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필사를 통한 영성 훈련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며 교회 성도들과 함께 영성 훈련으로서 전교인 성경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필사를 하기 전 몇 주에 걸쳐서 설교를 통해 성경 필사의 역사, 필사 할 때의 규율, 그 필사를 통해 전해 내려져 온 하나님의 말씀들을 먼저 나누면서 이것이 단지 '쓰고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사명'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필사를 통해 전해 내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손을 통해 전해 내려왔지만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거의 오류가 없이 전해 내려올 수 있었나를 함께 생각해 보았답니다. 한 글자라도 정확히 지키고자 했던 그런 엄격함과 정직함이 결국 필사자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백되어졌습니다.


"말씀을 필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전달한다는 사명감과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금 멈추어 목욕하고 기도하며 다시 말씀을 시작하고……. 그러다가 한 글자 실수하면 멈추어 그날을 반성하며 또 내일을 준비하며……".

 

먼저 사순절 기간 동안 성도들끼리 나누어 신약성경을 필사하고자 신약 27권을 각각 종이 파일에 담아 자원자를 모집했습니다. 다행히 성도님들께서 27권 모두를 자원해 주셨습니다. 파일를 나누어 주면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찢으셔야 합니다. 다시 쓰셔야 합니다."하면서 필사자의 마음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 부터 90세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적은 인원이지만 전 성도가 성경 필사에 참여했습니다. 필사를 시작한 다음 날부터 한 두 통씩 전화가 걸려옵니다.


"목사님, 이거 저 도저히 못하겠어요. 쓰는 종이보다 버리는 종이가 더 많아서 이건 정말 낭비입니다"

"목사님, 뒷면까지 잘 쓰다가 막판에 틀렸어요. 마음에 시험이 들 것 같습니다."

"필사하면서 은혜가 되기보다는 낙심되고 시험이 됩니다. 한 글자 틀려서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또 찢고 성질이 더 못되지는거 같아요……."

 

정말로 저 자신부터 한 장을 넘기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맥락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조사나 어미를 잘못 적는 실수를 할 때마다 '그냥 넘어갈까'하는 내면의 갈등이 오기도 했습니다. 잘 아는 구절일수록 아는 대로 쓰다가 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확하지 않게 기억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원망과 불평을 들으며 첫 주가 흘렀습니다.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주쨰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교회일에 적극적이지 않던 한 노년의 집사님은 신약성서 네 권을 마치고 구약의 창세기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틀리고 종이를 찢을 때마다 처음엔 목사님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내 신앙이 이렇게 실수에 둔감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결국은 내가 틀린 것인데 남을 원망하기나 하고……."

"내가 틀릴 때마다 참아 주시고 또 다시 시작했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답니다. 실수 투성이인 나를 그 분은 불평하지 않고 또 다시 시작했겠지요."

"똑같은 부분에서 자꾸 틀리면 그 부분은 나에게 특별히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구나 생각하니 더 말씀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고 구약을 다 마치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연말에 성도들과 함께 필사한 것을 성경으로 만들면서 하나님께 성경 봉헌 예배를 드릴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고 설랩니다.  왠지 한 권의 성경으로 만들어질 저희 성도들의 노력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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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뿌연 날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대입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이 치밀하고 긴박하게 움직여 가는 고등학교 학사 일정, 거기서 뭍어나는 내신 경쟁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성적 일등이 아니고선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으로 굴욕적이고 비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들의 소중한 아이들이 단지 성적 때문에 자기 자신과 타인의 고귀한 존엄성을 평가 절하하지 않기를 바란다. 첫 모의 고사를 마치고엄마, 이 학교에서 진짜 어렵겠어.”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괜찮아. 대한민국 교육과정 시간표에 맞출 필요 없어. 하나님의 시간, 성령의 시간에 맞추자. 잘 될 거야.” 순간, 노르위치 줄리안의 “All shall be well.”이라는 말이 떠올랐다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던 중세, 줄리안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모성적 자비심이 절망에 빠진 중세를 어루만지며 치유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성령의 기운이 아닐까 싶다.

