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0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착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존재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페벤시 가(家)의 아이들도 아슬란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주(主)인 아슬란을 처음 보게 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여러분은 떨어보셨습니까? 공포심 때문에가 아니라 경외심 때문에 말입니다. 공포(恐怖)와 경외(敬畏)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혹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나니아에 가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을 예배해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예(禮)와 배(拜)

 

예배시간에 예배당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禮拜)란 예(禮)를 갖추어 배(拜), 즉 절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으신 분, 그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분 발 앞에 장로 요한이 “엎드러진” 것처럼 말입니다(계 1:17; 5:5).


나니아는 예(禮)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합당한 예를 갖춰 대합니다. 서로 무례(無禮)를 범치 않습니다. 매너와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나니아가 ‘예의 나라’(禮儀之國)인 것은 나니아의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禮)란 본래 예배 시에 가져야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worth)하신 분으로 알고 예배(worth-ship)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동료 인간들을 예로써 대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스피안에게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슬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이다. 이는 가장 비천한 거지의 신분이라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할 만큼 명예로운 일이며,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도 부끄러워 어깨를 숙이게 할 만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거지라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아무리 황제라도 인간인 이상 죄인 중의 한 사람이기에 누구를 멸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니아 나라에서는 거지도 황제도 아슬란 앞에서 몸을 굽혀 절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함께 예배하는 자로 대합니다. 예로써 대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알게 됩니다. 나니아는 경외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공간입니다. 나니아는 “너무도 선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무서운” 아슬란을 만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겁(怯)과 신(神)

 

아슬란을 만난 아이들은 몸을 떨었습니다. 아슬란과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겁이 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아슬란을 만나면 겁이 나면서도, 동시에 신이 납니다. 겁이 나면서 신이 나고, 신이 나면서 겁이 납니다.


왜 겁이 날까요? 무시무시한(terrible) 존재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신이 날까요? 그 존재는 또한, 무시무시하게 선한(good)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이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해본 사람은 아직 진짜 선을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선은 그저 봄볕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은 무시무시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무시무시합니다. 태양처럼 무시무시한 선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서게 되면, 누구도 그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엎드러지게 됩니다. 떨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시 2:11)하게 됩니다.


진짜 기쁨은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이 납니다. 신이 나는데, 겁나도록 신이 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무게의 기쁨이 내 작은 영혼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

 

우리를 겁나게 하면서 또한 신나게 하는 무엇으로서의 ‘거룩’을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의 종교학자는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거룩이란 우리를 두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매료시키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10권 목록의 첫 번째 책으로 그 독일 학자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든 바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문학가로서 루이스의 가장 큰 업적은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를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슬란은 아이들을, 또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떨게 만듭니다.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어른들이 온갖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외하올 분에, 또 경이로운 것들에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 가슴이 뛰는 아이가 되어야 하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신” 분 앞에서 엎드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신나지 않는 것은 신(神)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신은 우리를 신나게, 겁나도록 신나게 만드는 신입니다.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자의 등에 올라탔는데요! 「사자, 마녀, 옷장」에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은 무시무시한 포효를 울리고는 루시와 수잔을 등에 태우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그 거대한 사자의 따듯한 황금빛 등 위에서 수잔은 앞에 앉아 갈기를 꽉 붙들었고, 루시는 그 뒤에서 수지를 꼭 잡았습니다. 아이들은 겁이 났지만, 그 질주는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경험한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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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6. 29. 14:59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오게된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마치 꿈속에서 뭔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뜻은 잘 모르면서도, 그러나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 그 말 때문에 그 꿈 전체가 좋은 꿈이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속에서.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워하는 이는 꿈을 꾸지요. 사실, 종교나 예술은 인류가 꿔온 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것이 있기에 꾸게 된 꿈들, 보고 싶은 것이 있기에 그려본 것들 말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인류가 꾸어온 '좋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꿈이지만 뭔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꿈 말입니다. 가령,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는 그런 신화들 말입니다. 신화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화는 힘이 셉니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신화 읽기를 즐겼습니다. 신화에 담긴, 신화가 일으키는 어떤 그리움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읽을 때 종종 자신을 찾아와 압도하곤 하던 그리움을 일컬어 "기쁨"(Jo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은 사실,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누리는(enjoy) 무엇이라기보다는 겪는(suffer) 무엇이었습니다. 영혼을 압도해 오는 어떤 허기,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은 이 세상 그 어떤 배부름이나 만족보다도 우리 영혼을 매료시킵니다. 사정없이 영혼을 후벼 파는 허기요 갈증이지만, 우리 영혼은 이 허기, 이 갈증을 몰랐던 때로 결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을 모르고 사느니, 이 허기, 이 갈증을 껴안고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봄을 좋아하시나요?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봄을 '누린다'기 보다는 봄을 '겪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루이스의 말을 풀이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그저 봄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샤워'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온통 '물들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을 '입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울긋불긋한 옷이라도 차려 입고서 봄나들이를 가는 것인가 봅니다.) 보면, 어른들은 그렇게 봄 구경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애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 마냥 봄인데 / 보일 리가 있나요. " ("봄, 교실에서" 고준식) 


