에, 즉 수도 생활 2년 만에 중병을 얻었습니다. “심장의 극심한 아픔은 몸서리 쳐지는 것”이었고, “날카로운 이로 심장을 물어뜯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기운이 전혀 없었고 맥이 풀려 입맛을 온통” 잃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열”, “고열로 말미암아 심경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도록 오그라들기 시작” 했다고 설명합니다. 

   육체적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우리에게 쉴 틈을 허용해 주지 않는 폭군적인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레사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순간도 쉴 수가 없어 마침내 큰 비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고 한탄했습니다(자서전 5,7). 심지어 극심한 발작 후에 3일 동안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고 장례준비를 하고 있던 찰라 그녀의 숨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 테레사는 3년 동안 “둥글게 말아놓은 실뭉치” 같이 침대에 누워서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서 보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잠시 고통이 멈추기만 해도 살 것 같은,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가 있을 때면 병세가 좀 나아지나보다 하고 생각”(자서전 6,1)하며 테레사는 기뻐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의 전환점을 이룬 날, 그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땅바닥을 기어갈 수 있기 시작했을 적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자서전 6,2) 


   투병 생활을 해 보신 분들, 혹은 육체적 고통 속에 계신 분들에게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저는 상상이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공감이, 어떤 분들에게는 간절히 일어나길 기대하는 한줄기 희망으로 들릴 말입니다. 저도 한 30년 전쯤 쇠도 씹어서 소화할 십대 중반에, 학교 등굣길에 꼭 건너야 할 육교 아래 서서 “내가 죽지 않고 저 육교를 올라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움큼씩 먹던 약이 몇 년에 걸쳐 점점 줄어들고, 어느 날 육교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고 난 뒤, 제가 걸어 올라온 계단을 돌아보고 울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끼친 해악은 건강 때문” 

   병에 대해 테레사가 초기에 보인 관점은 그저 받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점으로 일관합니다. 당대는 인내와 오래 참음이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때때로 억압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지만 테레사는 병 자체를 그냥 받아들입니다. 테레사는 “이 기간 동안은 줄곧 모든 것을 완전히 단념한 채로 지냈고, 처음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큰 기쁨마저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달갑게 받고 있었습니다.”(자서전 6,2)고 말합니다. 

   병이 주는 유일한 유익이 있다면, 가장 최소한의 것,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것만을 붙들게 하는 가난한 정신을 갖게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를 하고 지냈던 관계로 언제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해도 달갑게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자서전 6,2) 테레사가 오히려 투병 생활이 끝난 후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를 회고한 것에 비하면, 병상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 가운데 보냈다는 것은 아련한 소녀시절의 풋풋하고 순진한 첫사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것이 육체적 고통을 겪는 동안 얻어야 할 더할 나위 없는 삶의 보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여 순진하기까지 한 가난한 정신상태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얼마나 먼지요! 필요 없는 것들, 부차적인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 단 하나에만 마음을 기울이며 삶을 정돈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지요! 고통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저 끙끙 앓게 만들뿐입니다. 그저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아니면 고통만 벌컥벌컥 들이키느라 숨이 멎을 지경이 되니 말입니다. 

   고통은 철저히 당하는 자의 몫으로만 돌려지는 외롭고 고독한 심연입니다. 도와주고 싶고 돕기도 하지만, 함께 하고 싶고 함께 있지만, 혼자 겪어 내야만 하는 그 영역이 있기에 바라보는 자의 고통도 커져 갑니다. 그러니 고통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겪은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수는 없는 일입니다. 

   혼자 묵묵히 투병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어느 날 혼자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뜻의 일치”를 이루고 있으니 괜찮다던 마음에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병실에 누워 꼼작도 못하던 그녀에게 이른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면서 서로를 깨우는 수녀들의 찬미 소리를 듣고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은 무엇보다도 습관대로 고요 중에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자서전 6,2)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다는 갈망이 병을 고쳐달라는 간절하고 적극적인 기도로 바뀌고, 마침내 테레사는 기적처럼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일이 몰고 온 결과에 대한 테레사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더 잘 섬기고 싶었기에 건강을 원했습니다만, 내 영혼에 끼쳐진 갖은 해악은 그 건강에서 왔던 것입니다.”(자서전 6,4) 좀 더 건강하면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것이라는 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 그리스도’를 만나다.

   병을 털고 일어난 테레사의 이야기로 도시 아빌라가 들썩거렸습니다. 귀족들, 기사들은 기적을 몰고 온 젊고 아름다우며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테레사를 찾아 왔습니다. 모름지기 봉쇄수도원이었지만 종교가 일상인 시대에 수녀원의 응접실은 공식적인 사교 장소였습니다. 특히 180명이나 되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은 대단한 짐입니다. 테레사를 찾는 방문객이 많을수록 희사품도 많아지고 혹여, 귀족의 초청으로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딸려나가는 수녀까지 있으니 입을 몇이나 덜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소망했던 테레사도 “페스트와 같은 기분 풀이” 같다고 스스로 표현한 이런 교제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당시 이런 일은 크게 흠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레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가책을 토로해 보았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괜찮다고만 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한탄했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육체적 질병을 3년 만에 털고 일어난 것과 달리, 내적 고통은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의 성상” 앞에서 회심한 39세까지 계속 됩니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활은 무척 괴로웠습니다. ……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세속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일이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위로를 안겨 주는 반면, 세속 일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적 생활과 거기에서 오는 위로와, 관능적 생활의 향락과 기분 전환이라는 전연 반대되는 이 두 가지를 타협시켜 보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자서전 7,17) 