미세 먼지 탓에 봄기운을 느낄 새가 없다. 하늘은 뿌옇고 입안에는 먼지 맛이 돈다. 작년 4월, 바다가 우리 아이들을 삼키던 그날도 하늘엔 먼지가 많았다. 피곤하다고 투정하는 둘째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던 그날, 먼지가 많고 벌겋게 뿌연 하늘이 눈에 들어 왔다. 이런 하늘을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의 마음색도 이렇게 뿌옇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아줌마의 쓸데없는 잔걱정을 비웃듯이 새 몇 마리가 그 뿌연 하늘을 씩씩하게 재잘대며 가로질렀다. 그 녀석들이 더욱 힘차게 보인 것은, 그 녀석들에게 참으로 믿음이 간 것은, 하늘이 유달리 흐렸기 때문일 것이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큰 아이의 몸에서는 여고생의 웃음소리와 싱그러움이 감추어지지 않는다. 내 딸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날이 가까이 다가온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용서를 구하고 싶고, 깊이 머리 숙여 참회하고 싶다. 오늘 일기장엔 이렇게 쓴다. "그날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큰 슬픔이 올라온다. 용서를 구하고 싶고……. 참회하고 싶다."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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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다해 서로 위로합시다

'哀絶陽-남근 자른 일을 슬퍼하다'는 서글픈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것으로, 《목민심서》에는 이 시에 얽힌 사연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803년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채 사흘이 되지 않았습니다. 관아에서는 사흘박이 아이를 군포[각주:1]에 편입시키고 백성의 전 재산인 소를 빼앗아갔습니다. 악에 받힌 백성은 칼을 시퍼렇게 갈아 방으로 뛰어 들어 스스로 자신의 양근을 잘라버렸습니다. 다산은 “칼을 갈아 방으로 가 피가 자리 가득하니 자식 낳아 곤액 당함 한스러워 그랬다오.”라며 백성의 마음을 시에서 묘사했습니다.

"자식 낳아 곤액[각주:2]당함 한스러워 그랬다오."라고 울부짖는 바닷가의 한 백성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시대’ 청춘들의 우울함은 어딘가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덧 이런 아픔이 역사라는 긴 시간을 거쳐, 전 세계라는 오늘의 공간에서 온 인류가 함께 공유하는 정서가 된 것 같습니다. 깊은 상실감, 무기력과 슬픔, 그 아래 가장 막강한 힘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분노’로 여겨집니다. 이제는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어떤 명분도 없이, 또 원인점도 점차 모호해지면서, ‘분노’만이 오고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들리는 폭력의 소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타인에게 가하는 ‘무엇’은 결국 내 스스로에게 가하는 ‘무엇’입니다. 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전체’로서 존재합니다. 이 ‘무엇’의 자리에 ‘분노, 억압, 폭력’ 같은 말을 넣어 보면 이렇게 표현됩니다. 타인에게 분노하는 것은 나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해, 자살입니다. 좀 착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가하는 과정을 생략할 뿐입니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자멸입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지요.

스스로 자해하고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이 아픈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상처투성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애 세워놓고 이거 잘못했다, 저거 잘못했다, 이렇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아픈 모두를 꽉 안고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부터도 위로다운 위로를 받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지적받은 것은, 부끄러웠던 것은, 기억에서 파내고 싶게 혼난 것은 기억이 생생한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로가 뭔지, 또 위로하는 법을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주님께 먼저 위로를 받고, 주님께서 나를 위로하시는 그 방법을 가슴깊이 새겨, 그 깊이에서 위로해 주었으면 합니다.

위로가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지 마세요. 《영신수련》 넷째 주간 부활관상의 들머리에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위로의 임무를 행하시는 것을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보통 서로 어떻게 위로하는지와 비교해 본다.”(224번)라는 기도 지침이 나옵니다.  ‘위로’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이시며, 특히 친구 사이에 오고가는 깊은 ‘위로’는 그 사역의 확장입니다. 위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랍니다.

또한 《영신수련》에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런 위로를 ‘영적 위로’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나며 영혼이 창조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 자체로서만 사랑할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을 창조주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또한 자기 죄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수난의 아픔이나 직접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찬미와 관련된 다른 일들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과 창조주 주님 안에서 영혼을 침잠시키고 평온하게 하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부르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인 기쁨을 위로라고 한다.”(316번) ‘위로’를 통해 우리 온 존재는, 이 세상은 새롭게 변화됩니다. 화해와 치유의 눈물이 흐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채워지고, 하나님 안에서 고요히 평화롭게 자기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무엇보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너와 나’가 하나이며, ‘우리와 하나님’은 하나예요. 위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도록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차 있음을,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본시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려고 하지 마세요. 너무 슬프게 하고 너무 아프게 하고 너무 화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힘을 다해 위로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 저의 소망입니다. / 주선영