네, 어른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의 내면은 을씨년스럽기 때문입니다.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봄의 수혈이 필요한 것이지요. 봄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 잠기고, 그것을 흡입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봄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봄을 앓습니다. 봄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우리말 ‘아름답다’는 말은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움의 바다’인 하늘을 그리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이라는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이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 봄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니아에서 아슬란은 봄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아니, 아슬란 자체가 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오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루시를 비롯해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들어가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땅에서 하얀 마녀에게 영혼을 팔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버 씨 부부를 통해 예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때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뭔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나요? ‘꿈’ 속에서 뭔가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꾸게 되는 꿈속에서. 



이종태 <빛과 소금> 2020. 5월호



(이미지 출처: https://bit.ly/2Bjaxm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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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루시에게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사자, 마녀, 옷장』을 절친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의 딸이자 자신의 대녀(代女, goddaughter)인 루시 바필드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헌사에 적었습니다.

 

"너는 이제 요정 이야기를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지만]...하지만 언젠가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될 게다."

 

루시는 당시 15살이었으니까 요정 이야기 책을 좋아하지 않을 나이였긴 합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루시가 언젠가는 다시 요정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아이는 크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아" 지게 되는 법이니까요.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또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된]"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참 많습니다. 인생사가,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뭔가 잃어버리는 것이 꼭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고, 그래서 '세상'인 가 봅니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리는 것들에 뭐가 있을까요? 동심(童心)을 잃게 되는데, 워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른들은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지요.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과학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볼 때는 아이들이 무지개를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귀엽긴 하지만, 아직 머리가 더 커야 합니다.


인류가 이제 머리가 클 만큼 컸다고 자부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근/현대'(modern) 입니다. 무지하고 몽매(蒙昧)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계몽(啓蒙)된 시대"(aufgekläartes Zeitalter), "성인(成人)이 된 세계"(world come of age)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은 더 이상 태양을 보고 절하지 않고, 무지개를 볼 때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인은 행성에 우주탐사선을 보내고,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현상을 만들어내지요.


루이스는 현대 세계에서 스스로를 계몽되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해 『나니아 연대기』를 썼습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것들, 현대 세계에서 어른들이 잃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대부(代父, godfather)가 되어준 루시가 자라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대견스러워 했겠지만, 루시가 언젠가는 현대의 보통 성인들보다 더 성숙해져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는"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요정 이야기를 읽어본 지가 언제입니까?

 

Faerie

 