   하나님과 세속 사이의 괴로움 속에서 테레사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기나긴 세월 동안 시간만 보냅니다. 하나님과 세속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살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해야 할 싸움의 방식이 아닙니다. 테레사는 단지, 세속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자신이 싸운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세속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모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그런 끔직한 일에 대한 자각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십니다. 세속은 무(無)일 뿐입니다. 따라서 전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전부이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기울어지는 것이 우리 싸움의 방식입니다. 선택과 결단을 유보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된 행복을 괴로움이 좀 먹게 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테레사는 우연히 기도소에 놓인 “상처투성이의 그리스도를 표상한 성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테레사는 “그 상처가 말해 주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테레사는 하나님을 향해 삶을 완전히 정향(定向) 짓는 깊은 통회를 경험합니다.(자서전 9,1)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내적으로 고생한 것에 비례하여, 테레사의 결단은 아주 확고하게 나타납니다. 그후로부터 테레사의 영적인 걸음은 눈에 띄게 보폭이 커집니다.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의 문제점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한 테레사에게 이후로는 병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레사는 여러 가지 병을, 그것도 상당히 중한 병을 평생에 걸쳐 앓았습니다. 그렇다고 테레사가 병에 대해 완전히 초연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육체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써야 할 때, 기도를 하고 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간을 두어야 할 때, 테레사는 스스로 육체의 노예가 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테레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과 솔직하게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약함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다시 털고 일어섰다는 점입니다. 테레사는 그때마다 “주님께서 자신을 홀로 두지 않으셨고” 아주 “부드럽게 대해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서전 40,20)

   글머리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 자연스러운 갈망을 시작으로 개혁수도회를 창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테레사의 경우 육체의 질병은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이고, 내적인 고통은 더 나은 삶으로 깨어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었다면, 사역을 위해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내는 즉, 생명을 출산하는 산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방식을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혹자는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합니다만, 만일 그랬더라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을 까닭도 없었겠지요. 분명, 고통은 항상 도전을 제기하는 위험스러운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고통을 미리 두려워할 까닭도 없겠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를 염려하여 미리 보험 들 듯 안전한 환경을 위해 주문을 거는 소아적 신앙생활을 할 일도 아닙니다. 

   저는 테레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겨 쓰는 유비(類比)인 결혼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항상 사랑이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에 눈을 뜹니다. 테레사는 “네 소원, 님을 뵈옴이요, 네 두려움, 그를 잃을까 함이요, 네 고통, 그를 못 누림이요, 네 기쁨, 그리로 갈 수 있음이어야 하나니, 이제야 너는 크나큰 평화와 더불어 살으리라” (수녀들에게 타이르는 말, 69번)고 노래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이 몰고 오는 두려움을 넘어서 테레사는 예수님을 두 눈에 가득 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님을 사랑할 것을 오늘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님께서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이 오면, 님의 사랑에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이 봄눈처럼 깨어나길 청합니다. 


글쓴이  주선영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영성학을 전공했으며(Th.M), 현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과 <모새골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영성 생활에 안내가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테레사의 자서전은 도밍고회의 페드로 이바네즈 신부의 분부대로 쓰여졌습니다. 자서전은 이 신부에게 고백하는 형식의 문체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것은 결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시청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송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 곧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성으로 변질시키는 세태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직장에 적합한 '인재',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품'임을 오디션과 같은 입사 시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 받고 있다. 비단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라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도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혀지기를(picked up)"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유행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나를 뽑아줘"라는 간절한 외침이 배어 있는 듯해서 노래가 매우 서글프게 들린다. 더구나 이러한 정글과 같은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행을 '이용'해서 '과대 광고(공약)' 또는 '허위 광고(공약)'로 자신들을 포장해서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소명'(vocation)과 '사명(mission)'은 원래적으로 수동적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동성은 그 부름과 사명에 대한 응답에 있다. 곧 수동성이 우선이고 그 뒤에 능동성이 따른다. 앞서 말한 "pick me up"이라 외치는 노래도 자신이 수동적으로 선택되기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소명'과 '사명'이 갖고 있는 수동성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pick me up"이라는 문구에는 자신이 선택받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부름과 응답에는 자신이 부름을 받기에 매우 부적절한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청년 윤동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동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것은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허락"되어져야만 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했다. 최근에 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찬송가에 담긴 주님의 질문에 응답하던 때에는 분명 나같은 죄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그 결심 밑에 깔려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십자가는 내가 "져 주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당연히" 맡기셔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슬쩍 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시며 모든 제자들은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이 말씀 이전에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이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시인'으로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 들였다(〈쉽게 씨여진 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좋은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원하지만, 윤동주는 다른 이들이 피하는 괴로운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랬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세상은 상향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향성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캐스팅' 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 이틀 후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성금요일이다. 일 년 중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커지는 때이다. 그런데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 내가 결단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고마워하시며 얼른 십자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적 십자가는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부담스러워하며 억지로 받거나, 생색내며 받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한 줌의 재에 불과한 나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십자가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겸손히 두 손으로 받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귀히 여기는 이들은 사실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주기철)[각주:1]