  1. 군포(軍布) : 조선 시대에, 남자들의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받아들이던 베 또는 재물. [본문으로]
  2. 곤액(困厄) : 몹시 딱하고 어려운 사정과 재앙이 겹친 불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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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생각을 하고 살면 - 스데반의 순교 축일에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59-60)


 12월 26일,  초대 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의 순교를 기리는 날이다.  성탄절 다음 날인 12월 26일이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축일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조용한 아침,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순교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은 똑같이 하늘의 영광을 가리킨다. 바로 전장에서 사도들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초대교회의 집사로 임명된 스데반은 뜻밖에도 사도들처럼 기사와 표적을 행하다가,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히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예수님처럼 그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긴다.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추구한다. 


몇 주 동안 아팠다. 아프면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가장 아쉬운가 생각하다가 참느라, 기다리느라, 다하지 못한 설교가 가장 마음에 걸린다. 혹시라도 상처 입을까봐,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천천히, 느리게 가기 위해서 아끼고 아껴왔던 말씀들…….


결국은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미운 채로, 화해하지 못한 채로, 용서를 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하루를, 또 한 해를 그렇게 넘긴다. 차라리 죽을 생각하고 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워해야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꼭 말하고 싶은 말들, 편히 말할 수 있다. 설교자는 살 생각 말고 죽을 생각하며 말해야 한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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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 사랑을 위해 결연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 로렌스 형제 (1605-1691) 지음, 오현미 옮김하나님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좋은 씨앗, 2006), 114.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난 군대 생활이 좋았다. 무질서 하던 대학 새내기 생활을 뒤로하고, 규칙적인 삶과 규칙적인 식사 속에서 난 내 몸이 처음으로 건강해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처음 몇 주간은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눈동자 하나라도 흔들리면 바로 장교들이나 고참들의 소리와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져 왔다. 훈련소에서 처음 행군 나가서 몇 주만에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던 바깥 세상의 가게며 마을이며, 집들을 보았을 때, 난 처음 탈영을 하고 싶은 강한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참아서였는지 용기가 없어서였는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사격 훈련에 앞서 군기를 잡기 위해서 심한 얼차려를 받았다. 속된 말로 구르고 또 굴렀다. 군복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며 코는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었다. 육체의 한계라는 말이 오래간만에 생각나는 날이었다. 무사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땀투성이, 먼지 투성이가 된 훈련병들을 향해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소대장이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 말이 내 군생활을 건강하게 했던 힘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하루 즐기며 견디었고, 제대할 때에는 난 정말 건강해져 있었다. 


그런지가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신앙의 여정은 언뜻 보면 지루하고 더딘 여정 같지만, 어찌 보면 군대보다 더 힘들고 더 농도 깊은 고통의 시간일 때가 있다.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알고 그 속에서 말씀을 붙잡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군인보다 더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 여전히 느끼는 내 모습은 될 수 있는 대로 고통을 피하고 싶고, 두려움에 맞서기를 꺼리는 그런 소심한 나다. 군대에서는 군기가 견딜 수 있는 힘이었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여전히 피하지 말고 감당해야 한다. 그 분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맞서야 한다. 그래서 또 무릎 꿇고 그 분 앞에 엎드린다. 


"주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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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 벗들을 위한 기도

'영성지도'를 받는 '피지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참으로 긴장이 많은 사람이었다. 면담실 긴 복도를 걸어갈 때 올라오는 긴장감,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터질 것 같은 그 느낌을 인지하는 것이 30일 피정 내내 큰 과제 중의 하나였다. 그 후에도 일상에서의 삶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받는 영성지도 면담을 앞두고 우황청심환을 먹은 적도 있으니, 돌이켜 보면 빙그레 웃음이 난다. 영신수련의 특징이자, 나의 경험상 어려운 부분이 일대일 면담이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수련' 자체의 어려움과 '일대일 면담' 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영적 여정을 심도 있게 걸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때가 아닐 수도 있고, 또 영성지도자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경험상,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투사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하나님과 나, 우리와 나를 분리하여, '나'란 개체성에 참으로 목을 매는 분리의 망상으로 뭉쳐진 덩어리였다. 그래서 끝없는 긴장, 자기방어, 자기투사, 보복-되갚기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 즉 분리 의식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자기를 중심으로한 분리 의식으로부터, 하나님과의 합일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 나는 그것을 영적 여정의 목표로 알아듣고 있다.

사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렇게 딱딱한 톤은 아니다.

