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19. 9. 30. 10:51

가을의 기도, 가을의 독서

 

기도의 계절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물론 1년 365일, 사시사철이 모두 기도의 날이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교과서나 엽서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구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1연.

그렇다면 왜 하필 가을일까요? 이 시에서 말하는 가을은 산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나뭇잎이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다 덧없이 떨어지는 늦가을입니다. 이때를 시인은 침묵 속에 기다리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드디어 언어로 기도하고자 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썩고 흙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새 순으로 돋아나는 자연의 법칙을 시인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겨울의 문턱에 들서는 늦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는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히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직감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참된 기도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유한함과 고독함이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동시에 전율처럼 울릴 때 절대자 앞에서 “겸허한 모국어”로 발화됩니다.

 

기도의 언어

김현승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태어나 말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처음 듣고, 처음 한 말은 조선어였지만, 그가 자라 글을 배우던 시기의 국어(國語)는 일본어였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인 1937년부터는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0년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 한글로 된 인쇄물들이 거의 다 강제 폐간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모국어”란 갓난아이와 같은 그의 가장 순수한 존재와 결합된 원초적인 언어,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실한 언어였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아름답게 꾸며낸 말이 아닌, 또는 형식에 맞춘 공적인 말도 아닌, 그리고 외부로부터 강제로 부여된 말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가장 진실하고 본능적인 언어인 “모국어”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사람이 발화하는 “겸허한 모국어”입니다.

그런데 시인에 의하면, 이 “겸허한 모국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언어입니다. 외국어를 습득하듯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배우고 연습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시어를 다듬듯 조탁하여 만든 언어도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자,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언어입니다. 이 진정한 기도의 언어를 얻기 위해 시인이 하는 일은 낙엽이 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의 말들을 섣불리 쏟아 내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겸허하고 진실한 기도의 말을 주실 때까지 침묵 속에 고요히 기다립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물론 침묵 가운데 기도할 때 실은 그 침묵 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잡념 또는 분심(分心)과 싸우다가 지쳐서 침묵기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기도 중에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원인이 파악이 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흘려보낸(letting go) 뒤 다시 앞서 샛길로 빠진 지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정화되고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의 언어로 서서히 채워집니다. 그리고 기도가 매우 깊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기도의 말이 다름 아닌 말씀(logos)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침묵을 훈련하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마틴 레어드의 『침묵수업』(한국 샬렘)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가을의 독서와 기도

가을은 또한 독서의 계절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식상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종이책 대신 티브이나 유투브 같은 영상물만 보거나 스마트 폰으로 짧은 글들만 읽는 오늘날에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매우 절박한 호소가 되었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려한 영상을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것과는 달리, 독서에는 보다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됩니다. 글이 말하는 바를 파악하는 이해력과 글자들이 묘사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상상력은 물론, 말해지지 않은 행간의 의미까지도 탐구하는 추리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종이와 글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 들여 경험하게 합니다.

가을에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도의 좋은 자료입니다. 지난 상반기 ‘기도대각성’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교회에서 펴낸 〈말씀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도〉의 기획의도가 바로 독자가 말씀을 읽고, 그 독서 경험에서 솟아나는 기도를 드리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아직 다 활용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가을에 못다 한 부분을 읽고, 기도를 실천해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미 묵상지를 통해서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를 맛보신 분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두란노)이라는 책을 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인데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비워 두고, 말씀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하는 훈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책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과 이웃을 보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그룹으로 함께 읽고, 나누고, 훈련하면 더욱 좋습니다. 또한 영락수련원에서는 이번 가을에 ‘거룩한 독서 수련’ 2차(9월 26-28일)와 3차(11월 21-23일)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셔서 말씀으로 기도하며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리시길 초대합니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배경은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이지만, 지금부터 침묵 가운데 그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겸허한 모국어”를, 진실한 기도의 말을, 무엇보다 말씀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 바람연필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