/ 바람연필 권혁일


  1. 주기철, "오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서울: 홍성사, 2008), 159.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황혼 속의 〈재의 수요일〉 그리고 〈흰 그림자〉

하늘이 유난히도 맑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자, 기독교 전통 절기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회하는 40일 간의 기간이며,  그 첫 날인 수요일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되새기는 의식을 행한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과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유명한 시는 T. S. 엘리어트(Eliot: 1888-1965)의 장편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가 애독하던 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각주:1] 윤동주가 어떤 점에서 이 시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오늘이 재의 수요일이고, 다가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므로 T. S. 엘리어트의 시의 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읽어 본다.


재의 수요일


VI.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희망하지 않지만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며

꿈들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꿈이 교차하는 황혼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이것들을 바라기를 바라지 않지만

넓은 창으로부터 화강암 해변을 향해

하얀 돛들이 여전히 바다를 향해 날아 오른다,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again

Although I do not hope

Although I do not hope to turn


Wavering between the profit and the loss

In this brief transit where the dreams cross

The dreamcrossed twilight between birth and dying

(Bless me father) though I do not wish to wish these things

From the wide window towards the granite shore

The white sails still fly seaward, seaward flying

Unbroken wings


모두 6부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가 영적 절망과 고갈을 통과하여 개인적인 구원으로 향하는 내적 여정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위에 인용한 두 연은 이 시의 마지막인 6부의 시작 부분이다. 이 시는 T. S. 엘리어트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옮겨간 지 약 3년 후인 193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시는 때로 그의 '회심시'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의 엇나간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짧은 황혼 속에서 꿈들이 교차하고,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화강암이 빛나는 해변을 향해 믿음으로 비상한다. 이 순간 1부에서는 날기를 바라지 않고 허공만 칠 뿐이던 날개가 회복되어 희망찬 날갯짓을 한다. T. S. 엘리어트에게 황혼은 이렇게 전이와 비상의 시공간이었다.


황혼, 낮이 밤으로 바뀌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시적인 순간, 그래서 인생의 덧없음을 맛보고 동시에 영원을 소망하는 종말의 때…….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로 된 십자가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음성을 듣는 이 날이 바로 이 황혼의 때가 아닐까? 자신이 흙인 것과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부질없이 희망하며 서성거리고 말 것이다. 육지를 떠나 바다 위 하늘로 비상하지 못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T. S. 엘리어트의 시를 애독할 무렵에 쓴, 〈흰 그림자〉라는 시에도 '황혼'이 등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황혼은 깨달음의 시간과 공간이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 14.


시인은 황혼 속에서 땅검(땅거미)이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황혼과 동의어인 '땅검'은 해질녘의 어스름한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원래 시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황혼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일 때 놀랍게도 그는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듣는다. 곧, 황혼이 청각적으로 경험된다. 시인은 자신이 땅검의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이 지적인 총명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발견되는 깨달음, 또는 신비한 경험의 전제 조건은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는 것이다. "하루 종일 시든 귀"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은 그날 하루 많은 말들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비단 말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땅에서 살아가던 식민지 청년의 하루는 그의 영혼을 시들게 할 만큼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시든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황혼을 향해 그의 전 존재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그에게 새로운 영적 경험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시인은 황혼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는 이 시에서 그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결과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T. S. 엘리어트는 꿈들이 교차하는 황혼 속에서,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향해 비상하였다. 그러나 윤동주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낸다. 윤동주가 돌려 보낸 것은 '괴로워하던 나'이므로, 비록 '돌려보내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T. S. 엘리어트와 마찬가지로 미래 지향적인 결정, 또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돌려 보낸 나들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흰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원래 검은 색이지만, 시인의 그림자는 흰 색이다. 흰색의 그림자란 태양 아래서 볼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니 허상이다. 그러므로 결국 시인이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오래 괴로워하던 나들은 참된 나와 통합을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고장에 돌려 보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흰 그림자들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흰 그림자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는 흰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어둠은 자신의 허상인 흰 그림자를 발견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가 어둠을 부정적으로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시인은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발자취 소리가 들리는 땅검과 대조를 시킴으로써 그것들의 비현실성을 다시 부각시킨다. 우리는 이렇게 모양도 소리도 없는 비현실적인 나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 연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모든 것을 돌려 보낸 후 허전히 방으로 돌아와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양은 먹이 사슬에서 아래에 위치하는 매우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양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것은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풀포기나 뜯는 평화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또한, 풀포기를 뜯을 수 있는 양은 선한 목자를 가진 양, 그리고 그 목자를 신뢰하는 양이다(시편 23편 참조). 결국 이 시는 평화와 공존에 대한 신념, 그리고 목자에 대한 신뢰로 끝을 맺는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황혼 속의 깨달음 뒤에도 여전히 침략자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식민지 청년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괴로워 하는 나가 아니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으로 살고자 한다. 내적 변혁이 일어났다.