『나니아 연대기』는 '페어리 테일'(fairy tale)입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더불어 ('페어리 테일' 읽고 쓰는 어른들 모임이었던) 잉클링스(Inklings)의 멤버였던 J. R. R. 톨킨에 따르면, 'fairy tale' 은 본래 "요정(fairies)에 대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Faire"나 "Faerie"는 원래 "요정"이 아니라, 어떤 장소(place), "요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페어리 테일은 어떤 특별한 '장소/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보면, 그 이야기에서는 '나니아'라고 하는 나라, 그 장소, 그 공간이 거의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이런 저런 요정들, 괴물들, 인물들이 나와서, 그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의 재미'를 찾는 분들은 『나니아 연대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고, 왜 아이들이, 또 어떤 어른들이 『나니아 연대기』를 좋아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난 다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실 하나입니다. 바로 '나니아'라는 공간, 그것입니다. "나니아에 가보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는 우리 안에 어떤 그리움을 일으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인" 어떤 공간을 향한 그리움 말입니다. 나니아는 나무가 춤을 추고, 별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입니다. 나니아가 이렇게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인 것은 이 나니아를 창조한 존재, 아슬란이 바로 그렇게 살아 생동하는 존재, 만물을 살아 생동하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에서는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춤판이 벌어집니다.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듯이, 태초에 아슬란의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따라, 그 노래에 맞춰 나니아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국(雪國)

 

그런데 이 춤판이 그친 적이 있습니다. 나니아에 축제가 금지된 시절이 있습니다. 바로, 루시가 옷장을 통해 (처음) 들어가보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이었습니다.

 

"나니아는 겨울이죠. 아주 오랫동안 겨울이었어요."

 

나니아에서 루시가 처음 만난 인물(?) 툼누스가 한 말입니다. 루이스는 단조로워지고 삭막해지고, 만물이 목소리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웃음을 잃고, 경이를 잃고,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세계를 동토, 설국 같은 곳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주(宇宙)라는 집을 잃고, 텅 빈 공간 속을 부유합니다. 예전 사람들이 Cosmos(질서, 아름다움)라고 불렸던 우주를 이제 우리는 the Space(빈 공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텅 빈 우주”라는 제하의 글에서 C. S. 루이스는 “철학이 시작된 이래 일정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인간) 사유의 운동”이 있는데, 그 운동이 “모든 나무는 님프였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세상, “풍부하고 생동했던 우주”를 “텅 빈 우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텅 빈 우주"란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유스타스가 "우리 세계"라고 부르는 그 세계입니다. 영국 학교에서 전형적인 현대 교육을 받은 그 소년은 나니아 나라에서 별 신(神) 라만두를 만나고서는 신기해마지 않으며 말합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별은 그냥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거든요!” 그 아이에게 라만두가 한 대답은 실은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현대세계에 던지고자 했던 일성(一聲)이었습니다.

 

“얘야, 사실 너희 세계에서도 별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곧 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란다.”(Even in your world, my son, that is not what a star is, but only what it is made of.”)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럼 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와닿았다면, 이제 여러분은 페어리 테일을 다시 읽을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202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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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4. 24. 21:33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


루이스는 세상이 달리 보이게 만들어주는 작가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사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글을 읽고, 또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것 때문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체험을 선물로 받고, 또 선물로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우리더러 '달라지라'고 (닦달)하는 소리들로 가득합니다. 너가 달라져야 성공할 수 있다, 너가 달라져야 행복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들 말합니다.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도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우리를 달라지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잠깐 뭔가를 결심하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런 결심은 오래가지도 못하고,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들어주는 건 '결심'이 아니라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回心), 마음의 근본적 변화, 말입니다. 


사람은, 세상이 달리보일 때 비로소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구원을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닫혔던 눈이 열리는 것, 그래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회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된 어떤 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것이지요. 


루이스는 '보는 눈'을 강조한 작가였습니다.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Much depends on the seeing eye)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이,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세상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세계는 커집니다. 특별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이의 글은 우리를 더 큰 세계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우리로 그 안에서 성장하게 해줍니다. 


제게는 루이스의 글이 그런 더 큰 세상을 보게 해주는 눈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지면에 얼마간 연재될 저의 글은 그 눈으로 보게 된 세상에 대한 저의 간략한 탐험기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기억하십니까? 「사자, 마녀, 옷장」에서 그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한동안 머물렀던 한 노(老) 교수의 집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저택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그 집 안을 탐험하다 루시는 "커다란 옷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을 발견하게 되고, 그 옷장 안에 들어가 보았다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거대한 모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게 되지요. 