이렇게 '피지도자'로서 면담을 직면하는 것조차 어려운 '새심장'인 나를 '영성지도자'로 맞아 주고 자신들의 여정에 함께 하도록 길을 내준 참으로 고마운 벗들이 내겐 선물로 주어졌다. 오늘의 나는 이 벗들에 의해 태어났다. 이 벗들 중에 상당수가 올해 결혼을 했다. 결혼식 기도를 부탁받기도 했지만, 예식이란 것은 격식으로 챙겨야 할 관계적 수순이 있기에 사양해 왔다. 그저 벗들의 결혼에 살라주고 싶은 성서 구절을 기도로 삼아 홀로 앉는다. 2010년에 써 놓은 "시편 23편: 결혼을 위한 기도문"을 마음으로 깊게 품으면서.

결혼은 하나님, 우리와 나의 합일을 이뤄가는 수련의 장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낭만적 이름으로 가면을 쓴 채, 자기 존재의 허기와 결핍, 욕망을 채우는 가장 무도회가 아니다. 결혼은 자기를 내어줌으로 참 자기를 얻어가는 자기-수행의 장이다. 예를 들어, 집을 장만하는 문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문제, 우리 집의 중요한 가치 체계를 세워가는 문제, 의사 표현 방식과 결정 방식에 이르기까지,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자기라는 분리 의식에서 하나님과의 합일 의식으로 깨어나기 위해 과제로 주어졌다. 

결혼이라는 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개체성과 구체성을 향하여 움직이는 자기를 벗어나 보편성과 추상성으로 상징되는 영이신 하나님을 끊임 없이 선택하는 수련을 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가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이 모든 것에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 주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찬미와 영광, 그 밖의 다른 아무것도 원하거나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와 이권에서 벗어날수록 모든 영적인 일에서 더 진보한다는 것을 생각하라"(《영신수련》189번). 하나님을 추구할 때, 즉 하나님을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순간이다. 비상하고 신비한 것, 언젠가 일어나는 먼 미래의 것이 아니다. 생활이라 불리우는 우리들의 결혼에서 경험되는 거룩한 선물이다.

이 수행의 길을 시작하는 벗들을 위해, 또 결혼 생활에서 힘과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위해, 겨울을 재촉하는 매서운 바람이 윙윙 부는 깊은 밤에 홀로 기도 한 자락 올려본다.

 

여호와께서는 오늘 부부가 되는 신랑과 신부의 목자가 되시오니 이들의 결혼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둘의 여생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이들의 삶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남편은 아내의 푸른 풀밭이 되게 하시고, 아내는 남편에게 쉴 만한 물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둘의 영혼을, 이 둘의 마음을 주께서 늘 새롭게 소생시켜 주옵시고,

이들의 결혼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때때로 이들이 인생의 골짜기를 걷게 되는 경우라도,

구름 뒤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태양 같은 하나님의 현존을 기억하게 하시고

세상에서의 실패와 상처 받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랑으로 서게 하옵소서.

주님의 지팡이는 이들이 결정해야 할 무수한 선택에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막대기는 이들이 함께 걸어갈 믿음의 여정을 든든하게 감싸 주십시오.

이들의 결혼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셨으니,

신랑과 신부가 하나되는 이 결혼의 잔이 차고 흘러 넘치게 하시되,

이들을 낳으시고 키우신 양가 부모님과 함께 자란 형제와 일가친척과 축하하기 위해 모인 하객들을 넘어

온 세상 모든 만물들에게까지 사랑의 띠로 묶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들에게는 지혜로운 자녀와, 나누어 줄 수 있는 넉넉한 재물과, 겸손하게 섬길 수 있는 건강을 주옵소서.

이들의 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들의 평생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머물게 하옵시고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하옵소서.

이 결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오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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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서: 춘향의 정절을 생각하며

남원에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숙소로 잡은 호텔 앞이 광한루입니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살아있는 듯 합니다. 첫사랑의 시샘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반대와 이별 그리고 시련을 경험합니다. 님 그리며 매일 이 정원을 거닐었을 춘향이와 함께 걸어봅니다. 춘향이에게 사랑을 지켜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보이지 않고 약속은 희미해지는 님을 그리며 정절을 지켜간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문득 날마다 기도의 시간에 목마르고 보이지 않은 약속에 흔들리며 세상의 요구와 흐름에 허우적대면서도 주를 향한 정절을 지키고 싶은 저와 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습니다. 

