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938년 경
윤동주 (1917-1945), 《정본 윤동주 전집》(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96.
이 시에 나오는 우리집은 닭 한 마리도 키울 능력이 없는 매우 가난한 집이다. 시계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문명도 뒤처져있지만 우리집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는 애기이다. 우리집에 새벽이 오는 것은 시계가 울리기 때문이 아니라, 닭이 울기 때문이 아니라, 애기가 배고프다고 울기 때문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새벽이 되면 애기가 젖달라고 운다”라고 써야 한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비논리적으로 애기가 젖 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새벽이 된다고 노래한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울 때 찾아 온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가난하고 낙후된 우리집은 일제 식민지 시대 힘없고 약한 우리 나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새벽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연약한 애기는 당시 힘이 없던 한국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 시인은 우리집의 새벽, 곧 조선의 독립은 한국인들이 울 때 온다고 노래한 것이다. 시편 137편에 나오는 것처럼 울음은 단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이며 호소이다.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가 울 때에야 주님께서 여시는 새벽을 경험할 수 있다. 울어 보지 못한 사람은 위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4)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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