다시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절을 생각한다. 주일을 제외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최대한 마흔 번의 황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황혼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절망, 슬픔, 피로…… 이 모든 것들의 귀를 열어 황혼을, 석양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T. S. 엘리어트처럼 부러지지 않은 날개로 바다를 향해 비상하거나, 윤동주처럼 흰 그림자들을 돌려보내고 시름없이 풀포기를 뜯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2016. 2. 10. 수.


바람연필 권혁일



  1. 왕신영, 《윤동주와 일본의 지적 풍토》, 박사학위 논문, 고려대학교, 2006년, 56쪽.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인간다움의 회복 :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위한 기도 안내

   대림절을 시작으로 신앙력은 이미 한 해가 시작되었어요. 새해인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시간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갑니다. 신앙력과 세상력의 사이에서, 우리는 전자에 의한 고요한 기다림과 출발보다는 후자가 주는 힘에 더 압도되는 것 같아요. 모임도 많고 마음도 분주합니다. 커다란 박스를 꺼내놓고 1231일까지 한 해의 모든 것을 다 쓸어 담고 테잎으로 서둘러 봉인해 버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11일을 장모가 사위 맞듯 그렇게 가슴만 두근거리는 채 일거리에 쌓여서 정신없이 맞아들입니다. 지난 한 해를 음미할 시간도, 새해를 조용히 가늠해볼 시간도 빼앗긴 채, 우리는 고속도로를 그저 질주합니다. 지나온 길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며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는, 즉 성찰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위협하는 이 강력한 힘, 저는 이 힘을 악마적이라고 느낍니다.

    우리의 지난 한 해는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역사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 즉 사건으로 구성된 나 자신의 역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 구원이라는 말은 나란 사람이 존재하며 경험한 이 구체적 사건이 구원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체없이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지요.

    이 세상의 인간 실존은 흙으로 와 흙으로 돌아가는 소멸 속에서 허무감을 끌어안고 삽니다. 이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보상받기 위해 인간은 온갖 것에 집착합니다. 건강, 젊음, 미모, 물질, 권력. 거기다가 신앙인들은 한 걸음 더 하여 교리를 맹신하는 종교 활동과 자기중심적 기복 신앙, 막연한 내세 만능주의를 움켜잡습니다. 그러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자꾸 건조한 모래 바람이 이는 까닭은 집 지은 기초가 모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이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이끌려 울부짖을 일이 아니라, 그저 차분한 시선으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근거 없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그러하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온갖 흔적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흔적을 구체적인 내 삶의 역사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구원과 사랑, 거룩함에 대해 구체적인 감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일관된 방향과 그 방향을 향해 가속되는 안정된 힘을 느낍니다. 소멸에 관한 막연한 두려움은 근거 없음이 드러납니다. 이 근거 없음에 쫓겨 다녔다는 생각이 들면 어이가 없어지고 다시는 그렇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대림의 상징인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특징을 생각해 보세요. 한 분은 생각하시는 분이었고, 한 분은 광야로 물러나신 분입니다. 성탄의 시기와 한 해의 끝자락을 보내면서, 그것이 시·공의 물러남이든, 마음의 물러남이든, 좀 차분히 물러나고픈 갈증을 많이 느낍니다. 모래바람을 피하고픈 마음이요.

    그래서 지난 1224일에 저는 교회 식구들과 함께 하루 피정을 보냈습니다. 사역한 지 3년 반 만에 하루 피정을 열었으니, 저도 참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함께 기도하시는 분들께 성탄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맨 날 받기만 하다가 저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예전엔 잘 몰랐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는 것은 기쁨의 차원에 관한 말이 분명합니다. 주는 것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줄 수 있음이 얼마나 기쁜지요! 하나님께서도 성탄에 자기 자신을, 독생하신 성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렇게나 기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해의 끝자락을 저와 함께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 보시겠어요? 하나님 앞에 고요히 앉아 자기 존재를 들여다보는 모습, 저는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인간다움을 회복해 보시면 어떨까요?




기도 안내


    제가 안내하려는 주제는 한 해 동안 구체적인 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깨닫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속에 머물며 2016년을 가늠해 보기입니다.


* 먼저, 첫 번째 기도 자료를 준비합니다

    한 해 동안 내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 보세요. 예배와 영성 생활, 이웃 사랑(봉사), 교회 봉사, 가정, 직장, , 그리고 사회적인 부분까지 항목을 생각하며 크게 크게 적습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적어 보세요. 월별로 적는 것도 도움이 되어요.

 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 기도할 때는요. 각 사건들을 기억하세요. 공간들, 상황들,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거기서 올라오는 느낌들을 깊게 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세요. 성경 말씀은 호세아 111~4절 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기도하시면서 다음 요점으로 도움을 삼아 보세요.

1) 내 삶의 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깊게 보세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세요? 아니면, 뭔가 잘 못 된 것 같으세요? 이 질문과 더불어, 기도 중에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나의 느낌을 인식하면서,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과 대화(교제)하세요.