목에 큰 칼을 찬 채 님을 기다리는 춘향은 아마 처음에는 이도령이 장원급제해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소망으로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변사또의 회유가 가속되고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며 이몽룡마저 실패자인것이 확인됩니다. 춘향이가 마지막까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절을 지켜서 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약속을 지키며 죽으려는 마음 때문아니었을까요?

이번주간 묵상했던 계시록2장의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권면이 떠오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나님께 충성해서 잘 살고 충성해서 부자되고 충성해서 성공하려고 하지말고 충성해서 죽으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춘향이처럼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사는 삶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삶이 분명합니다. 로마처럼 거대한 경쟁과 분열의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께 정절을 통해 경쟁의 우위에 서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절을 지키느라 세상에서 죽어도 좋다. 죽겠다라는 마음임에 분명합니다./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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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정한 열망

'하고 싶다'

    추석 연휴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다. 약간 멍하고, 졸음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이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흐트러진 감각을 옷매무새 정리하듯 가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일상의 삶에서 침묵기도를 뿌리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한다. 잠을 근간으로 하는 몸 상태, 결혼과 육아의 살림살이, 교회의 일반사역과 영적지도 사역, 개인 공부, 기타 사회활동 등의 요소 속에 하루 1시간 이상의 침묵기도와 성찰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반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9-10개월짜리 일상에서의 영신수련이라고 일컫는 ‘19번 피정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을 만큼, 매일매일 침묵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교회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역자들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중에만 잠깐하고 일상에서 흐려지고 멈춰지는 것. 이 좋은 것을 왜 지속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좌충우돌이지만 더 흔들렸던 어제의 날들을 돌이켜보면, 명백해지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란 명언에 잘 나타난다. 침묵기도는 해야 한다는 당위의식과는 상극인 것 같다. ‘해야 한다는 가치관에 이끌린 노예의식은 침묵기도가 펼쳐주는 세상과는 충돌한다. 침묵기도는 철저히 자발적 사랑과 관련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곳은 하고 싶다는 내적인 갈망에 충실한 자발적인 선택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이다. 그만치 긴장과는 거리가 멀다. 유연하고 자유롭다. 오직 사랑의 논리에 관해서만 철저하다.  

    따라서 침묵기도를 일상의 삶에 잘 녹여내려면, 하나님을 향해 해야만 하는행위를 넘어서 하고 싶은마음에 아주 깊은 진솔함으로 주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매일의 기도 실천과 관련하여, 저녁과 아침을 이렇게 보내면 어떨까 싶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잠자리에 든 후 자고자할 때 바로 성모송 한 번 할 사이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그 수련을 요약한다.”(73번)고 조언한다. 이 말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잠자기 전에 내일 기도할 성경, 기도할 주제,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 등을 미리 읽고, 혹은 생각해 놓고 잔다. 두세 번 읽고 줄거리나 구절, 영적인 갈망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는 그 사이에,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기억한다. 머리 속에 불어 넣는 매일의 첫 생각이 이것이면 참 좋겠다. 아마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살고 싶은 그 비슷한 갈망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 갈망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 갈망이 구현되는 첫 자리이기도 한 침묵기도의 자리로 구체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좋겠다. ‘하고 싶은마음에 주목하면서, 가장 최적의 시간과 공간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꽉 들어차 있고 매일의 기도 시간도 자기 주도적으로 배정되어 있어서, 주님께 뭔가를 떼어 드려야 하는 느낌이 드는 삶을 벗어나보자. 우리 중에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너무 바쁘다. 이렇게 삶이 바빠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에 어떻게 기도 시간을 따로 내겠는가? 이기심 많은 인간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예, 시·공간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확 바꿔보는 것이다. 우리보다 우리와의 사귐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께 주도권을 아예 내 드리는 것이다. 전부를 다 드리고 우리는 단지, ‘하고 싶은마음을 더욱 깊게 확인하고, 그 마음 앞에 정직해 지는 것이다하여, ‘하고 싶다는 끌림 그 자체도, 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못 견디는 양치질처럼 완전한 일상이 되는 그런 날이 될 때까지, 언제나 다시 시작하면 될 터이다. 아직까진하고 싶음이 분명하니까. 자,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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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본래 마음이야 하나님을 닮아 곱고 청명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실, 내 마음이라 불릴만한 것도 따로 없지. 내 마음 내 님과 하나니까, 내 마음 찾으러 들어가면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찾아질 것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던 아들의 참 마음이 찾아 질 것 아닌가. 그것이 진짜니까.