루이스에게 세계는 바로 그런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커다란 집과 같은 곳이고, 저와 여러분은 그 집안 곳곳을 탐험하는 아이가 되라는 초대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마 18:3)라는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에게는 세계는 집과 같습니다.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가득한 장소입니다. 엄마가 있고, 규칙이 있고, 친한 동물이 있고, 놀 것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루이스가 우리로 상상해보게 하는 집은 아주 거대한 집,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집, 많은 비밀의 방들이 있는 집입니다. 그 나니아 작가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가 바로 그런 집이라는 것입니다. 집 우(宇), 집 주(宙), 우주(宇宙)라는 집, 말입니다. 


이런 우주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기를 초대하는 이야기가 바로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나니아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험은 아슬란이라는 무시무시하도록 선한 존재가 다스리는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모험입니다. 나니아라는 우주, 집 안 탐험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집에서만 모험할 수 있습니다. 집을 떠난 사람, 집이 없는 사람은 모험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뿐,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모험은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이 있고, 그 땅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창 12: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이 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24:1).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아래 땅에서만 모험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게 길을 떠나, 태초부터 이어지는 모험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태초의 말씀과 종말의 노래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태초와 종말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들을 믿고, 전하고, 짓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루이스가 지은 이야기 「나니아 연대기」는 우리로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종말에 있을 노래를 듣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뜻 있는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성경 이야기를 닮은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주는, 다시 말해 우리를 나 자신이라는 좁은 곳에서 꺼내 하나님의 세계라는 “넓은 곳”(시 18:19)으로 데려가주는 힘을 가졌습니다. 나니아 이야기의 마력으로 눈을 떠 보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아득하고 까마득한 신비인지요(天地玄黃 宇宙洪荒)!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세계,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자인 아슬란을 두고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루시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위험하지요. 하지만 선한 분이세요.“나니아 이야기가 보여주는 믿음의 삶이란 이 위험(危險)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탐험(探險)하고 모험(冒險)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삶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며 비밀의 방 옷장을 열어보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부활 생명의 삶은 결코 소심하거나 무거운 삶이 아닙니다. 이는 기대 넘치는 모험의 삶, 어린아이처럼 늘 하나님께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묻는 삶입니다.”(롬 8:15 메시지성경)


이종태, <빛과 소금> 202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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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19. 9. 30. 10:51

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기도의 계절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물론 1년 365일, 사시사철이 모두 기도의 날이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교과서나 엽서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1연.

그렇다면 왜 하필 가을일까요? 이 시에서 말하는 가을은 산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나뭇잎이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다 덧없이 떨어지는 늦가을입니다. 이때를 시인은 침묵 속에 기다리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드디어 언어로 기도하고자 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썩고 흙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새 순으로 돋아나는 자연의 법칙을 시인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겨울의 문턱에 들서는 늦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히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직감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참된 기도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유한함과 고독함이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동시에 전율처럼 울릴 때 절대자 앞에서 “겸허한 모국어”로 발화됩니다.

 

기도의 언어

김현승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태어나 말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처음 듣고, 처음 한 말은 조선어였지만, 그가 자라 글을 배우던 시기의 국어(國語)는 일본어였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인 1937년부터는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0년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 한글로 된 인쇄물들이 거의 다 강제 폐간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모국어”란 갓난아이와 같은 그의 가장 순수한 존재와 결합된 원초적인 언어,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실한 언어였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낸 말이 아닌, 또는 형식에 맞춘 공적인 말도 아닌, 그리고 외부로부터 강제로 부여된 말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가장 진실하고 본능적인 언어인 “모국어”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발화하는 “겸허한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시인에 의하면, 이 “겸허한 모국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언어입니다. 외국어를 습득하듯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배우고 연습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시어를 다듬듯 조탁하여 만든 언어도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자,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언어입니다. 이 진정한 기도의 언어를 얻기 위해 시인이 하는 일은 낙엽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의 말들을 섣불리 쏟아 내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겸허하고 진실한 기도의 말을 주실 때까지 침묵 속에 고요히 기다립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물론 침묵 가운데 기도할 때 실은 그 침묵 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잡념 또는 분심(分心)과 싸우다가 지쳐서 침묵기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기도 중에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원인이 파악이 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흘려보낸(letting go) 뒤 다시 앞서 샛길로 빠진 지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정화되고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의 언어로 서서히 채워집니다. 그리고 기도가 매우 깊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기도의 말이 다름 아닌 말씀(logos)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침묵을 훈련하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마틴 레어드의 『침묵수업』(한국 샬렘)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가을의 독서와 기도