2) 한 해 동안의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이끄셨는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각 사건들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요? 나는 성숙해졌나요? 나는 자유로워졌나요? 나는 고요해졌나요? 사랑이 많아 졌나요? 관대해 졌나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졌나요? 신앙심이 깊어졌나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났나요? 부르심에 민감해졌나요?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나의 사건 속에서 나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셨는지 묻고 대화해 보세요. 아버지 같으셨나요? 엄마 같으셨나요? 선생님, 연인, 친구? 봄볕 같으셨나요? 시원한 소나기? 곡식을 익게 만드는 가을 햇살? 사람을 고요하게 만드는 한겨울 깊은 밤?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말씀을 떠올리면서 기도해 보세요.

3) 만일 그러하지 않은 여러 마음들이 든다면, 과연 하나님은 나의 지금 이 느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바라보고, 판단하고, 느낀 이 감정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 하신지를 물어보세요. , ‘나의 느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알려 달라고 하세요. 말씀을 떠올리면서 말씀의 내용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기도임을 기억하세요. 자기 분석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하나님 당신께 초점이 가 있어야 해요.


다음 사항을 주의하세요. 

1. 기도 주제를 잃어버리거나 분심(잡념)이 올라와서 딴 생각으로 흘러갔어도, 다시 기도하던 지점으로 돌아가시면 되요.

2. 어떤 느낌에 깊이 함몰되거나 압도되어 기도를 놓치지 마세요. 기도는 대화요, 교제예요. 즉 오고 가야 해요. 인내하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사건을 기억하고, 위의 1),2),3)을 알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집중하세요. 그렇다고 욕심을 내라는 것은 아니구요. 하나님께 반응하라는 말이예요. 감정을 견디지 말고. 특히,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거나, 지루하다 거나, 하는 것도 느낌이예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세요. 지루함, 당황스러움을 인내하지 마세요.

3. 기도를 아마 여러 번 반복해야 할 거예요. 각 항목으로, 아니면 시간 순서로, 한 해의 사건으로 충분히 기도하세요. 그리고 각 기도를 성찰하시고요.

이렇게, 한해가 점점 하나의 메시지로, 하나의 경험으로 감지가 되기 시작하면, 2016년 새해에 대한 기도로 나아갑니다.


* 두 번째 기도는요, 이렇게 해 보세요.

    성탄절을 보내면서 참 빛이신 주님이 오셨어요. 빛 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 빛 아래서 고요한 마음으로 2016년을 떠올려보세요.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뜻, 어떤 말씀을 가지고 다가 오실지를 기대해 보세요. 그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조용히 품고, 또 품으세요. 깊게 깊게 말씀을 고요히 품고 응시합니다. 이번 기도에서는 생각을 펼쳐가거나 느낌을 떠올리지 않도록 하세요. 그저 빈 마음에 말씀을 품고 품어 말씀 자체에서 오는 기운과 힘과 느낌에 고요히 머무세요. 분심이 올라오고 생각이 많아지고 집중이 흩어지면, 다시 말씀을 기억하고 품어 보세요. 그 끝에 내면에서 올라오는 통찰이나 느낌이나 하나님과의 일치된 교제를 거부할 이유는 없어요. 마음 열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말씀은 이사야 4319~ 21절입니다.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전체를 천천히 반복해도 되구요, 기도 중에 품을 말씀 구절을 선택하시면서 기도 시간 내내 품고 계셔도 되어요. 저는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이라는 구절로 이끌림을 받았어요이 글을 쓰는 오늘은 1226일인데, 저도 일주일 내내 첫 번째 기도를 하면서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새해엔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반드시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속에 머물면서 시작하려구요.

   이 기도 안내가 2015년을 애쓰면서 살아오신 여러분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요, 2016년에 뵈어요. / 해'맑은우리 주선영


posted by 해'맑은우리

희망과 사랑처럼 : 대림절 그리고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대림절(Advent). 기다림의 계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기다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전화나 편지를 기다리고, 용돈날이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교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그 외에 모든 이들은 어떤 좋은 소식을, 또는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특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탄절이 있다.


저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성탄절을 과거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로 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늘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탄 절기 속에 새겨진 기억과 기다림은 마치 급행열차 같아서 ‘과거’에서 출발해서 ‘미래’를 향해 달릴 뿐, ‘현재’라는 역은 요란한 소리와 먼지만 남긴 채 무정차로 통과해 버리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과거에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미래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 사이에서 매년 반복되는 대림절과 성탄절은 올해도 바쁜 연말의 일상 속에서 연말 풍경의 하나로만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교회와 백화점에는 성탄 장식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데, 대강절은 별다른 감동 없이 내 삶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Photo by Gustavo Ampelio di Borgogna



기차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작품 중에 〈사랑스런 추억〉이라는 시가 있는데, 1연이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1연의 시간적 배경은 초봄이고,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다. 이 부분만 보면 시인이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아니다. 5연에 이르면 시인은 동경에 있고, 계절 또한 봄이 끝나는 때임이 나타난다.