근데, 이것은 뭔가. 종일토록 정신 나간 아낙네 머리 풀어 헤친 것처럼 사방팔방 뛰어 다니면서 발에 닿는 것은 다 뻥뻥 차고 다니는 이것은. 채인 사람은 이유 몰라 섭하다 눈물 찔금 짜고. 눈물 방물 맺혀 서럽게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 들여다보면, 내가 제 정신인가, 내가 사람 맞나 싶은데. 이것이 도체 뭐란 말인가. ! 이거 가짜 아닌가! 가짜 맞구먼. 어째서 가짜가 진짜 노릇하고 있고. 또 어째서 가짜가 태연하게 진짜 노릇하고 다니게 그냥 두는 건가.

그래서 성인도 그렇게 기도하셨는가. 성인에게도 기도가 필요하셨는가. 진짜가 진짜 자리에 있고 가짜가 진짜 노릇 못 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그 절실함을 알고 기도로 청하는 것이 바로 성인이구나. 그럼 이제 마음을 다 잡고, 성인을 따라 기도 한 자락 올려 보자.

 

사랑하옵는 주여,

제가 너그러워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당신을 섬기되,

마땅히 받으실 만큼 섬기도록

가르쳐 주소서.

 

주되, 그 대가를 셈하지 아니하고,

싸우되, 상처받음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땀흘려 일하되, 휴식을 찾지 않게 하소서.

 

힘써 일하되,

당신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아는 보수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 로욜라 성 이냐시오 기도. 한국예수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이냐시오영성연구소, 35.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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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음

 

삑삑삑삑 현관문이 열리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가방이 휙 던져집니다. 현관 앞에 나가보면, 가방 주인은 벌써 사라졌고 거꾸로 쳐박힌 책가방과 신주머니만 뒹굴고 있습니다. 저녁밥 때가 다 되어 돌아온 가방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 범벅에 땀내가 진동합니다. 한마디로 때 구정물이 쪼르르 흐릅니다. 할머니의 성화에 마지못해 씻고 머리 말리고 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어느새 보면 맨바닥에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하더니, 머리를 북북 긁어댑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릿니가 생겼습니다.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머리를 꼼꼼히 감기고,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고, 참빗질을 곱게 해 머릿니를 잡아줬습니다. 깨끗이 씻은 몸에서, 곱게 빛은 머리칼에서 차르르 윤기가 돕니다.

박수근 「모자(母子)」

문득, ‘철없는 아이를 두고 멀고 먼 길을, 어쩌면 돌아오기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면, 마지막 남은 시간 무엇을 할까? 엄마인 나는, 씻고 먹는데 아직도 애 태우는 어린 막내에게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오늘처럼 손수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할 거예요. “엄마 없는 동안, 잘 씻어라. 엄마 없는 티 내지 말고, 머리 잘 감고 목욕 잘해.” 그리고 막 지은 따끈한 밥을 먹일 겁니다. 반찬 하나하나 올려주면서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귀찮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노느라고 밥 때 놓치지 말고, 밥 꼭 잘 챙겨 먹고 다녀.”


예수님 마음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학생만 되도 샴푸값 아깝게 씻어대고, 냉장고 문이 닳을 새라 챙겨먹는데, 아직 초등학생이라 ‘씻어라 먹어라’ 챙겨줘야 되는, 그런 앞뒤 모르는 제자들을 두고 가셔야 하니, 그렇게 손수 씻어주셨고, 손수 먹여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주님께 대한 내적인식을 청하는데 이로써 그분을 더 사랑하고 더 잘 따르려는 것이다.” (영신수련 104번)로 기도의 첫문을 열어놓고 묵상으로 붙잡고 있었던 세족과 마지막 만찬의 주님 마음은 ‘엄마 마음’ 같았습니다. 그것이 몸이든, 영혼이든, 하나님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잘 씻고 잘 먹고 다녀라’하시는,  또 서로서로 돌아보면서 다들 ‘잘 씻고 잘 먹고 다니는지’ 살펴 주기를 바라시는 그런, 엄마 마음이요.


저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그러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엄마 마음’이 서글픈 세상살이에 지쳐 자꾸 후미진 구석으로 물러나려는  우리를 포근하게 어루만져 주었으면 합니다. 그 따뜻한 기운으로 모두가 다시 한번,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엄마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하루, 잘 씻고 잘 챙겨 먹고 다니세요! 다른 사람들도 좀 챙겨주시고요.”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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