가을은 또한 독서의 계절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식상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종이책 대신 티브이나 유투브 같은 영상물만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짧은 글들만 읽는 오늘날에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매우 절박한 호소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려한 영상을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에는 보다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됩니다. 글이 말하는 바를 파악하는 이해력과 글자들이 묘사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상상력은 물론, 말해지지 않은 행간의 의미까지도 탐구하는 추리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 들여 경험하게 합니다.

가을에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도의 좋은 자료입니다. 지난 상반기 ‘기도대각성’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교회에서 펴낸 〈말씀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도〉의 기획의도가 바로 독자가 말씀을 읽고, 그 독서 경험에서 솟아나는 기도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아직 다 활용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가을에 못다 한 부분을 읽고, 기도를 실천해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미 묵상지를 통해서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를 맛보신 분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두란노)이라는 책을 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인데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비워 두고, 말씀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하는 훈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책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과 이웃을 보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그룹으로 함께 읽고, 나누고, 훈련하면 더욱 좋습니다. 또한 영락수련원에서는 이번 가을에 ‘거룩한 독서 수련’ 2차(9월 26-28일)와 3차(11월 21-23일)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셔서 말씀으로 기도하며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리시길 초대합니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배경은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이지만, 지금부터 침묵 가운데 그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겸허한 모국어”를, 진실한 기도의 말을, 무엇보다 말씀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 바람연필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태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태초에 아름다이 있었다



태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얼마 전 한 사진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교회에 새로 등록한 한 청년을 심방하였는데, 그는 전문 사진작가였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모던한 분위기의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그 중 한 흑백 사진에 시선이 사로잡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어떤 젊은 여성의 인물사진이었는데, 왼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빛이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오른뺨을 비추고 있었고, 반대쪽으로 넘긴 긴 머리칼은 어둠 속에 있었지만 고개를 흔들면 곧 찰랑거릴 것만 같은 힘과 윤기가 느껴졌다. 참 아름다웠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면, 예쁜 아가씨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진을 채우고 있는 빛과 어두움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사진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피사체, 곧 젊고 예쁜 여성 때문이라기보다도 그 피사체를 비추는 빛 때문이었다.

흔히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라고 말한다. 사진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포토그래프photograph는 빛을 뜻하는 포토photo와 그림을 뜻하는 그래프graph의 합성어다. 그 중 포토photo라는 접사는 빛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스φς(phōs)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도 수십 차례 등장한다. 빛이 없으면 아름다운 사진이 존재할 수가 없다. 아니, 빛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둠 속에서도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물리적인 시공간을 차지하고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존재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그 존재가 보는 이의 마음에 부딪혀 올 때 일어나는 반응 또는 인식인데, 어둠 속에서는 사물의 심상image이 우리 마음에 아예 맺히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 시절 대학 캠퍼스 안으로 난 길을 지나가다가 붉게 빛나는 단풍잎에 마음이 뺏겨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적이 있다. ‘,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나무가 있었네!’ 사실 그 전날에도 같은 길을 지난 간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 나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때가 제법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은 키의 단풍나무와 애기 손바닥 같은 잎사귀들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마도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의 시야에도 살짝 들어왔다가 나갔겠지만, 내 마음 속에서 아름다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낮의 빛 속에서 그 나뭇잎들은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 나의 시선과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 나무를 찍었는데, 그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아 다음날 다시 큰 카메라DSLR를 들고 비슷한 시간대에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담듯 정성껏 사진을 찍어, 액정 화면LCD으로 확대해서 확인하다가 나는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카메라에 담긴 빛 때문이었다. 단풍잎이 아름답게 보였던 이유는 단순히 한낮의 빛 속에 그 형체와 색깔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빛이 붉은 잎사귀들을 투과하며 신비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이글을 한 영성센터에서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영성지도자 전문과정 집중훈련이 두 주간 열리는데, 여기에 몇 해째 강사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란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영성 훈련으로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도록 다른 그리스도인이 돕는 것을 말한다. 이때 돕는 사람을 전통적으로 영성지도자spiritual director라 하는데, 오늘날에는 권위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영혼의 친구soul friend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상담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영성지도는 문제의 유무에 상관없이 한 사람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건강관리에 비유하면 질병을 다루기 위한 치료나 수술이 아니라, 사람이 더욱 건강할 수 있도록 돕는 건강증진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영성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인데, 참여자들은 강의와 실습을 통해서 영성지도에 대한 지식과 기술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신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그 존재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신적인 빛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여러 영성지도자들은 영성지도를 할 때 종종 초를 켜 둔다. 그것은 주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타오르는 촛불은 때론 우리가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할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빛이신 주님을 상징한다18:20, 8:12. 그리고 영성지도 대화에 참여하실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화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비추어 주셔서 평소 스스로는 알지 못하던 깊은 생각과 감정까지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성지도란 이러한 하나님의 빛에 자신과 상대방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영성지도자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사람, 곧 피지도자directee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내면을 하나님의 빛으로 채운다. 이렇게 영성지도자가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형제, 또는 자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환대의 공간을 제공하게 되면, 피지도자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밝히시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영성지도 시간에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치 햇살을 투과시키며 밝게 빛나는 나뭇잎처럼 어떤 이는 연초록빛으로, 어떤 이는 울긋불긋한 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본다. 그렇다. 빛 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원래 아름다운 존재다.