봄은 다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동경의 릿쿄(입교)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이 시 〈사랑스런 추억〉을 썼고, 시의 제일 마지막 줄에 “5월 13일”이라고 시를 쓴 날을 분명히 적어 두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현재 일본 동경의 조그만 하숙방에 있다. 그러면서 과거 어느 이른 봄 아침에 서울의 한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자신을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낯선 남의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시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이 배어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의 추억 속에 “옛 거리에 남은 나”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6, 7, 8연은 아래와 같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시인의 몸은 이미 서울을 떠나 동경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옛 거리에 남은 나”가 있어, 그가 오늘도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비논리적인 진술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상상력이다. 그것은 시인이 지금 과거의 나를 추억하고 있고, 과거의 기다림이 오늘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연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리던 ‘초봄의 나’를 5연에서 ‘늦봄의 나’가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고 있다. 곧, “희망과 사랑”이 ‘과거의 나의 기다림’과 ‘현재의 나의 그리움’을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기다림은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리움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기억과 기다림은 현재를 무정차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현재라는 역에 분명히 정차하고 있다. 그래서 “옛 거리에 남은 나”는 빛바랜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추억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 청년 윤동주가 기다리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기차를 기다렸지만, 기차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올 “누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가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는 그 “누구를”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다. 그 희망과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시인은 자신을 희망과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에는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바란다. 그리고 사랑이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렸던 “누구”는 현재에는 부재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누구”는 어떤 특정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재 함께 있지 않은 가족과 친구도 될 수 있고, 암울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근원적인 그리움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난다고 해서 완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고백록》의 첫 부분에 쓴 것처럼, 우리의 모든 그리움의 종착역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각주:1]





벌써 대림절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이 천여 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천사는 들의 목자들에게 오늘 구세주께서 너희에게 탄생하셨다[각주:2].”(눅 2:11)라고 전했다. 물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시고 육체적으로는 이 땅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마치 〈사랑스런 추억〉이란 시를 쓸 때, 일본에서 공부하던 윤동주의 몸이 서울이나 북간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번 성탄절에도 우리의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실 수가 있지 않을까? 오신 주님, 그리고 오실 주님을 향한 깊은 그리움 속에서 마굿간과 같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 아기 예수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의 아기 예수, 미래의 재림주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태어나시지 않을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그리스도를 출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모습 속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과 사랑처럼” 그분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면 말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고백록》, Book I, i (1). [본문으로]
  2. born to you / ἐτέχθη ὑμῖν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테트리스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고전 게임 중에 '테트리스(Tetris)'가 있다.  보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블럭들을 회전시켜 블럭을 빈공간 없이 채우면 그 블럭들이 없어지도록  만들어진 게임이다. 블럭을 더 쌓을 곳이 없으면 끝나는 게임이기 때문에 블럭을 주어진 공간에 잘 회전시켜 넣어야한다. 이 게임과의 첫만남은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갔던 오락실에서였다. 그 때 테트리스를 열심히 했는데 최근 아이들이 내 스마트폰에다가 비슷한 류의 게임을  제멋대로 다운받아둔 참에 다시 몇 번 해보게 되었다. 


Image from www.ea.com/tetris-ipad


    게임을 하면서 나는 20여 년이 지났지만 놀랄 만하게도 변하지 않은 나의 습성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비어 있는 공간에 정확히 일치하는 블럭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다. 만약 ㅁ자 형태의 공간이 있는데 ㄴ자 형태의 블럭이 나타나면 난 그 ㅁ자 공간은 비워둔 채 다른 곳에 ㄴ자 블럭을 쌓아두고는 ㅁ자 블럭이 나타날때 까지 기다린다. 원하는 블럭이 제 때 나타나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한 공간을 빼고 나머지는 다 채워졌는데 딱 한 공간에 내가 원하는 블럭이 나타나지 않아서 억울하고도 아쉽게 게임이 종료될 때가 많았다. 그럴때면 난 언제나 "그 블럭이 나오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테트리스를 잘 하는 어떤 친구를 보면서 나는 내 게임의 실패가 '원하는 블럭이 나오지 않은 운 없음' 이 아니라 '나와야한다고 생각하는 블럭에 대한 나 자신의 고집'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비어있는 공간에 딱맞는 블럭을 기다리기보다 조금 보기에 좋지않고 딱맞지 않아도 한 줄의 블럭이라도 줄일 수 있는 자리에 블럭을 채워넣는 것이었다. 모양은 이상하지만 쌓여있는 블럭을 줄여주었기에 오히려 어떤 모양의 블럭이든 받아들일수 있는 수용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후 나의 테트리스 방식은 바뀌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비슷한 류의 다른 게임을 하는 나는 여전히 비슷한 패턴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원하는 블럭을 기다리고, 내가 가진 공간과 맞지 않는 블럭은 불편하게 여기고 한 켠에 쌓아두며, 있어야할 블럭을 기다리다 결국 게임이 끝나버리는 패턴 말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내게 필요한 사람, 관계, 자리, 기회, 환경을 기다리되 내가 생각한 모양과 방법과 시기를 고집한다. 그러면서 제때에 모든 조건들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운이 없다고 말하며 그걸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지낸다. 주어지지 않는 것을 탓하느라 여러 번의 기회와 관계가 주어지지만  한 켠으로 밀어내고 치워둔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내가 원하는 그것을 고집한다. 내가 기다리던 긴 1자형 막대블럭이 나타나 한꺼번에 모든 블럭을 없애주는 기적을 기다린다. 그 사람, 그 자리, 그 기회가 모든 것을 기적처럼 해결해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사람에 대하여, 환경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답을 정해놓고 그것에 딱맞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나의 집착을 본다. 그런데 사실은 딱맞는 그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내가 가진 것을 애착하는 한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은 조금 덜 맞는 기회와 자리와 사람이지만 주어진 사람과 자리를 기쁨으로 수용해간다면 그것이 나를 더 균형있는 삶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애착을 내려놓는 순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posted by 진정한 열망