이번 여름 영성지도자 훈련에서도 많은 이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본다. 영성지도자로서 성장하는 것, 무엇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빛 속에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의도하신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점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알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열등감과 교만은 일출 직후의 어둠처럼 무기력하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 허상虛像, 곧 이 세상에 없는 존재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점점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될 때, 이 땅에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그 빛 아래서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셨다. 정말 아름다웠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바람연필 권혁일

이글은 〈소망말씀나눔〉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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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과 피식웃음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17. 9. 11. 20:39

초콜릿과 피식 웃음


며칠 전 어떤 성도 한 분이 당 떨어지는 여름에 힘내시라고 초콜릿 한 통을 주고 가셨습니다. 당 떨어지는 여름을 걱정하는 마음이 작은 손 편지에 배어있었습니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힘들 때마다 하나씩 드시면서 ‘피식 웃음’ 지으라는 편지글에 미안하게도 ‘함박웃음’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크고 특별한 것을 주고 싶습니다. 특별한 시간, 특별한 이벤트, 특별한 선물을 주어야 사랑인 시대니까요. 그러나 사랑이 없다 싶어 서운했던 순간들을 돌이키면 대개 작은 순간들입니다. 작은 말 한 마디, 작은 눈빛 한 번, 작은 숨 한 호흡이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것을 준비하는 노동같은 애씀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작은 순간을, 작은 눈빛을, 작은 숨을 보내고 싶습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향기로운 기억들은 대개 예기치 못한 작은 감동들이니까요.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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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묵상 2 : 반복되는 충실함이 생명을 일군다.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17. 8. 18. 11:47

병상묵상 2. 

반복되는 충실함이 생명을 일군다



    아버지는 모두 6번의 항암주사를 맞으셨다. 어떤 회 차에는 가려움증이, 어떤 회 차에는 부종이, 어떤 회 차에는 탈모와 극심한 통증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소화불량과 배변의 어려움은 계속되는 고통이었다. 처음에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하시고 힘을 냈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고 연약해지셨다. 일반적으로 항암주사를 맞고 나면 첫 주는 아주 힘들지만 둘째 주가 지나면서 회복되어 3주가 지나면 다시 항암을 맞을 정도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차수가 진행될수록 몸의 회복력이 저하되었다. 갈수록 입맛이 없으니 음식을 먹기도 힘들고, 소화가 잘 안 되니 음식도 맛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항암주사를 맞은 후 병원에 가서 하는 정기점검에서 항암일정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는 위기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힘을 내셨다. 항암치료가 연기되면 투병은 길어질 것이기에 어떻게든 드시려고 애를 쓰셨다. 백혈구 수치가 기준에 미달되어 일정이 연기될 것 같은 때에도 그렇게 일주일 악착같이 드시고 움직이시고 애를 쓰시고 나면 입원 당일에는 수치가 정상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다. 어머니는 그런 과정을 통해 일주일이란 시간이 변화를 이루는데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하셨다.