홀로된 너에게


여자 친구와 헤어 졌다고 금방 다른 여자로 그 자리를 채우지 말 것. 특히, 그 허전함 때문이라면 더욱 더. 연애는 쉬어서는 안 된다 거나, 그냥 한번 만나보자며 은근슬쩍 소개팅 자리로 끌려가지 말 것.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인연을 만들어 가지 말 것. 사람 사이의 관계는 까닭 없이 맺고 풀리는 것이 아니기에, 연을 맺을 때는 맺을 만한 이유를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풀렸을 때도 그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서, 앞선 관계, 즉 앞선 인연이 네게 전달해 주는 삶의 메시지를 다 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어디 남녀관계의 인연만 까닭이 있겠는가?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까닭이 있다. 특히, 네 존재 자체가 하나의 까닭이야. 네가 좀 머리 아파하고 늘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로 해 보면, “네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냐?”, “너는 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냐?” 하는 질문이야.

    이 질문에 대해 네 스스로 어떤 수준의 답을 결정하게 되느냐에 따라, 너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냥, 행복하게, 다른 사람들 살듯이 사는, 아니 엄밀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살라고 암묵적으로 주입해온 그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면, 너는 그저 마음이 힘들면 적절히 심리적 처방을 하고, 몸이 힘들면 휘트니스 센터로 달려가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학기 시작하면 공부 때문에 바빠지고, 어느 샌가 아픔이 적당히 잊혀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이랑 사랑에 빠질 것이다. 잘되면 결혼 할 것이고. 네가 소원하는 한 가정의 가장-요즘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이 되겠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 생활비에 교육비 씨름에, 은퇴 연금 씨름에, 행여 암이라도 걸릴까, 행여 퇴직이라도 당할까하는 불안감과 그 사이사이에 마치 메마른 가뭄 끝에 혀끝 축이는 느낌이 드는 출산, 아이들의 미소, 승진과 재테크의 보상 사이에서 시소를 탄다. 노동의 강도와 거기에 따라붙는 희생하는 느낌이 높으면 높을수록 여가 시간이 되면 미친 듯이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여흥에 탐닉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 것이다.

    하지만, 얘야! 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이야. 삶을 잘 못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을 이제 막 눈치 채기 시작한 네게 묻는다. 특히,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네 삶의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에 주목해 다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자, 앞으로 40-50년 후에 끝날 인생에서 무슨 그렇게 큰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다들 죽음이 앞에 있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반인들이나 신자들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지금 먹지 않으면, 지금 가지지 않으면,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욕심내고, 온갖 치졸한 짓으로 인간다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악다구니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게 아니면, 소박함을 가장한 소시민적 안일함 속에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평범함으로 안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냐?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그러니 묻는다. “얘야!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될 네 삶의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내가 자주 보는 아주 오래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 기독교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 따르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쉬움이 묻어나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또 지금 20대 중반에 끙끙대는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목적이 바로 영혼 구원이라는 의미다. 영혼 구원, 그게 바로 너와 나,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근원적인 까닭이다. 이 목적 하나에 온 우주와 천지 만물이 수고로이 운행을 한다. 이 목적 하나를 위해, 우리의 삶은 아주 치밀하게 계획되어 움직여 간다. 허투루 일어나는 일도 없고, 까닭 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도 없다. 우연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러니 삶이란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소중하며 감탄에 마지않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대에 참 둔감하다. 삶에 말려들어가 둔감해 지는 것이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둔감한 우리들이 그나마 반응하게 되는 때가 언제일 것 같으냐? 그래. 아플 때다. 괴롭고 힘들어서 며칠씩 불면의 날을 지새울 때. 자기 스스로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자기가 봐도 자기가 한심스러울 때야.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1599년의 문헌에도 이럴 때가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받고 있는 적절한 때라는 기록이 있다. 신앙심에 항상 자신이 없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16세기에도 그랬다는 말을 들으면 좀 위로가 되지? 한번 직접 봐보자.


사람이 지금 그의 신원()에 만족하지 못하고, 속내에 있는 고뇌나 밖으로부터 오는 괴로움 때문에, 말하자면 하는 일이 잘 안된다거나 친구들로부터의 업신여김, 또는 다른 비슷한 어려움 때문에 권할 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나쁜 버릇이나 타락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알맞기도 하다. 특별히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져서 그런 것을 알고 아파하고 고치기를 원할 때이다. 그 자신의 허약함을 바로 잡으려 할 때가 …… [영신수련을 하기에] 적절한 때이다.” - 영신수련 지침서, 정한채 역, 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5번.


    바로 이때가, “내 삶의 까닭은 무엇인가?”를 물을 때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이다. 네가 이 를 잘 살려가면, 너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될 것이야. 삶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영혼 구원을 돕기 위해서고,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단다.

    삶이 네 까닭은 무엇인가?”고 말을 걸어온 지금, 하늘이 가깝고 자기가 잘 보이는 좋은 곳에 머물고 있는 지금, 조용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주렴. 언제든 들어줄게. 기다리마

해'맑은우리 주선영

posted by 해'맑은우리

오늘, 식사는 잘 하셨나요?

오늘, 식사는 잘 하셨는지요?

체중 감량해야 하는데 왕성한 식욕에 이끌려 오늘도 후회가 남는 식사를 하셨다구요? 요즘 밥맛이 통 없어서 모래알 씹듯 하시다구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오랜만에 유쾌하셨다구요? 비즈니스 때문에 먹는 밥이라 가시방석이었다구요? 애들 밥 챙기느라 먹은 건지 전쟁 치른 건지 모르겠다구요? 오늘 저녁은 뭘 해 먹나 벌써 고민이라구요?

하루 두세 번의 식사, 그리고 사이사이에 먹는 음료와 간식. 우리는 참 많이 먹고 마시고, 거기에 기울이는 시간과 에너지도 상당합니다먹는 것과 영성 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즘, 저는 먹는 것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느낌들, 특히 죄책감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과식했을 때, 주부로서 식사를 잘 챙기지 못했을 때, 재료 준비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그냥 버려지는 음식물, 식사 때 오고가는 소리가 좋지 못했을 때는 하지 말아야 할 것해 버린 사람처럼, 해야할 것을 다하지 못한 사람처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무척 무겁고 불쾌해 집니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도움을 받아 볼까 합니다. 《영신수련》에는 먹는 것이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그만큼 잘 준비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봅니다. , 자기 욕구가 훈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절제입니다. 절제를 통해 자기 몸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을 찾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내면의 소리, 위로, 영감들을 잘 느낄 수 있게 깨어납니다. 무조건 정량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정상 체중이나 감량 목표를 정해 놓고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자기 욕구에 충실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두려움, 먹고 난 후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자기 만족이 교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절제는 하나님께 민감하고 민첩하기 위해서 자기 삶의 독특성에 근거한 자기에게 맞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냐시오는 이것을 먹는 방식에서나 양에서 스스로의 주인”(《영신수련》, 216)이 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 먹는 일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일체의 자유로움을 의미합니다.

매일의 식사 때마다 《영신수련》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식사를 통해 하나님께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고, 그 가까워진 거리만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먹는 일이 수행이라니! 얼마나 멋진 발상입니까 

이렇게 해 보세요.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그분이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분을 본받도록 힘쓴다.”(영신수련》, 214) 이렇게도 해 보세요. “또한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생각, 즉 성인들의 생애나 어떤 경건한 관상, 혹은 해야 할 어떤 영적인 일 등을 생각할 수도 있다.”(영신수련》, 215)  많은 수도원에서 공동 식사 중에 영성 고전,  특히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성경을 읽지요. 저는 글을 쓰는 지금도, 앞선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받은 충격이 생각납니다.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저희처럼 식사를 하셨다는 것 자체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일상적인 예수님의 모습엔 관심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마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네 신앙생활이란 것이 일상의 삶과 괴리된 특수 교회 생활로 고립되어 늘 절름발이 같이 절룩거리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예수님의 일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마음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우리 서로 먹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기로 해요. 밥 짓고 상차리는 게 일인 사람으로서 밥 한 공기에 온 우주만물과 거기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내길 기도해 봅니다. 제가 차린 밥을 먹는 식구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더욱 깨쳐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 식탁에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주님을 초대하고 싶네요. 주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하고 픈 말이 참 많네요. 기도하러 가야 겠습니다.

이번 글은 식사의 신비로움을 예찬한 신학자 칼 라너의 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산 것으로 화함이요, 어떤 존재물을 그 본성은 지킨 채, 더 고차원적이고 더 포괄적인 다른 현실 안으로 포섭함이다 먹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인식을 통해 주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사랑을 통해 세계라는 전체에 자기를 내맡기는 과정의 가장 낮은,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해야 한다.” - 칼 라너(Karl Rahner), 일상》 (분도출판사, 2003), 31-32. 

/ 해'맑은우리 주선영



'영성 생활 > 수필 한 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트리스  (0) 2015.10.12
홀로된 너에게  (0) 2015.07.09
오늘, 식사는 잘 하셨나요?  (0) 2015.05.27
성경 필사를 통한 영성 훈련  (0) 2015.03.26
하늘이 뿌연 날  (0) 2015.03.22
힘을 다해 서로 위로합시다  (0) 2015.01.12
posted by 해'맑은우리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