    일주일이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끼니를 꾸준히 먹는 것이면 회복을 맛볼 수 있다. 암환자에게 음식을 먹는 일이 즐거울 리 없지만 그 힘든 일을 충실히 반복해 갈 때 생명의 기운이 몸에서 일어남을 경험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생명이 일구어진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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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새벽 4시. 어김없이 알람이 울리면 습관적으로 눈이 떠진다. 잠시 동안 잠자리에 누워 씨름하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후다닥 옷을 입고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 도착하면 4시 15분.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난 말씀을 준비한다. 하루 동안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섭취하는 영의 식사 시간. 그런데 6시가 가까울수록 만나를 통한 기쁨을 뒤로 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부터 꿈틀대기 시작한다. ‘오늘은 혹시 못 오시지 않을까? 오늘도 또 오실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서 성도를 기다리는 한편의 마음과 성도가 안 오기를 바라는 또 한편의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한다. 나의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6시가 되면 한 영혼이 계단을 올라온다. 오늘도 늘 그렇게 어김없이 찾아온 한 사람의 성도. 


결국은 논문을 쓰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에서부터 나오는 생각이다. ‘목사가 새벽예배 나오는 성도를 귀찮아하다니…….’ 하루 종일 마음이 영 죄스럽고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마음 한편으로는 여기저기서 충고랍시고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음성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듯하다. “논문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그 분께 양해를 구해야지! “주일날 출석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교회 교인인데, 그 사람 때문에 논문을 못 마친다면 나중에 누구를 탓하겠나?” “자기 몸도 생각하고 돌보면서 목회를 장기간으로 보아야지.” 등등. 


박사과정 종합시험을 앞두고, 전임 목사님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의도치 않게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이 되었다. 목사님의 권유와 교회의 급박한 상황이 그 자리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그중 다섯 명의 권사님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새벽예배를 지키시는 분들이셨다. 그 열심과 신앙을 알기에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매일같이 나와 새벽예배를 인도했다. 1년 쯤 뒤에는 교회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 하루하루가 바쁜 삶의 연속이었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이런 목회의 기회를 얻고 열심 낼 수 있다는 것이 흥에 겨웠다. 


3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무력감이 왔다. 몸의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고 건강의 악신호가 울렸다. 공부와 목회를 병행한다는 것, 늦둥이 딸마저 태어나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 산다는 것. 목회도, 공부도,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짐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도는 늘지 않고 오히려 이사를 가시는 권사님, 병상에 누워 예배 참석이 어려우신 성도님들, 다섯 명이던 새벽예배 참석이 세 명으로, 세 명에서 두 명으로…….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낯선 집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 나가시는 집사님인데 출석하시는 교회가 멀어 새벽예배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시는구나!’ 그분을 생각하며 또다시 식은 열정을 되살렸다. 그런 기쁨도 잠시, 한두 명 나오시던 권사님들마저 새벽예배 출석이 어렵게 되었다. 80이 훨씬 넘으셨음에도 가장 열심히 기도하시던 권사님의 남편이 쓰러지셔서 새벽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권사님은 딸이 출산하여 아이를 봐 주느라 어렵단다. 그때부터 그 집사님과 나, 둘이서 한 사람은 설교자로, 한 사람은 성도로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둘이서 새벽예배를 드린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가끔씩 손녀를 보시던 권사님이 나오시기라도 하면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 “와, 오늘을 출석률이 두 배가 되었어요.”하며 기뻐하신다. 2년 여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시는 집사님을 보며 언젠가 우리 교회 출석하면 큰 일꾼이 되리라는 기대도 점점 사라지고, 정작 내가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은 한 사람도 새벽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되니 점점 마음속으로 불평이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은 그분이 안 왔으면 좋겠다’라는 불손한(?)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교회에 도착해서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집사님을 보면서 하나님께 회개를 드리고……. 이런 사이클이 몇 번 반복되었다. 마치 그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사용하면 써지지 않던 논문도 빨리 쓸 수 있을 것 같고 여기저기 일어나는 안 좋은 건강의 신호도 금방 회복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오니까 새벽예배 시간이 점점 고통스런 시간이 되어갔다. 


그날 새벽도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왔다. 사무실에 들어와 설교문을 프린트 해서 올라 가려는데 벽에 걸린 한 액자에 눈이 멈췄다. 그곳에 있은 지 한참 된 액자인데, 사실 걸려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내 취임예배 신문기사 스크랩이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목회!” ‘한 영혼’이라는 글귀가 갑자기 액자 전체보다 크게 튀어나와 보인다. 이 말은 내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요, 평생을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어머니가 내게 늘 하던 말씀이요, 내가 교회의 담임이 되었을 때에 당연스레 가장 먼저 떠 올린 글귀다. 한 성도를 앞에 두고 갈등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비춰주신 내 첫 마음의 기억! 언제까지일지, 혹은 평생이 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고, 또 기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나에게 그 어떤 인생의 순간보다 더 순결하고, 빛나는 그런 감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일상에 빠져 시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처럼 느껴졌다. 


무릎 꿇어 기도하는 내 모습 위로 우뚝 서 있는 십자가가 그날은 무겁지 않고 가볍고 친근히 느껴졌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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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묵상1.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다.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17. 7. 27. 20:14


병상 묵상 1. 

함께 하는 것사랑이다.



     아버지가 몇 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셨다. 아직 몸을 추슬러야 하는 과정이 남았지만, 두 종류의 암을 이겨내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가슴 벅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워 이기신 것만이 아니라 투병과정을 통해 내게 많은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가 혈액암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지난 12월은 가족 모두에게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다. 여러 번 고향으로 가서 담당의와 상의하면서 6차례 이상의 항암치료를 본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어려움은 아버지의 간병이었다. 항암치료는 3~4일의 입원이면 가능하지만, 항암을 마치고 돌아온 환자가 다시 항암할 때까지 돌보는 3주 정도의 기간을 어떻게 지내실지가 고민이었다. 건강도 좋지 않은 어머니가 간병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큰 짐이 되었다. 


     간병인도 구해보고, 요양병원도 알아보고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진단을 받고 치료에 대한 모든 것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아버지에게 “내가 비용과 간병을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시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아프고 죄송했다. 나는 어머니를 염려해서 요양병원에 머물면서 항암치료를 해 가시길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집에 머물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교착에 빠졌을 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간병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아내로서 끝까지 주어진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당신이 더 아프게 된다 해도 충실한 아내로 살고 싶다 말씀하셨다.


     친구 목사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지낼 방을 정리하고 환자를 위한 침대를 들이고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모든 치료를 준비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나는 아버지를 위해 수고했지만 결국은 내 집으로 떠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구나.” 부종 때문에 걷기 어렵고, 통증으로 잠 못 이루고, 배변과 소화가 어려워 식사도 고통스럽고, 말할 힘조차 없던 시간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했다.


     지난 명절 고향에 내려갔을 때, 통증으로 아파하시는 아버지를 마사지 하다가 뼈밖에 남지않은 아버지의 어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전화로 말씀하신 ‘아버지가 많이 말랐다.’가 무엇인지를 나는 그 순간 몸으로 깨달았다. 나는 언어로 듣고, 나는 내 생각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숨으로 듣고,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함께 있는 자만이 아는 고통, 함께 사는 자만이 아는 지식이 어머니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왜 하나님이 그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지 알았다. 왜 예수를 인간이 되시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 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지를 조금 알 것 같다.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가 당신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지와 상관없이 함께 있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의 의도와 생각과 선택의 순간들에 함께 있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네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놀랄만한 사랑의 고백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함께 함보다 벗어남을 우선시한다. 고통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함께 함이 고통 속에서 줄 수 있는 더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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